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94화
유혹은 강했지만, 그만큼 신중해야 했다.
경상도와 전라도에 선혜법을 도입하는 것이 조선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일이라면, 그 과정은 심장 수술이라 해야 할 테니까.
전례도 있다.
인조는 집권 직후 하삼도 전체에 날치기로 선혜법(삼도대동법)을 확대했다.
조세 개혁으로 민심을 위무하고 파탄 난 재정을 회복하겠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날치기였던 탓에 준비도 부족했고, 그 과정도 조잡했던 탓에 하삼도의 선혜법은 곧장 현실적인 한계와 지주들의 반발에 부닥쳐 고작 한 해 만에 폐지되고 말았다.
그렇게 좌절하여 동력은 상실하고 부작용만 무수히 남긴 전례는 개혁에 걸림돌만 되어버렸다.
하삼도에 다시 선혜법이 도입된 건 인조가 질펀하게 똥을 싸지르고 50년은 더 지난 뒤.
다르게 말하면, 인조의 섣부른 정책 시행이 조선의 역사를 반백 년 늦춘 셈이다.
차라리 10년 20년 지지부진하게 논의한 끝에 가까스로 도입하는 것보다 못한 결과다. 그럴 바에야 백 번 신중한 게 낫다. 서인조차 원점의 거론은 회피하고 범선 도입을 주장하며 개혁 과격파를 빙자하는 이유다.
여기에 북인들도 ‘우리 밑천 건드리는 건 안 된다, 이놈들아!’라는 진심은 절대 말하지 않고 개혁 신중파로 위장하여 변죽만 울려대는 중.
이게 후대의 교과서에는 어떻게 표현되려나.
“아무튼, 이놈이고 저놈이고 딴생각만 하면서 이상한 소리 하는 데는 전문가야. 그러니 정치하고 있겠지만.”
호조의 세출입 보고서에 직인을 찍고 넘기니 다음 상대는 예조판서의 사직소다.
내가 늙어서 몸도 아프고 병에도 걸렸으니 쉬게 해달라는 뻔한 내용.
그동안 말만 조금씩 달라졌을 뿐, 몇 번 올라올 때마다 다 반려했는데 아직도 이러는 건 정말로 쉬고 싶다는 뜻인가?
아니면 챙겨달라는 복심이 있어서인가.
‘애매하네.’
원래 조선의 신하들이 하는 만성적인 거짓말이 두 가지 있다.
죽여주시옵소서, 사직을 윤허해 주시옵소서.
그렇다고 옳다구나 죽이거나 윤허해 주면 안 된다. 다 제가 아쉬운 게 있어서 하는 엄살이라 그렇다.
‘게다가 남이공은 강짜도 부릴 만한 인재이고…….’
해낸 일이 많은 사람이다.
북경에서 벌어다 들인 금은이 얼마이며, 또 생소하기란 남들과 마찬가지였을 범선의 도입에서도 꼼꼼했다.
유일하게 해내지 못한 일이 중고 대포를 매각하는 것이었다.
원래 그거 하려고 북경으로 갔던 거라.
그런데 명나라가 위기감이 없었는지 결국 대포는 못 팔았다.
이상한 놈들이다. 이러다가 나라 망한다는 생각은 안 드나?
……안 들었으니까 망했겠지.
시기도 조금 안 맞긴 했다.
홍태주가 원정을 조금 덜 서둘렀다면 몰랐겠는데, 급발진하더니 그대로 터져 버려서.
아무튼 남이공은 대포 대금 대신 명나라 대신들에게서 매수 대금을 받아 챙겼으니 충분히 참작할 수 있다.
본인도 그걸 잘 알아서 먹지 않고 나라로 보낸 걸 테고. 덕분에 해낸 일이 많았다. 충청도의 잘 닦인 길과 개축된 포구에는 남이공의 공적이 서려 있다.
‘이 정도로 해놓고 설마 욕심 없이 사직하고 싶을까?’
설마.
‘챙겨줄 게 뭐가 있는지 고민해 봐야겠네.’
* * *
“경하드리네. 전하께서 궤장을 내리신 건 이번이 두 번째 아닌가?”
호조판서 김신국이 이죽거렸다.
첫 번째로 궤장을 하사받은 사람은 이원익. 폐조 시절 야인으로 있다가 금상의 즉위와 함께 영의정으로 불려오면서 궤장을 받았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두 번째 수여자가 바로 예조판서 남이공이었다.
그러나 남이공은 대뜸 한숨부터 내쉬었다.
“말도 말아. 궤장을 받고 난 다음에 전하께서 부르시더니, 달리 줄 게 없으셨다더구만.”
“흐음? 왜 사족을 붙이셨단 말인가.”
“사직소를 몇 번 올렸거든. 그래서 그런 것 같네. 궤장을 하사하신 것도 마찬가지고.”
남이공의 대답에 김신국의 눈이 커졌다.
“해낸 일도 많겠다, 의정도 따놓은 셈인데 사직을 왜 청한단 말인가? 괜히 성심을 어지럽히기나 하고. ……노났군.”
