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조 명군이 되다-193화 (193/380)

인조, 명군이 되다 193화

“명에서 등래대원수라는 이름으로 서찰이 왔는데, 아무리 봐도 이상합니다.”

“그 직함부터가 수상쩍기 짝이 없군요.”

“그러하옵니다. 또한 예조판서에게 자문을 구하였는데, 등래대원수를 자칭하는 진광부陳光福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남이공이 등주를 통해 명나라를 오갔으니, 그곳의 관리들에 대해서라면야 조선의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런 남이공조차 듣보잡인 놈이 대원수 타령을 할 일이야 너무 뻔했다.

“등래가 반란군의 손에 넘어간 모양입니다.”

“신들 역시 그리 사료하고 있사옵니다. 과연 그러하다면 등래대원수의 서찰이라는 것도 기실 역적 수괴가 보낸 글줄에 불과하니, 태워 없앰이 어떻겠사옵니까?”

“그렇게 하세요.”

오교병변吳橋兵變인가.

요동군 패잔병이 오교현 유지의 닭을 훔쳐먹었다가 걸려서라는,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일어난 사건.

엄밀하게 말하면 그냥 닭 좀 훔쳐먹었다는 이유만으로 벌어진 일은 아니다.

원래 반란이 일어날 만한 상황이었고, 닭은 그저 화약 더미에 던져진 불씨였을 뿐.

미친놈이 딱총 좀 갈겼다고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것과 비슷하다.

그만큼 명나라 상황이 전반적으로 개판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닭 몇 마리가 반란의 계기가 된다? 쉽지 않다.

원래 역사에서 오교병변의 주모자는 나에게도 생뚱맞은 진광부란 놈이 아니라 모문룡네 떨거지였던 경중명耿仲明이었다.

놈은 없어졌어도, 일어날 만한 일이라 일어난 모양이다.

내려갈 팀은 내려가고 망할 나라는 망하는 것처럼.

“예조판서가 거론되어서 하는 말입니다만, 그에게서 범선 사업의 보고는 없었습니까?”

“마침 예조판서가 자문과 함께 전달하기를, 범선의 시범 항해는 성공적이었으며 현재 1호 화란선의 사양으로는 대형 조운선보다 두 배는 많은 화물을 두 배 빠른 속도로 운송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고 하였사옵니다.”

“단순한 계산으로는 네 배의 효율이로군요.”

“그러하옵니다.”

놀라운 성과다.

개선을 통해 400%의 효율을 달성하는 건 이 시대에서만 가능한 기적이 아닐까.

엄밀히 말하면, 효율을 그렇게까지 높게 쳐주기는 어렵다.

400% 범선과 대형 조운선을 일대일로 비교하여 나온 수치고, 함선의 건조비와 운영비까지 고려한다면 수치는 현실적인 수준으로 내려오겠지.

그렇다손 쳐도 괄목할 성과임에는 변함이 없다.

범선을 도입해 얻어낸 진정한 진전은 조선이 더는 연안만 고집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태안반도를 우회할 수 있다면 당연히 서해와 남해의 다도해多島海도 우회할 수 있다. 즐비한 섬과 암초 지대 탓에 물살이 복잡하고 유속이 빨라 생각 없이 다녔다간 큰일 나는 곳.

그 큰일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임진년 무수한 일본인이 몸소 보여준 바 있다.

“호조판서?”

“예, 예에…….”

나의 호명에 김신국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부르르 떨었다.

지금은 한여름인데.

나만 보면 반년 전의 추억이 떠오르는 걸까.

“화란선과 기존 조운선의 건조 및 운영 비용도 따져보아 화란선이 기존의 조운선을 대체 또는 교체할 만한지 알아보고, 할 만하다면 비용 대비 실리를 계산하여 도입을 서두를지 혹은 점진적으로 이뤄갈지 분석해서 알려주세요.”

“서, 서두르겠사옵니다.”

김신국이 다시 부들부들 떨었다.

수명을 갈아서라도 최대한 빨리 내놓지 않으면 경회지 연못에 처넣어버리겠다, 따위의 환청이라도 들은 걸까.

그렇게 해버려도 별로 문제는 안 되는 계절이다.

좀 찝찝해지기야 하겠지.

하지만 김신국이 보는 사람이 더 애처로워질 정도로 떨었으므로 당부했다.

“……너무 서두르진 않으셔도 됩니다. 이는 백년대계와 직결된 일이니. 일부러라도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겠지요.”

“각골명심하겠나이다…….”

김신국이 내심 안도한 얼굴로 답했다.

정말 환청이라도 들어버린 걸까.

