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83화
야심한 밤.
구름 한 점 없이 드높은 하늘에서는 무수한 별이 빛났고, 아래에서는 지글거리고 이따금 탁탁 튀는 소리와 함께 화등과 횃불이 일렁였다.
덕분에 작은 마을을 끼고서 주둔한 원숭환의 군영은 대낮처럼 밝았다.
혹여 있을지 모를 후금군 잔당이나 습격대의 돌입을 막기 위한 예방.
원숭환은 부관 및 호위들을 이끌고 불청객을 맞이하러 나갔다.
그 심상치 않은 거동에 소피나 갈기러 나왔던 말단 병사들이 동료를 깨웠고, 이내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천막들 너머로 얼굴들이 튀어나왔다.
딴에는 조심하는 기색이나 군영이 밝아 원숭환과 부관은 낯짝들을 다 볼 수 있었으나, 굳이 거론하지 않고 불청객부터 마주했다.
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머지는 수은갑을 걸친 채 중무장하였으므로, 호차를 특정하기는 쉬웠다.
대명의 복식을 어설프게 따라한 화려한 의복까지 걸친 채였으니.
원숭환이 엄히 일렀다.
“무슨 수작이냐? 당장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전부 베겠다.”
날 선 태도에 부관과 호위들부터 무기를 고쳐 쥐었다. 상대는 오랑캐들. 기세 싸움에 호락호락 지고 들어가는 종자들이 아니었다.
호차 일행에서는 병사 하나가 오랑캐의 언어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통역일까.
긴장한 시선이 교차하는 가운데 화려한 옷을 걸친 호차가 태연하게 성큼 나섰다.
그 뻔뻔하면서도 무방비한 접근에 원숭환이 일순 인상을 찌푸렸다.
호차가 말했다.
“너무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그대들과 싸움을 논하기 위해 온 게 아니라, 협력을 구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니 말입니다.”
통역의 전언에 원숭환의 미간이 더욱 좁아졌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
“대인께서도 후금이 현재 분열되어 있다는 건 알고 계시겠지요.”
“……다이곤多爾袞 쪽이냐.”
원숭환의 추측에는 통역조차 필요 없었다. 도르곤, 다이곤. 언어의 차이로 발음이 약간 다를 뿐.
호차가 말했다.
“원 대인께 전해드리고픈 소식이 있습니다.”
“말하라.”
“현재 금주에는 홍타이지와 그를 따르는 군사들이 은밀히 주둔해 있습니다.”
놀라운 소식이었다.
원숭환은 금주 공략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홍태주가 금주에 주둔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런 상태에서 홍태주의 군대와 맞닥뜨렸다면, 절대 쉽지 않은 싸움이 되었겠지.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십중팔구는 패배로 귀결되었으리라.
그러나 원숭환은 놀라움을 내색하지 않았다. 섵불리 놀라지도 않았다.
“무엇을 근거로 너의 말을 믿으란 말이냐? 내게는 마치 다이곤 쪽의 사신이라는 것처럼 소개했지만, 그조차도 사실일지 미지수이거니와, 그렇다면 어째서 홍태주가 금주에 있다는 걸 안다는 말이냐.”
호차는 예상했던 의문이었다는 듯 태연하게 답했다.
“이건 폐하께서 소관의 신분을 증명하는 직인입니다. 임시로 전용 중인 대원 황실의 옥새가 찍혀 있지요.”
원숭환이 받아든 종이에는 알아보지 못할 오랑캐 문자와 난생처음 보는 직인이 찍혀 있었다.
“흥, 내게 이런 건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대원 황실의 옥채를 탈취했다고 보르지긴?兒只斤과는 일말의 연관도 없는 삼류 오랑캐 혈통이 황제를 참칭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지만, 일단 그건 넘어간다 치더라도 이게 날조인지 아닌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원숭환은 살아생전 대원 황실의 직인 따위 본 적이 없었으므로, 놈들이 아무 도장이나 파서 찍어대었다 한들 분별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믿을 수도 없는 것이다.
