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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92화 (192/380)

인조, 명군이 되다 192화

“흐으음…… 하아.”

벨테브레이는 갑판에서 심호흡했다.

“방구라도 뀌셨습니까.”

“쳐돌았나.”

벨테브레이는 미친 소리나 하는 갑판장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시야는 가리는 것 없이 사방의 수평선으로 뻗어 나가고, 드높은 하늘에는 새하얀 구름 몇 점이 유유자적 흘렀다.

뜨거운 햇빛이 작열하는 아래에서.

짜고 따스한 바닷바람이 불었다.

벨테브레이에게는 집구석보다 더 익숙한 환경.

대양.

드넓은 바다.

고단한 선원 노릇에는 질렸어도 이 해방감만은 질리지 않는다.

“그동안 뭍에서 지냈던 나날이 속박처럼 느껴질 정도로군.”

물론, 이런 해방감이 언제까지고 이어지는 건 아니다.

항해가 예정된 일정보다 길어질 때라던가, 폭풍우 따위를 만나 영혼마저 신체에서 자유로워질 위기에 처한다든가.

그런 상황에 놓이면 무한했던 해방감은 긴장에서 두려움으로, 고뇌에서 좌절로 빠르게 단계들을 거치며 심적 고통을 쏟아내는 괴물로 변모한다.

망망대해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감정을 느끼게 만들고, 이따금 ‘씨발’이라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게 만드는.

다행히, 이즈음 조선의 서해안은 그런대로 온화했다.

지상에서 그리 멀어지지도 않았다. 일대 지리에는 생소했으니까. 틈틈이 뭍을 확인하며 나아가야 했다.

안전 면에서는 이상적인 항해다.

화란호는 훈풍을 받으며 계속 북상했다.

조선의 수부들은 이 정도 바람에 이 정도 속도라면 조운선보다 두 배는 빠르다고 했다. 벨테브레이는 자식이 인정받은 것 같아 뿌듯해졌다.

좀 기괴하고, 이상하면 어떤가.

자신이 만들어낸 배였다.

몇몇 부족한 부분과 어쩔 수 없는 부분은 조선공들의 손이 탔지만, 이 정도면 분명 자신의 자식이 맞았다.

그리고 이 착한 자식은 아버지를 이세계 귀족의 지위로 데려다주고 있었다.

벨테브레이는 갑판장을 향해 말했다.

“자네는 내가 아니었으면 갑판장은커녕 여전히 갑판에 말라붙은 가래침이나 닦아내고 있었겠지. 판Van 벨테브레이의 위대한 인생 항해에 얹혀가게 된 걸 영광으로 알도록!”

“……쳐돌아 버렸습니까, 선장님?”

* * *

벨테브레이가 돌아버린 정도는 차라리 양호했다.

그가 태평하게 바다를 건너고, 북쪽 한양에서는 새로운 화장품이 선풍적인 명성을 얻으며 무수한 수요를 창조하는 동안.

서쪽의 제국에서는 반란군과 도적들이 강역의 사분지 일을 차지하는 진짜로 쳐돌아 버린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원인은 십 년도 더 전에 벌어진 토사土司들의 반란이었다.

그간 명나라가 지속한 토벌전으로 토사 반란군의 세력은 조금씩 축소하였으나, 위충현이 다시 중앙의 패권을 확보하자 제국의 쇄신을 실낱같은 희망으로 기대하던 관군과 사천은 모래성처럼 무너져버렸다.

그러자 이전부터 기근과 사천에서 넘어온 토사 반란군으로 민심이 극도로 흉흉했던 섬서에서 대규모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이러한 소식에 자극받은 여타 지역에서도 산발적인 봉기가 발생했고, 이런 흐름은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 일대조차 예외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발생한 봉기의 흐름은 여타 지역과는 달랐다.

조선으로 치면 경기도에 해당하는 직예直? 남부, 오교현?橋縣 어느 장원에서.

“왕 대인!”

한 시종이 시급히 주인을 찾았다. 곧, 침소의 방문이 열렸고 자다 깬 왕 대인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냐.”

“크, 큰일입니다요.”

“그러니까…….”

“직접 보셔야 합니다!”

왕 대인은 질색을 하고서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안절부절못하는 시종을 따라 장원의 후원으로 향했다.

여전히 잠기운이 다 가시지 않은 왕 대인이었다.

날씨는 따뜻했고 바람은 포근했다. 시답잖은 일이라면 한숨 푹 자고 일어난 다음 시종을 벌주리라 어렴풋이 생각했다.

하지만, 시종의 발이 멈추었을 때 왕 대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 어어? 이게 다 어찌 된 일이냐?!”