지난겨울의 일은 순전히 김신국 주변에서 얼쩡대는 김류를 퇴치하기 위한 조처였다. 이런 왕의 따스한 진의는 알지 못하고, 그저 추워 떨었다는 것만 기억하니 씁쓸할 따름이다.

얼마나 씁쓸한지 올해 겨울이 기대될 정도로 씁쓸하다.

몇 번 더 들어갔다가 나오면 이 왕의 무한한 신하 사랑을 깨닫지 않을까? 분명, 얼음장에 넣어놓은 채로 내 사랑이 느껴지냐고 물어보면 아주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거 같은데.

* * *

화란호의 시범 운행이 성공적으로 종결한 뒤.

“이제 뭘 하실 겁니까?”

자칭 판Van 벨테브레이가 남이공에게 물었다.

남이공은 육로를 통해 공진창貢津倉으로 나아가던 중, 화란호와 벨테브레이 일행이 예상보다도 훨씬 일찍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전까지는 걱정으로 안장이 가시방석이었던 남이공이다.

화란호는 완전히 새로운 양식의 선박이었고, 태안반도를 우회하는 길을 개척하는 것도 처음이었던 데다, 신뢰도가 아직은 불투명한 화란인들이 선장에 돛과 키를 책임졌으니까.

그러나 우려했던 일이 우려로만 끝났음을 알게 된 남이공은 한가지 확고한 결의를 품은 채로 공진창에 도착했다.

“뭘 하냐니……? 아무것도 안 할 걸세! 귀국하고도 반 년 가까이 도성에 발을 들이지 못했어. 또 이딴 일감이 떨어지면 차라리 사직하고 말지.”

“판서 자리를 그렇게 쉽게 포기해도 되는 겁니까?”

벨테브레이의 순진한 물음에 남이공은 학을 뗐다.

“나는 너무 늙었어! 너무 부려지기도 했고. 원하면 쉬어야지.”

“쉬다가 질리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판서까지 찍었으면 원할 때 비슷한 위치로 복직하는 건 쉽네. 물론, 조정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으나 지금 나는 쉬는 것보단 고생하는 것에 더 질렸으니 미리 걱정할 부분은 아니지.”

“흐음. 조선의 공무원은 안정적인 직종이군요.”

“재수가 어련히 없으면 고생도 안정적으로 할 수 있지.”

혹사의 말미에 이르러 해방만을 앞둔 남이공은 회의적으로 변해버렸다.

퇴청까지 고작 반 각 앞둔 관리의 심리가 천 배쯤 심화하였다고 할까.

“자네는 갑판에서보다는 의자에 앉아서 일하고 싶다 했으니, 전함사典艦司에 신설될 해운판관海運判官으로 추천해두었네.”

“오? 어떤 자리입니까.”

“이름만 들어봐도 대충 짐작했겠지만, 해운을 관장하는 직책일세. 해운을 수행하는 조운선의 관리 역시 해운판관의 소관이고.”

“알짜군요.”

벨테브레이의 낯이 순식간에 음험해졌다.

“이보게…… 이상한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이상한 생각이라니요. 무슨 의심을 하셨건 간에, 단언컨대 오해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벨테브레이는 뻔뻔하게 아닌 척하였으나 노회한 남이공의 안목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내게는 시치미를 떼어도 별일 일어나지 않겠지만, 전하께서는 호락호락하신 분이 아니시네. 즉위하실 때 기념 삼아 나라의 큰 도적과 작은 도적들을 모두 베고 매달아버리셨으니까.”

보통 왕이 즉위하면 대사령大赦令을 통해 죄수들을 풀어주는 등의 혜택을 내렸지만, 금상은 달랐다.

사직을 좀먹었던 권신과 간신배들을 주륙했고 심지어는 반정의 후광을 쓴 의군마저 민간을 침해했다면 도적의 죄를 물어 사형에 처했다.

그때 칼날을 피했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북병사가 어사로 임명되었을 때 지방에서 습격당한 것과 품급 높은 종친인 흥안군이 북병사 독살 사건에 연루된 것 모두 왕의 자작극으로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에는 워낙 사건 자체가 충격적이라 냉정하게 상황을 보지 못하였으나, 지금 와서 돌아보니 모든 게 시의적절했다.

사건 전후로 금상은 선혜법 도입과 궁방전 몰수를 강하게 추진했으니까.

물론, 이러한 해석을 공공연히 거론하는 사람은 없었다.

용린을 함부로 건드렸다간 신변이 위태로워진다는 동서고금의 뻔한 진리를 떠나, 금상은 나라를 외침에서 거듭 구제했고 조정을 굳건하게 지탱하고 있었다.

