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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75화 (175/380)

인조, 명군이 되다 175화

홍태주군은 진군하며 무수한 장애에 부닥쳤다.

군벌과 도적을 소탕하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미개함과 야만성은 약자들에게는 잘 통용되는 무기일지 몰라도, 정규군을 상대로는 별다른 효용을 내지 못한다.

그것을 군벌과 도적들도 잘 알았으므로 대부분은 교전을 피했다.

이따금 벌어지는 싸움도 아주 손쉽게 종결됐다.

진정으로 홍태주군에 장애가 된 건 굶주린 자들이었다.

산과 들을 가리지 않고 도처에서 횡행하는 주린 자들은 수시로 군대의 앞을 가로막았으며, 구걸을 하거나 심지어는 습격을 벌여댔다.

생존이 불투명해진 자들에게 있어 목숨이란 한 끼 식사만도 못한 것이었다.

진정 목숨이 초개가 된 자들이다.

오로지 배를 채우겠다는 일념만으로 조잡한 무기와 독기만으로 달려드니 기세만은 군벌이나 도적 떼와 확연히 달랐다.

습격이 자포자기한 자들의 자살 시도처럼 비쳤음에도 가랑비에 옷 젖듯 사상자가 누적되는 이유였다.

또한, 굶주림에 광인이 되어버린 자들의 비참한 죽음들은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리기에도 충분했다.

“이런 상황인데 군벌들이 난립하여 각축장을 벌이고 있었단 말인가?”

홍태주는 답지 않게 당혹감마저 느꼈다.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가 여태 배우고 경험해 온 싸움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했다.

전쟁이나 전장에서 품위라는 개념은 딱히 고려해본 적이 없었던 홍태주다.

오직 싸워 이기는 것만 생각할 뿐.

하지만 이곳에서 벌어지는 싸움의 천박함이란 홍태주마저 기함하게 만들었다.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 황폐해진 농지를 두고 구차한 싸움을 벌여댄다.

승자는 무엇도 얻지 못한 채로 기뻐하고, 패자는 무엇도 잃지 않고서 복수를 염원한다.

악다구니와 같은 투쟁을 필사적으로 이어가나 오직 시체만이 늘어날 뿐이다.

“가진 게 없으니 빼앗기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한간 관리가 분석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가 가진 게 없다. 가진 게 없는 자들끼리 싸워 무엇을 빼앗는다는 말이냐.”

“싸우다 보면 그런 건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

“우매하고 미천한 자들이 악의와 독기만 남아서 벌이는 짓이니 개의치 마시옵소서. 또한, 폐하께서 행차하셨으니 소모적인 다툼도 모두 끝날 것입니다.”

“나는 이런 미개한 싸움에 집착하는 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살아만 있다면 이런 행태를 반복하지 않겠는가?”

그간 군벌과 도적들을 소탕하며 적지 않은 포로를 사로잡았다.

공을 세운 자들에게 전리품으로 나눠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포로들이 여태 지옥도에서 아귀다툼만을 반복해왔다는 사실에 홍태주는 생각이 달라졌다.

“앞으로는 포로를 남기지 말고 모두 죽여라. 쓸모가 없는 놈들이다. 잡아둔 포로도 모조리 죽여라.”

“……!”

수하들이 놀란 얼굴로 홍태주를 마주했다.

“땅은 갈지 못하고 서로 죽이기만 할 줄 아는 짐승들인데 노예로 거두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후환에 지나지 않는다. 모두 죽여라.”

홍태주가 거듭 단호하게 지시했다.

“……해산해라.”

수하들이 썰물처럼 물러난 뒤, 홍태주는 문득 복잡한 생각이 들어 상념에 빠졌다.

어처구니없는 야만성과 미개함.

일말의 생산성 없이 황무지나 다름없는 땅을 두고서 착취와 아귀다툼만을 거듭하는 천박함.

어쩌면 명나라나 조선이 자신을 보아온 시선이 이렇지 않았을까.

그간 양국의 멸시에 분노하고, 요동을 제패하면서 우월감을 느꼈지만, 정작 그들의 시선이 이러했다는 건 조금도 생각해 보거나 체감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몸소 겪어보니 닭살이 돋았다.

