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80화
“보검의 실물은 이렇게 생겼군.”
대명에서 가장 상징적인 명검을 꼽으라면, 역시 황제가 하사하는 상방검尙方劍일 것이다.
이름 자체는 평범하기 짝이 없다.
황제의 창고인, 상방尙方에 있던 검劍이라는 뜻이니까.
그러나 상방검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하지 않았다.
황제의 검이란 제왕의 절대 권력을 상징했고, 이것을 신하에게 하사함은 자신의 권한을 대행하라는 뜻이었으니까.
“……나도 한 자루 있었으면 좋겠는데.”
위충현은 입맛만 쩝, 다시고는 시퍼런 검날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잠시나마 상방검의 주인 된 기분을 느끼고자 허리춤에 꽂아둔 채 창고를 나섰다.
어차피 황제 앞에서만 두 손으로 받쳐 들면 그만이었다.
위충현이 위풍당당 창고를 나서자 밖에서 수족들이 맞아주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태감. 지금 차고 계신 게 보검입니까?”
“그렇다.”
위충현이 상방검 손잡이에 손을 턱, 얹고서 답하자 한 한관이 곧장 비위를 맞췄다.
“상방검의 주인이 따로 있는 듯합니다.”
“하하!”
“제가 보검이었다면, 태감의 허리춤에서 나가고 싶지 않을 겁니다. 도대체 죽으라고 보내는 놈에게 왜 귀한 검을 하사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위충현은 실소를 머금는 것으로 긍정했다.
얼마 전, 그는 남이공의 제안에 응했다.
조선이 정성껏 세워놓은 창살에서 탈출한 홍태주와, 위충현 자신의 권력에 순응하지 않는 위험분자를 양패구상시키기로 말이다.
동창의 퀴퀴한 비밀 지하 감옥이 아닌, 비린내가 나는 전장에서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될 주인공으로는 원숭환이 낙점됐다.
원숭환은 절의가 곧고 옳그 그름을 엄격하게 분간했으며, 그러한 성정을 언행과 행보로 옮기는 데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제국을 수중의 찰흙처럼 주무르고픈 위충현과 엄당에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더욱이 원숭환은 입만 산 동림당과 다르게 병법에도 능했다.
그가 반란을 일으킨다면, 부패한 환관들 및 무능한 간신들로 구성된 엄당이 맞서기란 불가능하다.
과거 한나라 시절에도 제국을 주물러대었던 십상시가 군벌의 반역을 당하여 찰나에 몰살되지 않았던가?
난세를 맞이한 명대에서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원숭환을 죽여야 하는 이유였다.
‘게다가 본인이 원하기도 했고 말이지.’
대명의 대후금 정책은 크게 두 가지였다.
병력을 산해관에 집중시켜 방어력을 극대화하거나, 혹은 점진적인 진출을 통해서 산해관 너머를 잠식해나가거나.
원숭환은 그간 후자에 속했다.
그리고 후금이 분열하고 홍태주가 완전히 몰락해 버린 지금, 보다 적극적인 대응을 끊임없이 주문해 왔다.
‘그러니 본인이 책임지는 게 맞지.’
모름지기 세상만사는 결자해지 아니겠는가.
위충현은 원숭환이 바라는 대로 해주었으므로, 그를 사지로 내모는 것에 일말의 유감도 가지지 않았다.
대신 남이공과의 거래를 성공적으로 타결하고 원숭환까지 포함해 세 사람 모두 만족스러운 결과를 이끌어낸 자신의 지략에 감탄했을 뿐.
* * *
“폐하, 보검을 가져왔습니다.”
“아!”
위충현이 상방검을 떠받들고서 등장하자, 적적하게 그의 귀환만을 기다렸던 황제가 반색하며 일어섰다.
황제는 친히 용상에서 내려와 위충현이 바치는 상방검을 챙겼다.
그리고 불쑥 드는 호기심에 칼을 뽑아 날을 살폈으나, 황제는 이내 검을 집어넣었다.
시퍼런 날붙이는 섬뜩하기만 했으니까.
“원숭환.”
“예, 폐하.”
황제는 자신 앞에 무릎 꿇은 신하를 내려다보았다.
홍태주의 세력이 회복되려는 지금, 곁의 위충현과 조정의 대신들은 물론 북경의 여론까지 열성적으로 요동의 탈환을 주문했다.
