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81화
남이공이 산호 지팡이를 붙든 채 갑판에서 우웩우웩 물고기 밥을 생산하는 동안.
그보다 한참 북쪽, 산해관 너머 영원성에서는 원숭환이 귀환했다.
“다녀오셨습니까.”
“그래.”
원숭환이 무뚝뚝하게 인사를 받아내자, 그 장군에 그 부관이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출정입니까.”
“그래.”
“멍청한 짓입니다.”
“안다.”
그간 명나라 조정은 산해관을 두고서 더 진출하느냐, 혹은 마느냐를 두고 언쟁을 거듭해 왔다.
이를 다르게 말하자면, 결국 무엇 하나 제대로 결정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덕분에 산해관 너머에서 전진기지 개념으로 축성된 영원성은 중대한 군사적 가치에 불구하고 대명의 흐릿한 대후금 전략에 의해 붕 떠 있어왔다.
현재 영원성에 주둔한 군사는 고작 1만을 상회하는 정도.
이마저도 중원에서 꾸려진 군대가 파견되어 주둔한 것이 아닌, 요동과 요서의 피난민이 징발된 것이었다.
“지원은요?”
“없다.”
군대를 구성할 가장 기본적인 자원인 인력조차 공급되지 못할 정도이니 물자 사정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오랑캐에게 빼앗길 것. 쇠붙이라면 모조리 녹여 무구로 만들어야 했다.
“나가봐야 전멸을 면치 못할 겁니다.”
군사도 부족하고 물자도 부족하다.
부관이 거론하지 않아도 원숭환은 잘 아는 바였다.
“하지만 황명이니 따라야 하네. 나 자신을 벨 수는 없으니까.”
원숭환은 허리에 찬 칼을 빼냈다. 화려하게 장식된 검이었다. 보검寶劍이라는 명칭이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상방검입니까?”
“그래.”
부관이 굳이 청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눈동자에서 호기심을 읽은 원숭환이 상방검을 건넸다.
그것이 황제의 하사라도 된다는 양 부관은 두 손으로 상방검을 받쳐 들었다가, 조심스럽게 칼을 빼냈다.
매끄러운 금속성 마찰음이 집무실을 울렸다.
모습을 드러낸 검신은 거울과 같아서, 칼을 빼 든 부관의 얼굴이 비칠 정도였다.
상방검이 보검이라고도 불리는 이유가 꼭 외장에만 있지는 않았다.
하기야 황제에게 진상되는 검이니 내부라고 어쭙잖게 만들어 놓았을 리 없었다.
“명검은 명검이군요.”
부관은 감탄하며 상방검을 반납했다.
공손한 그의 태도와 달리, 원숭환은 대수롭지 않게 상방검을 찼다.
아무리 대단한 명검이고 황제의 하사품일지라도 자식 같은 군사들을 모조리 사지로 내몰게 만든 원흉이다. 잘 대해줄 이유가 없었다.
상방검이 본래 간신을 벨 자격을 의미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최선은 검을 받든 자리에서 고자 놈을 베어버리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기회는 이미 지나갔으니 그저 아쉬워할 뿐.
“장수들에게 출전 소식을 전하게. 길일은 넉넉히 보름은 넘어서 잡을 터이니 출정 준비는 여유롭게 하되, 철저히 하고. 두 번 목숨 걸 일은 없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나는 먼저 들어가서 쉬겠네. 피곤하군.”
북경에서 영원성까지 오느라 몸이 피로한 것도 있었지만, 정신이 더 피로했다.
산해관 너머는 직접 본 적도 없을 자들이 입을 모아 원정을 채근하고 무고한 병사들을 사지로 몰았으니까.
그리고 영원성은 텅 비게 되겠지.
여유가 없다면서 휘하의 군사들만 이끌고 적지만 가라는 지경인데, 과연 영원성을 지킬 증원이 있을까.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였다.
후금에 최대한의 치명상을 입히지 못한다면, 그래서 오랑캐 추장을 다시 저들의 소굴에 처박지 못한다면 영원성이 놈들의 손에 떨어질 테니까.
* * *
길일, 즉 출전일이 다가올수록 영원성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과연 우리가 홍태주와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여론은 비관적이었다.
