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73화
동궁에 반쯤 칩거하게 된 세자였지만, 후계자로서의 일과마저 모두 놓아버린 건 아니었다.
왕업을 소소하게나마 맛보면서 만기萬機를 예습했고, 시강원에서는 현안과 당금의 쟁점을 논의하면서 실전 감각을 익혔다.
그리고 이따금 부왕이 보내온 중신을 맞이하여 외부로는 드러나지 않는 내밀한 왕업의 수단과 방식을 배웠다.
행하고픈 마음은 딱히 없었으나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노련한 신하들의 수법들을 익혀둔다면 대응할 때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일과를 마친 세자는 먼저 잠든 세자빈과 아이를 한참 지켜보다가, 이대로는 뜬눈으로 밤을 새우겠다는 걱정에 몸을 돌렸다.
세자는 그제야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그 상태로 세자는 생각했다.
자신이 너무 게으름을 부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일과를 놓치지 않고 모두 수행하는 세자였으므로, 누군가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본다면 무슨 소리냐 싶을 발상이었다.
하지만 세자에게 일과란 당연히 이행해야 하는 것이었다.
마치 사람이 생존을 위해서라면 숨을 쉬고 잠을 자야 하듯이, 일과 역시 그러한 부류로 여겼다.
세자에게 있어 성실이란 일과를 완성도 있게 수행한 다음 잠들기 전까지 여유 시간에 자기발전까지 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준이라면 세간의 범인들 치고 십중팔구 게으르지 않은 인간은 없겠으나, 타고난 세자로서는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마음가짐을 이해할 수 없을 터였다.
그리고 세자는 반성했다.
그간 세자빈의 요양을 돕고 아들을 돌본다는 변명으로 게으름을 부려왔으니, 내일부터는 더 성실하게 하루에 임해야겠다고.
누군가 이 대목에서 머릿속을 들여다보았다면 실로 미치광이의 발상으로 여겼겠으나, 세상에 관심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세자는 내일을 기약하며 잠들었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이 되어.
“…….”
세자는 반개한 눈으로 기상했다.
창호는 짙은 파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직 야심한 시각이었다.
세자는 엎드린 채로 방을 기어 세자빈의 이불과 아들의 강보를 고쳐 씌워준 다음 비틀거리며 침소를 빠져나왔다.
한겨울 새벽이라 바깥에는 삭풍이 몰아쳤다.
세자는 부르르, 떨면서 동궁내시에게 부탁했다.
“소금 한 종지와 물 한 사발 떠와 주시겠습니까?”
동궁내시가 곧 주문받은 대로 가져왔다.
세자는 소금으로 이를 닦고, 입을 헹구었으며, 얼굴을 닦아냈다. 세안수를 타고 한기가 엄습하자 세자는 다시 부르르 떨었다.
“어흐흐!”
세자는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온 듯하여, 익위사를 대동하고서 동궁 일대를 한 바퀴 돌았다.
가벼운 운동.
몸이 풀린 세자는 박명과 함께 밝아지는 마당을 가로질러 창고로 향했다.
그곳에서 기름 먹인 행주로 대포와 무구를 닦는 게 세자의 진정한 일과 시작이었다. 그간의 일정은 단지 기상에 뒤따르는 당연한 절차였을 뿐.
마음을 가다듬으며 무구마다 부친이 내린 가르침을 되새긴 세자는 공손한 태도로 뒷정리한 뒤 창고를 나섰다.
이즈음에는 마당도 더 밝아져 있었고 침소에서도 인기척이 전해졌다.
세자는 직접 세안수와 소금을 챙겨 잠기운으로 알딸딸한 세자빈을 방문했다.
“기침하셨습니까, 부인?”
“……저하께서는 참으로 부지런하십니다.”
“부인은 매번 같은 소리만 하십니다.”
세자는 세자빈이 세안을 마치고 얼굴을 닦아내는 동안 손목을 짚어 맥을 살폈다.
오늘도 이상 없음.
“나는 업무를 보러 가겠습니다. 필요한 도움이 있으면 불러주세요.”
“예. 일 보셔요.”
세안하고도 여전히 비몽사몽한 세자빈이었다. 바깥과 달리 침소의 내부는 따뜻하고 포근했다. 세자도 잠깐이지만 다시 이불에 드러눕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신 세자는 세자빈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별실로 향했다.
별실은 의도적으로 불을 때지 않아 냉골이나 다름없었다.
세자는 방문을 열어두어 찬바람까지 들게 하고서 서안을 당겼다. 그리고 문방사우를 펼쳐 부왕께 보낼 서찰을 써내려 갔다.