당장 이곳에서 벌어지는 아귀다툼이 그간 만주족이 수백 년간 행해온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

홍태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몸서리치면서도, 이 깨달음을 어떠한 결론으로 이끌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단순하게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도 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명나라와 조선이 가졌을 감정을 똑같이 경험해보았다고 해서 양국과의 관계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홍태주 자신이 황제가 되었다고 해서 자신을 바라보는 양국의 시선이 달라지지 않았듯이.

그러나, 이것이 자신이 진정으로 황제답고 대청이 제국다운 면모를 갖출 기회일지도 몰랐다.

* * *

끼이이익!

소름 끼치는 경첩 소리와 함께 창고의 문이 열렸다.

군벌들은 정말로 이유 없이 다투지는 않았다는 듯 내부는 식량으로 가득 차 있었다.

“폐하, 이 정도라면 부족한 군량을 크게 충당할 수 있겠습니다!”

한간 관리가 화색을 띠면서 반겼다.

창고와 황제 주변을 지키며 내부에 쌓인 식량을 마주한 병사들 역시, 뿌듯한 기색이었다.

군벌과 도적들을 소탕하며 갖은 고생을 다 하는 와중 든든한 식사는 큰 위안이 되어주리라.

홍태주는 고민했다.

군벌은 쟁기와 호미로 땅과 싸우는 자들이 아니다.

쌀 한 톨마저 모조리 다른 누군가에게서 빼앗은 것들이다. 일상만을 원했던 농민들이 들과 산을 방황하게 된 이유였다.

‘……그냥 내어주는 건 아깝다.’

유능한 지도자라면 언제나 실리를 챙겨야 한다.

군벌이 축적해둔 식량이 적지는 않았지만, 굶주린 자 모두에게 살포한다면 이전과 마찬가지로 반나절의 위안으로 그칠 뿐이다.

식량은 식량대로 허비하고 굶주린 자들은 마저 굶어죽는 것이다.

“……폐하?”

“이곳에서 병사들을 징발하라.”

홍태주의 지시에 한간 관리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아뢰옵기 지극히 황송하오나, 우군의 규모는 군벌들과 비교하여 절대적으로나 상대적으로나 작지 않사옵니다. 하물며 이곳의 주민들은 오랫동안 굶어 힘을 쓸 수 없으니, 애써 징발한들 아깝게 군량만 축낼 것입니다.”

주변의 관리와 장수들은 이견이 없었다.

홍태주는 수하와 병사들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동안 여러 군벌을 소탕하면서 충성스럽고 용맹한 전사들을 여럿 잃었다. 많은 수는 아니나, 도적에 불과한 그놈들의 목숨 일 백을 거두어도 나의 병사 목숨 하나가 더 아깝다.”

“그렇다면…….”

한간 관리의 얼굴이 펴졌다.

“먼저 죽을 자들을 모집하라는 것이다. 힘이 없어도 칼은 대신 맞아줄 수 있고, 또 그렇게 죽어 나가다 보면 먹여야 할 입도 줄어드는 셈이다.”

“지당한 하교이십니다!”

“알았다면 이행하라.”

“예!”

모두의 앞에서 말했으므로, 한간 관리의 지시 전달은 팔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비록 징발된 이들 대부분은 군벌을 마저 소탕하는 과정에서 화살받이로 소모되겠지만, 일부만은 원정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선두에 서서 무수한 사선을 헤치고도 살아남았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군공을 세운 셈이니 더는 화살받이 취급을 받지 않으리라.

그러면 제 몫을 다하는 병사로서 정당하게 군량을 타내어 더는 굶주림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베풀어줄 수 있는 최선이다.’

홍태주는 수하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막사로 향했다. 아직 원정은 끝나지 않았다.

* * *

조선은 요동에 강도 높은 첩보전을 펼치고 있었으나, 명나라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국가의 명운이 걸린 상황에서도 정쟁과 내홍을 거듭하는 중이지만, 이런 마당에도 충신은 있기 마련이었다.

이들은 후금이 내분에 빠짐과 동시에 난립한 명나라계 군벌들을 후원했다.

비록 육로는 막혔으나 군벌들이 난립한 요동반도의 끝자락은 산동반도와 가까웠다. 그런 것 치고도 물리적인 거리는 상당했으나, 두 반도 사이에 낀 묘도열도廟島列가 중계지 역할을 해주었다.

