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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86화 (186/380)

인조, 명군이 되다 186화

군기감에는 특별한 장인들이 있었다.

이질적인 외모를 가진 그들은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여러 사람의 이목을 사로잡았으나, 그들의 존재조차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

외지에서 상경한 몇몇 사람만이 이따금 ‘군기시에 털 붉은 오랑캐들이 있다던데 정말인가?’ 하고 물어보는 정도였다.

털 붉은 오랑캐들의 정체는 얀 얀스 벨테브레이와 두 부하였다.

제주도에 표류한 그들은 본디 조선 조정의 관대한 원조를 받아 원래 목적지였던 일본으로 보내질 뻔했으나, 일본이 기독교인은 받지 않는다며 표류인의 송환을 거부해 버렸다.

벨테브레이와 수하들은 졸지에 이름조차 몰랐던 이역만리 타지에서 발붙이고 살아가게 되었다.

누군가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던가.

세 사람이 조선에 녹아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슬슬 해도 지는데 퇴청하죠?”

벨테브레이가 어눌한 조선어로 투덜거리자 군기시 수장 최유해崔有海가 인상을 부렸다.

“어이, 박씨. 해가 중천인데 무슨 퇴청 소리인가?”

성씨가 너무 길고 혀가 꼬인다며 졸지에 박 씨로 개명된 벨테브레이였다.

“헛소리 그만하고 일이나 하시게.”

“…무슨 일을 합니까. 어차피 오늘 일정도 다 끝났는데요.”

벨테브레이는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더 할 것도 없는데 이만 퇴청하지요? 최 영감님도 쉬고 싶을 거 아닙니까.”

“으음…….”

최유해는 잠시 고민했다. 달리 시킬 일도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군수품 생산과 관리를 전담하는 군기시의 업무는 소강상태였다.

“…그래. 해산하게.”

“오, 영감 최고!”

“자넨 말부터 똑바로 배우는 게 좋겠군. 이건 경어가 아니라 숫제 동네 형장 상대로 농담 따먹기나 하자는 수준이잖나.”

최유해가 팔짱을 끼고서 눈살을 찌푸리자, 벨테브레이가 능청맞게 웃었다.

“제가 오랑캐라서 그럽니다, 오랑캐라. 조선말 어려워요우. 존댓말 어려워요우!”

“……후우.”

최유해는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관리나 장인들이 시건방지게 굴었다면 아주 물고를 내었겠으나, 오랑캐가 제가 오랑캐라서 말을 똑바로 못하겠다는데 어떻게 화를 낸단 말인가.

홍모이라고 이렇게 다 뻔뻔한 건 아닌 것이, 함께 굴러들어 온 다른 두 녀석은 어벙할지언정 그런대로 조심스러운 태도가 있었다.

박연 이놈은 저들 족속들 사이에서도 유별난 놈이었을 테지.

“알아서들 정리하고 해산하게. 난 갈 테니.”

“바쁘십니까? 간만에 탕반에다 술 한잔하지 않고요?”

“내가 바쁘지 않았다면 이른 퇴청을 허락해 주지도 않았겠지. 내일 보세.”

최유해가 먼저 빠져나가자, 덩달아 이르게 퇴청하게 된 관리들이 벨테브레이에게 덕담을 남기며 흩어졌다.

벨테브레이 역시 굳이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으므로 자신의 자리를 대강 정리하고서 일어서는데, 막 빠져나간 관리가 다시 돌아왔다.

“뭐, 두고 가셨습니까?”

벨테브레이는 딱히 도우려는 생각까진 없이 툭 건넨 말이었으나, 관리는 질색을 하고서 검지를 입에 대었다.

“쉿! 높은 분 오셨네!”

“…….”

뒤따라 몇몇 사람이 군기시에 등장했다.

벨테브레이는 안면조차 없는 이들.

그러나 입장과 함께 풍기는 위세와 기품이 보통 범상한 게 아니었고, 말단 관리라지만 친한 군기시 동료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니 능청맞게 군기시정을 놀리던 벨테브레이도 일단은 허리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 친구인가?”

“직접 보는 건 이 사람도 처음입니다만, 잘못 찾아온 것 같지는 않군요.”

한 사람이 벨테브레이에게 물었다.

“자네가 제주도에 표류했다는 그 화란和蘭인인가?”

“그렇습니다.”

“예판이 말하기를, 자네 화란인들은 배를 타고 바다를 오가는 데 아주 전문가라던데.”

“음, 모든 Holland인이 바다의 전문가는 아니겠으나 소인과 동료들은 전문가가 맞습니다. ……배를 탈 일이라도 있는지요?”

아마 그런 듯했다.

달리 바다의 전문가를 찾을 이유가 어디 있을까.

벨테브레이는 내심 고민했다. 배를 타게 된다면, 탈출해야 하나. 탈출한다면 어디로 향해야 하나.

