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87화
오대양을 주유한다는 네덜란드 선원의 명성이 허울은 아니었다.
벨테브레이는 무수한 시선 가운데에서 차마 발을 돌릴 수 없어 일단 물 위로 나왔지만, 이질적인 외향의 선박에 점차 익숙해져갔다.
그게 쉬웠다는 뜻은 아니었다.
옛 사관의 야욕을 위해 빠른 적응을 강요받은 헤이스버르츠와 페스바르트가 앞다투어 불평했다.
“이거, 수당은 나오죠?!”
“나와야지!”
“저는 수당으로 사관님의 오른팔을 가지고 싶습니다!”
“나는 왼팔! 야, 헤이스버르츠!”
“왜!”
“지금 수당 챙길까?!”
“그럴까!”
헤이스버르츠와 페스바르트는 제각기 돛줄과 키를 다루면서 악에 받친 것처럼 외쳐댔다.
“진정해, 이 자식들아! 고작 섬 하나 찍고 가는 건데 불쌍한 사람의 양 팔을 뜯어가려고 그래?!”
벨테브레이가 다른 돛줄을 다루면서 항변했다.
“사관님, 물 위에 오르면 입 조심하셔야죠? 선상반란이라도 일어나면 2대 1이라고요!”
“…….”
“페스바르트! 사관님은 살포시 암초섬에 던져버리고 우리만 돌아갈까?!”
“땡기는데!”
찍고 돌아가야 할 암초섬에 버려질 위기에 처한 벨테브레이가 필사적으로 설득했다.
“알았어, 알았어! 돌아가면 탕반에 독주라도 잔뜩 쏴 주마! 어르신들에게도 보고서에 너희 이름 같이 올려달라고 할게!”
“사관님은 방금 그 약속 때문에 사신 겁니다!”
“크윽…….”
벨테브레이는 안 그래도 홀쭉한 지갑이 마저 찢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선상반란을 제압한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갑판이 안정되었다면 다음은 배를 안전하게 몰아 선창으로 복귀하는 것뿐.
다시 이질적인 선박의 분석에 들어간 벨테브레이는 내심 감탄했다.
대나무 다발들로 고정된 사각돛은 그가 아는 사각돛과는 기능이 달랐다.
바람의 힘을 받아 배를 밀어낸다는 돛의 원리는 동일했다.
그러나 범선의 사각돛이 바람을 품어 부풀었을 때 제 기능을 다한다면, 동양식 사각돛은 바람이 적어도 다발로 고정되어 작은 힘이나마 받아 나아갔다.
단점이라면, 범선의 사각돛과 달리 최적의 풍향과 풍속에서는 효율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오히려 너무 큰 힘을 받아 견디지 못하고 찢어질 테지.
돛의 면적이 유동적이지 못하고 고정된 것의 장단점이다.
첫인상을 제하고 특징만 본다면 사각돛보다는 삼각돛과 유사하다. 즉, 이 돛은 원양 항해보다는 연안 항해에 적합했다.
“사관님, 어째 배가 너무 흔들리는 거 같지 않습니까?”
“그러게. 이상하군. 갑판도 낮은데 이렇게 휘청거릴 수 있나?”
벨테브레이와 두 부하는 어느새 암초섬에 다다라 있었다.
뒤를 돌아 그들이 출항한 선창은 어느새 손톱만큼 작아졌고, 사람은 보이지도 않았다.
제법 멀리 나온 셈.
이만하면 암초 걱정은 덜하겠으나 이제는 배 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었다.
“왜 이러지?”
“어, 어어……. 사관님?”
“호들갑들 떨지 말고 있어봐.”
벨테브레이는 배Ship 보다는 BAE라고 불러야 할 이 이종 뗏목의 구조를 살피기 시작했다.
다른 게 돛만은 아닐 테지.
갑판을 두드려보고, 현측을 확인하던 벨테브레이는 금세 옷을 훌렁훌렁 벗고는 속옷만 남은 채로 물에 뛰어들었다.
짚이는 점이 있어서였다.
그리고 잠수한 곳 반대편에서 튀어나온 벨테브레이는 온 몸으로 바닷물을 흘려대며 감탄했다.
“와, 이거 바닥이 평평한데?”
두 사람에게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헤이스버르츠가 말했다.
“그냥 뗏목이었네요.”
“이러니 바다로 못 나가지!”
벨테브레이와 두 사람이 아는 배의 ‘정상적’인 형태는 V나 U자로 바닥이 움푹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래야 물살을 쉽게 가를 수 있고, 측면에서 파도를 맞아도 수면 아래 깊게 들어간 배 바닥에 의해 충격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바닥이 ㅂ자 형태로 평평해버리면 그러한 이점을 누릴 수 없다.
파도를 맞으면 정직하게 흔들리는 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평평한 바닥에도 이점은 있었다.
배가 물에 깊숙이 박히지 않고 떠 있는 형상이 되어 선회에 매우 유리했다.
범선은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제자리 회전이 가능할 정도.
그러나 벨테브레이와 두 부하들은 평저선의 장점은 생각하지 못했다.
