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84화
오월동주가 유쾌하지 않았던 건 다이곤 측도 마찬가지였다.
원숭환의 군대와 다이곤 측 군대는 금주를 사이에 두고 각기 서쪽과 동편에 주둔했다.
협공은 협공이되 힘을 합쳐서 함께 금주를 공략하기보단, 서로 홍태주의 시선과 전력을 분산시키겠다는 수준.
“금주와 홍태주의 수급 모두 먼저 성벽을 넘는 쪽이 차지하지 않겠습니까?”
부관의 분석에 원숭환이 답했다.
“그렇겠지. 어쩌면 안에서 새로운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르겠어.”
금주의 홍태주의 수급을 두고 명군과 다이곤의 후금군이 2차전을 치르는 것이다.
“휘하에 전달해두게. 절대 먼저 공격하지는 말되, 공격을 받으면 즉각 알리고 교전에 돌입하라고.”
“알겠습니다.”
원숭환은 군중의 나부끼는 깃발을 뒤로 한 채로 금주와 주변의 전장을 살폈다.
포위망은 그의 군대와 다이곤 측의 협력 수준만큼이나 엉성했다.
혹 홍태주가 양군이 맞닿은 남쪽이나 북쪽으로 기습 출성한다면 쉽게 파훼될 듯했다. 그러나 홍태주는 나서지 않았다.
‘기만술인가…….’
원숭환은 홍태주가 뻔히 보이는 상책을 고르지 않으니 괜히 근심이 들었다.
금주성의 성문 누각에서는 다이곤 측을 비분강개하게 만든 청의 (자칭) 황제기가 펄럭였다.
그렇게 홍태주가 금성 안에 있다고 믿게 만들고서, 외부에서 들이친다면 자신의 군사들은 그대로 뒤통수를 맞게 되리라.
“당보塘報를 더 퍼뜨려야겠다.”
첨병들이 전장 주변을 지킨다면, 뒤통수를 맞기 전 조금이라도 대처할 시간을 가질 수 있으리라.
보유한 군사의 규모를 생각하면 이마저도 무시 못 할 출혈이다.
그러나 싸움의 요체는 한정된 자원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용하느냐다. 한 줌 군사로 적의 회심의 전략에 대응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
홍태주가 금주성 안에 있고, 딱히 외부에서 들이칠 계획도 없다면 낭비가 되겠지만 전략이란 게 다 이런 법이다.
적의 심리를 간파했다면 작은 투자로 큰 효용을 얻고, 그렇지 못했다면 큰 투자로도 작은 효용조차 얻지 못한다.
당보를 더 퍼뜨리는 정도는 짐작이 맞지 않더라도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다.
‘오히려 뒤통수를 맞을 일이 없다면 그거야말로 최선이겠지.’
원숭환은 저울질을 거듭하면서 전장 상황을 조율해나갔다.
설계와 포석을 마쳤다면 응당 결과를 봐야 하는 법. 군병들이 전장을 앞두고 도열한 가운데, 태양이 흐릿한 하늘 정중앙에 다다랐다.
삐이이이이익!
명적화살이 귀곡성 같은 소리를 내며 하늘을 가로질렀다.
그와 함께 여러 사람이 고함을 터뜨렸다.
군사들이 충차와 사다리를 앞세워 금주성으로 진격했고, 홍태주의 후금군은 성첩에 의지하여 반격을 시작했다.
사수의 손을 떠난 검은 선은 화살이 되어 전장에 내리꽂혔다.
흙바닥에서는 잔디 위로 수백여 개 대살이 단숨에 솟아올랐고, 공성 병기를 앞세워 진군하던 병사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전우가 풀밭에 몸을 뉘고 신음을 흘려도 병사들의 진군은 그치지 않았다.
“머뭇거리면 화살에 맞는다! 내달려라! 내달려!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질주하란 말이다!”
장교가 선두에서 사다리의 운송을 채근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던 금주성 성첩 어딘가에서 날아든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시끄러운 입 하나가 침묵했지만, 군사들은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사다리의 끄트머리가 땅에 끌리면서 흙바닥 위로 자국을 남겼다.
“사다리를 세워라!”
“사다리를 밀어라!”
명군이 성벽 아래 다다르자 상이한 명령이 상이한 언어로 터져 나왔다.
성첩에서는 후금군이 창을 내질렀고, 아래에서는 명군이 창을 쑤셔댔다. 쇠로 만들어진 버들잎이 교차할 때마다 상이한 갑주를 걸친 군사들이 한 덩이가 되어 굴러떨어졌다.