명나라는 군벌들을 지원함과 동시에 현지의 여론과 현황을 파악했다.

한간 이영방이 일으킨 내란은 모두의 주목을 받았다.

오랑캐들을 모조리 요동 땅에서 물리치고 대명의 치세를 다시 불러오겠다던 이영방의 기치는 그리 신뢰 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두 세력이 맞부딪쳐 공멸한다면 명나라로선 고마울 따름이니까.

하지만 이영방은 명나라 조정의 기대에 부응해 내지 못했다.

도리어 처참하게 대패함으로써, 원정의 실패와 아파태의 내란으로 위축되어 있었던 홍태주가 요양을 나서게 만드는 계기만 만들어주고 말았다.

그리고 한 번 소굴을 뛰쳐나온 홍태주는 겨울잠을 마치고 일어난 맹수와 같은 기세로 정복을 거듭했다.

조선의 대승에 이은 후금의 자멸로 안도했던 명나라를 다시 긴장하게 만드는 소식이었다.

“정쟁에 몰두할 때가 아닙니다.”

명나라의 관리가 한 말이 아니었다.

본업을 목수로 삼고 취미로 황제 노릇을 하는 천계제의 발언 역시 아니었다.

“설사雪蓑…….”

남이공.

조선에서는 구식이 되어버린 소홍이포 장사를 위해 시제품을 가지고 방문했다가, 졸지에 명나라 정치의 흑막이 되어버린 자였다.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서 엄당과 동림당 사이를 저울질했을 때부터 남이공의 위세는 그저 변방의 배신陪臣으로 치부될 수준이 아니었지만, 최근 조선이 후금의 주력을 몰살해버리는 압승을 거두면서 남이공의 입지는 수직으로 상승했다.

“매국노 이영방이 홍노紅奴를 붙들어놓는 데 실패했고, 홍노는 요동을 다시 제 손바닥에 놓고 있으니, 장차 후환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남이공이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공간은 그의 숙소가 아니었다.

화려한 금박으로 장식된 용상의 앞, 그리고 좌우로 시립한 명나라의 중신들 가운데였다.

“조선 국왕 전하께서는 끝내 강을 넘으실 의향이 없다고 하외까?”

엄당의 인사인 왕화정王化貞이었다.

“전하께서는 이미 후금 땅에 군사를 보내는 것 이상으로 힘써주고 계십니다. 후금의 정예한 군사가 몰살하고, 아파태는 내란을 일으켰으며, 여러 부족이 들고일어난 것이 모두 전하께서 세우신 공로인데 어찌 이것들은 보지 않으시고 군사만 찾으십니까?”

“조선 국왕께서 강군을 몰아 요양을 친다면 홍노의 수급도 촌각에 떨어질 터인데, 가장 확실한 길은 두고서 겉돌기만 하시니 하는 말이외다…….”

왕화정이 대답과 함께 꼴깍 침을 삼켰다.

황제 앞에서 대명의 조회를 주도하는 남이공의 존재감이 강대했다.

희대의 간신 위충현도 분명 무시 못 할 존재감을 지녔으나, 태생이 내시인 그가 조정에서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더욱이 남이공은 중외에서 조명받는 이국의 사신.

위충현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대는 동창과 금의위에도 면역이다.

찔러 칼이 들어가지 않는 건 아닐 터이나 그런 미친 짓을 저질렀다간 조선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왕 공께서는 요동의 구원자가 대명의 군대가 아닌, 조선의 군대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요동을 깔끔하게 포기할 거라면 모를까.

조선의 군사로 저들의 영토를 회복시켜달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홍노는 천하의 적이외다. 놈을 처단하는 게 중요하지, 벨 수 있다면 칼의 주인이 누구인지가 중요하겠소?”

“그렇다면 어째서 그 칼을 직접 쥐고자 하시는 않는다는 말입니까.”

“…….”

남이공이 왕에게서 받은 지령은 이러했다.

홍태주의 기세가 달라졌으니 명나라를 끌어들여 치게 만들라고.

그간 명나라의 혼란이 진화되지 않도록 이간질과 협잡만을 거듭했던 남이공 본인이 협력을 입에 담기 시작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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