자신은 성심을 어지럽혔다가 한겨울에 냉수마찰이나 했는데.
과거 자신을 경회지에 밀어 넣은 장본인인 남이공은 성심을 어지럽히고도 궤장을 수여하였다니 이 무슨 불합리함인가.
“일이 많아서 그렇지.”
“일? 음. 많긴 했군.”
명나라를 다녀오고 얼마 쉬지도 못한 채 충청도로 가서 반년을 일했다.
아마 사랑방에 먼지가 가득 쌓이지 않았을까.
속아문屬衙門도 아닌 육조의 장관으로 타향살이를 했으니 억울할 만했다.
“지금은 한양에서 일하지 않나? 아니면, 외지로 나갈 새로운 일이라도 받으신 건가.”
“전하께서 후금의 동향을 한양에서 알 수 있겠느냐더군.”
“…….”
“이러다간 과로로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직소를 올렸지. 계속 반려되더니 이렇게 되었군. 기껏 하사받은 의자에 앉을 일은 없고 장대는 지팡이 삼아서 의주까지 가게 생겼어.”
남이공의 한탄에 김신국은 그를 더 원망하지 않았다.
경회지에서 한 번 수영하는 게 기약 없는 타향살이보다는 확실히 양호했다.
“……의정 자리는 맡아놓았으니 고생 더 한다고 생각하게.”
김신국이 건넨 위안에 한탄하던 남이공이 눈을 치켜떴다.
“진정 그렇게 생각하나? 영상이야 워낙 유능하고 하는 일도 많으니 그렇다 치지만, 다른 두 분은 대북 출신에 하는 일도 적은데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잖나.”
과거에는 의정도 판서들과 마찬가지로 틈틈이 교체되었지만, 현재는 종신직처럼 연임이 유지되는 중이었다.
덕분에 판서들도 쉬이 자리를 바꾸지 않고 한 자리만을 연임하며 전문성을 강화하는 데는 도움이 되고 있으나, 출세를 바라는 개인에게는 도리어 걸림돌인 셈.
“그렇게 보면 뭐든 안 좋지……. 두 분도 공적이 있으니 전하께서 계속 의정으로 기용하시는 거 아니겠나? 콕 집어 무언가 담당하진 않더라도, 육조에서 하는 일이 다 일차적으로는 의정부에 전해지는데.”
김신국의 위로가 이어졌으나 기약 없는 출장을 앞둔 남이공은 회의적이었다.
“실리도 없잖아 있겠으나, 정치적인 이유도 크다는 건 자네도 알잖나.”
“…….”
“환국 때 다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대북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고, 비변사는 하루아침에 없었던 것마냥 거론조차 되지 않고 대신 의정부가 살아났지.”
신하들의 힘을 분산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게 불만이라는 건 아닐세. 그냥, 정말로 의정을 맡겨놨는지는 전하가 아니고서야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지.”
“음…….”
김신국이 침음을 흘렸다.
“가벼이 위로하려 들어 미안하네. 그럼, 이건 어떤가? 내가 대신 전하께 의향을 물어보는 거지.”
그러면 남이공의 엄살과 비관을 멈출 수 있지 않을까.
설령 좋은 대답은 듣지 못하더라도, 차라리 깔끔하게 정해지는 쪽이 지금보다 나을 터였다.
“……그래주겠나?”
“자네가 괜찮다면.”
“당연히 괜찮지. 나 역시 궁금했네만, 직접 물어볼 수는 없잖은가.”
아무래도 모양새 빠지는 짓이었다. 좋은 대답을 듣기도 힘들 테고.
“알겠네. 자리가 생기는 대로 전하께 의향을 물어보겠네.”
“자네밖에 없어.”
“화를 낼 때는 언제고?”
“화 낸다고 이렇게까지 해주는 사람은 자네밖에 없다는 뜻이지. 앞으로는 화를 많이 내어야겠군.”
“당분간은 보기 힘들어질 테니, 많이 내시게.”
두 사람은 서로 못된 농담을 주고받은 다음 호탕하게 웃었다.
* * *
육조의 서열은 전통적으로 이호예병형공을 따른다.
이조는 인사권을 가졌으니 가장 앞서고, 그다음은 돈을 만지는 호조.
예조는 외교와 함께 교육 및 언론 등 예법과 관련된 일이라면 다양한 분야를 거느려서 그다음.
병조는 살벌한 시대에 국방을 담당하기 때문에 그다음.
형조는 이상적인 국가에서는 쓸모가 없는 법을 관장하므로 중요도를 낮게 보았고, 공조는 많은 인력과 재물을 소모하므로 말석에 놓였다.
다분히 동양적인 관점에서 매긴 서열이다.
동양이니 당연하겠지만.
그러나 최근에는 실질적인 서열에 변동이 있었다.
존재감을 일부러 죽여놓은 이조를 제치고 호조가 선두에 올랐고, 전국적으로 행해지는 기반시설 공사를 관장하게 된 공조가 뒤를 쫓았다.
하는 일이 많고 중요할수록 기관의 권위와 권력도 강해지는 법.
무시할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예조판서가 한양을 나서기 전에 한탄이 많았사옵니다.”