내용은, 그간 충분히 휴식했으니 다시 혜민서에서 환자와 빈자들을 돌보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 * *
아침부터 세자에게서 서찰이 왔다.
“더 쉬어도 될 텐데.”
그런 솔직한 대답을 전하기엔 세자가 혜민서로 복귀하고픈 마음을 구구절절 드러내고 있었다.
세자빈과 세손은 건강하며, 자신의 휴식은 충분했고, 집필해야 할 의서가 있을 뿐만 아니라, 혜민서에서 자신의 귀환을 바라는 사람이 많다고.
“얼마나 좋은 왕이 되려는 건지…….”
피 한 방울 안 섞인, 아니, 신체적으로는 피가 섞인 게 맞지만 영적으로는 친아들이 아닌데도 친아들처럼 여기고 아껴온 세자다.
그러나 서찰을 일독하고 나니 세자가 조금은 비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외출 다녀와서 바로 옷 걸어두고 씻고, 식사하고 난 다음 설거지부터 하는 느낌의…….’
그런 비인간성.
왕의 후계로서는 나쁘지 않다.
세종대왕은 대단한 공부벌레였고, 동시에 매우 성실했다. 덕분에 조선과 한반도의 역사가 얼마나 진전되었던가.
‘하지만 나는 아버지이니.’
세자가 무리하지 않기를 바랐다.
세종대왕은 분명 성실했지만, 너무 성실했다. 독서와 정무에 몰두하여 거동을 꺼렸던 탓에 평소 과식에 야식하던 습관까지 겹쳐 몸을 망쳤다. 말년에는 당뇨로 대단히 고생했다.
치세 초반이나 후계자 시절에는 멀쩡했던 사람이 막상 중후반에 들어가서는 맛이 가버리는 경우도 잦았다.
왜란 때 영웅적인 행보를 보여주었던 광해군이 대표적인 경우다.
의외로 연산군도 치세 초반에는 꽤 멀쩡했다고 하고.
그저 광인으로만 치부되는 사도세자도 어릴 때는 영특했다. 그런데 아비인 영조가 이즈음 제정신이 아니었던 상태라…….
‘임오화변 전후로 치매가 도졌지.’
누군가는 의도적인 행보라고들 하지만, 정작 영조는 문득 전날의 자신이 어땠는지 신하들에게 물어보곤 했다.
본인이 자신의 병증을 무서워할 정도인데 설마 이마저도 가장에 불과할까.
아무튼, 이렇게 부담감이 위험하다.
게다가 똑똑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면 그만큼 부담감도 크게 받는다.
‘책봉례를 앞두고 토끼 눈이 되었던 세자이니.’
지금은 세자라는 자리에 익숙해진 듯하나, 직분에 걸맞게 행동하고자 많이 애쓴다.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
타고난 정신적 성숙함과는 반대로 신체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도 걱정이었다.
‘……건강해라, 이놈아.’
염원과 함께 비답에는 긍정적인 대답을 담았다. 제가 원하여 청했으니 마냥 만류할 일은 아니라고 여겼다.
애지중지한다고 억지로 쉬게 하면 그것대로도 스트레스받을 거라.
“휴일을 만들어놔야 하나.”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하들은 물론, 노비에게도 있는 게 휴일이다. 그런데 왜 왕에게는 휴일이 없다는 말인가.
사건 사고라는 게 날짜 가려가며 터지는 건 아니다만, 왕도 사람이야. 사람.
사람에게 충분한 휴식이 주어지지 못하는 건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다.
* * *
“이제부터 삼가일三暇日마다 왕도 휴식한다. 그 전날에는 세자와 의정 중 한 사람이 쉬게 하고, 대신 순휴일에 공무를 보게 하라.”
삼가일三暇日이란 관리들이 한 달에 세 번 열흘 간격으로 가지는 휴무를 뜻한다.
그러나 이날에도 관청마다 한두 사람씩은 숙직이나 출납 따위로 등청했고 조회朝會에도 참석했다.
즉, 왕은 삼가일에 쉬지 못했다.
병조참판 이귀가 득달같이 나섰다.
“전하. 예로부터 부지런함은 모든 제왕의 덕목이었사옵니다. 그간 전하께서는 분주하게 나라를 다스리시어 오늘날 같은 성대함을 이룩하셨사온데, 어찌하여 그 비결 된 덕목을 저버리고자 하시옵니까?”
“하다못해 노비에게도 주어지는 것이 휴일이거늘 왕에게는 휴일이 부당하다는 말입니까?”
