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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76화 (176/380)

인조, 명군이 되다 176화

홍태주는 호랑이는 이빨이 빠져도 호랑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는 요동반도의 과반을 장악했으며, 현지의 민심도 나쁘지 않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의아한 일이다.

후금은 명나라가 요동에서 지켜왔던 질서를 완전히 뭉개버렸다.

누르하치가 거듭한 수탈과 학살은 인심이 팍팍하다 못해 흉악한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질서는 물론 인간의 생존을 위한 필수 요소조차 실종되어버린 요동은 인간쓰레기들이 양산되고 활개치는 인세의 지옥으로 전락했다.

‘그러니 요동이 오늘날의 꼴이 된 주범은 두말할 것 없이 후금인데.’

요동반도의 명나라인들은 홍태주의 지배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필경, 지금은 홍태주보다 이웃이 더 악독하고 위험하다는 걸 질리도록 체감해서일 테지.’

시달릴 만큼 시달렸으니 최악보다는 차악이 낫다는 생각이 들 법하다.

나로서는 반갑지 못한 소식이다.

네 방위를 에워싼 감옥이 최대한 홍태주를 붙들어놓기를 바랐으니까.

하지만 홍태주는 서쪽의 창살을 뜯어냈고, 저항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다 죽어가는 명나라를 홍태주와 붙게 하려는 이유다.

내홍과 반란을 겪는 명나라가 다시 홍태주와 싸우게 되면 원 역사처럼 자멸을 면치 못하겠지.

하지만 홍태주를 억압하는 데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

나는 남이공이 보내온 문서의 일독을 마쳤다.

얼핏 보면 인평대군이 글자 연습을 한다고 아무런 한자나 늘어놓은 모양새다.

그런 것 치고는 필체가 유려했지만.

암호문이다.

이국에 전쟁을 충동질하라는 명령을 공개적으로 내릴 수는 없잖은가.

“특사가 잘 해주기를 바라야겠군.”

남이공이 보내온 문서는 서안 한쪽에 내려놓고서, 백지를 늘어놓고 세필을 적셨다.

본디 한문에서는 숨은 뜻을 은유하는 방식으로 파자 따위를 이용한다.

대표적인 게 목자득국木子得國, 십팔자위왕十八子?王 같은 말장난이다.

한문의 의미를 그대로 읽으면 목자득국은 나무의 아들이 나라를 얻는다, 십팔자위왕은 열 여덟 사람이 왕이 된다, 따위의 의미지만 앞선 글자들을 합쳐보면 다른 의미가 생겨나는 것이다.

목자木子와 십팔자十八子를 겹쳐 써보면 이李라는 글자가 생겨나니까.

태조 이성계가 서까래 세 개에 깔렸다는 꿈의 해몽도 이런 식이다. 사람 몸 위에 석 삼三이 놓였으니 왕王이 될 꿈이라고.

나는 이런 식으로는 암호를 사용하지 않는다.

식자 치고 파자를 알아채지 못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는 탓이다. 이들에게는 언어유희에 불과한 게 파자다.

대신 나는 다른 방식을 사용했다.

천자문을 바탕으로 특정 숫자만큼 배열을 밀거나 당겨서 읽는 것이다.

세로 한 칸이라면 천天을 지地로 읽는 식.

천자문은 가장 흔히 쓰이는 한자들로 구성되었으며, 겹치는 글자가 없다는 점에서 암호책으로 쓰기에 적합했다.

아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맹점이긴 하지만, 가로와 세로 축을 무작위로 밀고 당겨서 쓰고 읽는다면 기준을 미리 아는 게 아니고서야 얼핏 봐서는 알아채기 어렵다.

한문은 표음문자가 아니라 표의문자라서 더욱 그렇다.

알파벳이라면 단어의 길이, 문장 구성만 봐도 단일치환의 단서를 직감할 수 있지만 한문은 아니니까.

물론, 표의문자라서 단일치환 이상의 암호체계를 적용하기 어렵다는 부작용도 있긴 하다.

천자문에서 등장하지 않는 한자는 파자해서 치환한다. 남이공 정도 되는 식자라면 파자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다.

나는 백지를 채워나갔다.

말머리의 네 글자는 획수의 홀짝에 따라 가로와 세로를 앞으로, 뒤로 몇 칸이나 당길지를 규정한다.

더더욱 해석을 어렵게 만드는 기능도 있다.