호차는 이마저도 예상했다는 듯, 원숭환이 돌려준 종이를 태연히 품에 넣었다.
“대금이 찬탈자에 의해 분열되고, 또 강건함을 상실하면서 선 한의 정당한 후계자인 도르곤과 섭정 아바타이는 꾸준히 명나라의 동향을 주시해 왔습니다.”
“….”
“그건 찬탈자인 홍타이지라도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최근, 명나라의 요동 출정 논란이 탁상공론에서 끝나지 않고 원 대인께서 출병하여 요서를 파죽지세로 수복하였지요.”
이미 모두의 귀에 들어간 소식이라는 뜻.
“홍태주는 원 대인께서 자신을 격멸하고 요동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 대인께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요하와 그 앞을 지키는 금주를 넘어가야 하지요.”
“그래서 홍태주가 미리 군사를 이끌고 금주에 주둔했다는 말인가?”
“대금 역시 반역자의 행보를 주의깊게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반역자는 최근 요동반도를 정복했으며, 일단의 군세가 요하를 건넜다는 사실을 포착했습니다.”
원숭환은 잠시 턱을 쓰다듬었다가 일렀다.
“너희 말이 옳다고 치자. 그런데 내게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는 이유가 무엇이냐?”
“홍타이지가 비록 선 한을 살해한 반역자에 불과하다고는 하나, 그가 가진 재주와 능력마저 가짜라고는 못 하겠지요. 요양을 뛰쳐나와 요동반도를 빠르게 정복한 반역자의 호전적인 행보는 폐하와 섭정만 아닌 대금의 모두에게 근심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를 이용해 차도살인을 하겠다?”
원숭환의 의문에 시종 공손하던 호차가 비릿하게 웃었다.
“아무리 요서를 탈환한 원 대인일지라도, 고작 일만의 군세로 성을 낀 반역자의 군대를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길고 짧은 건 대보아야 아는 일이다.”
“대금의 관대한 황제 폐하와 섭정께서 대인께 제안하는 건 협공입니다.”
“……네놈들은 나를 거듭 놀라게 만드는군.”
원숭환은 그 점만은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반쪽자리 후금이, 다른 반쪽짜리 후금을 치기 위해 손을 맞잡자고 할 줄이야!
“반역자의 수급을 취하는 건, 분명 이후 칼을 맞대게 될 명나라와 대금일지라도 충분히 일시적인 협력을 강구할만한 목표입니다.”
원숭환은 팔짱을 꼈다.
많은 함의를 가진 그 몸짓에, 호차가 덧붙였다.
“반역자가 알아서 성에 들어간 지금이 아니라면, 놈의 수급을 확실하게 거둘 기회가 언제 찾아올지는 대인이라도 미지수겠지요?”
“…….”
“제게는 원 대인 단독으로 홍타이지를 처단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실 수 있겠지만, 홍타이지의 모가지는 허장성세만으로는 달아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대인을 방문한 것이지요.”
호차의 답변도 많은 함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이 자리에서 구구절절 일일이 확인한다는 것도 우스운 노릇.
원숭환은 일단 부관과 머리를 맞대보기로 했다.
자신이 유추해 낸 바가 부관이 보아도 옳은지.
그리고 어떠한 선택이 최선이 될지.
원숭환은 차마 칼은 뽑지 못했다. 오랑캐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봐야 하는 자신의 처지만 우스울 따름이었다.
만에 하나 살아서 귀환하게 된다면 입만 산 고자와 그의 발닦개 같은 놈들이 어떻게 떠들 것인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지만, 요동에는 대안이 없다. 어떻게든 홍태주의 수급부터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봐야 소생의 희망이라도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
원숭환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물러나라.”
“얼마든지 기다리겠습니다. 다만, 반역자까지 얼마든지 기다려주리라는 기대는 안 하고 계시기를 바라지요.”
원숭환은 더 상대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 * *
원숭환과 부관은 밖에 호차를 세워둔 뒤 지휘막사를 방문했다.
