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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79화 (179/380)

인조, 명군이 되다 179화

위충현은 인상을 굳혔다.

눈앞의 불청객은, 적당히 구슬려서는 말귀를 이해할 사람이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지요.”

“경청하겠습니다.”

“내가 개인적으로는 남 대인을 존경하긴 하지만, 황상을 보필하고 한 당을 책임지는 몸으로서는 그렇게 좋아할 여지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요?”

“대인께서는 나 이상으로 황상과 밀접하게 지내시며 대국의 정무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북경에서 도는 소문에 귀 대인의 수하들이 일조하는 바가 있다는 보고까지 받았습니다.”

“불편하게 해드렸다니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무지렁이들이 가벼이 입을 놀리지 않도록 단속하지요.”

“대인.”

남이공이 예, 하고서 짧게 답했다.

위충현은 그새 바짝 말라버린 입술을 적시고서 마저 말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이 사람이 감히 태감께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다만 세상에 원하는 바가 있다면 천조天朝가 홍적의 토벌에 적극적으로 나서주기만을 바랄 뿐이지요.”

“대명은 지금 추가적으로 군사를 일으키지 여의치 않은 상황이고, 가벼이 요동을 회복한다면 큰 비용을 치러야 합니다.”

“그래서 홍적을 가만히 내버려 두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남이공이 과장되게 기겁했다.

“태감께서는 홍적이 요동반도를 점거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가만히 내버려 두면, 꼭 큰 우환이 될 겁니다.”

“귀 대인께는 미안하지만, 대명에는 크고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고 지금의 홍태주는 우선순위가 아닙니다.”

위충현은 단호하게 일축했다.

비록 귀주와 사천에서 벌어진 두 토사의 현재 진행형인 반란과, 병화兵禍에 가뭄까지 겹쳐 식량난이 예고된 그 일대 지방에 대한 사정을 모두 늘어놓을 수는 없었다.

대국 체면에 변방 소국을 상대로 어떠한 고생을 하는지 소상히 열거하는 것도 우스웠지만, 민감한 소식을 굳이 외인에게 자세하게 알려 정적들에게 공격당할 거리를 만들어줄 필요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대명의 난처한 사정만은 굳이 거론할 필요조차 없이 분명했다.

출정도 분명 문제였으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요동을 탈환한 뒤다.

요동은 원래 부유한 지역.

대명의 중심인 직예直? 및 수도 북경과 인접하고 무역 대상이었던 여진 부족들과도 가까우며, 조선의 사행과 밀수꾼들이 음양으로 물품을 거래했으니까.

상업적으로 번화할 수밖에 없는 입지다.

그러나 부유하고 화려했던 요동은 오늘날 후금의 무자비한 약탈과 착취로 지옥도로 전락했다.

과연 회복에 얼마나 많은 재원과 시간이 필요할까?

‘차라리 조선에 던져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 있다. ……나중에 요동과 대명이 모두 회복한 다음에 말을 바꿔도 되니까.’

파탄 난 요동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승승장구를 거듭하는 조선이라도 엄청난 노력을 들여야 할 테고, 궁극적으로는 족쇄가 되어버릴 거다.

새로운 위협으로 부상하는 조선을 견제할 겸 요동의 회복까지 이국에 떠넘기는 일거양득의 책략이다.

조선이 생각보다 약해지지 않는다면, 그냥 넘어가면 될 따름이고.

어차피 지금은 오랑캐 수중에 떨어진 지역이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내어주어 실리를 꾀할 수 있다면 성공적인 거래 아닌가?

‘……생각보다 괜찮은데.’

그저 남이공을 북경에서 내쫓기 위한 대가로만 여겼으나 제법 실리를 취할 구석이 많았다.

황제와 당여들도 어렵지 않게 설득할 수 있겠지. 이미 제 손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물론, 동림당은 자신이 나라를 팔아먹는다며 소란을 일으키겠으나…….

‘어차피 동림당은 건수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소란을 일으킬 무리다.’

계산을 마친 위충현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건 어떻겠습니까. 대명은 현재 요동을 탈환할 여력도, 탈환한 다음 책임질 여력도 부족합니다.”

