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조 명군이 되다-188화 (188/380)

인조, 명군이 되다 188화

벨테브레이와 두 부하, 그리고 일부 군기시 관리와 예조판서 남이공이 한양을 떠났다.

이제 조선으로 귀국한 남이공이 얼마 쉬지도 못하고 또 출장을 나간 이유는…….

범선에 대해 완전히 몰이해한 조선 관리들 사이에서 벨테브레이가 일을 제대로 하는지, 아니면 완전히 미친 짓을 꾸미는지 가늠이나마 할 수 있는 유일한 인재였던 탓이었다.

배를 만든다는 임무 특성상 직접 배 탈 일이 많을 텐데, 남이공은 뱃멀미를 심하게 앓는 사람이다.

혹사당할 남이공의 반고리관과 내장기관에 미리 유감을 표하지.

조정의 흐름이 이렇다면, 가정의 흐름은 이랬다.

중전은 인평대군을 돌보느라 초췌해졌고, 봉림대군은 새해를 맞아 머리가 굵어져서는 온갖 것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어떤 종류의 질문은 대답하기 난처한 것도 있었다.

내가 알지 못해서라기보단, 어린아이 수준에 맞춰 설명하기 힘들어서였다.

-아바마마, 애완 대포가 무엇이옵니까?

그 애완 대포의 주인인 세자는 향비누의 효용을 깨달았는지 최근 비누의 양산을 제안했다.

세자는 빈자와 환자들에게도 호패를 채울 수단인 혜민서를 여전히 도맡고 있었다.

그만큼 의학과 위생에 진심인 세자다.

비누의 양산을 제안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취약한 환경에 놓인 백성들에게 획기적인 공공보건을 제공할 수 있다나.

하지만, 세자의 가상한 제안은 비누 제작에 많은 품과 재료 그리고 비용이 소모되며 내수사는 먹고 뒈질 여유도 없다는 아비의 거절에 침몰했다.

옛날 옛적 못된 흥안군을 퇴치할 때 겸사겸사 건수를 잡아 종친들에게서 궁방전을 모조리 몰수했지만, 그것도 다 밑천이다.

아무리 부유하다는 내수사라도 한 해 소출을 능가하는 소비를 한다면 생산성의 근간이 되는 농지가 축소되어 내년부터는 더 힘들어지게 된다.

그리고 내수사는 충분히 무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충청도에 지어지고 개축된 무수한 기간시설들과 세자가 안방처럼 여기는 혜민서도 다 내수사의 재산이 들어갔다.

남이공이 북경에서 털어온 금괴가 주축을 맡은 건 맞다.

하지만 금처럼 국제적으로 신용도 높고 안정성도 확실한 보증수표를 민간에 녹여버릴 수는 없잖은가?

내수사에서 웃돈을 주고 매입하는 방식으로 금을 보전하고 국가사업에 보탰다. 그러고 나니 호주머니가 아주 홀쭉해졌다. 애초에 여유를 남기지 않았다. 비누 만들 돈이 어떻게 남아 있겠어.

참고로 이 건은 호조야 땡 잡았다고 여겼지만 내가 호구가 아니어서 좋다가 말았다.

웃돈 치고도 과한 투자금은 채무로 걸었다. 행사할 생각은 전혀 없다. 재상들이 쩐주가 누구인지 망각할 때마다 한 번씩 잡아당기는 목줄 용도다.

관리들이 나를 물지 못하는 이유.

꼬우면 운영을 잘해서 이자까지 두둑하게 쳐서 갚으면 된다.

그럴 돈이 없다고?

나도 없다, 이 자식들아.

없는 와중에 나라 살리겠다고 호주머니 짜서 부어넣었는데 이 정도 힘은 가져야지.

마지막으로 대비께서는 전례없이 나마스떼하시는 중이다.

수시로 출궁을 요청하며 광산부부인과 공주 부부를 데리고서 한성 안팎의 명승지를 들쑤시고 있으니까.

부럽다.

나는 밤낮으로 일만 하는데.

“전하, 세자 입시하였사옵니다.”

세자가?

“들라고 하세요.”

윤허와 함께 문이 열리면서, 잔뜩 긴장한 세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인 일이냐?”

세자는 대답에 앞서 부친의 집무실을 먼저 훑었다.

가로로 길게 늘어선 서안들과 그 위에 중구난방으로 펼쳐진 권자들, 그리고 좌우로 탑과 피라미드처럼 쌓인 책과 두루마리들.

