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90화
북인이 세력을 회복했다고는 하나, 반정과 환국을 통해 세상을 뒤집어놓은 서인을 완전히 압도할 수는 없었다.
태안반도 극복을 저지하기 위한 여러 정치적 견제가 있었으나 서인은 모든 힘을 결집해서 막아냈다.
특히 가장 큰 문제였던 예산은 호조판서 김신국을 김류가 친히 포섭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덕분에 남이공과 벨테브레이는 방해받지 않고 K-플류트 건조에 몰두할 수 있었다.
신형 함선의 건조란 방해가 없어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장 필요한 자재의 수급이 늦어지는 건 일도 아니었으며, 최소한의 삯만 지급받고서 공역에 투입된 조선공들은 쥐뿔만큼의 의욕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해야 할 일.
남이공은 조선공들을 독려했고, 벨테브레이는 감독했다. 조금씩 작업에 속도가 붙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북쪽에서는…….
김신국이 물속에 있었다.
봄이 되어 엄동설한은 누그러들었지만, 아직 새벽마다 연못에 살얼음이 끼는 정도의 추위는 남아 있었다.
김신국은 그것을 온몸으로 느껴야만 했다.
퇴로는 없었다.
왕이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전하, 얼어죽을 것 같사옵니다.”
“경께서는 밥을 먹으니 배가 불렀더라는 수준의 말씀을 굳이 하시는군요.”
김신국은 경회지에 퐁당 빠져 있었다.
사유, 충분한 공적 근거 없이 범선 사업에 많은 예산을 몰아주었기 때문에.
“책임자인 남이공에게서도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사옵니다. 범선이 장차 하삼도 선혜법의 열쇠가 될 수도 있음은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그렇지요. 하지만, 개인 사이에서 오간 서찰이 예산 배정의 공적인 근거가 될 수는 없어요.”
김신국 딴에는 억울할지도 모른다.
그동안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진 일이 고작 이뿐이겠는가.
김신국이 냉수마찰을 하게 된 궁극적인 원인은, 그의 결정이 오롯이 호조판서로서의 개인적인 판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이 김류에게 매수되었다는 사실을 내가 모를 것 같습니까?”
“매, 매수라니요……. 신은 공조판서에게서 아무런 뇌물도 받지 않았사옵니다.”
“과거 입은 은혜를 청산시켜주는 게 대가가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김신국이 질색했다. 다 들켰구나, 싶었던 걸까.
한숨을 푹 내쉬며 좌절한 김신국이 변명했다.
“하오나, 사람으로서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갚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경의 말이 옳지만, 사사로운 은혜를 공적인 영역에서 갚아서는 안 되겠지요? 더욱이 경이 더 괘씸한 건 내가 선혜법의 시행과 범선 도입에 기대가 많은 걸 알아, 그 뜻에 부합하여 은근슬쩍 부정을 저질렀다는 점입니다.”
문제가 되지 않을 줄 알고.
“김류는 서인의 영수고, 또 그릇이 소인배에 불과하니 당리당략에 힘쓰는 건 개가 아무 기둥을 보고 오줌을 갈기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되어 그런 행위를 저지른다면, 벌을 주어야 마땅하겠지요.”
“…….”
김류가 배신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심증만 가지고 있었던 김신국을 연못으로 밀어넣을 수 있었겠나.
다 김신국을 매수한 장본인인 김류의 협조가 있어서였다.
김류가 배신한 이유는 김신국이 부정을 저지르면서도 안도했던 이유와 같았다.
이 일이 공적으로 추궁된다면 범선 도입에도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김류는 그 점을 우려했고, 강한 심증을 가지고 있던 내게 볼일 다 본 김신국을 넘기는 대신 공적으로 죄를 묻지 않기로 타협했다.
그러니 김신국은 김류라는 인물과 범선 사업이 왕의 의향에 부합하는 사정, 믿던 두 도끼에 좌우 발등이 다 찍힌 셈이다.
딴에는 되게 억울한 일이겠으나 공금 만지는 사람이 공금으로 죄를 지었으니 발등 좀 찍혀도 된다.
“게다가 예산에는 나랏돈만 있는 게 아니지요. 엄연히 주인 있는 돈이 섞여 있거늘 누구 허락을 맡았다고 함부로 쓴단 말입니까?”
“……전하, 신이 늙어 망령되어 상심을 끼쳐드렸으니 골백번 죽어도 죄를 갚을 길이 없사옵니다. 하오나 신이 이대로 정말 얼어 죽어버린다면 어떻게 죄를 조금이라도 갚겠사옵니까?”
