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95화
인재가 적긴 해도, 적은 인재들 사이에서 경쟁이 치열한 건 사실이다.
언제 공석이 날지는 며느리인 세자빈조차 모르는 의정 자리에 경쟁자만 해도 몇인가.
남이공과 김신국 외에도, 반정의 일등공신으로 의정은 맡겨놓은 양 방자할 수 있음에도 직무는 성실히 수행하는 공조판서 김류, 행동하는 공무의 상징인 공조참판 김육, 묵묵하게 제 할 일만 하는 도승지 이덕형 등.
살아 있는 인간승리의 상징이자 전승 명장인 도원수 정충신도 유력 후보다. 출신은 이제 트집잡을 사람이 없고, 무관이지만 이항복 밑에서 공부했던지라 학맥이 괜찮다.
악마의 대변인으로 일부러 맞을 소리를 해 여론을 내 편으로 몰아가는 병조참판 이귀도 나름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자기가 샌드백 대표로서 고평가되고 있다는 걸 알면 악마의 대변인에서 그냥 악마의 대변으로 타락해버릴 수도 있다마는…….
굳이 그걸 알려줄 일은 없으니까.
“경쟁이 치열합니다.”
농담조로 남이공 뒷담을 늘어놓았던 김신국이 비장한 표정이 되었다.
남이공이 가기 싫다며 징징대었던 것은 이미 맨 처음에 해준 말.
갑자기 뒷담을 한 건 경쟁자를 음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도 의정 후보라는 말을 듣고 욕심이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이었다.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은.
원하면 열심히 해야지.
정점의 자리를 탐한답시고 누가 곱게 포장해서 선물해주겠나? 직접 쟁취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점이고, 그래야 정점이다.
“이만큼 욕심을 드러내셨으니 열심히 하시겠지요?”
기대하겠다는 말에 김신국의 표정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왜?
또 실망시켰다고 경회지에 밀어 처넣을 거 같아서 그러나.
우는 아이 달래는 차원으로 김신국에게 까까 하나 물려주었다.
* * *
조선이 평화롭게 내치에 집중하는 동안, 요동의 상황은 여전히 혼란 속에 있었다.
-황제가 대군을 보내준다면서?!
-금주에서 군대가 아주 깨박살이 났다던데!
-우린 영원히 오랑캐들 밑에서 노예처럼 살 수밖에 없는 건가?
-이럴 줄 알았어! 처음부터 산해관 너머는 버려질 운명이었다고!
요동의 주민들은 원숭환의 군대가 처참하게 패배하자 일말의 저항의식마저 상실하고 고분고분한 노예가 되어버렸다.
그런 처사를 거부하기엔 그간 요동반도에서 잠시 다른 세력들이 부흥했을 때 벌어진 지옥이 너무나 처참했다.
군벌이 할거하고 도적 떼가 난립하면서 요동인이 같은 요동인을 착취하고 핍박했다.
홍태주는 그런 집단을 모조리 격살한 뒤 반도에 다시 평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마저도 칼날 위에 놓인 것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었으나, 불안한 평화일지라도 잠시나마 누려보지 못했던 요동민들로선 오히려 감사할 정도였다.
-다시 그 빌어먹을 도적떼에 시달리느니 오랑캐의 노예로 사는 게 백 배는 낫다.
-겪어보니 말이 통하는 족속들이라고 덜하지도 않더라.
-저번에 군사로 뽑혀간 놈들은 요양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던데. 그럴 줄 알았으면 나도 자원할 걸.
반전된 여론이 요동반도를 빠르게 안정시켰다.
할거와 함께 홍태주에게는 시건방진 태도를 견지했던 압록강변의 군소 부족들도 명과 도르곤의 연합군이 대패하자 대세를 인정했다.
-다시 홍타이지 천하인가?
-난 놈은 난 놈이야. 요양까지 확 쪼그라들 때가 엊그제인데 벌써 반도를 점령하고 요하까지 회복하다니.
-맞서긴 글렀군.
부족이 다시 흡수당하는 건 막고자 처지 비슷한 세력들과 연맹을 이루긴 했으나, 이전의 시건방진 태도를 유지하여 가장 먼저 사라지고픈 자는 없었다.
-저희는 대청의 황제이자 만주의 대칸께, 금주에서 거둔 대승을 경하드립니다.
각 부족의 사절들이 일제히 요양을 방문했다.