어느 순간.
단순하고 끔찍한, 그러나 그만큼 정석적인 공성전의 흐름이 바뀌었다.
두두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울려댔다. 그 격동에 금주성의 벽돌 틈새로 부스러기와 먼지가 흘러나올 정도.
명군 모두와 원숭환이 일순 흠칫하였으나 말발굽 소리는 먼 곳에서 시작하여 더욱 먼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모두가 깨달았다.
홍태주가 드디어 출성했다고. 그리고 저들의 반대편에서 공성하고 있을 다이곤 군을 치러 갔다고.
한 장교가 사색이 되어 외쳤다.
“서둘러 성을 장악해야 한다! 성첩을 넘지 못하면 모두 죽은 목숨이다!”
사기만 떨어지기 좋은 독전이었으나 사실이 그러했다.
과연 다이곤 측 군대가 치열한 공성전 와중 기습 출성한 홍태주의 기병돌진을 감당할 수 있을까?
아무리 홍태주가 몰락을 거듭해 이빨이 빠져버린 호랑일지라도 호랑이는 호랑이다. 더욱이 홍태주 역시 이번 전투에서 자신과 제 세력의 명운이 걸렸음을 알고 있을 터.
성첩을 서둘러 장악하지 않으면, 성벽 밖에서 공성을 벌이는 명군은 홍태주의 돌격에 그대로 노출된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파멸.
“당보를 모두 회수해라! 예비대 또한 전부 투입한다!”
홍태주가 전통적인 기병 전력을 활용하고자 출성할 가능성은 크게 점치고 있었다.
1만에 불과한 총원에도 예비대를 따로 빼두었던 이유.
그러나 홍태주가 다이곤 측으로 향한 지금, 무주공산이 되었을 금주성을 신속히 장악하기 위해 과감해질 필요가 있었다.
“장군!”
원숭환이 박차를 가하자 곧장 부관이 따라붙었다.
“위험합니다!”
“여기서 위험하지 않은 곳은 없어!”
“그러다 눈먼…….”
콱!
부관의 말이 씨앗이 되었다는 듯,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원숭환의 투구를 때렸다.
“장군!”
“괜, 찮아!”
눈먼 화살이었다. 투구는 관통되지 않았다. 화살이 우악스럽게 긁고 지나간 자국이 생생했다.
“위험하다지 않았습니까!”
“부관은 오늘 앵무새가 될 참인가?! 지금은 나서는 게 맞아!”
최고 지휘관이 함께한다는 사실은 병사들의 전의를 북돋기에 충분했다.
그러다 죽기라도 한다면 정반대의 효과가 더욱 심하게 나겠지만, 원숭환은 지금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홍태주가 이미 그러고 있으니까.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로는 호랑이를 잡을 수 없다.
“내가 왔다!”
원숭환이 일갈과 함께 일순 수하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장교들은 차마 나무라지 못하여 환호로써 지휘관의 등장을 알렸다.
곧장 화살이 날아들었으나, 원숭환은 말에서 뛰어내려 충차의 후미로 달려들었다. 그의 뒤로 안장과 발자국마다 화살이 박혔다.
“밀어!”
한껏 당겨졌던 충차의 머리가 원숭환의 합류와 발맞춰 성문을 타격했다.
콰앙!
폭음에 가까운 파열음과 함께 금주성의 성문이 터져나갔고, 그 너머에서 온몸으로 충격을 완충하던 후금군 병사들이 우르르 쓰러졌다.
“지금이다! 돌입해!”
원숭환과 휘하 장교들이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이 외쳤다.
병사들은 이미 본능적으로 달려드는 중이었다. 서둘러 몸을 추스르는 후금군들 위로 창칼이 쏟아졌다.
후금군은 쓰러진 채로도 항전했다. 곡도가 허공과 함께 발목과 허벅지를 베었다. 한 덩이가 되어 난전을 벌이는 양측 군사들 사이로 피가 튀기고 살점이 떨어졌다.
“몰아붙여어어어!”
“와아아아악!”
성문으로 모여든 예비대 군사들이 충혈된 눈으로 외쳤다.
거대한 함성.
그 전의에 찬물을 끼얹는 건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였다. 이전과도 기세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명군은 뒤나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마저 몰아붙일 따름이었다. 어떻게든 성에 몸을 들이밀지 못하면 죽은 목숨이었다.
“온다!”
새삼스러운 경악.