김신국이 대뜸 딴소리했다.
방금까지 호조의 결산에 대해 일대일로 논의하던 중이었는데 예판 소리가 나왔으니 딴소리 맞지.
“회피하시는 겁니까?”
“…크흠, 그게 아니오라. 예조판서가 신과 막역한 사이이지 않사옵니까?”
“그래서요.”
“예조판서가 한양을 나서기 전에 한탄이 많았사옵니다. 신 또한, 예판이 일하는 모습을 직접 본 것은 아니나 궤장까지 받은 몸으로 외지에 나가기란 쉽지 않겠다는 염려가 들었사옵니다.”
말마따나 막역한 사이이니 걱정이 들 법했다.
남이공도 떠나기 전 김신국에게 한탄했다고도 하고.
하지만,
“나에게 그런 마음을 굳이 밝힌다는 건, 원하시는 게 있다는 말씀이겠지요?”
“전하께서 신의 마음을 이토록 꿰뚫어 보시니 어찌 감히 숨기겠사옵니까.”
뭐 딱히 숨긴 것도 없구만…….
듣기 좋은 소리로 점수 따 보겠다는 수작이다. 뻔하지만, 못 되게 볼 정도는 아닌.
“허심탄회하게 물어보세요. 원하는 게 뭡니까?”
“예조판서를 의정으로 기용하실 의사가 있으시옵니까.”
“허심탄회하게 물어보랬더니 정말로 허심탄회하게 물어보시는군요.”
“지엄한 왕명이니 어찌 따르지 않겠사옵니까.”
김신국이 씨익 웃으면서 답했다.
예로부터 근묵자흑이라더니 두 사람이 다 실없는 부분이 있었다.
남이공도 내 면전에서는 한탄하거나 의향을 물어보지 못하고 친우에게 맡겨둔 채 떠나지 않았던가.
“호판께서 솔직하게 물어보셨으니, 솔직하게 답해드리겠습니다.”
“망극하옵나이다.”
“분명한 점은 예조판서가 대체 불가능한 인재라는 것입니다. 거듭 명나라를 방문하고 또 장기간 체류하면서 해국의 사정에 해박하고, 또 그 틈바구니에서 국익도 실현했지요.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김신국도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은 밝았다.
“예판이 의주로 향한 건 그를 고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언제 본청에서 저력을 발휘했던가요? 명나라 이전에는 가도였고, 명나라 다음에는 의주일 뿐입니다.”
의주는 요동과 맞닿은 창구.
2차 의주 전투로 인해 공식적으로는 폐쇄되었으나, 밀수상과 조선에 남은 일부 여진족 유민들이 알음알음 국경을 오간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조선 역시 그러한 자들을 세작으로 기용하여 요동의 정세를 주시하고 있다.
한윤은 아예 현지에 심처를 만들어 상주하는 중이고.
그렇다고 정부 요인이 직접 적지에 들어가 활동하는 건 너무 위험하다.
남이공이 의주로 보내진 이유.
그는 양국의 경계에서 요동에 상주하고 오가는 첩보자산과 한양의 조정 사이를 잇는 가교를 맡는 것이다.
가도와 북경에서 했던 일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예조판서는 내 이미 최대한 크게 쓸 생각입니다. 몸은 고달프겠지만, 그게 공직에 있는 사람의 의무이지요. 예판이 의정에 내정되어 있느냐는 질문에 거두절미하고 답하자면, 미정입니다. 경쟁자가 그만 있는 건 아니거든요.”
의정은 백관이 다 선망하는 관직의 정점이자, 또한 정점답게 단 세 명에게만 허락된 자리다.
“남이공이 대체 불가능한 인재인 건 맞지만 그 못지않게 공을 세울 사람이 없는 건 아닙니다. 당장 호판 역시, 의정 자리를 두고 남이공과 경쟁하는 관계지요. 아닙니까? 아니라면 호판은 후보에서 빼두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아니, 맞습니다!”
김신국이 식겁하며 부정했다.
“의정의 자리는 누구도 맡고 있지 않아요. 응당 공을 많이 세우고 앞으로도 세워줄 사람이 오르게 될 겁니다. 뻔한 소리로 귀결하게 되었습니다만, 이게 사실이니 어쩌겠습니까.”
“아니옵니다. 전하의 하교가 백 번 지당하십니다.”
“예조판서에게는 나의 대답을 어떻게 전해주실 생각이십니까? 설마, 예판에게 자신도 의정을 두고 경쟁하는 관계라 이실직고하실 겁니까.”
의중을 떠보니 김신국이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
“굳이 그런 것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지 않겠사옵니까. 그저, 전하의 기대에 부응하면 의정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전할 것이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요.”
“예판이 오해할 여지가 조금 있는 듯합니다.”
“경쟁자이니 모든 사정을 일일이 헤아려줄 수는 없지 않겠사옵니까. 예판도 아주 괘씸한 사람이옵니다. 전하께서 믿고 중임을 맡겼거늘, 궤장까지 받아놓곤 세 살배기마냥 멀리 가기 싫다고 투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