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77화
나라 안팎으로 분란이 그치지 않는 와중에도, 수백 년간 존속한 대제국의 중심부는 번화하고 또 번화했다.
산해관과 그 너머를 생각하면 기만적이기까지 한 광경이다.
북경에 거주하는 고관과 주민들이 변방의 시끄럽기만 한 사정을 남의 일처럼 여기는 이유다.
“외국에서 온 사람인데, 가상하게 여겨 조금만 싸게 주지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 남이공은 외유를 나왔다.
좌판을 펼친 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남 대인의 위세라면 북경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싸게 달라니요? 안 됩니다. 더 달라고 하지 않는 걸 고맙게 여기십시오.”
“어허, 이 사람 참.”
남이공은 주변을 돌아보며 웃었다. 동행한 호위와 수행원들, 그리고 추종자들이 따라서 웃었다.
개중에서 몇몇은 엄당과 동림당의 감시 겸 연락망이었다.
남이공은 본인의 선택과 주변인의 추천을 받아 책을 골랐고, 값은 추종자 중 하나가 내주었다.
엄당 측 사람이었다.
“그대 덕분에 내가 선진 문물을 편히 익히게 되었소이다. 고맙소.”
“아닙니다. 남 선생이 대명을 위해 해준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깟 책값이야 내드리지 못하겠습니까. 나중에 식사나 한번 같이해 주시면 망극하겠습니다.”
“그럽시다.”
남이공이 빙긋 웃었다. 이것이 엄당이나 동림당이 자리를 만드는 방법이었다.
황제가 아니고서야, 자신은 심부름꾼만 달랑 보내서 오라, 가라 거취를 지시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산책을 마친 남이공은 숙소 앞에 도착했다.
“귀가하십니까?”
“기왕 출타하신 김에 더 돌아보시지요. 고즈넉한 곳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맞습니다.”
추종자들이 아쉬워했다.
눈으로는 구분되지 않아도 양당의 끄나풀로서 쫓아다니는 사람이 절반, 남이공의 학문과 후금을 격파한 조선에 대한 막연한 선망으로 쫓아다니는 사람이 절반이다.
두 가지 모두이기도 한 자도 있었고.
남이공은 차별하지 않고 아쉬워하는 추종자들과 인사를 나눴다.
“이 사람과 외유를 함께 해주어서 고맙습니다만, 세간의 이목이 많고 저 또한 새로운 책이 생겼으니 응당 학문에 힘써야지 않겠습니까? 오늘만이 날은 아니니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추종자들이 무어라 더 만류하였지만, 남이공은 작게 웃어주고는 미안한 얼굴로 발을 돌렸다.
한 번 붙들리면 끝이 없으니.
그렇게 대문으로 들어선 남이공이 일순 안색을 고쳤다.
이번 외유는 바깥 바람만을 쐬고자 나온 게 아니었다.
남이공은 일꾼들이 옮겨온 책 중 하나를 빼 들고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책을 펼쳐 눈여겨두었던 쪽을 살폈다.
‘역시 이쪽이군.’
손끝으로 전해지는 무게가 달랐다.
남이공은 수상한 쪽의 끄트머리를 손톱으로 문질렀다. 그러자 약하게 접착되어 있던 틈이 벌어지며 종이가 둘로 나뉘었다.
지령은 그 안에 있었다.
‘쫓아다니는 인간들 때문에 밀명을 받는 절차만 번다해졌군.’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외출만 하면 어떻게 알고서 추종자들이 끼어든다.
개중에는 추종을 빙자한 엄당과 동림당의 사람도 섞여 있었고, 또 양당은 밖에서만이 아니라 안에서도 눈과 귀를 들여놓기 위해 꾸준히 공작을 벌여댔다.
남이공의 존재는 따지고 보면 굴러들어온 돌이다.
외부인이 양당의 중진들 이상으로 조명받고 있으니, 어떻게든 약점을 잡아 제 편으로 끌어들이건 내치건 하고 싶겠지.
‘당해줄쏘냐.’
남이공은 미소지었다.
밀명의 일독을 마친 그는 화로를 끌어다 벌건 숯불들 사이로 지령을 밀어 넣었다.
금세 불이 붙은 지령이 검게 물들어갔다.
남이공은 흔적이 보이지 않도록 숯을 뒤섞었다. 나풀거리던 검은 종이는 금세 바스라져 잿가루와 하나가 되었다.
* * *
조심하여 나쁠 건 없다.
과하면 기우겠으나, 그 정도로 호들갑을 떨어대는 것만 아니라면 만사불여 튼튼이지 않겠나.
애초에 양당의 이목이 이토록 집중된 상황에서 대놓고 밀명을 주고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한 조심성 덕으로 남이공은 왕과의 소통이 원활했다.