쟁점이 하나 생기면 식자라는 종자들이 비슷한 말을 조금씩 다르게 해서 전혀 다른 결론을 내고, 또 쓸데없이 머리가 좋은 놈들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까지 전례랍시고 끌고 오기 때문에 검증이 필요했다.

그것을 수행하다 보면 집무실이 이렇게 개판이 되는 것이다.

세자는 동요하지 않았다. 많이 보았던 장면이라, 원래 이랬다는 걸 알고 앞으로도 이럴 예정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겠지.

“보여드릴 게 있사옵니다.”

“와서 앉거라.”

나는 정면에 놓인 서안을 중심으로, 중구난방 펼쳐진 권자들을 옆으로 밀어냈다.

이렇게 더 어질러놓으면 뭘 어디까지 했는지 분명 세자와의 대담이 끝난 다음에는 잊어버리고 말겠지만…….

아들이 와서 뭘 보여주겠다는데 어쩌겠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둘 수 있는 새 서안이 없다. 이미 궁궐 곳곳에 있는 걸 죄 가져온지라.

“보여주거라.”

“예.”

세자는 품에서 권자를 하나 꺼내서는, 협소한 빈자리에 두고 좌우로 펼쳤다.

“흐음…….”

세자가 일전에 요청했던 비누 양산의 연장선이었다.

미래로 치면, 사업계획서의 어설픈 형태.

“비누가 품이 많이 들고 값비싼 물건이기는 하나, 이 점을 뒤집는다면 여러 사람에게 일거리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실익까지 거둘 수 있습니다.”

이미 혜민서에서는 빈자들의 지속 가능한 구제책으로 소일거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짚과 갈대를 엮어 신발과 가재를 만들고, 나뭇가지와 나무토막을 깎아 도구와 부품을 제작하는 식이다.

소소하게나마 이런 기술을 배워놓으면 생활이 단번에 호전되지는 못하더라도 구걸에만 의존하는 방식은 탈피할 수 있지 않겠는가?

세자는 그 일환으로 비누 제작까지 도입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산된 비누를 민간에 판매함으로써 노동자의 품삯과 재료비를 충당한다.

장사하여 이문을 크게 남기려는 것이 아니니 비누를 싸게 공급할 수 있고, 그렇게 민간의 위생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그럴싸하구나.”

고생한 보람이 느껴지는 걸까.

세자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너무 이상적이기도 하구나. 공공보건으로서 유의미할 정도로 비누가 판매된다는 가정이 성립하려면 백성 대다수가 비누의 존재를 알고, 동시에 또 원해야 하며, 재료값에 품삯까지 더해진 만큼의 재화를 지불하고도 구매할 의사까지 있다는 전제부터 성립해야지 않겠느냐?”

“…….”

“실제로는 백성들의 십중팔구가 비누의 존재를 알지 못하며, 설령 존재는 물론 용도까지 알게 되더라도 빈한한 사정에 구매의사란 촌평하여 ‘뭔 놈의 얼어죽을 비누’쯤 되지 않겠느냐.”

비누는 주재료가 기름이다.

그리고 백성 대다수는 등유燈油로 쓸 저질 기름도 없어서 밤이 되면 그냥 이불을 덮고 누워버린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을 실천하기 위해 등불을 켜는 사정 좋은 반가에도, 기름을 이용한 지짐 요리는 특식으로 여겨진다.

요즘 내가 자주 쓰는 표현을 쓰자면 민간에서는 먹고 뒈질 기름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귀한 기름으로 만든 비누를 씻을 용도로 사고 싶을까?

밥에 뿌려먹을 기름이나마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사치스러운 물건이다.

게다가, 공공보건을 보급할 정도로 비누를 생산한다면 기름은 더 귀해지고 가격은 폭등할 거다.

세간에서는 세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세상물정을 몰라 귀한 기름을 먹지도 못하게 비누로 만들어버린다고 비난하겠지.

“…….”

불 보듯 뻔히 펼쳐질 미래를 잘 풀어서 설명해주니 세자는 뒤통수라도 맞은 얼굴이 되었다.

대보와 갖은 국새를 가지고 외지에 피신해본 적이 있는데도 이렇다. 세자라고 궁궐 바깥의 세상을 모르지는 않다는 거다.

그런데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공공보건이라는 시대를 과하게 앞선 염원을 달성할 마음에 방심한 모양이다.

“세자가 백성들의 건강을 위하여 많이 고민하였으니 가상하다. 하지만 아무리 뜻이 가상하고 계획이 거창하더라도, 현실이 따라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법이다. 만약 이를 권력을 이용해 강요한다면 도리어 가상한 뜻과 거창한 계획은 공허해지고 핍박만 남지 않겠느냐?”

“……예.”