왕 대인은 후원에서 수십 마리의 닭을 길러왔다.

그러나, 지금 닭장은 한쪽이 우악스럽게 뜯겨나가 휘고 부서진 채 내쳐졌고 닭은 모조리 사라진 상태였다.

“내 다아아아앍!”

경악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린 왕 대인은 곧장 닭장 앞에서 교차하는 무수한 발자국을 발견했다.

도둑 한두 명이 닭을 훔쳐 간 게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리고 이렇게 떼거리로 장원에 쳐들어와 마구잡이로 닭을 훔칠 놈들이라면…….

“그 패잔병들 짓이로군!”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요동이 함락된 뒤, 본디 그곳을 목숨 걸고 지켰어야 했을 무수한 요동군이 인접한 직예로 흘러들어왔다.

이는 직예의 남단인 오교현도 마찬가지였다.

패잔병들은 현 곳곳에 분산 수용되었고, 갈 곳 잃은 패잔병들이 다 그렇듯이 이들은 숨 쉬듯 크고 작은 말썽을 일으켜댔다.

왕 대인은 이들을 제외한 다른 어떤 용의자도 떠올릴 수 없었다.

“빌어먹을 놈들! 이따위 도적질이나 할 거라면 요동에서 오랑캐들 상대로나 도적질할 것이지……!”

비분강개하던 왕 대인이 시종에게 일렀다.

“너!”

“예, 예?”

“앞장서라!”

“……?!”

왕 대인의 말에 시종이 경악해서는 만류했다.

“아이고, 안 됩니다! 이름만 요동군이지, 순 도적놈들과 다를 바 없는데 찾아가서 어쩌시려고요!”

“따져야지!”

“그놈들이 곱게 사과라도 하겠습니까…….”

“그러니 이참에라도 가서 버릇을 들여놔야지! 안 그래도 동네가 그놈들 때문에 바람 잘 날이 없었는데, 나조차도 당하고 침묵한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시달리겠느냐!”

왕 대인이 재차 안내를 채근하자, 시종은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도 앞장섰다.

요동군의 주둔지는 마을 외곽, 산비탈에 있었다. 산도적과 진배없는 놈들이기 때문일까.

간만에 산을 방문한 왕 대인은 곧장 코를 벌름거렸다.

익숙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풍겨왔다.

왕 대인은 더욱 거친 발걸음으로 시종을 쫓았다.

그리고 도착한 요동군의 주둔지에서는.

가장자리 중구난방 펼쳐진 천막들 사이로 솥단지가 김을 내뿜고 있었다.

요동군은 그런 솥단지를 가운데에 두고서 제각기 나무토막과 돌을 깔고 앉은 채였다.

다들 손에는 하얀 고기를 든 채 입에는 기름기가 번들거렸는데, 발치에는 먹다 남긴 얇은 뼛조각이 즐비했다. 그 상태로 왕 대인과 딱 눈이 마주친 병사들은 서로 바삐 시선을 교환했다.

“네 이놈들!”

왕 대인이 일갈했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산새들이 후드득 날아올랐다.

“마을에서도 갖은 사고는 다 치더니, 이제는 닭까지 도적질하여 훔쳐먹느냐!”

그러자 병사 중 하나가 질린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서. 어떻게 해드릴깝쇼.”

“뭐……?”

왕 대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물들었다.

“도적질을 저지르고 어찌 이렇게 당당할 수 있단 말이냐! 정녕 나라의 법이 무섭지 않으냐?!”

허허허.

하하하!

왕 대인의 말에 요동군은 하얀 조각을 튀기며 웃어댔다.

그들에게는 법만큼 우스운 것도 없었다.

제국 전역에 기근이 들었고, 이는 직예도 마찬가지였다. 지역들 대부분이 주민 먹기도 부족한 식량을 요동군에 매각하는 것을 금지해버렸다.

그렇다면 병사들은 얌전히 굶어죽으라는 말인가?

이를 중재해야 할 부대 지휘관이나 중앙의 관리들은 정작 나몰라라였다.

지휘관들은 얼마 남지 않은 물자를 긁어다 밀매상들에 헐값으로 팔아넘겼고, 또 금세 자리를 비워버렸으며, 중앙의 관리들은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아예 모르는 듯했다.

혹은 알고 있음에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있던지.

이것이 대명의 지엄한 국법이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힘없는 놈은 나가 뒈지라는 식이다.

그렇다면 자신보다 더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하고 핍박하더라도 무슨 상관이겠는가?

어차피,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다 굶어 죽을 판국인데.

요동군들은 굳이 이러한 사정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지는 않았다.

하소연을 해서 뭐라도 달라진 적이 없었던 덕이다. 신세 한탄을 하던 시절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다.