전문으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부분이이다. 말머리부터 해석을 시작했다간 공허하게 쳇바퀴만 돌게 된다.

“……후.”

완성된 암호문은 봉하기 전에 내가 다시 해석해본다. 혹여 글자가 잘못 기입되었을 경우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니까.

표의문자 치고도 한 글자에 여러 뜻이 공존하는 한문이다.

글자 자체가 틀려버린다면 대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다.

검증까지 끝냈다면, 남은 건 암호문을 봉하고 남이공에게 보내는 것뿐이다.

물론 내가 직접 움직이지는 않는다.

“상선? 밖에 계십니까.”

“예, 전하.”

“들어오세요.”

미닫이문이 좌우로 열리고, 그 너머에서 최 상선이 손을 모은 채로 들어섰다.

“부르셨사옵니까.”

“예판에게 보낼 서찰입니다.”

조용히 이르며 암호문을 건넸다.

최 상선은 암호문을 챙겨 품에 쏙 넣으며 말했다.

“숙수들이 겨우내 절여놓은 과일로 과편果片을 만들었다고 하옵니다.”

“참 기대됩니다. 내가 평소에 닦달을 한다고, 숙수들이 고생이 많아요.”

“전하께서는 이 나라의 주인이시고, 종묘와 사직을 다시 세우셨으니 이러한 주문도 숙수들에게는 도리어 영광일 것입니다.”

“알겠어요. 상선 덕분에 낯부끄럽습니다. 물러나세요.”

“예에.”

짧게 잡담을 나눈 상선은 굳은 얼굴로 꾸벅 허리 숙였다.

암호문은 잘 전달하겠다는 듯이다.

고개를 끄덕이니 상선은 안색을 바꾸고서 물러났다.

근무는 여기까지.

나 역시 안색을 바꾸고 집무실을 나섰다.

* * *

두 차례 호란을 맞으면서, 오리지널 인조와의 자존심 싸움은 나의 압승으로 귀결됐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홍태주와 맞서는 중이다.

이유는 달라졌다.

“내가 이 나이에 찬바람까지 맞으며 산에 올라야겠소?”

대비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정작 고생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말이지요?”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비가 두 다리로 직접 산에 오를 리가 있나.

당연히 가마를 탔고, 그 가마를 지고서 북악산을 올라야 했던 가마꾼들은 한겨울에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고생들 했으니 가서 빙주氷酒라도 들게.”

“예, 전하.”

가마꾼들은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땀을 훔치며 물러났다.

세상 편하게 산세를 구경하며 올라온 대비는 아니겠지만, 지친 가마꾼들에게는 이런 한겨울이라도 살얼음 섞어놓은 술은 진미일 거다.

“광산부부인께서는 아니 같이 오셨습니까?”

“내 어머니께서는 사가에서 머무르시니, 함께 출발하기가 여의치 않소. 조금 늦더라도 주상이 상량해주기를 바라오.”

“여부야 있겠습니까.”

나는 대비를 정자로 안내했다.

가파른 산비탈을 앞두고 세워진 정자에서는 파도처럼 몰아치는 안개와 그 너머 한양의 풍경이 한 폭 그림처럼 펼쳐졌다.

내가 가족 모임의 장소를 이곳으로 고수하는 이유였다.

가마꾼들이 좀 고생하더라도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정자 주변을 둘러싼 병풍과 장막 너머로 가마꾼들이 풍경을 안주 삼아 빙주를 즐기는 소리에 마음이 가벼워진다.

곧이어 다른 손님들이 도착했다.

“세자 왔느냐!”

“예, 아바마마.”

세자와 세자빈 부부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리 드문드문 보는 사이도 아니거늘, 세자는 못 본 잠깐 동안 더 장성한 것처럼 느껴졌다.

“평소에 운동은 하느냐? 혜민서 일은 할 만하고?”

“예, 아바마마. 기상한 직후와 잠들기 직전 서궐을 한 바퀴씩 돌고, 의서도 많이 진척하였습니다.”

세자가 지금의 위치에서, 그리고 장차 왕이 되었을 때를 위하여 휴일을 만들어주었지만 몸과 마음의 피로는 종류가 다르다.

나는 세자가 민망함에 나를 밀어낼 때까지 세게 안아주었다.

“잘하고 있구나.”

“……망극하옵니다, 아바마마.”

이어 고개를 돌려 부자간의 애정을 목도한 세자빈을 마주했다.

