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조 명군이 되다-191화 (191/380)

인조, 명군이 되다 191화

벨테브레이와 두 부하, 헤이스버르츠와 베스바르트는 완성이 가까워진 K-플류트에 이름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

이전대로 ‘시범선’이라 칭한들 혼동의 소지는 없겠지만, 제삼자나 후대의 사람에게는 너무 막연한 호칭이었다.

남이공의 뜻도 같았다.

K-플류트는 조선사에 전례 없는 새로운 함종이었다. 범선 도입을 긍정적으로 보고, 큰 변혁의 시발이 되리라 생각하는 그에게 이 함종에는 별개의 명칭이 필요했다.

벨테브레이가 보기엔 조선사만 아니라 인류 역사상으로도 전례 없는 함종이었지만.

새로운 함종의 영광스러운 작명권은 최초로 범선 도입을 주장한 벨테브레이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벨테브레이는 솔직한 이름을 제안했다.

“Gruwel.”

“그게 무슨 뜻인가?”

“번역하자면 ‘혐오체’나 ‘무서운 것’ 정도겠군요.”

“음…….”

짜게 식은 남이공이 고개를 저었다.

“화란和蘭에도 이름을 하찮게 지어 무탈하기를 기원하는 풍습이 있는 모양이군……. 하지만 그걸 배 상대로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 자네는?”

지목받은 헤이스버르츠가 말했다.

“Fusie.”

“그건 무슨 의미인가?”

“합쳐쳤다는 뜻입니다. 네덜란드의 양식과 조선의 양식이 접목되지 않았습니까.”

“흐음.”

벨테브레이가 제안한 ‘혐오체’보다는 훨씬 객관적인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남이공은 반려할 수밖에 없었다.

“다들 이름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점을 망각했나 본데 이 배는 조선에서 사용될 걸세.”

혀가 꼬여 발음조차 어려운 단어를 그대로 쓰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고, 번역 역시 가져다 쓸 게 못 되었다.

그동안 조선에서는 함종을 판옥선이니, 거북선이니, 창선이니, 방패선이니 하고 분류했지 ‘혐오체’나 ‘융합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게 무슨 배의 이름인가?

바다괴물 이름이지.

생김새가 한선과는 이질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굳이 티낼 필요는 없었다.

“그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차라리 내가 이름을 짓는 게 낫겠군. 화란선和蘭船.”

참으로 정직한 작명이었으나 원래 한선의 명칭은 이렇게 지었다.

판옥선? 배에 판옥板屋을 씌웠으니까.

거북선? 배가 거북이 모양으로 생겼으니까.

이 배는 화란인이 고안하고 제안했으니 화란선.

“저는 Holland 출신이 아니라 Friesland 출신인데…….”

베스바르트가 작게 투덜거렸다.

네덜란드를 홀란트라 부르는 건 조선을 경기도라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 하지만 어쩌겠나, 조선에 알려진 이름이 화란인데.

“자네들은 조선을 고려라고 부르잖나.”

남이공은 베스바르트의 하찮은 불만을 단호하게 일축하고서 신형 함종의 이름을 화란선으로 확정했다.

벨테브레이는 가만히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배에 ‘네덜란드 배’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걸 본국에서 안다면 다들 배꼽이 빠지겠군…….’

* * *

네덜란드 배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기실 네덜란드 배와는 많이 다른 이 네덜란드 배는 여름의 무더위를 걱정하던 많은 사람들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을 때 바다와 만났다.

벨테브레이와 헤이스버르츠, 베스바르트는 1호 화란선인 화란호에서 각기 선장과 갑판장, 조타장을 맡았다.

“출세했네. 선장에다 사관이라니.”

베스바르트가 실소했다.

고작 한 해 전까지만 해도 사략선 선원에 불과했던 그였다. 미묘한 불만이 있다면, 조타장의 서열이 갑판장보다 낮다는 정도일까.

그러나 갑판장을 맡은 헤이스버르츠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수부들에게 돛줄의 조작법을 알려주는 데만도 바빴으니까.

범선과 조선 군선의 결정적인 차에는 선체보다도 선박의 기동 방식에 있었다.

조선의 군선도 평상시에는 돛을 이용해 항해했으나, 어디까지나 여유를 부릴 수 있을 때뿐.