그리고 홍태주는 저들의 불투명한 존속 가능성에 불안해했던 사절들을 환대했다.
-각자 부족을 다스리는 일로 바쁠 텐데, 이렇게 먼 길을 찾아와 나의 승전을 축하해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이렇게 그대들이 충성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서 황제에게 예우를 다하니 어찌 가상하지 않은가.
홍태주는 강변 부족들에게 혼란한 변방을 대신 맡아준 노고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여러 작위를 나눠주었다.
각자의 영역에서 자치를 허락하는 대신 세금의 납부와 대청의 질서로 편입될 것을 제안한 것이다.
대세를 인지한 군소 부족들에게 거부권은 없었다. 자존심을 세워본들 굴종에 대한 찬반으로 분열된 연맹을 믿고 홍태주와 맞서기란 불가능했으니까.
-폐하께서 과분한 은상을 내려주시니 소인들은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황제 폐하 만만세!
홍태주라고 강변을 점거한 군소 부족들을 좋게 본 건 아니었다.
대청이 취약해진 틈을 타, 조선으로 피난했던 자들이 다시 돌아와서 제멋대로 제국의 영토와 백성을 차지해버렸으니까.
그러나 그러한 점이 동시에 군소 부족의 처리를 어렵게 만들었다.
조선에서 튀어나와 조선과의 접경지역을 차지한 이들의 존재는 극도의 괘씸함을 제하고 본다면 극강의 위협으로 부상한 조선과의 완충지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조선이 대청의 일부를 갉아먹을 심산으로 퍼뜨린 놈들이다. 그런 의도가 존속되는 한 조선이 제 손으로 퍼뜨린 부족들을 직접 처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괘씸하지 않사옵니까.
-놈들의 존재를 허락해준 건 놈들과의 교섭이 아니다. 그놈들을 풀어놓은 조선과의 교섭이지.
홍태주는 한때 조선의 왕이 자신에게 건넸던 말을 자신이 반대로 건네고 있다는 데서 불쾌함을 느꼈다.
과거, 조선의 왕은 그에게 강을 넘어오지 말라고 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홍태주가 조선의 왕에게 강을 넘어오지 말라는 의도로 완충지대를 존속시켰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경고였고 후자는 애원이라는 점일까.
홍태주는 그것을 너무 늦게 분별했다. 그 대가가 매우 쓰디썼으므로, 자존심은 상할지라도 조선의 우위를 인정했다.
자존심이 두 번 상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터이므로.
-지금은 반역자들을 손보는 게 먼저다.
그리고 그 반역자들은 곤란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압록강 경계에 난립한 부족들이 홍타이지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합니다.”
신하의 보고에 섭정 아파태는 고뇌 끝에 답했다.
“……알았네. 나가보게.”
섭정의 축객에도 보고한 신하는 무언가 남은 게 있다는 듯 입술을 연신 움찔거리다, 예를 표하고는 물러났다.
“후우. 젠장…….”
아파태는 한숨과 함께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패전은 여론의 치명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과거 홍태주가 찬탈까지 일으켜가며 시작한 원정이 참패로 귀결하자, 대청의 신민들은 일제히 홍타이지에게서 등을 돌렸었다.
그리고 이번에 그의 군대가 홍태주를 상대로 패배하자 민심은 똑같이 등을 돌렸다.
홍태주는 연전연승과 함께 재기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연일 전해지는 와중이었다.
어쩌면 신민들은 ‘찬탈은 똑같이 저질렀는데 이쪽이 더 병신이었네’ 같은 발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이곤은 적자고 홍태주는 서자에 불과하다는 건 대다수 신민에게 아무래도 상관없을 사안이다.
유능한 자를 따르는 게 상식인 사회에서 혈통의 존귀란 부차적이니까.
그리고 적서의 차이는 승패를 가려주지 않으며, 그러한 사실이 이번에 확실하게 증명되기까지 했다.
홍태주와의 우열은 이번 전투로 완전히 드러났다.
성을 두고 하는 공방에 있어 공성하는 측이 불리하다는 건 당연한 상식.
그러나 아파태의 군대는 명과 협공했으며, 여기에 홍태주는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나와 선두에서 연합군을 차례로 격멸해 버렸다.
패배에는 합리화의 여지가 조금도 없었다.
그렇다고 곡해할 수도 없었다.