원래 목적지였던 일본이 물리적으로는 가깝지만 기독교인이라고 인도를 거부했다니 부담스러웠다. 박해라도 시작된 걸까? 북해 일대라면 몰라도, 동양인들 세계에서 밀항을 시도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포르모사 섬으로 돌아가는 방법뿐인데, 망망대해를 뚫고 그 먼 거리를 가려니 막막했다.

이제 조선 사람 다 된 벨테브레이가 김칫국을 동이째로 들이켜는 동안.

공조판서 김류가 말했다.

“배를 탈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군. 하지만, 뱃사람의 식견이 필요하다는 건 알지. 그대가 이 나라에도 흔한 여느 뱃사람들보다는 더 식견이 깊기를 바라겠네.”

김류는 오랑캐 따위에게 조언을 구한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그가 먼저 조언을 청하러 찾아간 이는 남이공이었다.

남이공은 마침 명나라에서 귀국한 참이었고, 예로부터 중원은 치수를 황제의 업이자 소명으로 삼아왔으니, 태안반도의 물길을 극복하는 데 대국의 지혜를 빌려올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이공의 답변은 이것이었다.

홍모이라는 족속들은 오직 배에 의존하여 세상의 반대편에서 중원까지 찾아왔다고.

커다란 배를 건조하고, 홍이포라는 거대한 대포를 적재하고서 물 위를 부유하는 족속이라면 태안반도를 극복할 방법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남이공도 확신은 없었다.

그저 자신이 없는 사이 홍모이 족속 셋이 조선에 떠내려왔다는 신기한 근황을 얼핏 전해들었을 뿐이었다. 그들이 마침 군기시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도.

바다 건너 이역만리의 홍모이 소굴을 직접 찾아가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군기시를 방문해 물어볼 뿐이라면 딱히 밑질 것도 없잖은가?

김류와 남이공이 군기시를 찾아온 연유였다.

벨테브레이가 답했다.

“일단 문제부터 보여주시지요.”

* * *

쏴아아…….

광대한 바다가 노을빛을 깨뜨리는 가운데, 수평선에 놓인 검은 선들이 붉은 하늘과 바다를 갈랐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장관.

그러나 바닷사람인 벨테브레이와 동행한 두 사람은 소름만 끼쳤다.

“이렇게 암초 많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각한 곳에서 배를 몬다는 말입니까?”

“어우, 저는 만금을 줘도 못하겠습니다. 어차피 뒈질 텐데…….”

“암초 때문에 파선한 세곡선의 쌀이 밀려와서 썩어간다고 ‘쌀 썩은 여’라는 지명까지 붙었다면서, 꾸역꾸역 선박을 들이밀 이유가 뭡니까? 사탄에게 영혼이라도 공양하나요?”

벨테브레이는 물론, 동료 디럭 헤이스버르츠와 얀 피터르 페르바스트까지 경악하여 한 마디씩 내놓았다.

즐비한 암초와 극단적인 조수간만의 차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기가 장난스럽게 그려놓은 선처럼 개판인 해안선, 그 해안선을 따라 지저분하게 뒤섞인 갯벌과 모래사장, 자갈밭과 바위 암초지대. 이런 박살난 환경에 의해 극단적으로 변화하고 휘몰아치는 해류까지.

태안반도는 뱃사람들에게 실재하는 지옥문이었다.

“굳이……? 여기를? 왜? 어째서?”

만금을 줘도 이곳에서 배는 못 몰겠다던 헤이스버르츠는, 그새 뇌라도 손상된 양 의문을 하나씩 쥐어짜냈다.

“게다가 등대는 왜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까?”

“아예 야간에는 운항하지 않는다는 거지.”

“음, 확실히 이런 환경에서 야간 운항을 한다는 건 등대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집단자살로 해석해야겠지요…….”

태안반도를 돌아본 세 네덜란드인은 금세 같은 진단을 내릴 수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런 곳을 억지로 통과하겠다는 겁니까? 운하는 어떻냐고요? 그게 파질 것 같습니까?”

벨테브레이와 일행은 굴포운하 유적도 답사했다.

그리고 세상 단단한 돌바닥을 확인하고는, 이건 진짜 글렀다고 생각했다.

“왜 더 멀리 빠져서 크게 우회할 생각은 안 하는 겁니까? ……저기 수평선 너머로 펼쳐진 망망대해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나요?”

벨테브레이는 답없는 운하나 거론하며 혹 조선인들은 바다의 존재를 부정하는 건 아닌가 의심하면서 열심히 먼 바다를 향해 팔을 휘저었다.

“……그게 되나?”

“예?”

관료의 불신 섞인 물음에 벨테브레이는 도리어 어이가 가출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벨테브레이는 네덜란드에서 온 사람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그는 북해에서 출발하여 북대서양과 남대서양을 가로질러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거쳐 말라카 해협과 중국해를 모두 거쳐서 조선에 당도한 사람이었다.

벨테브레이에게 태안반도의 우회란 삼 분짜리 동네 마실도 안 되는 짓.

그게 되냐고 의심한다는 건, 자신에게 두 다리가 달려있기나 하냐는 수준의 질문이었다. ……뻔히 맞은편에 서 있는 걸 보고도 하는!

