인조, 명군이 되다 172화
피와 살점으로 얼룩진 들판 한가운데서.
“대승을 경하드립니다!”
홍태주는 장수들의 칭송을 받으며 투구를 벗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의 질주였다.
몇몇 측근은 대칸-황제의 돌격에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신의 안위를 돌볼 때가 아니었다. 이영방의 반란이 그 증거였다. 다행히 효과는 확실했다.
함께 적을 유린한 팔기군의 사기와 충성심도 올라갔을 테고.
“사로잡은 포로 중 등급이 높은 자들은 빠짐없이 처형하고, 잡병들과 전리품은 군공에 따라 군사들에게 나눠주어라.”
“받들겠습니다.”
지금은 일신의 안위만 아니라 재물 역시 아낄 때가 아니었다.
이영방이 살아서 도망쳤다. 군사를 잃었으니 다시 위협이 되기는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곱게 죽어줄 놈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찌꺼기들을 규합해 다시 맞서고자 하겠지.
여느 한족이나, 북쪽의 찬탈자들도 마찬가지다. 자신은 무수히 시험을 받게 될 거다. 그리고 실패는 허락되지 않는다. 전력을 다해 부딪칠 수밖에 없다.
……끝내 요동을 평정하더라도, 그다음에는 더 강해졌을 조선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기록되는 건 마지막 모습이다.’
대청은 아직 멸망하지 않았고, 자신은 여전히 대청의 황제였다. 야망을 막연하게 꿈꾸기엔 이미 짧지 않은 인생을 걸어왔으나, 지금 여전히 살아 있다.
더 투쟁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그리해야지 않겠는가.
* * *
홍태주가 고난의 행군을 이어가는 동안…….
조선에서는 행복한 나날이 이어졌다.
숙적이었던 후금은 철저하게 몰락했고, 홍태주는 살아남기 바빴으며, 명나라는 이국에 간섭할 여유가 없었으니까.
이따금 몰락한 양반들이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추기보다는 궐문 앞에서 농성 벌이기를 택하였으나, 전문가 김류에 의해 금방 진압되었다.
매질은 가혹하고 설득은 피로하니 그저 찬물만 뿌릴 따름이었으나, 한겨울에 냉수마찰을 하게 된 선비들은 동사를 면하기 위해서라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판서, 선비들이 슬슬 독기가 오르는 모양인데 아예 죽어버리겠다고 버티는 자가 나타난다면 내가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염려치 마시옵소서. 그 전에, 궐문 앞을 점거하는 일이 사라질 것이옵니다.”
“상책이라도 있으신 모양입니다.”
“예.”
비릿한 웃음으로 자신감을 보인 김류는 두 번째 단계에 착수했다.
선비들은 다음날에도 궐문 앞을 점령했다.
몇몇 이들은 물벼락을 막기 위해 우산까지 가져왔다.
“전하! 당장 공조판서 김류가 벌이는 만행을 죄주시고, 신들의 진심 어린 충언을 통촉해주시옵소서!”
“통촉해주시옵소서!”
평소와 마찬가지로 좌장이 선창을 하면 다른 일행들은 후창을 하는 식이었다.
구경꾼들 사이에서, 김류도 내심 감탄했다.
농성을 벌일 때마다 하는 말이 달라진다.
주제는 정해져 있다. 이 법은 이래서 안 되고, 저 법은 저래서 안 된다. 공조판서는 나쁜 놈이니 죄주어야 한다.
그런 한결같은 주제로 매번 새로운 농성을 벌인다. 창의력만은 대단했다. 물벼락을 맞을 때마다 상소문이 젖어 쓸 수 없게 되니 울며 겨자먹기로 그러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양상이 달라질 거다.’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농성하는 선비들을 에워싼 구경꾼들의 낯빛이 평소와 달랐다.
“전하, 신들이 간청드리오니 하루 속히 악법을 혁파하시고…….”
좌장이 소리치던 와중이었다.
“큭큭!”
“……혁파하시고!”
“하하하!”
“…….”
농성하던 몇몇 선비와 유생들의 고개가 주변으로 향했다.
그들이 마주한 건 조소와 손가락질이었다.
“이 바보들은 언제까지 이럴 생각이란 말인가?”
“나는 모르겠는데. 한 번 물어보지 그러나.”
“바보가 옮을까 못 하겠네.”
“하하!”
농성하는 이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놀림이었다. 그러나 선비들을 분통에 빠뜨린 결정적인 이유는, 당장 저들을 비웃는 자들이 전형적인 양민의 복색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네 이놈들!”