그들은 그저 저들을 착취하고 핍박하며 외면해온 자들과 마찬가지로, 뻔뻔해지기로 했다.

“씨바, 이미 털 다 뽑고 솥단지에 처넣어버렸는데 어쩌라고? 뭐. 이거라도 돌려드릴까?”

한 병사가 먹던 조각을 왕 대인에게 던졌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왕 대인의 얼굴에 기름과 하얀 조각이 튀겼다.

“……!”

시종은 경악했고, 왕 대인은 진노했다.

“하찮은 도적놈들 주제에 감히 나를 욕보이다니! 그래, 네놈들은 기어코 목이 다 달아나야만 정신을 차리겠구나! 현령에게 이 일을 알릴 터이니, 지금 처먹은 닭은 마지막 만찬인 줄로 알아라!”

그렇게 왕 대인은 살벌한 엄포를 놓고서 씩씩대며 발을 돌렸다.

상황이 반전된 건 그 순간이었다.

시종도, 왕 대인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한 요동군이 곁에 기대놓았던 창대를 쥐고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발을 돌리고서 몇 걸음 멀어지지 않은 왕 대인을 향해 창을 던졌다.

퍽!

닭고기를 던졌을 때와 비슷한, 그러나 훨씬 둔탁한 소리가 났다.

왕 대인은 가슴에 돋아난 창대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몇 번 건드려보더니, 환상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왕 대인의 마지막이었다.

그는 유언은커녕 단말마조차 내뱉지 못한 채, 풀썩 쓰러져 피를 쏟아냈다.

“으아아아악!”

그 광경에 시종이 비명을 내질렀다.

다른 요동군이 창을 던졌지만, 살기 위해 내달리기 시작한 시종을 맞추지는 못했다.

그리고 산비탈 아래로 살인이다, 살인이다, 요동군이 왕 대인을 죽였다, 하는 경고가 빠르게 멀어졌다.

요동군은 누군가의 충동적인 살인을 책망하지 않았다.

유지인 왕 대인의 닭을 훔쳐 먹을 때부터, 이렇게 될 가능성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면 거짓말이었다.

단지 왕 대인마저 굴복하여 오교현의 폭군으로 등극하느냐, 혹은 기어코 피를 본 다음에야 폭군으로 등극하느냐의 차이만 있었을 뿐.

배가 든든해진 요동군은 저마다 무장을 챙겼다. 곧 토벌군이 들이닥칠 터였다. 하지만 그들에게 전의가 조금도 없으리란 건, 요동군부터 잘 알고 있었다.

말단 병사의 임금은 아주 오래전부터 끊겼다. 직예의 상황조차 다르지 않았다.

제 목숨을 거는 행위에 일말의 가치조차 매겨주지 않는데 누가 과연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저들을 저지하려 들까.

요동군은 자신이 있었다.

요동 없는 요동군의 반란은 그렇게 몇 마리 닭으로 시작됐다.

오교현의 관군은 과연 요동군의 예상대로 창 한 번 제대로 섞지 못하고 패퇴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작정 불려나온 다른 요동군은 물론, 현지의 굶주리고 분노한 관군까지 일부 합류하면서 반란 세력은 빠르게 확대됐다.

반란군은 방비가 삼엄한 북경으로 쳐들어가는 대신 남동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직예만큼은 아니어도 부유하여 배와 호주머니를 채울 구석은 많았으니까.

여러 도시를 함락하며 요동 없는 요동반란군은 수효만 물경 십여 만에 이르렀다.

설상가상으로 이를 진압하기 위해 등래순무登萊巡撫 손원화孫元化가 파견한 장도張燾의 군대마저 반역에 가담해버렸다.

그 과정에서 부하들에게 구속된 장도는 과거 홍이포 복제와 포수 양성에 일조했던 인물이었다. 덕분에 요동 없는 요동반란군은 규모는 물론 보유 화력마저 폭증하여 진압군을 압도하게 되었다.

즉, 명나라에서는 토착민과 농민, 그리고 그들의 반란을 진압해야 할 군대까지 다 반란을 일으킨 셈이었다.

제국은 당장 죽지 않는다는 듯 현지에서는 매섭게 번져대는 반역과 봉기의 산불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그들의 주인이자 우두머리인 북경에서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결국, 지원을 받지 못하고 단독으로 요동반란군과 맞섰던 등래군은 끝내 붕괴했고 산동의 경제적 수도인 등주는 요동반란군의 차지가 되었다.

진압군 총사령관 손원화는 적지에서 탈출했으나 탈영죄로 처형당했다.

망할 나라는 하나의 이유만으로 망하지 않음을 증명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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