물리적 거리의 한계로 소식이 오가는 동안 시일이 다소 소요되기는 하지만, 장기적인 계획을 미리 세워두고 목표가 달성될 것을 상정한다면 조언과 지령을 시의적절하게 전달받을 수 있다.
남이공은 이를 따르기로 했다.
“부르셨습니까?”
“가까이 오게.”
“예.”
남이공에게 호출을 받아서 온 사내가 훌쩍 다가섰다.
본디 그가 사신단에서 본디 맡은 직무는 화원畵員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관청인 도화서의 말단 잡직.
사행을 오가는 와중 풍경 속 사신단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원래 그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사신단이 예기치 않게 붙박이가 되면서 화원의 역할도 붕 떠버렸다. 이국의 모습을 남기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졸지에 놀게 될 뻔한 사내였으나 남이공은 그의 충성심과 평소 행동거지에 집중했다.
“숙지하게. 자네가 수행원들에게 가르쳐줘야 하는 내용이니.”
남이공은 화원 사내를 자신의 손으로 기용했다.
그림을 그려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역할인 만큼, 운신의 폭이 자신보다 자유로웠고 주목은 덜 받았으니까.
“조선 사신 남이공은 다 죽어가는 홍태주를 토벌하고자 대타협을 주문하였으나, 엄당과 동림당은 거부했네.
요동반도의 의병들이 나무껍질만 씹으며 오랑캐들과 혈전을 벌이는 동안에도 당쟁만 벌이기 위해서 말이야.”
“예.”
“그리고 엄당 인사인 왕화정은 조선에 요동을 넘기려고 했지.
조선의 군사를 불러 홍태주를 처단하고 요동을 탈환하면, 과연 요동이 대명의 정당한 영토로 여겨질 수 있겠나?
북경에서 안락하게 부귀영화를 향유하는 관리들은 다르게 생각할지 몰라도 조선 덕에 몰살을 면한 요동의 사람들은 아닐 테지.”
그저 전언으로서 수행원들에게 전달될 말이 아니었다.
명나라의 위정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편향적인 해석을 수행원들을 통해 퍼뜨리라는 지령이었다.
물론, 이것이 선동의 첫 단계는 아니었다.
처음 소문을 퍼뜨리는 건 보다 은밀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선동이 누구의 입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쉽게 포착될 테니까. 수행원들이 동원되는 건 일단 붙기 시작한 불에 기름이 뿌려져야 할 때다.
“숙지했나?”
“예.”
“혹여 사족을 말할 필요가 생긴다면 이상의 기준을 따르게. 조선이 이미 다 두들겨놓은 홍태주에 대한 정벌조차 머뭇거리는 건 감투정신의 부재이자, 위정자들이 당쟁에 매몰되어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또 하나의 증거라고.”
“알겠습니다.”
남이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부는 이만하면 충분했다. 대화의 변수는 무궁무진하다. 예시를 숙지했고 기준만 준수한다면 나머지는 재량에 따라야 한다.
몇 번 부려본 경험에 따르면 화원은 이런 쪽에서도 재능이 있다.
이번에도 그 기대에 부응해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물러나게. 혹 문제가 생긴다면 바로 알려주고.”
“예.”
* * *
“쯧!”
위충현은 혀를 차며 찻물을 들이켰다.
본래 그는 다도茶道와 거리가 멀었다. 고를 수 있다면 차보다는 술이다.
그런 위충현이 유일하게 마시는 차가 안휘성의 육안아차六安芽茶였다. 시원한 맛이 있어 답답한 속을 조금이나마 달래주는 덕이다.
본래는 황제에게 올라가는 진상품이지만.
위충현에게는 황제의 것이 곧 제 것이었다.
“불청객이 드디어 본심을 드러냈군. 처음부터 이럴 요량이었던 모양이야.”
위충현은 동창에서 올라온 동향 보고서를 툭 던졌다.
북경에 불붙은 것처럼 번지는 소문이 있었다.
위정자들이 당쟁에만 매몰되어 요동과 그 땅의 백성들은 도외시하고 내홍만 거듭한다고 말이다.
“무지몽매한 놈들에게는 달콤한 속삭임이지.”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자를 막연히 질투하기 마련이고, 비슷한 처지에 놓인 자들과 공감하기 마련이다.
그 점에서 요동의 백성들은 북경의 주민들이 쉽게 이입할 수 있는 대상이었고, 부와 권력을 지닌 위정자들을 일견 정당하게 비난할 수 있는 거리는 입이 근질근질한 똥개들에게 내던져진 뼉다구와 같았다.
“동창이나 금의위를 시켜 통제하는 건 어떨까요?”
엄당 관리가 제안했다.