“조선이 요동을 맡으라는 말입니까?”

“예.”

“……!”

남이공은 놀라워하다, 눈치를 보며 물었다.

“황상께서 응하시겠습니까? 또, 다른 관리들은요.”

“이미 온 천하가 황상의 것이거늘 요동을 조선에 맡긴다고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수령에게 지방의 통치를 대행시킨다고 하여 그게 수령의 것이 되는 건 아니지요.”

“음.”

“여타 관리들은 생각이 다를 수 있겠지만, 남 대인이 믿어만 주신다면 문제없습니다.”

위충현은 남이공만 북경에서 사라져준다면 곧바로 과거의 권력을 되찾을 자신이 있었다.

오히려, 그간 황제와 엄당, 동림당 사이를 오가며 균형과 화합을 빙자해 번잡한 소동만 일으켰던 장본인이 모른 체하니 어이가 없었다.

“으음…….”

“두 번 드리는 제안은 아닐 것입니다. 나 역시, 술기운을 빌어서 내지른지라 정신이 돌아오면 또 생각이 달라질 테지요.”

위충현은 여유롭게 웃었다.

상대방에게 제한적인 권유임을 주지시켜 심리적인 무게의 추를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옮기는 전략이었다.

완전히 억지스러운 제안을 한 것이 아니라면 제법 효과가 있었고, 그래서 그간 많이도 써먹은 수법이었다.

하지만 남이공은 이미 마음을 굳힌 채였다.

바다 건너 계실 전하께서 무수한 여론에도 불구하고 끝내 강을 넘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이었나.

점령은 둘째 치고, 유지와 회복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어렵게 공을 들여놓아도 장차 명나라가 떼를 써 빼앗으려 들 공산이 있다. 그게 점령과 유지를 떠나서 요동 지배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런데 주겠다고?’

남이공은 위충현을 속이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척하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애초에 네 것도 아닌 걸 어떻게 준다는 말이냐.’

아무리 명나라를 쥐고 흔드는 태감이라도, 환관인 한 공식적으로는 황제의 손발에 불과하다.

명나라가 정상국가로 돌아온다면 위충현의 공언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설사 황제나 조정의 이름으로 조선의 요동 지배를 공인하더라도 전적으로 신뢰하긴 힘들다.

명나라는 이미 선제의 교서라도 여차하면 따르지 않을 수 있음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종계변무로 말이지.’

국초, 명나라는 조선의 태조가 고려의 간신 이인임의 아들이라는 잘못된 종계宗系를 기록했다.

이를 인지한 조선은 태종 때부터 시정을 요구했고, 당시 황제인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가 친히 이를 수렴하겠다는 성지를 남겼다.

그러나 이것이 일부나마 반영된 건 백 년이 지난 중종 때였으며, 나머지 문제에 대해서는 공허한 답변이나마 받은 게 반백 년은 더 지난 선조 때였다.

‘영락제는 명나라를 진정으로 창건했다고 평가받는 황제거늘, 그런 황제의 성지조차 따르지 않는데 고작 환관 따위에 휘둘린 허수아비 황제의 성지는 무슨 힘이 있을까.’

황제의 성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약조하여 안심하게 만들고자 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기만하려 든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과연.

“대인께서 안심되지 않는다면 내 친히 폐하께 주청 드려 성지를 남겨드리리다.”

“……음.”

남이공은 내심 흠칫했다.

딱 기만을 의심하던 찰나에 위충현이 자백이라도 하듯 황제의 성지를 약조했으니.

일순 마음이라도 읽었나 착각했을 정도였다.

덕분에 남이공은 마음만 더 굳었다.

그가 위충현의 공허한 제안에 어울려준 건, 과연 자신을 북경에서 쫓아내는 대가로 얼마나 유의미한 조건을 거는지 일단 들어나 보자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 것도 아닌 요동을 공수표까지 팔아 맡기느니 마느니 한다는 점에서 기대감은 사라졌다.

