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74화
이영방을 꺾고 기세를 잡은 홍태주는 먹물 번져가듯 요동을 잠식해 나갔다.
한때 요동 전체가 그의 것이었음을 생각하면, 탈환이라는 표현이 더 걸맞을 터다.
“미천한 죄인이 대청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홍태주가 오래간만에 본 사촌, 아민은 구차해져 있었다.
앞선 한의 시절 휘하의 군세를 모두 잃고 이패륵의 작위마저 박탈당한 그다.
하지만 목숨은 거둬지지 않았으니, 대신 만주의 정신적 수도인 혁도아랍을 지킬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혁도아랍은 위상에 반하여 심하게 낙후하였으나, 그렇다고 아이신기오로가 발흥한 땅을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변명하고 싶지 않으나, 아바타이는 과거 죄인에게 폐하를 이간하여 강을 넘도록 부추겼습니다.”
아민은 누르하치가 아닌, 누르하치의 동생 슈르하치의 핏줄이다.
이패륵이라는 높은 지위에 올랐으나 이는 누르하치가 계승의 정당성을 가진 다른 패륵들을 중재하기 위해서였을 뿐.
만주 땅에서는 무엇도 자신이 쟁취할 게 없다고 여겼던 아민에게 강을 넘어 조선을 쟁취하라는 아파태의 꼬드김은 달콤했다.
속아 넘어간 게 아니다.
아파태는 단지 아민이 듣고 싶어 했던 말을 해주었을 뿐이다.
현재 아민이 홍태주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는 것처럼.
“아바타이가 도르곤의 모친 아바하이와 결탁하여 폐하를 배신한 것도 우연은 아닙니다. 죄인이 감히 폐하께 간청드립니다. 일개 전사라도 좋으니 다시 종군하게 해주십시오……!”
홍태주는 손끝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아민의 간청이 이어졌다.
“죄인의 죄와 원한을 조금이라도 덜게 해주신다면, 이 한목숨 다할 때까지 견마지로로 은혜를 갚겠습니다!”
홍태주는 잠시 생각했다.
괘씸하다고.
만주에 두 발을 딛고 선 자라면 마땅히 견마지로를 다해 자신에게 충성하는 게 맞다.
감히 조건을 달고 말 게 아니다.
그건 자신의 땅과 노예들을 제멋대로 차지한 반역자들이나 할 법한 발언이다.
하지만 아민의 저의는 대충 이해했다.
이참에 아파태를 때려죽여야 할 명분을 보태주면서, 겸사겸사 혁도아랍에 유폐된 자기 신세도 고쳐보겠다는 거다.
아파태가 만악의 근원이 될수록 그의 사특한 꼬드김에 넘어간 자신의 죄도 가벼워질 테니.
군공이라도 세운다면 더더욱 지금의 신세를 벗어나기 쉬워진다.
일단 자유의 몸이 되기만 한다면, 아이신기오로의 성을 단 아민이 어디 가서 아쉬운 소리를 하며 살지는 않겠지.
‘그래도 아바타이를 찾아가지 않은 건 가상하군.’
과거 아파태의 꼬드김이 있었다는 건 당시 두 사람이 힘을 합쳤었다는 자백이다.
그러나 아민은 아파태 대신 자신을 찾아와 충성을 맹세했다.
사리 판단은 떨어져도 아예 눈이 삐지는 않았다는 거겠지.
‘덕분에 혁도아랍이 아바타이에게 넘어가는 일은 없어졌군.’
아민이 집 지키는 개로 전락했을지언정, 집을 지키기 위한 권한 정도는 가지고 있다.
그러한 아민이 아파태를 찾아갔다면 만주의 정신적 수도가 참칭자에게 넘어가는 꼴이 된다.
지극히 불쾌한 상황.
혁도아랍이 요동에서 멀고, 오지에 위치해 군사적으로 부담해야 할 비용이 적지 않음을 생각하면 혁도아랍 자체는 계륵에 가깝긴 하지만, 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면 정세는 훨씬 까다로워졌을 거다.
아민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만천하에 보여줄 필요가 있다.
생존을 위해서건, 이익을 위해서건 자신에게 줄을 서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아파태에게 서는 줄이 줄어든다는 뜻이니까.
‘토사구팽은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
계산을 갈무리한 홍태주가 입을 열었다.
“좋다.”
“폐하……!”
아민이 과장되게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죄인의 신분이지만, 일족을 일개 병사로 쓸 수는 없지. 그대의 지위는 신하들과 논의해서 결정하겠다.”
“……예!”
“물러나라.”