그런 존재를 굳이 자극한다는 건 만인의 적이 되어 가문 단위로 말살을 당해보겠다는 뜻과 마찬가지.

남이공과 마찬가지로 녹봉 오래 타 먹어본 사람들만이, ‘이런 내막이 있지는 않을까.’하고 저마다 속으로 쉬쉬할 따름이었다.

이러한 마당에 배만 아니라, 이문에도 밝은 홍모이가 공직에서 특기를 발휘하려 들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까.

기껏 좋은 공적을 세워놓고도 단호한 왕업 앞에 깔려버릴 터였다.

“잿밥에 관심이 있다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라고 조언해 줄 수밖에 없겠군. 어차피, 당장 해운판관의 전권은 거의 전무하고 담당할 범위도 협소하네.”

아직 경상도와 전라도에는 선혜법이 도입되지 않았고, 태안반도 이남에서는 아예 육로를 통해 세곡을 운송했다.

이러한 와중 신설된 해운판관과 수운판관은 시범 운항의 연장선이었다.

육로보다 수로의 운송 효율이 월등한 지역에서만 시범적으로 조운을 시행하기로 했으니까. 성과가 좋다면 확대되겠으나 부실하다면 혁파될 터였다.

남이공이 장기적인 안목에서 접근하라고 한 건 이 때문.

“설마 외지인인 자네에게 대뜸 신기한 배 하나 만들어냈다고 무한한 권력을 맡기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겠지?”

“크흠……. 아쉽군요. 저와 이곳 사람들이 다른 건 머리카락과 피부색 정도인데요.”

“그 외에도 다른 점이 많지. 하지만 조선은 선진한 문명국이니, 자네가 신뢰도와 능력을 꾸준히 입증한다면 원하는 부와 권력을 얻을 수도 있겠지. 전하께서 용인하는 하에서는 말이야.”

“흠. 그건 네덜란드에서도 마찬가지였지요. 두고 보십시오. 지상 최강의 부와 권력을 일궈낼 테니.”

비록 공직에서 용돈을 벌기에는 어려워졌지만, 일국의 해운을 관장하다 보면 관련 분야의 경험과 숙련자들과의 인맥이 두터워지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자본과 인맥이 모두 충분히 마련되었을 때…….

조선 동인도회사를 세워 이 땅의 ‘얀 피터르스존 쿤’이 되리라!

‘……잠깐. 조선은 인도보다 더 동쪽에 있는데. 그러면 이름을 서인도회사라 지어야 하나?’

그러나 서인도(카리브)는 지구 반대편에 있었다. 신대륙으로 가로막혀 조선이 활동하기엔 너무 먼 세상이었다.

잠시 고뇌한 벨테브레이는 이 문제를 잊기로 했다.

지구는 둥그니 아무튼 인도가 동쪽에 있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 * *

호조가 작년의 세입을 정리해 보내왔다.

여름이 다 되어서야 정산을 마친 이유는, 국가 단위에서 이루어진 입출을 아날로그 방식으로 계산하기 때문.

그 와중에도 입출은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현재 국고 상황은 대강 때려 맞출 수밖에 없다.

창고가 한 곳도 아닐뿐더러, 세곡 외에도 다종다양한 현물이 있어서…….

그래도 장부상 드러나는 올해 봄까지의 재정은 매우 쾌적했다.

세출이 크지만, 그것도 세입 역시 크기에 가능했다.

충청도의 생산성이 놀라웠다.

역시 하삼도라 일컬어지는 조선의 곡창지대 중 하나이기 때문일까.

경상도와 전라도와 비교하면 충청도는 하삼도에서 최약체겠지만, 앞서 선혜법이 시행된 강원도와 비교하면 선녀처럼 보인다.

강원도는 세곡 생산성보다는 오히려 특산품이 더 가치가 있던지라.

선혜법을 도입하여 세법이 개선되었어도 티가 나지 않았던 탓.

“경상도와 전라도에도 선혜법을 도입하면 진짜 나라가 달라질 정도겠는데.”

조선의 머리가 한양에 있다면, 그것을 돌아가게 만드는 심장은 하삼도에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무수한 백성과 농지에 하삼도가 있는 탓.

그러나 두 지역은 임란에 직격당했고, 그 와중에도 암군이 연이어 집권하면서 무수한 백성과 농토가 제도에서 이탈해 음지로 흩어졌다.

두뇌가 멀쩡하게 돌아가도 심장이 파업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반대로, 심장이 다시 돌기 시작한다면 조선은 새로운 지평을 맞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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