몇몇 선비가 일어나서 외쳤다.
억지로 떠들어대던 좌장의 연설도 그칠 수밖에 없었고, 군중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어느 안전이라고 네깟 것들이 감히 경솔하게 지껄이느냐!”
“……누구 안전인데?”
정말로 궁금해서라는 듯한 물음에, 구경꾼들 사이에서 와하하 파안대소가 터졌다.
곧 멱살잡이가 벌어졌고, 농성과 구경꾼들 사이를 격리하던 병사들이 곧장 달려들어 선비를 두들겼다.
“물러나시오!”
퍽! 퍽!
“아이고!”
선비가 매질 두어 방에 쓰러져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자, 천지사방이 다 비웃는 듯이 웃음소리가 커졌다.
그러한 광경에 다른 선비들이 울분을 터뜨렸다.
“감히 사대부의 몸에 손을 대다니!”
“하늘이 무서운 줄도 모른단 말이냐?!”
“천한 나졸 따위가!”
먼저 행패를 부려 진압했을 뿐이거늘, 쏟아지는 모욕에 군사들은 열려던 입을 닫고 싸늘하게 선비들을 쳐다보았다.
그러한 광경이 주는 기세가 없잖아 있어, 몇몇 독한 이들은 달려들다가 또 매를 맞고는 하였으나 대개는 그런 광경을 봐서라도 쭈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궐문을 지키는 위사가 말했다.
“병사들을 세워놓은 건 혹시 모를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서인데, 그대들이 먼저 난동을 피워 소란을 진압하였으니 유감은 가지지 말기를 바라오.”
“이놈! 감히 하찮은 칼잡이 주제에 누구를 가르치려 드느냐!”
“허.”
“당장 무릎을 꿇고 사죄를 올려도 모자랄 상황에 빳빳하게 고개를 치켜들고서 지껄이다니!”
“…….”
위사의 미간이 일그러졌지만, 감정적으로 지시를 내리지는 않았다.
당장 눈앞의 농성꾼들이 감정적인 대응으로 스스로를 궁지로 몰아가는 중이었다.
구경꾼 중 하나가 군중 속에서 비웃었다.
“맑은 하늘에 우산 쓴 바보들이 뭐라는 거냐?”
“누구냐!”
몇몇 선비와 유생이 눈을 흘기며 주변을 노려보았으나, 돌아오는 건 그저 조소뿐.
그저 얼굴만 붉히고 있는 가운데, 김류가 바가지를 들고 시의적절하게 등장했다.
“아직도 소란 피우고들 있나?”
김류는 상투적인 느낌으로 물을 뿌렸다.
비 맞은 생쥐 꼴이 된 선비와 유생들은 씩씩거리다가도 저들 신세의 처량함을 자각하고서 추욱 늘어졌다.
“물러나라.”
김류가 코웃음을 치며 물러났고, 구경꾼들은 흩어지면서도 끝까지 조소와 들뜬 잡담을 그치지 않았다.
잠시 후 선비와 유생들은 물자국만 남기며 비틀비틀 흩어졌다. 이전처럼 다음을 기약하는 이는 없었다.
* * *
“놀랍습니다.”
상선이 보고했다.
김류가 농성을 광대놀음으로 전락시킨 건 신의 한 수였다.
그간 선비와 유생들이 물벼락을 맞으면서도 꿋꿋하게 버틴 비결이 무엇이던가?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자존심을 꺾다 못해 짓뭉개고 가루로 빻아버렸으니.
다시는 궐문 앞으로 몰려들지 못할 테지.
“이제야 궐이 잠잠해지겠습니다.”
중전이 질렸다는 얼굴로 말했다.
경운궁은 본디 선조가 임시로 기거했던 행궁이었던 만큼 규모가 작았다.
궐문 앞에서 벌어지는 소란이 고스란히 안쪽까지 전해졌다.
‘그 안쪽에는 나만 아니라 중전과 두 대군도 있고.’
두 대군은 가정환경이 특히 중요한 시기다. 소음공해는 찬물을 뿌려서라도 없애야지.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다시 대군들 교육에 집중할 수 있다.
“이리로 오거라. 아비와 함께 책이나 읽자꾸나.”
슬쩍 꼬시니 인평대군이 품으로 와 안겼다. 용포가 닿는 촉감이 좋았는지 얼굴을 비벼댔다.
그 모습이 귀여워 빵실한 볼을 주물렀다.
“흐흐.”
야속한 세월을 맞고 불효자가 되어버린 세자에게서는 찾지 못하게 된 즐거움이다.