세자가 간만이 축 처지는 모습을 보니 그것대로도 안쓰러웠다.

요즘에는 가장이랍시고 당당해지려 애쓰던데.

솔직한 모습을 보니 덩치는 커졌어도 세자가 어디로 가지는 않았다는 게 느껴졌다.

“옆에 와서 앉거라. 이 아비가 가상한 세자의 노력을 높이 사서 비책을 알려주마.”

세자는 오래간만에 나와 함께 용상에 앉았다. 새삼스러운 거부는 없었다.

“당장 모든 백성들에게 비누를 공급하겠다는 건 성급한 계획이다.”

“통감하였사옵니다.”

“그래. 세자가 바닷물로 기름을 연성하고, 백성들을 세뇌하여 기름은 먹기보다 비누로 만들어 쓰는 게 낫다고 여기게 할 수 없다면 이건 좋은 계획이 아니지.”

“…….”

“크흠, 그나마 시도해볼 만한 건 백성들 스스로가 비누를 궁금해하고 원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게 가능하옵니까?”

마치 세뇌능력이 있기라도 하냐는 투였다.

안타깝게도, 내게는 세뇌능력이 없다. 있었다면 조선의 세계패권 실현을 위해 만주와 열도의 오랑캐들에게 동해바다로 전입 명령을 내렸겠지.

내가 생각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

“범인凡人의 속성을 이용하면 되지 않으냐?”

세자는 아직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아비가 이미 모범을 보여주었거늘.

“이 나라의 오랜 숙원이었던 호패법이 어떻게 도입되었더냐.”

“아…….”

“아비가 제안한 건, 비누를 제작하되 소량만 만들어 종친과 대신들에게 조금씩 선물하는 것이다. 품계의 등급에 따라 선물할 비누의 양에 차등을 두는 것도 좋겠지.”

“그러면 비누가 상류층만의 전유물이 되지 않겠사옵니까?”

“그것이 요점이란다. 만약 필부의 앞에 상류층의 전유물이 툭 떨어진다면, 필부는 슬쩍 챙겨가고자 하지 않겠느냐?”

“…….”

“신분이 높은 자들은 이미 왕실에서 향비누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선물을 받으면 아주 기쁘게 여길 것이고, 효용을 체감하지 못하더라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사용할 것이다.”

오늘날에 위생이란 너무나 막연한 개념.

병원체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탓이다. 단지 본능적인 혐오감으로 더러운 것을 기피할 뿐. 그러한 인식을 타파하고자 해도 기술의 한계로 불가능하다.

그래도 사람들은 선물받은 비누를 알뜰하게 사용할 거다.

왕가의 공신력과 권위가 부족한 체감을 메워주고, 과시욕이 성실한 행위의 발로가 될 테니까.

“그럼 점차 여유있는 사람부터 상류층의 전유물을 구하고자 애쓰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기름을 비누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생기는 것이다.”

저들이 원해서 귀한 기름을 비누로 연성해주겠다는데 무슨 지탄을 받겠나.

“나날이 더 많은 사람이 비누를 사용하게 될 테지. 그러다 보면 비누는 상류층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이 옅어지지 않겠느냐?”

이래서는 비누 확산의 원동력이 닳게 된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상황.

“그러면 세자는 상류층을 위한 비누를 만들면 된다. 응당 아무나 살 수 없도록 값비싸고, 기존의 비누와도 차별점이 있어야겠지. 아비가 비누에 향비조香肥?를 더한 게 좋은 예시가 될 거다.”

“……!”

앉은 자리에서 새로운 계획을 뚝딱 만들어내니 세자가 숨까지 멎은 채로 경악했다.

하기야 요즘 세상에 사람의 심리를 살살 간지럽히며 조종하는 수법이 얼마나 발전했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러한 수법이 첨단으로 발전한 자본주의 세계에서 왔다. 이 정도야 교양이지.

“아비가 얼개는 대강 세워보았으니, 세자가 보아서 미진한 점이 있다면 개선하거라. 작게 시작하는 계획이니 거창한 지원은 없어도 되겠지. 필요한 만큼은 지원해 줄 터이니…….”

나는 세자가 가져온 사업계획서를 밀어냈다.

“이건 도로 가지고 가거라.”

세자는 복잡한 얼굴로 자신의 권자를 챙겼다.

괜히 심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장차 왕이 될 세자에게 이 정도 충격은 필요했다. 부족함 없이 발전할 수는 없으니까.

이 일이 잘 풀린다면 세자가 훗날에는 비누대왕이라 불릴지도 모르겠다.

그게 그다지 훗날이 아닐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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