아민은 제 발만 보일 정도로 깊게 허리를 숙인 채, 뒷걸음질로 어전을 빠져나갔다.
실로 구차한 모습이다.
의도적인 모습이기도 할 테고.
“혁도아랍과 슈르하치의 핏줄이 나의 품으로 알아서 돌아왔으니 좋은 징조다.”
신하들이 일제히 찬동했다. 실리는 몰라도, 상징적인 의미는 상당했다.
“이제, 급선무는 서쪽의 변란을 마저 다스리는 것이다.”
앞선 한이 요동을 정벌할 때 가장 마지막으로 복속되었던 서남단 반도는 현재 무의미한 기대감에 젖어 다시 저항을 시작했다.
들리는 말로는 해로를 타고 명나라에서 미미한 지원이 있다고도 한다.
나쁜 소식은 아니다.
그게 명나라의 한계라는 뜻이니.
“주인을 무는 개와 반란을 일으키는 노예는 살려둘 필요가 없다. 이미 배신자 이영방의 폭도 무리를 주륙하였으니, 저항도 크게 약화하였을 것이다. 너희들은 나머지도 토벌할 계획을 수립해라.”
“받들겠습니다.”
만주족과 한간 관리들이 일제히 허리 숙였다.
서쪽만 문제인 건 아니다.
북쪽에는 아파태와 참칭자 도르곤이 수도 선양을 점거한 체 세력을 응집하고 있다.
남쪽의 압록강 근방을 잠식한 군소 세력들은 참칭자 못지않은 눈엣가시다. 그러나 그들이 당장 표면적인 충성을 바쳐오는 한, 조선과의 완충지대라는 쓸모가 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 시린 법이니.
우선순위는 아니지만, 동쪽에도 적이 있다.
야인여진.
그들의 세력까지는 거리가 멀고, 또 방대한 영역에 흩어 있어 당분간은 논외로 여기는 게 편했다.
종합하면 사방이 적인 셈이다.
그러나,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다.
사방이 적이라는 것도 마냥 나쁜 전황은 아니다. 다르게 말하면, 사방으로 공격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그들 모두 다시 복속하였을 때…….
대청은 제국에 걸맞은 위상과 위력을 회복하게 될 것이었다.
* * *
요동의 백성 대다수는 더는 고향에서 살지 않았다.
대신, 오래전부터 후금의 핍박을 피해 숨어든 자들을 쫓아 산으로 바다로 도망쳤다.
완전히 고향을 등진 사람은 적었다.
모든 재산과 집을 두고서, 빈손이 되어 기약 없는 방랑을 시작하는 건 후금과 군벌들 못지않게 두려웠으니까.
십중팔구는 가까운 야산에 움막을 짓고 살면서, 밤마다 고향으로 내려와 잠을 자거나 밥을 지어서 가져가곤 했다.
대낮에 사람이 돌아다녔다간 약탈을 피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이름이 있다 싶은 마을들은 모조리 유령 마을 아닌 유령 마을이 되어버렸다.
낮에는 인기척 하나 없이 휑하다가…….
밤만 되면 숨을 죽인 인영들이 골목마다 횡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도피도 영원히 지속할 수는 없었다.
지키지 못할 작물을 애써 기르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으나, 입은 누구에게나 다 달려 있었으므로.
그리하여 원치 않게 고향을 등지게 된 유민들과 그런 유민들에게서 식량과 재물을 강도질하는 도적들, 그리고 도적들이 떼로 모여 안하무인의 지경이 되어 만들어진 군벌까지 세 집단의 경계는 요동이 혼란한 만큼이나 불분명해졌다.
유령 마을 아닌 유령 마을은 경계심이 부족한 외부인을 사냥하는 도적 떼의 함정이 되었으며, 해소되지 못한 채 나날이 쌓여가는 원한과 악감정은 집단 사이의 반목과 충돌을 낳아 무리의 이합집산을 유도했다.
지옥으로 전락한 요동에서 요동인을 가장 핍박하고 수탈하는 건 만주족이 아니었다. 같은 요동인이었다.
더군다나 최근 가장 큰 세력과 야망을 가졌던 이영방의 연합이 몰락하면서 군벌과 도적 떼의 경향은 더욱 하루살이 같이 변했다.
군벌 서열의 윗자리들이 죄 공백이 된 탓이다.
정작, 몰락한 군벌들의 영역은 홍태주가 독식하였으나 군소한 군벌들은 지척까지 다다른 홍태주의 위협을 의식하지 않았다.
애초에 상대가 안 된다고 여겨서일까.