“보자. 우리가 저번에는 여기까지 읽었구나. ……임진왜란 때 통제사 이순신이 한산도에 주둔하고 있었다.”
인평대군은 천자문을 거의 익혔으나 체득體得의 단계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
자연스러운 언어로는 정착하지 못했다는 뜻.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문이라는 게 여간 지저분한 글자가 아니니. 그렇다고 요즘 세상에 한문을 모르고 살 수도 없다.
그래서 교보재로 삼은 게 패설집이다.
반가에서는 천자문 다음으로 소학小學이나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익히지만, 그건 너무 재미없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인질 삼아 한문부터 눈에 익게 만드는 게 나의 작전이다.
나는 글자를 손가락으로 쫓아가면서 단락을 마저 읽었다.
“……이순신의 아들은 충청도에서 싸우다가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이순신은 아들의 죽음을 모르고 있었는데, 충청도 방어사가 왜적을 사로잡아 한산도로 압송해 왔다. 이날 밤 이순신의 꿈에 아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나타나…….”
아이가 읽기에는 조금 수위가 있는 설화였다.
요즘 시대에는 동화랄 게 따로 없으니까. 사실, 후대에 동화로서 전해지는 이야기들도 원전은 무척 살벌하다.
세상 자체가 살벌한 세상이라 그런가.
나는 읽다 말고 인평대군에게 물었다.
“여기서부터는 직접 읽어보겠느냐?”
“예, 아바마마.”
인평대군이 아비에게서 배웠다는 듯 글자를 하나씩 가리키며 읽어나갔다.
“잡혀온 왜적 중에 나를 죽인 자가 끼어 있습니다…….”
나는 인평대군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이따금 막힐 때는 가르쳐주었다.
한자의 개수는 수만여 개에 달한다. 천자문은 아주 기초적인 수준이다. 흔히 쓰이는 상용한자도 오천여 개 정도.
글을 읽다보면 모르는 글자가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
괜히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하신 게 아니었다.
‘공문서도 글도 이제는 한글로 쓰면 좋을 텐데.’
원래 역사에서는 나라가 망할 때까지 한자를 썼다.
그저 미련하기만 한 고집은 아니다. 종이값이 비싸 세척하고 다시 쓰는 시대인지라. 정해진 구획 하나에 많은 뜻을 비교적 정확하게 담을 수 있는 한자의 효용이 아주 없지는 않다.
그렇다고 나라가 망할 때까지 우직하게 한자를 고집했다는 건 조금 문제가 있긴 하다.
내킨 김에 뜯어고칠 수도 있지만…….
한자 배제보다 중요한 과업들이 있다.
당장 진행 중인 선혜법과 호패법의 확대만 해도 그렇다.
각 도에서는 행정구역의 개편이 슬금슬금 이뤄지는 중이고.
본디 군역을 지지 않았던 천민들로 구성된 속오군의 존재는 신분제의 혼란을 의미한다.
나는 거기서 벽돌 몇 개를 빼내어 나라의 밑거름으로 삼았고.
왜란 때 국가의 위기로 얼렁뚱땅 속오군에 천민이 일부 편입되긴 하였으나, 이 나라에 장기적으로 필요한 건 군역과 납세를 동시에 수행해줄 양민들이다.
공을 세운 천민 속오군들을 해방하고 재산을 모을 기회를 준 건 천민들을 양민으로 전환한 것이다.
국가가 총체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 모든 변화가 다 수습되더라도, 중요한 과업은 여전히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는 화폐의 도입이라던지.
‘이러한 마당에 실익보다 반발이 훨씬 큰 한자의 배제를 시도하는 건 가성비가 안 맞지.’
세자에게 그러할 필요성만을 상기시켜 두고서 후대의 과제로 남겨두는 게 옳다.
“……이순신은 통곡하고 원수를 죽이라 명한 다음, 아들의 혼백을 불러 글을 짓고 제사했다.”
인평대군이 일화의 일독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잘했다. 아들이 읽어주니 더 재미있구나.”
나는 인평대군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오늘 배운 글자는 따로 연습하거라. 그래야, 이 아비에게 또 이야기를 들려줄 때는 막힘이 없지 않겠느냐?”
“예, 아바마마.”
“그래.”
공부는 이만하면 되었다 싶어 인평대군을 품에서 일으키니, 아들이 물었다.
“소자, 책을 가져가서 더 읽어도 되겠사옵니까?”
“그러거라.”
허락이 떨어지자 인평대군은 책을 끌어안고서 중전에게로 향했다.
누군가의 품에 계속 안겨 있는 게 좋은 모양이었다.
세자도 한때는 저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