뻔뻔하게도 생환한 패잔병들이 많아 곧바로 반박이 들어올 게 뻔했다.
‘내가 어떻게 얻은 세상인데!’
적자인 다이곤을 내세워 찬탈 야욕을 희석하고 고지식한 대신들의 호감을 사 요동을 평정한 다음, 다이곤과 그를 진짜로 지지하는 순진한 머저리들을 척살한 뒤 만주를 통째로 삼키는 게 아파태의 원대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획은 두 번째 단추에서 완전히 잘못 끼워졌다.
다이곤을 추대하고 홍태주를 내쫓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번 패전으로 요동을 단기간에 평정하는 게 요원해졌으니까.
이제는 요동 평정이 가능이나 할지가 의문이었다.
더욱 큰 문제는 이것이 아파태 한 사람만의 의문이 아니었으며, 여러 신민이 공유하여 불온한 여론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여론를 반전시킬만한 게 없나?’
아파태는 연신 입술을 핥고 깨물었다.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간, 다이곤 이전에 자신이 섭정 자리에서 축출될 게 뻔했다.
명나라와 연합하자니, 저번처럼 사지에 버려진 놈들이 아니고서야 오만방자한 북경의 종자들이 오랑캐로 치부하는 자신과 대등한 연합을 맺으려 들지도 않을 것 같았다.
‘……진짜로 이것밖에는 없나?’
아파태가 그간 두려워했던 것이 있었다.
자신을 통해 아민을 부채질하여 강 너머에서 팔기가 떼죽음당하게 만들고.
누르하치가 알탄 칸을 무릎꿇리며 무수한 몽골인 전사와 황위를 차지하고도 차마 건드리지 못하였으며.
그 탓에 불안에 빠진 홍태주가 섵부르게 찬탈과 원정을 일으키게 만들었으며.
그 와중 자신이 반역을 일으켜 홍태주의 세력을 뒤에서부터 꺾게 부채질한 원흉.
조선.
홍태주의 모든 걸 끌어모은 원정조차 좌절시키며 부정할 수 없이 극강의 존재로 부상한 조선을 만주에 개입시키는 건 늑대를 내쫓기 위해 호랑이를 집구석에 들이는 격이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부릴만한 여유가 있던가?
여론은 갈수록 악화되는 중이고, 다이곤의 생모 아파해阿巴亥는 이 기회를 틈타 자신을 축출할 생각인지 신하들과의 접견이 폭증했다.
다 죽게 생긴 판국에!
아파태는 자신이 어렵게 성취해놓은 이 모든 것을 곱게 아파해나 홍태주에게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설령 자신의 것으로만 남기지는 못하더라도…….
완전히 타인의 손에 넘기느니, 차라리 일부를 팔더라도 나머지를 지키는 게 자신을 위한 길이리라!
* * *
“예조판서에게 뭐가 있긴 한가 봅니다. 의주로 보내기 무섭게 바로 이런 건수를 물어오다니요.”
명과 다이곤의 연합이 대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부터 은근히 기대해 왔던 바였다.
그래, 이게 정상이지.
나라가 망하기 직전인데 뭐라도 하는 게 당연하다.
-……뭐가 아쉬워서 대포를 사지? 그건 됐고, 우리 당파 밀어주면 돈 줄게!
이런 명나라의 대신들이 이상한 거다.
그렇다고 침몰하는 배를 미련없이 버리고 자신만 살아남으려는 아파태의 모습이라고 보기 좋은 건 아니지만…….
원래 아파태는 후계자들을 차도살인하고자 아민과 홍태주를 충동질해왔고, 누르하치 상대로는 비자금을 챙기고자 화친의 대금을 눈탱이 수준으로 불렸다.
이미 형제들만 아니라 자기 부친 겸 충성의 대상이기도 했던 한의 뒤통수마저 깠던 놈인데 누구 뒤통수인들 못 때릴까.
이놈은 심심하면 자기 뒤통수라도 때릴 만성적인 배신자다.
좌의정 박홍구가 평했다.
“아파태의 요청을 여염도 알아듣게 치환하자면, 생선이 도마에 올라와서는 자신을 예쁘게 떠달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겠습니다.”
“하하!”
우의정 이상의가 곧장 파안대소했도, 영의정 이원익도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박홍구의 해석이 적절했다.
그리고 나는 요리를 위해 삼의정을 소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