어떤 군벌들은 저들이 주변을 모조리 평정한 다음 힘을 하나로 모아 홍태주에게 대적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그려놓기는 했다.
그 결과는 군벌과 도적 떼의 치열해진 경쟁으로 더 황폐해진 요동과 더 피폐해진 요동인의 삶뿐이었지만.
홍태주의 군대가 난립하는 군벌들의 영역에 들어섰을 때 요동민들의 반응이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이유였다.
“폐, 폐하…….”
홍태주의 천막에 촌부들이 방문했다.
오랑캐 황제는 그들을 언제라도 베어버릴 수 있었지만, 촌부들도 나름 죽음을 각오하고서 찾아왔다.
어차피 오랑캐 황제의 후의라도 받아내지 못한다면 오직 파멸만이 예정되어 있었으니까.
홍태주는 그러한 촌부들의 사정을 어렵지 않게 유추했다.
“말하라.”
“예, 망극하옵니다. 폐하…….”
선두의 촌부가 침을 삼키고서 마저 말했다.
“말씀드리기 황송하오나, 저희는 세상 바뀌는 건 잘 알지 못하고 그저 땅만 보고 살아온 무지렁이 농사꾼들이옵니다.”
혹여 오랑캐 황제의 심기를 거슬렀을까 촌부가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는 동안, 한간 관리가 필요 이상으로 진솔한 말을 적당히 가다듬어 통역했다.
홍태주는 그간 침묵하는 촌부들을 보며 짧게 답했다.
“계속 말하라.”
“……망극하옵니다. 소인들은 그간 마찬가지로 땅만 갈면서 살아왔는데 근자에 들어서는 도적이 갑자기 범람하는 강물처럼 불어나 관리와 병사들도 감당하지 못하여 도망치고, 심지어는 한 패거리가 되어서 폐하께 바칠 세금은 물론 내년에 파종할 낱알들까지 모조리 빼앗았습니다…….”
촌부의 하소연에 울먹임이 섞였다.
큰 걱정도 근심도 없이, 묵묵하게 제 몫만 하면서 살아가는 게 사치가 되어버린 세상이다.
“소인들은 당장 먹을 게 없어 산에 올라 나무껍질만 먹어온 지 오래이옵니다. 하지만 나무껍질은 배는 불러도 소화는 되지 않아, 다들 주린 채로 죽어갈 따름입니다…….”
홍태주는 오는 와중 한결같았던 나무들의 몰골을 떠올렸다.
죄 종류를 불문하고 껍질이 벗겨져 있었다.
“환자와 노인, 아이들이 연달아 죽어 나가도 사람들은 슬퍼할 기력도 없습니다. 혹 먹을 게 있을까 정처 없이 방황하거나, 엉성하게 지어놓은 여막 아래에서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천천히 죽어갈 따름입니다…….”
촌부들은 그러한 가정의 가장들이었다.
난폭하고 잔혹한 오랑캐들의 소굴에 제 발로 찾아와 자비를 구걸하는 이유였다.
요즘은 시대가 오랑캐보다 더 난폭하고 잔혹했으므로.
“폐하, 부디 소인들을 가엾게 여겨 조금의 낱알이라도 베풀어주십시오. 낱알을 씹을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하소연이 말미에 다다랐을 때부터 촌부는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치 온몸의 물을 이 자리에서 짜내기라도 하겠다는 기세였다.
그건 함께 찾아온 촌부들도 마찬가지였다. 애써 의식하지 않았던 현실이었으나, 어려움을 호소하기 위해 입에 담자 저들 스스로가 얼마나 비참한 지경에 빠져 있는지 깨달은 탓이었다.
홍태주가 수하들에게 물었다.
“내어줄 식량이 있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가져온 군량으로는 군사들 먹이기도 빠듯합니다.”
홍태주도 식량 문제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여느 백성이라면 굶주렸을 때 산이나 들을 들쑤셔볼 수라도 있지, 군대는 그럴 수조차 없으니까.
잔존한 팔기는 물론 싸움을 위해 징집병까지 꾸린 홍태주다.
필요에 의한 소모전을 각오하고서 서남단 정벌에 나섰다.
“그렇다면 쫓아내라. 군사들 먹일 식량도 부족한데 어떻게 식충이 같은 입을 먹이겠는가.”
홍태주의 축객에 주변을 지키는 병사들이 촌부들에게 향했다.
촌부들은 혹 죽나 싶어 두려워하면서도 한 줌 식량을 위한 애걸을 그치지 않았다.
홍태주는 비참하게 멀어지는 촌부들의 모습을 주시하다가, 금세 머리에서 지워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