오죽 내놓을 패가 없으면 고작 이 정도로 자신을 속여 넘기려 한단 말인가.

‘동창과 금의위의 칼부림을 앞세우지 못하는 위충현은 그저 벼락출세한 고자일 뿐이지. 이게 당연한 건가…….’

남이공은 실망감을 감추지 않고서 답했다.

“판단은 전하께서 하시겠지만, 이 사람이 평소 모셔온 전하를 생각해 보면 응하실 것 같지 않습니다.”

“……어째서 말입니까.”

위충현이 인상을 굳혔다. 딴에는 회심의 한 수였다.

“대국조차 평정 후를 근심할 정도거늘, 소국인 조선이 과연 요동을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지금의 조선이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전하께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다면, 이 사람이 백 번 설득되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지요. 하하.”

남이공은 딱딱한 웃음으로 위충현의 제안을 일축했다.

“……크흠.”

쓴 헛기침이 적막을 때렸다.

“태감, 그렇다면 이건 어떻겠습니까?”

“말씀하시구려.”

조금은 쌀쌀함이 묻어나는 어조였다.

타협이 불가하다면 접대하는 의미도 없다. 위충현의 마음도 식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태감과 이해관계가 합치하지 않는 인물 중 군재가 뛰어난 사람이 한둘은 있지 않겠습니까?”

“있기야 하겠습니다마는.”

“그런 사람을 요동으로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내게 우환이 될 사람에게 군공을 안겨줘야 할 이유도 알지 못하겠거니와, 애초에 군사를 일으키는 건…….”

위충현은 대담이 겉돈다고 생각했다. 이래서야 진전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남이공에게는 아니었다.

“소수라도 괜찮습니다.”

“……흐음?”

“조선 국왕 전하께서 우려하시는 건 기껏 꺾어놓은 홍적이 다시 요동 전체를 회복하는 경우입니다.”

“그야…….”

“전하께서는 군사적, 비군사적 수단을 모두 동원해 홍적을 수도에서 내쫓고 그들 스스로가 폐허로 만들어버린 요양에 가둬버리셨지요.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네 방위에 세워둔 창살 중 한쪽을 무너뜨리고 세력을 회복하는 중이다.

“대군을 파견하여 홍적을 완전히 끝장내지는 못하더라도, 안산공방전과 같은 쐐기를 박아달라는 겁니다.”

“그 정도라면 조선의 정예한 군대로도 능히 해낼 수 있는 일일 텐데요.”

“천조와 다르게 조선이 가진 군대는 그뿐입니다. 혹여 홍적의 제압에 큰 피해가 발생한다면, 조선에는 쭉정이만 남아버립니다.”

“그러나 천조의 군대는 아깝지 않다는 말입니까?”

“아깝지 않은 목숨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천조에는 많은 군사가 있으니, 같은 규모의 원정을 일으킨다면 상대적으로 부담이 작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대국이 아닙니까.”

위충현은 시큰둥하고 콧바람을 내쉬었다.

“홍적을 완전히 토벌하지 못할 거라면, 왜 굳이 원정을 일으켜야 한단 말입니까.”

기왕 원정을 일으킬 거라면 확실하게 매듭을 지어놓고 말지.

대국이 신경 써야 할 구석은 산해관 너머만이 아니었다. 원정에 대한 부담이 상대적으로 작을 수는 있겠으나 없을 수는 없다.

“이 사람이 조선으로 귀국한 다음에는, 태감께서 조정의 질서를 과거로 돌려놓으시겠지요?”

“…….”

“과연 동림당이 호락호락 그러한 흐름을 받아들이겠습니까.”

“호락호락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어쩐단 말이오? 내게는 폐하의 은총이 있고, 동창과 금의위가 있거늘.”

“그 점은 동림당도 알 테지요. 반드시 필사적으로 맞설 것입니다.”

“흐음. 대인의 말씀이 옳을지도 모르나, 그건 대인께서 신경 쓰실 바는 아닌 듯합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건 남이공이 북경을 떠난 다음일 텐데.

남이공의 내정간섭을 중단시키고자 자리를 만든 위충현이었다. 달가운 화제는 아니었다.