“세자빈은 출타하여도 괜찮은가?”

나타날 때는 두 발로 걸어왔으나 뒤따라 빈 가마가 올라온 걸 보아 언덕 아래에서만 걸어 온 모양이었다.

그러니 산부가 산을 탄다고 체력적으로 혹사당하지는 않았겠으나 지금은 한겨울. 일단 걱정부터 들었다.

“염려치 마시옵소서. 세자에게 간호를 잘 받아, 몸은 이미 회복하였사옵니다.”

빈말로 보이지는 않았다. 추위에 얼굴이 상기되기는 했으나 그 외에는 건강해 보였으니까.

그래도 산부라서 노파심을 조금 부렸다.

“들어가서 쉬자꾸나. 세자도.”

“예.”

중궁과 봉림대군은 나와 함께 도착해 있었으니 이렇게 가족은 모두 모인 셈이다.

하지만 손님이 아직 남아 있었으니, 대비가 끔찍이 아끼는 정명공주와 영안위 부부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두 사람은 양해를 구하면서 정자로 들어왔다.

“늦어서 송구하옵니다.”

“그리 늦지도 않으셨습니다.”

짧은 일축에 정명공주와 영안위 부부는 빠르게 녹아들었다.

대비와 광산부부인은 여느때처럼 두 사람을 반겨주었다. 족보상 이쪽도 아들이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족보상이니까.

하물며 어려서부터 입양된 것도 아니고 찬탈로 대통大統의 끝자락을 꿰찬 것일 뿐이니.

아쉽지는 않다. 딱히 아쉬울 것도 아니고.

“맛 좀 보거라. 가족들은 다 먹어봤는데, 아직 세자와 세자빈만 먹어보지 못했구나.”

나는 숙수들이 비장하게 개발해낸 과편果片을 건넸다.

원래 겨울에는 맛보기 쉽지 않은 간식이다. 과즙을 굳혀 만드는 거라.

그런데 숙수들이 창의력을 발휘해본 거지.

‘원래 꿀이 들어가는데, 그럼 미리 과일을 꿀에 절여놨다가 겨울 때 꺼내쓰면 되지 않나?’

하고.

“맛있습니다.”

간식을 한 입한 세자가 소박하게 웃었다.

세자빈도 한 입하고, 아비와 함께 겨울 과편을 이미 맛보았던 봉림대군도 한 입했다.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치부하고 넘어갔을 소소한 일화들을 나눴다.

궁궐에 개가 나타났는데 워낙 재빨라 잡지는 못하고 끝내 궐문을 통해 쫓아냈다던가.

생일 맞은 궁인을 축하해주었는데, 알고 보니 다른 사람과 혼동을 했었다던가.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는 동안, 연기만 풀풀 날리던 휘장을 헤치고 궁인들이 소반을 가져왔다.

단향회檀香會다.

새해를 앞두고 왕과 신하들이 모여 박달나무 숯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워먹는 연회다.

그 주인공이 되는 설하멱雪下覓은 이름처럼 눈발 아래에서 먹어야 제 맛이 난다. 바깥은 찬바람 쌩쌩한데 파절임을 깔고서 김을 모락모락 풍기는 고기 구이를 보려니 벌써 침이 고였다.

첫 접시라서 배고픈 사람은 많은데 고기는 부족했다.

궁인이 설하멱을 많이 덜어주려 하기에 사양했고, 다음 차례가 된 중전은 소박한 나의 접시를 보더니 양껏 덜어갔다.

그 의도가 너무 뻔했던지라 나는 밥상을 끌어안고서 옆으로 피신했다.

중전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는지 깜짝 놀라서는 물었다.

“나라의 주인 된 분께서 채신머리 없이 밥상을 옮기시다니요.”

“이렇게 해야 중전이 고기를 많이 들 수 있으니까요. 이게 다, 지아비가 부인을 챙기기 위한 깊은 심계입니다.”

체신머리 좀 없어도 된다.

내뱉은 말은 즉석이긴 하다만.

내가 애도 아니고, 많이 받아서 넘겨주겠다는 발상이 아주 괘씸했단 말이지.

중전이 질린 얼굴로 항복했다.

“알겠습니다. 드리지 않을 테니, 밥상은 원래대로 두고 드시지요.”

“하하.”

여러 사람이 웃었다.

이게 내가 여전히 조선을 이끌고, 홍태주와 맞서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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