교전으로 응급한 상황에서는 노를 이용해 기동력을 발휘했는데 범선은 항상 돛으로만 움직였다. 그만큼 조작해야 할 것이 많았고 복잡했다.

또한 범선은 키를 움직이는 방법도 달랐다.

한선의 키는 선외에 노출된 손잡이를 조종하지만, 서양의 범선은 타륜이 등장하기 전까지 선내에서 ‘채찍막대Whipstaff’라는 장치를 이용해 방향타를 조종했다.

두 사람이 각기 갑판장과 조타장을 맡은 이유였다.

수부들은 생소한 장치에도 빠르게 조작법과 기능을 배워나갔다.

천상 뱃사람들이다. 외관이나 작동법만 다를 뿐 궁극적으로 동일한 돛과 키의 기능은 그들에게도 익숙했다.

“다들 무서운 속도로 익숙해지던데, 우리 단물만 빨리고 버려지는 건 아니겠죠?”

“재수없는 소리를 굳이 해야겠냐?”

“너는 재수없는 상판때기를 계속 달고 다니잖아. 이 정도면 양호하지.”

“왜 갑자기 지랄이야?”

“지랄맞기로는 네 면상이 더…….”

일과를 마치고 귀환한 헤이스바르츠와 페스바르트는 만난 지 30초만에 싸움이 붙었고, 가운데에서 벨테브레이는 울려대는 고막에 인상을 찌푸렸다.

“좀 닥쳐라, 이 사관놈들아.”

헤이스바르츠와 페스바르트는 사관이라는 호칭이 마음에 들었는지, 얌전히 입을 닫았다.

출세는 출세였다.

두 사람이 선원으로 일했던 사략선은 자국 정부의 공인만 받았다 뿐이지, 엄연히 해적선.

네덜란드와는 다른 깃발을 단 모든 상선과 군선이 적이었다.

당연히 매 순간 목숨 걸고 활동해야만 했고 그다지 유쾌한 삶은 아니었다. 한탕 치고 빠지는 데 실패한 모든 해적은 물고기밥이 됐거나 교수대에 매달린 인간 과일이 되었다.

실제로, 세 사람은 인지하지 못했으나 그들이 조선에 표류하기 전 선원으로 일했던 아우베르케르크 호는 해양 경쟁국 포르투갈의 선단에 나포되어 배는 불살라지고 선원은 모두 처형됐다.

도리어 조선에 표류된 게 천운이었던 셈.

벨테브레이가 말했다.

“안 그래도 먼저 남 대감에게 물어봤다.”

시답잖은 일로 투닥대기 바쁜 부하들이 이제 하는 걱정을, 자신이 먼저 하지 못했을 리 없잖은가?

“뭐래요?!”

“빨리 알려주십쇼! 그래야 홀란트 호를 타고 홀란트까지 튈지 말지 결정하죠!”

두 사람의 채근에 벨테브레이가 도리어 물었다.

“……튈만했으면 내가 너희들 상대로 이러고 있겠냐?”

헤이스바르츠와 페스바르트의 얼굴이 동시에 밝아졌다.

“만금을 하사한대요?”

“동양의 신비로운 보물이라도 내려주는 겁니까?”

“염병은…….”

벨테브레이는 철부지 같은 수하들의 언동에 질색하고는 덧붙였다.

“당장은 우리 일이 다 완수되지 않아서 별다른 말이 없는 거고, 범선이 세곡 운송에 도움이 된다는 게 입증되면 응당 책임자 자리에도 오를 수 있다더라.”

“오오……!”

“사관 다음에는 선장입니까?!”

“그런 것까지는 말해주지 않았어. 선장이 될 수도 있겠지만, 함선 설계자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수도에서 물류 운송을 책임질지도 모르지. 기왕이면 그게 좋겠는데.”

선원 생활은 질린 벨테브레이다.

범선의 도입을 최초로 제안한 건 조선의 귀족인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였다. 이대로 선장을 계속 맡게 되더라도 사략선 사관보다야 훨씬 출세한 셈이지만, 그에게 최선은 정해져 있었다.

“분명한 건, 이 일과 관련된 쪽으로 좋은 자리를 얻을 거라는 점이야. 단물이 다 빠졌어도 지금은 우리가 제일 전문가고, 유능한 뱃사람은 항상 부족하다니까.”

해도도 더 작성해야 하고, 태안반도를 우회할 때의 경로도 찾아내야 했다.