호차야, 알아서 어디든 짱박혀 기다리든 하리라. 사신은 공적인 신분의 간자. 굳이 군영 내부로 들여줄 이유가 없다.
직후 원숭환은 각급 부대 지휘관을 소집하고 호차의 제안을 알렸다.
그러나 다들 유구무언.
애초에 1만에 불과했던 군대다. 소규모 부대 지휘관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소양에는 한계가 있었고, 조정의 빈약한 지원은 인력에도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냉정하게 평가하면 자리에 모인 인물 중 십중팔구는 유의미한 논의라는 게 불가능한 상태.
그래도 불러모아 호차의 제안을 전달한 건 만에 하나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혹여 후금군을 아군으로 만날 수도 있었으니까. 적아의 구분은 확실히 해야지 않겠는가.
‘홍태주의 목이 떨어지는 대로 다이곤의 후금군이 돌변하여 달려들 수도 있다마는…….’
그건 합을 맞추기로 한 다음 심도 있게 논의해도 될 부분이다.
지금 중요한 건 전군의 운명을 가로지를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과연 놈들을 믿고 함께 싸울 것이냐, 혹은 믿지 않고 싸울 것이냐.”
이미 달리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던 관계로 원숭환은 부관을 바라보았다.
조솔교趙率敎.
“그대 생각은 어떤가?”
부관은 차례만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답했다.
“오랑캐를 신뢰하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닙니다. 평소라도 그렇지만, 군대와 요동의 명운이 걸린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지요.”
부관이 곧장 덧붙였다.
“그러나, 지금은 대안이 없습니다. 호차의 전언대로 홍태주가 수하들과 함께 금주에 주둔하고 있다면 단독으로 공략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오래된 병법에 따르면 성을 공략할 때는 수비하는 쪽보다 세 배는 많아야 한다고 했다.
당장 원숭환이 이끄는 병력은 고작 1만여.
오랑캐 수괴가 입성한 금주성에 설마 삼천이 없을까.
원숭환이 주변을 돌아보자, 한 장교가 물었다.
“그래서 오랑캐를 믿으시겠다는 말입니까? ……놈들과 한 편이 되어서 싸우자고요?”
“오월동주의 형세이니, 함께 물에 빠져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뭍에 닿을 때까지는 힘을 합쳐 노를 저어야겠지.”
몇몇 장교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일만여 군대로 금주성을 함락할 방법을 낼 지략은 없더라도, 적과 등을 맞대는 행위가 달가울 리 없다.
원숭환은 모여드는 이목을 의식하고는 일렀다.
“조금 더 생각해보겠다. 이견이 없다면 해산하도록. 부관은 남게.”
장교들이 차례대로 인사를 올린 뒤 물러났다.
원숭환은 관자놀이를 눌렀다.
단독으로 금주를 공략할 수 없고, 오랑캐와 등을 맞대기도 싫다고 선택지가 없는 건 아니었다.
“철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장군.”
부관의 부름에도, 원숭환은 눈만 감을 따름이었다.
“요동의 정벌은 황명이었습니다. 더욱이 폐하가 직접 장군에게 상방검을 하사하지 않았습니까?”
황명을 완수하지 않고 철군한다면 원숭환은 죽은 목숨이다.
대쪽같은 원숭환이 한 줌에 불과한, 그러나 충성스러운 수하들을 이끌고 무리한 원정에 나서게 된 이유가 무엇이던가.
남이공이 귀국하면서 위충현은 제 세상을 되찾았고, 권력을 이전처럼 전횡하려는 그에게 대쪽같은 성품을 가진 원숭환은 눈엣가시와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원숭환은 이미 산해관으로 철군하라는 명령을 한 번 거부했던 이.
충군애국忠君愛國하는 마음으로 위험을 감수하고 저지른 일이었으나, 불충매국하는 위충현에게 중요한 건 옳고 그름이 아니라 자신에게 굴종하느냐 마느냐였다.
그에게 원숭환은 이미 전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부관이 말했다.