“왜 안 된다고 생각하시죠? 조선에는 배라는 개념이 없나요?”

“어허, 지금 대조선을 모욕하시는 겐가? 이 나라는 섬오랑캐들이 끌고 온 삼백 척 선단을 단 열두 척으로 박살내버린 나라야!”

관료가 갑자기 국뽕에 차올라 급발진하자, 벨테브레이는 그럼 일본인들이 판자 삼백 개를 띄운거냐고 되물으려다 말았다.

한 소리 또 했다가는 턱이 돌아갈 것 같아서.

“큼흠…. 아무튼 배가 뭡니까?”

“배는, 배지.”

“그 용도가 뭐냐는 말입니다.”

“물을 건너는 거?”

“그 물에는 바다도 포함되겠지요?”

“…그렇지.”

벨테브레에는 아름다운 석양이 지는 수평선을 가리켰다.

“그럼 저 바다도 당연히 건널 수 있지 않을까요?”

“흐음. 이곳의 수부들은 그렇게 해보자는 말이 없던데.”

“다들 창의성이 부족하거나 이 지옥문을 굳이 오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 그렇습니다. 아니면, 일부러 배를 박살내서 반사이익을 얻으려고 결탁이라도 했던지요.”

유럽에도 왕왕 있는 일이다.

보험사기를 치려고 겉만 멀쩡한 배를 위장 사고로 파손시키는.

“그, 그런가?”

“아닐 수도 있고요! 상관은 없습니다. 중요한 건, 말씀드렸다시피 배라는 건 원래 바다를 건너는 수단이라는 겁니다. 이 험난한 수로를 굳이 거쳐야 할 이유가 뭐랍니까? 바다로 가서 빙 돌아가면 그만인데.”

“흐음…….”

관료는 턱을 살살 쓰다듬더니, 이내 끄덕였다.

“알겠네. 하지만 말로는 무엇인들 못 하겠나. 자네들이 직접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수부들과 다른 관리들도 이런 방법이 있다는 걸 깨닫겠지.”

“멀쩡한 배와 화물을 버리지 않게 도와드렸는데 수고비는 두둑히 나오겠지요?”

“수고비는 모르겠지만, 이 일이 성총까지 전해진다면 관직이 내려질지도 모르지.”

벨테브레이는 작게 입을 열고서 호오, 감탄했다.

그가 조선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발을 붙이게 된 뒤 가장 먼저 익힌 건 이 나라 특유의 신분제였다.

유럽에서 공무원이란 실권자들의 하수인으로 귀족들에게는 업신여겨지기 일쑤였으나, 이곳에서는 공무원이 곧 실권자이자 귀족.

그래서인지 공무원이 되는 게 쉽지 않았다.

당장 그의 신세인 장인 겸 고문도 공무의 실현을 담당하지만, 실상은 기술 좋은 막노동꾼.

진정한 공무원이 되려면 벨테브레이로선 머리만 아플 뿐인 철학에서 뛰어난 성취를 이루거나 유용한 재능을 입증해야만 했다.

그동안에는 워낙 막연하여 먼 일처럼 느껴졌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사략선 사관이었던 내가 이세계에서는 귀족?!

거부할 수 있을 리 없잖은가.

“바다에 나들이 잠깐 다녀오는 게 뭐라고…… 흠흠. 맡겨만 주시죠. 어떻게 하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 * *

다음날 아침.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낸 건지 선창에는 구경꾼들이 즐비했다.

점잖게 차려입은 자들은 관리거나 그들의 수발을 들어주는 아전들일 것이요, 헐렁하게 옷을 거치고서 탄 피부와 탄탄한 체구를 드러내는 자들은 일대의 수부일 터였다.

전자는 기대감 만발이었고 후자는 빈정이 가득했다.

바다로 나가는 게 가당키나 하냐는 듯.

벨테브레이는 두 동료와 함께 바다로 나아가며 모이는 이목에 자신감 가득한 미소로 답했다.

수부들의 시선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이 생업으로 백날 배를 몰았다고 한들, 이 ‘지구 반대편에서부터 배를 타고 온’ 벨테브레이의 상대가 될 리 없잖은가?

근방에서 빌빌대며 지옥문이나 오가는 신세들로서는 바다로 나간다는 게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온 세계의 바다를 주름잡는 네덜란드 선원의 항해술은 항해 아닌 항해에 만족해온 이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안겨주리라.

그렇게 자신하며 부두의 끝자락에 도착한 벨테브레이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었다.

“이게…… 배?”

벨테브레이가 마주한 건 선체가 낮고 넓적하며 노로 혼동할 정도로 원시적인 키에 돛은 사각만 두 개인 기괴한 무언가였다.

중국인들이 타고 다니는 쓰레기Junk와 비슷한…….

벨테브레이는 당혹감 속에서 고민했다.

자신의 부족한 조선어 능력 탓에 사람들이 배Ship가 아닌, BAE 라는 발음의 해양 쓰레기를 대신 가져온 건 아닐까 하고.

“배가 맞네만. 문제라도 있나?”

문제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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