무작정 우회하는 것보다는 최적의 경로를 찾아 이용하는 게 시간과 비용을 크게 절약해줄 테니까. 항해는 그게 기본이었다.

벨테브레이의 확약에 헤이스바르츠와 페스바르트는 죽다가 살아나기라도 한 양 안도했다.

보답보다는 배신을 더 걱정했던 두 사람이었다.

공권력은 응당 불신의 대상.

지구 반대편이라고 해도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신비의 나라에서 자신들을 단물만 쪽 빼먹은 다음 팽해버리면, 죽도록 고생했는데 또 사략선 선원이나 진배없는 구질구질한 삶을 마저 이어가게 될 것 아닌가.

그래도 벨테브레이가 사관이라 자신들보다는 더 똑똑하겠지, 하고 막연한 믿음으로 따라왔는데 이제야 갖은 고생이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뒤통수 맞더라도 선장님 뒤통수는 먼저 때리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후우. 그럴 일이 없어져서 다행입니다.”

“그러게.”

두 사람이 태평하게 선상반란을 대신한 지상반란 계획을 털어놓자, 벨테브레이는 어이가 없었다.

“이 배은망덕한 종자들아.”

* * *

벨테브레이는 이세계에 떨어진 이래 목자와 같은 마음으로 부하들을 이끌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부하들은 만성적으로 배신을 공모해왔다.

그동안 자신의 뒤통수가 깨지지 않았던 건 아가페적 사랑을 베풀어온 자신에게 주의 은혜가 함께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두 부하가 자신을 놀릴 요량으로 마음에도 없이 배신을 떠들어댔기 때문일까?

벨테브레이의 철학적이고 심리적인 사유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남이공은 여름이 정점에 이르러 태풍 위협이 발생하기 전에 시험을 완수하고자 했다.

수부들이 마침 범선 운항에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과 경험을 갖추었으므로 벨테브레이는 지체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조금 더 극적인 연출을 위해, 원래는 모래로 대신하고자 했던 화물을 진짜 세곡으로 채웠다.

남이공이 말했다.

“범선의 용이함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단지 운송이 ‘가능’하다는 것만 보여서는 안 되네. 실제로 해내야지.”

“사고라도 생기면 우린 다 죽은 목숨이겠지요?”

승선을 앞둔 벨테브레이가 농을 건넸다.

뱃사람치고는 과감한 언행이었다.

죽음이 가까운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단어 하나에도 민감한 편이었으므로.

그만큼 자신감이 있어서였다.

어쩌다 보니 플류트가 아닌 K-플류트가 되어버렸지만, 화란호는 수부들을 훈련하기 위한 시범 운항에서 정상적 기능했고 또 우수했다.

대형 조운선의 운반량 한 배 반을 적재하고도 공간이 남았다. 운항은 여유로울 것으로 예상됐다. 벨테브레이는 화란호가 자신을 귀족의 지위로 데려다줄 꽃가마로 보였다.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자네 목숨만 걸려 있으니까. 나는 육경의 장관이라서 배에다 쌀 조금 잃는다고 목까지 떨어지진 않을 걸세. 게다가 조정에 벌어다 준 금은이 얼마인데.”

남이공은 대수롭지 않게 벨테브레이의 농담을 받아넘기고서 덧붙였다.

“하지만, 사고가 생기면 범선의 도입이 요원해질 거라는 건 잘 알지. 너무 자만하지 않는 게 좋을 걸세.”

“걱정하지 마십시오.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가시게.”

남이공은 차마 동승하지 못했다. 물고기 밥을 주는 일이라면 질렸으므로.

벨테브레이는 육로로 이동하기로 한 남이공을 뒤로 하고 배에 올랐다.

곧, 신호와 함께 닻이 거두어지고 돛이 펼쳐졌다.

바람의 힘을 받은 화란호가 물살을 가르며 조금씩 포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한선과는 다른 거대한 몸뚱이가 파도에 흔들거리며 바다로 나아가는 모습은 분명 이질적이었으나 동시에 장관이기도 했다.

화란선 건조에 공을 들인 건 벨테브레이와 두 네덜란드인 부하만은 아니었다. 남이공은 멀어지는 화란호가 세상을 향해 독립하는 자식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 거대한 몸뚱이와 높게 솟은 돛이 수평선에 다다라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야, 어렵게 발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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