황제의 주변과 바깥에서, 그리고 제국의 위에서부터 아래로 공론이 일치하니 설령 제국의 주인이라도 거스를 수가 없었다.
출병이 결정되자 지휘관에는 원숭환이 임명됐다.
산해관 바깥에 영원성을 축조하고 수비했으며, 산발적인 습격들을 모두 성공적으로 격퇴했을 뿐만 아니라 군사를 잘 조련했고 용감무쌍하게 싸운다는 추천이 있어서였다.
황제는 부디 그 말 대로이기를 바랐다.
“과거, 오랑캐의 무리가 대명의 변경을 침략하고 무고한 백성들을 노예로 전락시켰다. 이에 곧장 장승음張承蔭이 군사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으나 끝내 공효를 거두지 못하여 오랑캐들이 발호한 지가 오늘로 십여 년이다.”
짧다고는 못할 세월.
“서쪽에서는 토사들이 준동하고 남쪽에서는 홍모이가 날뛰니, 짐이 즉위하고서 천하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이는 내가 부덕하기 때문인가?”
원숭환은 굳이 답하지 않았다.
당장 제국의 변경에서 벌어지는 소란들이 꼭 현 황제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소동이 막 벌어지던 시점에서 현 황제는 제위와 거리가 멀었으니까.
그러나 이러한 소동들이 제때 진압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건 분명 현 황제의 실책이 맞았다.
그간 황제는 제국의 주인으로서 나라를 올바르게 경영하는 대신, 골방에 틀어박혀 자신만의 궁궐을 짓는 데만 몰두했으니까.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는 건 원숭환도 알았다.
하지만 천하의 억조창생을 책임져야 할 제국의 주인에게 일일이 사정을 봐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인간의 한계를 용인해주기엔, 제국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으니.
원숭환의 무언無言으로 긍정하자 황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과분하게 대업을 이어받고도 제 몫을 다하지 못하여 중외의 신민 모두가 근심하고 있다. 어찌 나라고 나의 부족함을 알지 못하겠느냐? 다만 그대와 같은 유능한 신하들이 나를 보필하여 천하를 다시 안정시키기만을 바랄 뿐이다.”
“…….”
“이에 그대 원숭환에게 상방검과 함께 요동순무의 직책을 내리니, 군사를 이끌어 해묵은 폐단이 된 오랑캐들을 소탕하고 도탄에 빠진 요동의 신민들을 구원하라.”
황제가 상방검을 늘어뜨렸다.
원숭환은 두 손으로 상방검을 받쳐 들었다.
“신 원숭환, 백골이 진토될 각오로 분전하여 폐하의 기대에 부응하겠나이다.”
황제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상방검과 직책이 내려졌으니, 이제는 그저 믿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회의가 해산한 뒤.
황제는 자신의 말벗이 된 조선을 찾았다.
“폐하…….”
위충현이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그것만으로 의미는 다 전해졌다.
“…그랬지. 떠났지. 실감이 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폐하께서 기운이 없어 보이시니 지극히 애석합니다. ……혹, 옛 취미라도 다시 즐겨보심이 어떻겠사옵니까? 신이 가서 살펴보니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먼지가 앉아 있었사옵니다.”
“음. 먼지가 앉으면 안 되지. 접착할 때 지저분해진단 말이네…….”
“신이 안내해 드리겠사옵니다.”
위충현은 빙긋 미소를 품고서 황제를 내실로 이끌었다.
정무는 돌보지 못하고, 공허한 취미에만 몰두할 수 있는 구중궁궐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 * *
남이공은 그간 황제의 은총을 끼고 엄당과 동림당 사이의 균형을 맞추며 정쟁을 유도해왔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국가의 명운이 풍전등화에 처한 상황에서도 절대 권력이 더 강한 힘에만 집착하여 당쟁을 부추겼던 시절 전성기를 지냈으니까.
그 시절의 절대 권력을 흉내 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도 않았거니와 솔직하게 말하자면, 재미도 있었다.
기실 엄당과 동림당이 균형이 맞춰진 상태에서 일변하여 오직 나라만을 위해 힘쓰기로 결의했다면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위정자란 족속들은 시대나 속한 국가는 다를지언정 성질만은 한결같아서 만약은 만약으로 그쳤다.
엄당과 동림당 모두 서로에게 맺힌 감정이 많았다.
동림당은 환관이 황제를 끼고서 절대 권력을 향유하는 모습을 좌시하지 못했다.