“홍태주의 수급만 거둔다면, 요동은 무주공산이 되니 우리의 군사만으로도 얼마든지 회복할 수 있습니다. 금주는 유일한 고비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물러날 생각을 하시다니요.”
“만약 오랑캐들이 수작을 부린 것이라면? 협동이 함정에 불과했다면 군사들은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되네.”
함정이 아니었어도 홍태주에게 패바할 가능성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장군께서 철군의 책임을 지시더라도, 군사들이 억울한 처사에 놓이는 건 달라지지 않습니다. 과연 그 간신배놈이 요동의 구원을 진지하게 생각하겠습니까? 아니면, 과욕을 포기하고 폐하를 제대로 보필하겠습니까?”
군사들은 황제와 대명이 아닌 위충현과 그의 천하를 수비하는 데 이용되리라.
차라리 그뿐이라면 낫다.
천하는 지극히 혼란스럽고, 대명의 명운을 시험하는 건 요동의 해묵은 오랑캐들만이 아니었다.
이보다 오래된 토사들의 반란이 지금은 더욱 번져서 사천까지 세를 뻗지 않았던가?
지독한 병화가 제국의 양쪽을 십 년이나 몰아치면서 난민과 도적이 무수히 양산됐다.
과연, 부와 권력만을 탐하는 위충현이 천하의 안녕에 조금이라도 신경 써줄 것인가.
관병이 위충현과 그의 천하를 지키는 데는 일말의 대의도 실리도 없는 셈이다. 그저 이용만 계속 당하다가, 제국이 한계에 다다르면 창대를 거꾸로 쥐는 자들이 생겨 서로 혈전을 벌이리라.
“무리한 수라도 둘 수밖에 없습니다. 장군이 아니시면, 누가 요동을 구원하겠으며 폐하와 대명을 수호하겠습니까? 정녕 일말의 평화를 위해 요동은 도탄에 빠진 그대로 군병들만 이용되다 버려지는 것이 최선이겠습니까?”
부관이 따지듯 물었다.
원숭환은 쉬이 답하지 못했다.
상념이 길어지고, 원숭환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알았다. 하지만, 오랑캐들의 제안이 함정이 아니라는 건 분명히 해두어야겠으니 다이곤 군의 진영을 두 눈으로 보고 오라.”
협공의 실현 방법을 논하기 위해서라도 다이곤 군의 위치와 현황은 공유해야 한다.
그런데 혹 노출을 꺼린다면 무슨 수작이 있다는 뜻.
꺼리지 않는다고 마냥 안심하지는 못하겠으나 필요한 확인이었다.
“알겠습니다.”
“물러나라.”
부관은 꾸벅, 허리를 숙인 뒤 원숭환의 곁을 떠났다.
홀로 남게 된 원숭환은 생각했다.
다이곤이 설령 흑심 없이 협공을 제안해왔고, 어떻게든 금주를 회복하고 홍태주의 수급을 거둔다 하더라도, 자신이 오랑캐와 협력했다는 소식이 북경에 전해진다면 고자놈이 어떻게 나올까.
황명의 완수에 성공했다면 원숭환은 요동 회복과 숙적 후금을 멸망시킨 영웅이 된다.
고자 간신배가 더 날을 세워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그러나, 원숭환은 이 걱정을 미뤄두기로 했다.
다이곤 측의 진의나 금주 공략의 결과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모든 게 올바르게 풀린 다음에야 걱정도 의미가 있었다.
지금은 그저, 황명을 완수하는 데 최선을 다할 뿐…….
부관은 반나절 뒤에 귀환했다.
다이곤 측은 홍태주를 쫓아 요하를 건너왔으며, 형세를 따지자면 금주를 중앙에 둔 채 각 군이 동서의 양편에 주둔한 모양새였다.
수효는 원숭환 군보다 조금 많은 일만 오천.
소수의 팔기에 징집된 요동민이 주축을 이루었으며, 홍태주의 기만책일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원숭환은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