“이미 정해진 휴일이 있기 때문이옵니다.”
“그것이 진정 휴일이겠습니까.”
각기 3월 3일, 5월 5일, 9월 9일인 삼짇날과 단오, 중양절은 공식적으로 휴일이다.
이 역시 삼가일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철저하게 쉬는 날은 아니어서 윤대輪對와 경연經筵이 행해졌고, 여기에 길일을 기념하기 위한 잔치까지 더해져 왕으로서는 더더욱 휴일이 아니었다.
선왕과 선왕비의 기일도 휴일로 여겨지나 이 시대의 여느 휴일 언저리들처럼 미래의 공휴일과는 거리가 멀다.
애초에, 기일이다.
복잡하고 빡빡한 궁중 예법으로 제사를 지내는데 쉰다고 할 수 있을까.
그나마…….
철조輟朝라고 해서, 고위관리나 종친이 죽으면 며칠 조회를 중단하는 제도가 차라리 왕에게는 휴일에 부합할 정도다.
그리고 누구 죽은 날을 휴일로 칠 수는 없지.
더욱이, 종친이면 친척의 장례고 고관이 유명을 다했다면 당분간 정무가 힘들어진다. 어느 쪽이건 편한 마음으로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사정들은 이귀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을 테지.
“가장의 가정의 모범이듯, 군주는 국가의 모범이옵니다. 나라가 반석에 오른 지 오래되지 않았거늘 벌써 태만한 마음을 신민들에게 보이고자 하시옵니까?”
애초에 자신과 다른 의견은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는 사람이므로, 정상적으로 대처하려다간 나만 지친다.
“참판.”
“…….”
“나는 그대가 궁중의 예법을 신하 된 신분으로 감히 거론하였음에도 크게 마음을 베풀어 용서하였습니다.”
중전의 우려는 기우로 그치지 않았다.
예법에 보수적인 인사들은 나라의 안주인이 가체를 쓰지 않아 ‘볼품없는’ 차림으로 지내는 데 반대했다.
밖에서 어떻게 보겠냐며.
그중 이귀가 가장 극렬하게 반발했다.
“이제는 궁중의 예법을 제멋대로 재단하는 것을 넘어서, 왕을 핍박까지 하십니까?”
“핍박이 아니오라……!”
“내가 진정으로 태만해져 볼까요? 다 경이 인군을 무시하고 제가 왕인 양 전횡하여 나는 나서지 못하겠다고 말입니다.”
“…….”
이귀가 금세 합죽이가 되었다.
광해군이나 선조가 자신의 성실을 인질로 삼아 신하를 협박한다면, 모두가 쌍수를 들어 환영했겠지만 나는 다르다.
그간 해놓은 게 워낙 많았어야지.
방법이 유치하다는 건 인정한다.
옛날 생각도 좀 나고. 이귀를 이런 식으로 갈궜지.
다 아들을 위해서다. 세자가 알아서 휴식을 챙기지는 않을 테니까.
자식의 심신 건강 유지에 필요한 게 아버지의 체면이라면…….
얼마든지 더 유치해질 수 있다.
* * *
의주부에서 새로운 보고가 날아왔다.
이원화된 정보원은 혼란한 요동에서 대치되는 헛소문을 자주 가져왔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굵직한 소식이 있었다.
“홍태주가 이영방의 연합군을 무너뜨렸단 말이지.”
이빨 빠진 호랑일지라도, 본체는 호랑이거늘.
이영방은 한 번 후금에 귀부했음에도 이러한 사실을 망각했는지 홍태주에게 덤볐다가 제대로 냥냥펀치를 맞았다.
연합을 구성한 군벌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와해했다. 가진 게 무력뿐인 군벌에서 무력이 사라졌으니 당연한 귀결이다.
이영방은 실종됐다. 수급이 거둬지지 않았으니 살아남기는 했다는 뜻이리라. 내심 재기를 꿈꾸고 있겠으나 연합이 와해했으니 야망에 재도전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잘 풀리지 않으면 그대로 잠적해 버리겠지. 명나라로 튀거나.
실력 과시를 마친 홍태주는 와해한 군벌들의 영역에 관리자를 파견했다.
아파태에게 맞서지 못하고 요양으로 철군하며 도시국가 수준으로 축소되었던 영향력이 다시 요동에 번졌다.
“몰락했어도 대청을 창건한 황제다, 이건가…….”
이 이빨 빠진 호랑이는 와신상담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가 추구하는 재기란 배신만 거듭해온 이영방 따위의 것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고 강렬할 테지.
팔자 좀 피나 싶었더니만.
역시 만만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