엄당이야, 저들의 부와 권력을 강탈해가려는 동림당이 당연히 좋게 보일 리 없다.
그뿐만이 아니기도 했고.
그간 엄당이 흉내 냈던 절대 권력도, 한때는 동림당이 천계제를 추대하며 누렸던 것이다.
이에 맞서 여러 군소 당파가 반동림당 연합을 맺고서 맞섰으나 오늘날 양대 구도가 증명하듯 반 동림당 연합은 실패했다.
그 파편들이 원한을 갖고서 엄당에 흡수되었으니 엄당이 동림당과 맞서는 건 비단 부와 권력에 대한 집착만은 아닌 셈이다.
이러한 역사를 돌이켜보면, 당장 동림당이 천계제를 낀 엄당에 탄압당하는 것도 결국은 인과응보다.
‘만약 황제라도 달라졌다면 변화가 있었겠지만…….’
명나라의 조정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위기를 앞두고도 근본적인 변화를 거부했다.
그 미련하기 짝이 없는 모습은 남이공도 익숙했다.
과거의 조선 역시,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저마다 이익만을 탐하여 지적에 다다른 국난을 인지하지 못했으니까.
문제는 이것이다.
조선이야 운이 좋아 만력제의 도움을 입어 국난에도 소생할 기회를 얻었으나, 명나라는 과연 누구의 도움을 입어 소생할 것인가?
본국 일각에서는 이때 과거에 입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고 한다.
그럼 사르후 전투 때 군사가 동원되어 이역만리 호지胡地에서 전멸한 일은 무엇이냐는 의문은 차치하더라도, 조선이 대국을 구원하자는 말부터가 어불성설이다.
‘그럴 힘이 있었으면 요동부터 먹었지.’
요동 하나 차지할 여력이 없는데, 산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위 같은 명나라의 추락을 어떻게 감당한단 말이냐.
그래서 남이공이 북경을 떠나 귀로에 오른 건, 비단 거래의 조건이어서만은 아니었다.
이건 탈출이었다.
등주登州에 도착한 남이공은 바다를 앞두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새해를 맞아 하늘은 드높고 쾌청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는 짠맛이 느껴졌다. 남이공이 좋아하는 감각은 아니었다.
벌써 배에 탄 기분이 들었으니.
“곧 있으면 귀국하시겠습니다.”
등주의 관리였다.
“오래간만에 고국의 땅을 밟는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남 대인께서 조선으로 돌아가시면, 언제쯤 되어 다시 등주를 방문하실지.”
“하하……. 그건 전하의 뜻에 달렸으니 이 사람은 대답해 주기 어렵군요.”
“게다가, 설령 등주를 다시 방문하신들 그때는 제가 여기 없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남이공은 희미하게 웃었다.
당장 마주한 등주의 관리가 원하는 건 접대할 기회였다.
곧 떠나갈 사람이라곤 해도, 남이공이 북경에서 얻은 인지도는 이곳에도 알음알음 전해졌다.
그간 북경에서는 폭풍의 눈과 같았던 남이공이다.
위정자의 습성이란 수도 밖이라도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하물며 그간 폭풍의 눈이었던 남이공이 빠져나간 북경에는 또 어떤 파란이 몰아칠 것인가.
그 향방을 가늠하여 잘 처신한다면 북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테고, 아니라면 더 멀어질 것이다.
등주의 관리들이 귀로에 올라 피로한 남이공에게 체면 불고하고서 어떻게든 자리를 만들어보려는 이유였다.
‘그것도 명나라가 존속해야만 의미가 있을 터이거늘.’
외방의 신하들은 대국의 역사가 말미에 이르렀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순진하다고 해야 하나, 오만하다고 해야 하나.
남이공은 그저 주어진 이익만 취하기로 했다.
“귀국한 다음에는 여러 사람과 오래간만에 인사를 나누게 될 텐데, 그때 하나씩 나눠줄 기념품이 있다면 좋겠군요. 대인의 안목으로 추천해주신다면, 이 사람 역시 시간을 내어드리겠습니다.”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자리가 약조되어서일까. 쾌속으로 응한 등주의 관리가 화색으로 떠벌였다.
“마침, 등주는 삼면이 바다와 접하여 최상품의 진주와 산호를 구할 수 있지요. 특히 이곳의 산호로 만든 지팡이는 황궁에도 납품되는데, 남 대인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