“반성하셨습니까.”
“뼛속까지 반성하고 있사옵니다.”
엄중한 분위기였으므로 차마 엄살은 부리지 못하였으나, 내색만 안 하였다 뿐 늙은 관절이 시리다 못해 이제는 감각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사람이 산 채로 얼어붙는다면 이런 감각이지 않을까.
그러나 왕은 태평하게 살얼음 낀 위에 가져온 나무배나 살포시 얹었다.
“이게 뭔지 아시겠습니까?”
김신국은 새파래진 입술을 열었다.
“범선의 모형이옵니까.”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남이공과 벨테브레이는 김신국이 방만하게 제공한 예산을 조심스럽게 사용했다.
배 한 척 들어가는 데 들어가는 재료와 품이 만만치 않다는 걸 잘 알아서이리라.
현장에서는 설계를 무작정 실천으로 옮기는 대신, 먼저 일정한 비율로 축소한 모형부터 제작했다. 도면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설계상의 하자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모형 배는 물 위에 잘 떠 있었다.
무게추로 만든 가짜 화물을 탑재하고도 그랬다.
왕은 모형 배의 옆구리를 툭툭 치다가, 산 채로 얼어가는 김신국을 향해 웃었다.
“예조판서가 그나마 돈을 조심스럽게 써서 살려드리는 겁니다. 나오세요.”
김신국은 허어,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다.
이제 탈출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급격하게 추위가 몰려왔다.
김신국이 호수를 탈출하자 내시들이 곧장 화로와 새 옷을 들고 다가갔다.
살려준다는 거야, 말이야 살벌했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유능한 사람도 별로 없는데 죄 한 번 지었다고 인간 동태로 만들어버리면 다음에는 누구를 쓴단 말인가.
그리고 김신국이 부패한 사람이어서 이번 일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이만하면 김류가 철면피 깔고 또 찾아가서 옛 은혜를 구질구질 들이밀어도, 이번에 목숨 걸고 갚았으니 썩 꺼지라고 언성 높일 수 있겠지.
즉, 이게 다 김신국을 위해서 벌인 일이다. 노인 학대가 아니다. 사랑이다.
* * *
김신국은 인간 동태가 될 뻔한 뒤로, 정신이 바짝 들었는지 의도치 않게 지체되었던 업무들을 빠르게 처리했다.
황해도에 증축 및 개축될 기반시설에 대한 예산을 집행한다든가.
여러 속아문에서 잡비라는 명목으로 빠져나간 잔금의 자세한 내역을 확인한다든가.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공조에서 자재 대금으로 청구한 비용을 검토했으며 일부를 거부했다.
나름의 복수인 걸까. 공조의 장관이 김류다.
김류가 자신을 팔았다는 것까지는 몰랐을 거다.
절차를 다 갖추어 진행하면 될 일을, 채근당해 무리했다가 된통 고생했으니 그것에 대한 복수겠지.
알았다면 이렇게 미지근하게 보복할 리 없다. 결국에는 한 식구인데 공조를 파산시킬 것도 아니고.
대신 김류가 앓는 소리는 좀 해야겠지.
‘그러다가 도둑이 제 발 저리기라도 하면 웃기겠는데.’
서인과 북인의 당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비상상황을 제하면 조선 땅에서 당쟁이 그친 적은 없으니 오히려 이게 평소고 정상일지도 모르겠다.
범선 사업은 꽤나 진척되었고 서인도 필사적으로 지원하였으므로 전장은 황해도로 옮겨갔다. 북인이 주로 딴지를 거는 부분은 행정구역의 재편과 재조정된 일부 기반시설의 위치였다.
-이 지역을 왜 여기다가 붙이냐?! 세곡 운송의 용이함을 고려하면 이 고을에 붙이는 게 더 낫다!
-포구를 이쪽 강변에 지어버리면 반대편 고을에서는 접근성이 떨어진다!
논의를 통해 진전하고 개선되는 부분도 있었으나 난상토론이 의도적으로 과열되고 지연되는 걸 지켜보니 참 노골적이다 싶었다.
이들, 당리당략에 앞서는 북인 대부분은 젊고 지위가 낮았다.
비교적으로.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는 젊다거나 지위가 낮다고 할 수 없으니까. 어디까지나 노신 및 재상들과 비교했을 때다.
어쨌거나, 북인 청춘들은 과거 대북천하 때는 시대에 편승하여 부스러기를 주워먹었고 환국 때는 하찮아서 무시됐던 자들이다.