“어찌 이 사람이 신경 쓸 일이 아니겠습니까? 태감께 드린 제안과 직결되는데 말입니다.”

-태감과 이해관계가 합치되지 않으나, 군재는 가진 인물이 한둘은 있을 것이다.

위충현은 남이공의 발언을 상기하며, 곧장 몇 사람을 떠올렸다.

그들에게 소규모의 군대를 맡겨 홍태주를 치게 한다?

“내게 차도 살인을 제안하는 겁니까.”

“태감께서는 홍적에게 더 공을 들이고 싶지 않아 하시나,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으시겠다면 우리의 논의도 겉돌 수밖에 없습니다. 양측 모두 이익이 되는 선에서 타협을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내가 정적과 홍태주를 차도살인하면 조선은 무슨 이익을 얻는단 말이오?”

“맹수를 다시 우리에 집어넣게 되겠지요.”

남이공은 검지를 들고서 덧붙였다.

“어차피, 군재를 지니고도 태감의 질서에 반하는 사람이라면 장차 태감께는 근심이 될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 작은 군대일지라도 군령권을 맡기는 것 역시 근심이 될 테지요.”

“모든 정쟁을 동창과 금의위를 통해 제거하신다면, 그만큼 반발도 더 거세질 겁니다. 비수를 마구 휘두르고 다닌다면 종내에는 비수가 닳지 않겠습니까?”

“음.”

위충현은 부정하지 못했다.

음양을 아우르는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서 탄압하는 편이 정적들의 반발력과 대응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장수가 되어 적과 맞서 싸우다 전사하는 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설령 살아서 돌아온들, 패장이라면 부담 없이 죽일 수 있다.

반하여 동창과 금의위만 매번 우려먹으면 두 기관이 무력화되었을 때 후폭풍이 커진다.

위충현은 남이공의 주장에는 내심 긍정하였으나, 물론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다.

아직 협상이 진행 중이니.

남이공이 다시 입을 열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아조 역시 사정이 녹록지 않습니다. 물론 천조가 나서서 홍적을 처단해준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여 시간만 끌어주더라도 거듭 감읍할 일입니다.

조선의 내부에는 여전히 갖은 문제가 산적해 있고,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치명적인 문제들이 해결된 다음에는, 태감께서 바라시는 대로 조선이 홍적을 도맡아 처단할 수 있겠지요.”

위충현은 남이공이 혀에 꿀을 바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명나라와 홍태주를 붙이기 위해 떠벌렸던 엄살들이, 정말로 빈말이 아니라 이러한 내막 때문이라는 양 짜맞춰지고 있으니까.

동창을 통해 보다 세밀한 정보를 전해 듣고 있지 않았다면 남이공의 말에 홀라당 넘어갔으리라.

정말로 그런 게 아닌가, 하고서.

불청객이 펼치는 기만적인 화법의 괘씸함을 배제하고 본다면, 그의 제안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정적들의 처단은 필요한 일이었고 재능이 있는 자라면 더욱 처단이 필요했다.

만약 그 재능이 군재라면, 특히 그러했다.

요주의 인물을 정당한 명분으로 제거해 미래의 권력 질서를 강화하고, 그간 눈꼴 시리게 설쳐대었던 불청객 역시 북경에서 퇴거시킬 수 있다는 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도 당해줄 수밖에 없는 매력이었다.

‘이래서야 불청객을 호랑이 굴에 끌어들인 자신이 도리어 놀아난 꼴 아닌가?’

위충현은 괘씸한 마음이 한층 더하였으나 끝내 제안은 물리치지 못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저 주안상을 손톱으로 두드리며 시간만 조금 끈 것이 위충현 자존심 발휘의 전부였다.

두 사람은 이내 의기투합했고, 위충현은 재차 하인을 채근하여 주안을 다시 내어오게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남이공은 원숭환의 출정 소식을 들으며 귀로에 올랐다.

명나라 최후의 명장이 장기인 수성전은 발휘하지 못하고 한 줌 군사만을 대동한 치 야지에서 싸우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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