“오랑캐와 싸워 이기자는 여론을 어떻게 기관을 통해 꺾는단 말이냐.”
“하지만 태감께서 불쾌하게 여기신다면…….”
“그렇다고 행동으로 옮기면 동림당의 찌꺼기들만 좋아하겠지. 나 때문에 천하의 대명이 폭삭 망해버린 홍태주의 눈치나 보는 꼴이 되었다고 말이야!”
“……송구합니다.”
“쯧.”
위충현은 재차 찻잔을 채워 속을 달랬다.
동창이나 금의위를 움직이는 건 조심스러워야 했다. 예전과 같은 장악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탓이다.
괜히 트집거리를 내주었다간 아예 손에서 빠져나갈 수도 있었다.
‘조선에서 온 불청객 놈 때문에.’
멍청한 황제를 살살 달래놓아서 다시 정무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지금 자신이 누리는 모든 부와 권력이 황제의 무능과 태만에서 나온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치명적인 일이다.
위충현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의 수하들은 위축된 채로, 무언가를 채근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그간 엄당은 경쟁자들을 쉬운 방법으로 제거해왔다.
이번은 대상이 조금 특별할 뿐.
그래도 매한가지 사람이니, 칼이 들어가면 죽는 건 똑같지 않겠느냐는 거겠지.
다만 뒷감당할 자신은 없어서 대놓고 거론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건 너무 늦었어.”
“……!”
수하들이 뒷북을 치기 훨씬 전부터 위충현은 남이공의 암살을 고려해 왔다.
당연했다.
굴러들어온 돌이 자신 이상으로 황제의 관심을 끄는데, 죽여 없애고픈 생각이야 당연히 하지 않겠는가.
다만 사신이라는 특수한 신분을 생각해 손을 대지 않았는데 그것이 후환이 되어버렸다.
“남이공이 죽으면 조선의 왕이 가만히 있겠나?”
“……사고사로 얼마든지 위장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설령, 그렇지 못하더라도 어떻게 조선의 왕이 태감이나 대명을 위협하겠습니까.”
“한심하긴! 모문룡도 목이 달아나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조선의 왕은 요동의 패잔병과 유민들로 구성된 동강진을, 대명에 일언반구도 않고 분쇄해 버렸다.
변경에서 해적질을 벌였다는 이유였다.
“조선은 이미 대명을 공격한 바 있다. 동강진이 중원과는 경중이 다르나, 엄연히 대명의 변진이었다.”
수하 중 하나가 연신 입술을 움찔거리다 토해내듯이 말했다.
“그래도 조선이 중원까지 침략할 가능성은 작지 않겠습니까?”
“그런 가능성을 누가 감수한다는 말이냐? 네가?!”
“…….”
“더군다나 조선의 왕은 굳이 군사를 움직이지 않아도 일국을 결딴낼 수 있음을 입증해 냈다! 요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꼴만 봐도 분명하지 않으냐!”
남이공은 조선의 공훈을 과시하는 데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과연 일개 신하가 왕의 허락도 없이 내밀한 모략을 공공연히 자랑할 수 있을까?
이건 조선의 입지를 드높이기 위한 전략임과 동시에 시위였다.
조선과 척지려 한다면 똑같이 당하게 될 거라는.
총병까지 지냈던 모문룡과 그의 수하들이 모두 목이 달아난 이유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명군을 일시에 몰살해버린 조선군의 저력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만약 모문룡을 보호한다면 조선의 왕이 원한을 품고 후금과 결탁할지도 모른다. 당시의 명나라가 두려워했던 가능성이다.
그리고 현재, 후금은 완전히 몰락했으나 조선은 당시의 양국을 합친 것 이상으로 강해졌다.
대명일지라도 조선을 새로운 적으로 맞이하고 싶지 않다면 눈치 정도는 봐야 했다. 앞에서는 아닐지라도.
그건 자신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두 번째 모문룡이 되고 싶지 않다면.
“자리를 약조 받았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불러라. 이놈이 더 설치기 전에 끝장을 봐야겠다.”
“예? 하지만…….”
“내가 죽이겠다고 했더냐?”
위충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유능한 놈들은 다 죽여버렸으니 당연한 걸지도.
그렇다고 자신이 매사 일일이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다. 수하들은 그저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라고 무식한 놈들에게 부와 권력을 쥐여주었다.
“부르기나 해! 그리고 더 급한 일 없으면 볼일 보러 흩어져라.”
위충현이 꺼지라며 손을 펄럭이자, 수하들은 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이 비워지자 위충현은 다시 찻잔을 채웠다.
그새 식어버린 찻물을 단숨에 비워버린 위충현은, 뜨거운 한숨을 몇 번 더 내쉬다가 아예 찻주전자의 주둥아리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