원숭환은 쓸모를 다하고 옆으로 밀려난 충차에 올라타 있었다. 무두질한 가죽을 덧씌운 천장에는 드문드문 대살이 솟아 있었다.
그것을 발로 대강 치워 버리고서 독전을 이어가던 참이었다.
그의 몰입을 깨뜨린 건 한 병사의 경악이었다.
그가 기겁한 얼굴로 우군들 사이에 몸을 파묻는 동안, 과연 원숭환은 성벽을 돌아 달려드는 후금군 기병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알고 있었다.
무수한 말발굽이 지축을 때리며 다가오는데 어찌 모르랴.
적 기병대의 선두는 유난히 화려한 갑주를 걸쳤으며, 어깨에 갑주 못지않게 화려한 깃발을 걸치고 있었다.
깃발은 피로 얼룩져 문양을 분간하기 어려웠으나 끄트머리만 남은 황색 바탕은 원숭환이 공성을 앞두고 보았던 황제기와 같았다.
“서둘러서 입성해라! 입성하고 성문을 틀어막아라! 너희들!”
원숭환이 칼끝으로 후미의 예비대를 가리켰다.
“몸을 돌려서 적을 막아라!”
병사들은 핼쑥해진 낯으로 후금군 기병대를 향해 창을 들었다.
지축을 때리는 말발굽 소리가 거세질수록, 성문 너머에서 후금군을 밀어내는 명군의 함성이 비명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수백 개의 침 흘리는 말 대가리와 명군의 어깨가 교체했다.
콰가가가가!
기병의 육탄 돌격 앞에서는 갑주도 무기도 소용없었다.
원숭환은 코앞에서 병사들이 지푸라기처럼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찰나의 순간이 수하들의 목숨처럼 부유했다.
그리고 원숭환은 지척에서 적 수괴의 면상을 눈에 담았다.
늘어뜨린 황제기로 병사 두엇을 꿰어버린 홍태주는 피 묻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부상이라도 당한 걸까?
일순의 짐작은 홍태주의 괴성과 함께 깨졌다.
끄으아아아아!
초인적인 완력에 두 명이나 꿰인 황제기가 들어 올려졌다.
창대에 꼬치처럼 꿰인 병사들은 허공에서 버둥거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들 육신의 무게가 허상은 아니라는 듯 피와 함께 몸이 창대를 타고 흘렀다.
홍태주는 관성을 이용해 창을 마저 휘둘렀다. 그나마 버티고 있던 명군의 위로 두 명의 부상자가 꿰인 황제기가 작렬했다. 인체와 인체가 부딪히고 명군의 대오가 순식간에 뭉개졌다.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 * *
“허억, 허억. 학. 하아.”
갈라진 목구멍에서 거친 호흡이 연달았다.
실핏줄이 터져 붉게 물든 눈동자가 전장을 훑었다. 시체와 시체. 그리고 더 많은 시체들.
난전 끝에 양측은 무수한 사상자를 낳았다.
그 결과물은 승패와는 거리가 멀었다. 단지, 누가 끝까지 살아남았느냐는 생존의 차이였을 뿐이다.
살아남은 건 후금군이었다.
홍타이지의.
대단히 무리한 싸움이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직접 전장에 나설 일은 줄어들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무리한 두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손목은 시큰했다. 깃발은 놓아버린 지 오래다. 이대로 병신이 되어버리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이쯤 되어서는 홍타이지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선 한을 죽여 버린 건 정말로 섣부른 짓이었다고.
조선이 더 강해지기 전에 제압해야 한다는 당시의 생각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때에도 조선은 매 순간 강해졌으며, 끝내는 무리해서 일으킨 원정조차 참패로 귀결하지 않았던가.
다만 조선을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게 후회될 따름이었다.
그때는 이미 조선을 꺾기에는 늦었으며, 그들을 제압하거나 굴종시키는 건 후대에 맡기고서 자신은 선 한과 함께 중원의 정복에만 집중해야 했다.
중원을 다 정복한 뒤라면 조선과의 외교나 전쟁 면에서 많은 이점을 누릴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홍타이지는 시간을 되돌리는 기교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후회란 지나간 일을 아쉬워한다는 그 정의부터가 곧,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위임을 증명했다.
홍타이지는 그저 전투로 인해 피로해져 정신적으로 나약해졌을 뿐이라 치부하고서 과거 자신의 선택과 강 너머에 있을 조선을 잊어버리고자 했다.
마음처럼 쉽게 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