네덜란드인들에게 더없이 익숙하고 당연한 범선은 대양을 오가며 망망대해의 전장에서 싸웠으니까.
제자리 선회가 이점이 되는 건 전장이 좁고 복잡한 연안에서 뿐이다.
대양항해에 익숙하고 그 이점을 잘 아는 벨테브레이와 두 부하들로선, 평저선의 이점을 인지했더라도 먼 바다에서 고자가 되어야 할 충분한 이유로는 받아들이지 못했으리라.
“문제가 뭔지 알았다!”
* * *
-첨저선? 그거…… 어디 보자. 세종대왕 치세에 잠깐 하다가 말았던 거 아니냐?
벨테브레이가 서양식 범선의 도입을 주장하자 조정에서는 뜬금없이 선박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보수적인 관리와 식자들은 말세라며 혀를 찼다.
지금 대조선은 명나라마저 핍박한 후금을 박살내고, 남해에서는 충무공께서 섬오랑캐의 선단들을 식은 죽 해치우듯이 작살을 내버렸는데 무엇이 아쉬워서 오랑캐의 방식을 논한단 말인가?
-에잉! 쯧쯧쯧! 좋은 세상이다! 오랑캐들이 주둥아리를 다 털고! 쪽발이랑 되놈 다음에는 홍모이 차례냐?!
그러거나 말거나 때 아닌 선박 논란을 쉽게 꺼지지 않았다.
정계를 양분하는 서인이 끊임없이 땔감을 넣어댄 탓이다.
새롭게 선혜법 및 호패법을 도입할 지역으로는 황해도가 선정되었으나 다음 차례는 무조건 하삼도의 다른 지역.
그리고 경상도와 전라도는 서인들의 반대편에서 정계를 양분하는 북인들의 인적 금전적 기반이었다.
이들 지역에 선혜법 및 호패법을 도입한다면 무수한 인력과 대토지를 거느려 북인을 받쳐주는 유지들을 타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상도와 전라도에 선혜법을 시행하려면 넘어야 할 난관이 있었다.
태안반도!
이를 먼저 극복하지 못한다면 경상도와 전라도에 선혜법을 도입하기란 요원할 수밖에 없다.
금상은 현실적인 한계를 거론하며 백관의 공론이었던 요동 정벌마저 단호하게 거부했던 이.
마찬가지로 수문장守門將…… 아니, 수문장水門將 태안반도가 먼저 공략되지 않고서는 경상도와 전라도에 무리하게 선혜법을 도입할 리 없었다.
그리고 때마침 벨테브레이가 제안한 범선은 태안반도 극복의 해답이 될 수 있었다.
왜 굳이 암초 많고 물살 복잡한 태안반도 연안을 타고 가야 하는가?
그냥 범선 타고 빙 돌아가면 그만인데!
“이미 영묘英廟께서 오랑캐가 말한 것과 비슷한 갑조선甲造船을 도입하셨으나, 기술이 미진하고 물자가 많이 들어 무산된 적이 있사옵니다.”
“기술이야, 홍모이가 자신있게 떠들었으니 보탤 구석이 없지는 않을 테고 물자야 다소 수급이 어려운들 궁극적으로 얻을 실리를 생각하면 조족지혈에 지나지 않소이다!”
“다른 선열도 아니고 무려 영묘조에도 실현되지 못하였습니다! 결과야 뻔한데 공연히 품과 물자만 허비하려는 이유가 무엇이외까?”
“영묘조로부터 이백 년 가까이 흘렀소, 이백 년! 그리고, 과거에 시도했다가 안 된다고 포기한다면 호패법이 어떻게 도입될 수 있었겠소!”
중신들이 왈가왈부 떠들어댔지만, 논쟁은 좁혀지지 않고 공회전만 이어졌다.
다들 복심이 있는데 아닌 척 선박 문제만 떠들어대었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범선을 도입해야 경상도랑 전라도에 선혜법을 시행할 수 있다고! 그래야 네놈들 기반을 타격하지!
라던가,
-범선이 도입되면 네놈들이 우리들 기반 타격하는 것까지 일사천리인데 왜 응해주겠냐?!
하고서 각자 흉중의 뜻을 툭 까놓고 거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서인과 북인이 서로의 진의를 파악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놈이 왜 이러나, 하고 생각해보면 금방 나오는 답이었으니까.
그리고 양측 모두 이런 부분에서도 타협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각자의 이권을 빼앗고 지키려는 것인데 누가 고이 이권을 내어주었으며 또 보전을 묵과하겠는가.
“그만.”
용상에서 한 마디가 나왔다.
지지부진하게 고성방가만 오가던 조정을 일순 침묵시키는 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모두의 이목이 용상으로 향했다.
“전하…….”
겉도는 당쟁의 한가운데에서 난처해하던 이원익이 조심스럽게 왕을 불렀다.
“경들께서 열정적으로 국사를 논의하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만, 양측의 의견이 조금도 좁혀지지 않고 도리어 감정적으로 동요하니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내 비록 경들과 비교하여 학문과 전문성에서 미진한 부분이 많겠으나, 여러 의견을 가만히 경청해보니, 홍모이가 말한 범선이란 실현만 된다면 난항이 예상되는 다른 하삼도 지역의 선혜법 도입에 큰 도움이 될 듯합니다.”