그러니 경각심보다는 거들먹거리며 잘 먹고 잘살았던 전성기에 대한 애향심이 훨씬 큰 것이다.
21세기의 일본이 핵 두 방 맞고 엎어진 뒤에도 정신 못 차리는 증상과 같은 원인이다.
그렇다고, 논의 자체를 금지시킬 수는 없다.
몇몇 놈들이 개처럼 짖어댄다고 모두의 입을 봉할 수는 없잖은가.
다만 너무 과열되면 좌의정 박홍구나 우의정 이상의를 통해 알려줄 생각이었다.
누가 이미 찍혔고, 누가 위험 수위에 있는지를. 그러면 원로들이 알아서 사십 대 청춘들을 단속하지 않을까?
이러한 정쟁을 제하고 본다면, 한양은 비누 없는 비누 열풍에 빠졌다.
얼마나 대단한 물건이길래 종친과 고관대작들도 한두 개 선물받은 게 전부냐는 거다.
그리고 비누를 선물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얼굴까지 하얘졌다면서, 비누가 위생용품이 아닌 미백에 효험이 좋은 화장품으로 알려졌다.
‘……그건 인간들이 평소에 잘 안 씻어서인데.’
그동안 날도 추웠겠다, 위생관념도 없는 이 시대에 사람들이 평소에 씻어봐야 얼마나 씻었겠나.
그런데 과시 좀 한다고 비누 써서 면상을 문질러댔으니 당연히 얼굴이 밝아지겠지.
‘오히려 이득인가……?’
이 시대에서는 알지도 못하고 체감하기도 힘든 위생을 위한 물품보다는 화장품으로 알려지는 게 더 이롭지 않을까.
잊을만하면 어디서 새색시 목이 부러졌다는 말이 들어도 머리에 산을 얹고 다니는 세상이다.
‘……어쨌거나 귀한 기름을 처먹지도 않고 이상한 거 만든다고 열불내는 여론은 안 생기겠군.’
위생용품으로 알려졌다면 그렇게 화를 냈을 사람들도, 이제는 하얀 얼굴을 얻겠다고 비누를 면상에 문질러댈 테니까.
아무튼 나도 갈 길이 멀었다.
비누가 화장품으로 알려질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 * *
봄이 완연하여 따스함도 무르익고, 사람들이 슬슬 더위를 걱정할 즈음.
K-플류트의 진척은 아직 조선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안드로메다 은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건조 계획이 엉망으로 변한 건 아니었다.
남이공은 일정 면에서, 벨테브레이는 도면에서 최대한 세심하게 모든 것을 설계했고 계획은 차질 없이 순항했다.
단지 나아가는 곳이 안드로메다였을 뿐이었다.
원인은 배가 집구석보다 익숙한 사략선 사관의 두뇌에도 존재하는 용적의 한계였다.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다 기억할 수는 없었고, 그렇게 공백이 되어버린 부분은 숙련된 조선공들이 논의를 거쳐 보완했다.
조선공들이 구현할 수 없는 기법 역시 대체되었다.
서양 범선의 선체는 목재가 매끄럽게 접합되는 카벨Carvel 방식으로 건조되었으나, 조선의 조선공들이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그런 기법의 존재조차 몰랐던 참이다.
그래서 조선공들은 현실을 거부할 수 없었던 벨테브레이와의 타협으로 한선韓船 고유의 방식을 이용해 목재를 접합했다.
돛조차도 예외가 되지는 못했다.
조선에서는 서양 범선 돛의 재질인 캔버스를 수급할 수 없어 대신 동양 돛의 소재인 무명을 사용했다.
캔버스의 재료가 흔한 삼麻이고, 이미 삼을 이용해 만드는 직물이 있는 만큼 재현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새로운 종류의 직물을 돛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대량 생산하기는 벅찼으니까.
그렇게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K-플류트는 본토 플류트의 단순한 복제가 아닌 진정한 K-플류트가 되어갔다.
분명 구조는 한선과 크게 달랐으나 안팎으로 듬성듬성 부정할 수 없는 한선의 방식이 스며들었다.
그러니 계획이 말미에 다다를수록, K-플류트의 모습은 벨테브레이가 봐도 ‘이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고 반신반의할 지경이 되었다.
곧 벨테브레이는 K-플류트가 누구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벨테브레이는 K-플류트를 플류트라 칭하지 않기로 했다.
이건 플류트가 아닌 다른 ‘무언가’였으므로.
그리고 혈관에 혈액 대신 김칫국물이 흐르는 네덜란드인을 배로 형상화한 듯한 ‘무언가’의 앞에서, 벨테브레이는 심란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