증원도 없이 출정하게 된 원숭환과 휘하의 군대는 분전 끝에 안산에서 몰살당한 전 산해관 총병 마세륭의 군대보다도 수가 적었다.
물론, 그때의 후금과 지금의 후금은 다르다.
현재의 후금은 무리한 원정의 결과로 분열과 자멸을 거듭했다. 홍태주는 본인의 아비가 거느렸다가 감당하지 못하여 불태운 요양으로 돌아왔다.
수도마저 찬탈자에게 빼앗기고서.
하지만 영원성의 병사들은 후금이라면 누르하치가 이끌었던 파죽지세의 후금을 먼저 떠올렸다.
골수에 새겨진 인상이 그러했으니.
“인식의 개선을 시도했으나 별다른 효용은 얻지 못했습니다. 군사들은 여전히 비관적입니다.”
부관이 보고했다.
원숭환은 술잔을 기울이며 평했다.
“사기의 저하는 군율에 치명적이지.”
그의 시야에는 복층의 난간 너머로 군사들이 마당을 서성이는 모습이 보였다.
출전일이 점차 다가옴에 따라, 군중의 불안과 고조가 썰물처럼 올라오고 있었다.
‘불안해할 틈도 없이 몰아붙여야 했나.’
원숭환은 잠시 고민했다.
그가 출정까지 시간을 넉넉하게 잡은 건 군사들의 동요를 최대한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적은 수의 군대.
존재하지 않는 증원과 지원.
나가서 다 뒈지라는 수준의 엉성한 출전 명령.
일각에서는 중앙의 정치에 개입하던 남 대인을 귀국시키는 대가로 이번 원정이 기획되었다고도 했다.
조선이 왕이 애써 굴복시킨 홍태주가 창살을 박차고 튀어나와, 다시 요양에 처박을 공격이 필요했다던가.
‘전략적으로는 옳은 판단이지. 홍태주가 보통 비상한 놈은 아니니까…….’
타고난 재능으로 거듭 군공을 쌓아오며 서7남의 출생에도 후계자의 지위를 꿰어찼다.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홍태주를 자만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찬탈과 무리한 조선 원정이라는 실책을 범하게 됐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홍태주의 자질이 어디로 도망가지는 않았다.
당장 황제나 조정의 중신들이 홍태주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그들은 상황의 타개를 논하거나 시도하는 대신 우물에 몸이나 던졌겠지.
그러나 홍태주는 기어코 요양을 박차고 나와 요동반도를 회복했다.
난 놈은 난 놈이었다. 이래서야 견제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나와 군사들이 이용되는 건 불쾌하군.’
출정이 결정된 이유부터가 홍태주를 견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으니까.
그건 조선이 원하는 바였다.
대명이 조선의 요구에 응한 건 고자놈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였다. 즉, 일 만의 생명이 거래의 대금으로서 사지에 내던져진 것이다.
“쯧.”
원숭환이 혀를 차고서 다시 술잔을 기울이자, 부관이 물었다.
“다시금 강도를 높여서 인식의 전환을 시도해볼까요.”
“어떻게?”
“조선도 해낸 일을 설마 우리가 못 해내겠느냐고요. 우월감을 이용하는 전략이지요.”
당장 대명의 신민들이 내세울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제국의 일원이라는 것 정도?
보잘 것 없는 조건이다. 수천만 신민이 모두 공유하는 점이라 특징特徵이랄 것도 아니다.
그러나 대명의 신민들이 중외를 깔보며 저들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점을 오랫동안 위안거리로 삼아왔다는 것 역시 사실.
원숭환은 짧은 고민 끝에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조선과 비교하는 건 도리어 역효과만 낼 수 있어.”
“그럴까요?”
“조선은 오랑캐의 일인자, 이인자, 삼인자를 모두 잡아내지 않았나. 그간 대명은 한 놈도 잡아내지 못할 동안에 말이야.”
부관은 잠시 생각했다.
이인자, 삼인자라면 각기 후계자였던 홍태주와 이패륵인 아민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일인자는 당연히 누르하치를 말하는 것일 텐데, 누르하치가 조선과 싸워 패배한 적이 있던가?
부관은 이내 홍태주가 반역을 일으킨 이유가 누르하치에 반하여 억지로 조선 원정을 일으키기 위함이었음을 떠올렸다.