왕은 언쟁이 오가는 와중 모두가 은근히 회피해온 정곡을 찔렀다.
이렇게 훤히 보고 있거늘 감히 두 말할 수 있을까.
신하들은 판결을 기다리는 기분으로 침묵을 지켰다.
“하삼도의 다른 지역에 선혜법을 도입하는 게 급선무는 아니지만, 미리 준비하여서 나쁠 건 없겠지요. 그 박연(朴淵, 벨테브레이)이라는 자에게 인력과 자재 및 기타 협조를 제공하여 과연 범선이 아조의 해역에서도 효용을 낼 수 있을지 시험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왕의 말은 지시보다는 제안에 가까웠지만, 그것이 그냥 까라는 명령이나 진배없다는 건 모두가 알았다.
명나라 해적도 박살내고, 후금도 박살냈으며, 그것을 가능하게 한 무기와 화약의 제조법 및 보관법을 친히 개선해냈다.
그런 군주의 제안을 어떻게 거부하겠는가.
거부한 사람은 광화문 앞에서 돌팔매만 잔뜩 맞고 거꾸로 매달리는 수가 있었다.
* * *
‘대양항해 능력을 갖출 기회야. 절대로 놓치면 안 되지.’
잊고 있었던 벨테브레이다.
네덜란드에서 선원이 표류했으니 신기하긴 한데, 그래서 어쩌겠는가.
벨테브레이는 원래 역사에서 군기시 관리를 지냈다.
대포가 발달한 서양에서 왔으니, 그래도 조선에 새로울 개념 정도는 있었겠지.
하지만 그 이상은 기대할 수 없었다. 무기에 대한 안목 자체가 없지는 않았을 거다. 표류 전 사략선에서 병기사관을 담당했으니까.
그러나 그게 전부.
무기를 관리하고 통제했으니 담당하는 병기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지식을 보유했겠으나, 그 지식의 수준이 직접 제작까지 가능할 정도는 아니었을 거다.
그리고 이 역사의 조선은 네덜란드의 특산품 홍이포를 이미 입수했다.
지금은 소형화와 복제를 통해 유사품을 만들어낼 기술 역시 완성한 상태다.
이 부분에서는 벨테브레이가 보탤 여지가 없다.
벨테브레이의 효용을 따지자면 기실 무기 개발자보다는 함선 설계자와 항해 기술자로서의 효용이 더 높을 거다.
선원이자 사관으로서, 서양식 범선에 대한 이해도는 담당했던 병기 이상일 테지.
구조는 물론, 목재의 종류나 결합방식 등등.
선원이면 배가 자기 집이다. 설마 자기 집이 흙으로 되었는지, 시멘트로 되었는지, 방과 문이 어디에 어떻게 났는지를 모를까.
다만 그 능력조차 지금까지는 도외시되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후금이랑 전쟁 중이어서.
그리고 북쪽의 오랑캐들은 배를 타지 않는다.
원래 역사에서는 원숭환이 모문룡의 목을 치자, 의지할 데 없어진 동강진 떨거지들이 후금에 투항해서 수군을 만들어주지만…….
이번 역사에서는 그럴 일이 없어졌으니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후금은 몰락했고, 회복하는 속도가 무섭긴 하지만 당장은 이전과 같은 위협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때 벨테브레이가 가진 범선의 이해도는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가치와 여유가 있었다.
조선의 전통적인 선박 구조는 그동안 연안에 국한된 수로와 전장에 최적화되어 있었고, 임란 때 제대로 그 이점을 써먹었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서양은 이미 지구 반대편까지 배를 타고 오는 시대가 되었는데 언제까지 물가에서 놀 텐가.
‘게다가, 대양항해 능력이 하삼도의 선혜법 도입에 결정적인 열쇠가 될 수 있으니.’
만능 열쇠가 되리라고는 장담하지 못한다.
서양식 범선을 개발하더라도 당장 조선의 항구들을 편하게 이용하기 어려운 탓이다.
평저선은 얕은 수심에도 기동할 수 있지만, 범선은 첨저선이라 수심이 얕은 곳에 지어졌을 대부분의 조악한 포구는 전기차 앞에 놓인 기름 주유소에 불과하다.
제대로 된 시설과 수용능력을 갖춘 군항은 여지가 있겠지. 다소 조건이 맞지 않더라도 확장하면 된다.
신형 범선의 역할이 범용적인 민간 함선이 아닌 조운선의 대체로서 핵심 항구만을 오갈 것을 생각하면 그리 난처한 여건은 아닌 셈.
하지만 이러한 제약의 존재가 곧 범선이 무적이 아니라는 방증이기도 했다.
‘실제로 조운선을 대체할 수 있을지는 결과를 봐야 알겠지.’
지금은 벨테브레이와 조선 관리들을 믿고 기다릴 따름이다.
어쩌면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를 나의 생각과 우려는 밝히지 않았다.
조선의 왕으로선 한 번도 본 적 없을 범선에 대해 수상하리만치 높은 이해도를 보이는 건 조심해야 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