조선이 의도하였는지는 모를 일이나 누르하치가 죽은 원인이 된 건 사실이었다.
원숭환이 덧붙였다.
“소국도 해낸 일이라고 업신여기면 대명만 바보되는 셈이지. 군사들은 더더욱 따라하지 못할 일이라며 두려워할 걸세.”
배우지 못했을지언정 설마 병사들이라고 조선군이 강하다는 것을 모를까.
하물며 대명은 요동을 오랑캐에 내어준 판국이다.
병사들은 그 요동에서 피난한 사람들이고.
“차라리 군사들이 부담을 외면할 수 있도록 잔치라도 크게 벌이는 게 낫겠군. 술과 고기를 아끼지 말게. 어차피 더는 아끼지도 못하게 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자네도 좀 들겠나?”
원숭환이 잔을 채워서 밀어냈다.
막 술로 부담을 밀어내라는 말을 들어서일까.
부관은 원숭환이 술로 목을 축이고 있었던 이유와, 자신에게도 권하는 이유를 짐작했다.
가설은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으나 그러한 사실이 부관의 기분을 좋게 해주지는 못했다. 그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입술만 말았다가, 이내 잔을 단숨에 기울였다.
부담감은 딱히 가시지 않았다.
참수를 앞두고 단두주斷頭酒를 마시는 듯하여 목만 도리어 칼칼해졌다.
* * *
모든 것이 부족했던 영원성에서 술과 고기는 만금보다 귀했다.
원숭환은 군사들을 위해 그간 비축해둔 한줌을 모조리 풀었고, 의도대로 군사들은 잠시나마 시름을 외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원숭환은 군사들이 다시 회한에 빠지게 할 시간을 주고 싶지 않았다.
군사들은 늦게까지 잔치를 즐겼으나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술이 부족해서 취기에 시달릴 수조차 없었던 탓이다. 물자 부족의 유일한 이점이었다.
“하늘이 맑구나…….”
원숭환은 세계 천장에서 느긋하게 부유하는 구름들을 구경했다.
“연단에 오르시지요.”
부관이 청했다.
원숭환이 그 말에 시선을 내리는 순간, 그는 다시 현세로 돌아왔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 있었다.
그는 부관을 대동하고서 모두의 앞에 섰다.
일 만의 정병이 연단 앞에 도열해 있었다.
“군사들아! 드디어 결전의 때가 왔구나! 우리는 그동안 대명의 어떠한 군대도 감당해내지 못한 숙적을 상대하러 간다!”
원숭환은 바깥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러나 좌절하지 말라! 좌절하기에는 아직 이르거니와, 적은 거듭된 실패로 시궁창에 박혔다!”
홍태주의 몰락은 말단 부대 지휘관들이 세뇌 수준으로 병사들에게 떠들어대었다.
“우리는 놈들에게 결정타를 먹일 것이다! 아직 죽지 못해 죄만 쌓아가는 홍태주에게 사형을 집행하고, 사지를 썰어 중원 전체에 조리돌림하여 고통받았던 요동을 구원하리라!”
원숭환의 선언에 군사들이 와아와아 환호를 내질렀다.
출전을 두려워하던 이들이 한순간에 광전사가 되어 싸움을 반기게 된 건, 당연히 아니었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을 마주했다. 좌절과 절망이 해답이 아니라면 스스로 최면이라도 걸어야 했다.
그런 군사들 앞에서 장교들도 환호를 드높여 자기최면에 일조했다.
함성이 조금 잦아든 뒤.
원숭환은 선언을 짧게 마무리지었다.
“진군하라!”
단호한 명령과 함께 성문을 마주한 군사들이 저벅저벅 나아갔다.
* * *
대명은 안산공방전 이후 수비적인 태도로 일관했고, 그 결과 영원성 너머는 모조리 적지였다.
원숭환은 그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후금의 세력이 홍태주가 통제 가능한 곳까지 물러나 있었다면 첫 전투부터 혈전을 각오해야 했을 테니까.
물러나지 않고 영원성 근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후금의 파편은, 원숭환이 첫 전투를 승전으로 장식하기 좋은 제물이었다.
그간 요동에서 명군의 출정을 질로도록 외쳐대었기 때문일까?
막상 원숭환이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나타나자 후금군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이 기겁했다.
원숭환은 그들이 대비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즉각 공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