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96화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영의정 이원익이었다.
“아파태의 거점은 홍태주의 영역보다 북쪽에 있는데, 과연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사옵니까?”
박홍구가 곧장 답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해줄 수 있느냐가 아니지요. 아파태가 우리가 무엇이라도 해줄 수 있다고 ‘믿는다’는 점입니다.”
박홍구는 단어를 하나씩 강조해 가며 말했다.
그에게 아파태의 요청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전하, 아파태의 거점이 홍태주 영역 너머에 있다곤 하나 이렇게 서찰을 보낼 수단이 존재한다는 건 곧 대금을 보낼 수도 있다는 의미도 되지 않겠사옵니까?”
“공언을 남발하고는 재화만 챙기고 입을 싹 닦겠다는 말이외까.”
“영상… 그것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조의 강토와 백성들을 유린하고자 했던 사악한 오랑캐들입니다. 설마 그들과 의리라도 지킬 생각이십니까?”
박홍구가 사상이라도 의심한다는 양 눈살을 가늘게 뜨자 이원익이 정색하며 답했다.
“아니요. 다만, 약조가 성취되지 않으면 아파태가 공공연히 어떠한 음해를 떠들까 싶어 우려되어 하는 말이외다.”
뒤통수 맞았다는 사실을 고발하는 게 어떻게 음해가 될 수 있겠느냐마는…….
이원익도 순진무구한 인물은 아니다.
박홍구가 그렇기라도 한 양 농을 건넸으나, 이원익도 과거 아파태의 코를 꿰고 꼬드기는 데 직접 나서기까지 한 사람이다.
그가 걱정했던 건 조선의 평판.
“고작 오랑캐가 억울하여 몇 마디 짖어댈 뿐입니다. 누가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명나라가요? 아니면 홍태주가요.”
“으음…….”
“조선의 평판이 상실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도 신뢰도를 상실한다는 건 중대한 문제일세. 두 번째 배신은 첫 번째 배신이 있어야만 가능하고, 첫 번째 배신이 발생했다면 자신이 두 번째가 되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요점은, 과연 아파태에게 우리의 첫 배신을 희생할 가치가 있냐는 걸세.”
영의정 아니랄까 봐 그야말로 촌철살인이다.
조선의 평판과 신뢰도를 진심으로 걱정하나 이는 조선이 감수해야 할 평판과 신뢰의 하락을 중대한 비용으로 여겨서일 뿐, 아파태와의 약속은 안중에도 없다.
그의 신중론에 생략된 부분을 더한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방법이라도 있지 않은 한)신중하자’라는 거겠지.
거기에는 우의정 이상의도 긍정했다.
“영의정 대감의 말씀이 옳습니다. 당장 공약을 남발하는 대신, 아파태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제공할 수 있는지부터 확실히 해둔 다음 손익을 계산해보아 공언으로 둘지 이행할지 정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흐음.”
박홍구식으로 이 논의를 비유하자면, 그는 생선이 무어라 지껄이건 그냥 튀겨버리자는 쪽이고, 영의정과 우의정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으로 보이긴 싫으니 일단 어떻게 요리되고 싶은지 들어나 보자는 쪽이겠지.
근래에는 당쟁이 격화하면서, 북 출신인 좌의정과 우의정은 하는 일이 뭔데 의정이냐는 여론이 생겨났다.
아주 식견 짧은 사람들이다.
뭘 하고 있기는…….
남의 나라 섭정 요리하고 있지.
* * *
삼의정의 논의는 이러한 결론으로 귀결했다.
‘손님 뭘 찾으세요?’
‘얼마까지 생각하고 오셨는데요?’
그리고 대금보다 원하는 게 많으면 주는 것만 먹고 째버리자는 것.
쌍팔년도 동대문이나 전자상가에서나 볼 법한 양아치 같은 결말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네야 정말로 삼류 양아치들이라서 그런 거라면, 이건 이천만 신민 중 최고의 지성을 가진 삼의정이 머리 맞대고 계산기 두들겨보니 이게 국익에 가장 부합하더라는 냉정한 결론이다.
상대방도 용돈 모아서 찾아온 코흘리개가 아닌 일국의 섭정.
얼핏 하는 짓이 같아 보여도 걸린 무게가 다르다.
‘어차피 아파태도 그냥 당해주진 않겠지.’
이미 조선과 몇 번 협업을 해본 놈이다.
그리고 이만큼 성장한 조선을 부리는 건 절대 값싸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을 거다.
400년 뒤 세상에서는 유명한 갑부와 한 끼 식사를 가지는 데만 246억 원을 냈다던가?
그 정도면 조선이 ‘어흠’ 한 마디만 해줘도 금 2460냥은 내야지.
기반시설이 어디 하늘에서 떨어지고 범선이 바다에서 솟아나던가.
다 왕이 사재까지 털어서 보태는 중이다.
그런데 내치로 바쁜 조선의 이목을 밖으로 빼앗았으니 그만한 대가는 지불해야지.
“예조판서를 통해서 삼의정의 결론을…… 예스럽게 포장하여 전달하라 당부해 두지요. 진전이 있으면 그대들을 다시 불러모으겠습니다.”
“예, 전하.”
삼의정이 일제히 허리 숙였다.
* * *
기다림은 오래지 않았다.
아파태는 지푸라기라도 잡기 위해 잊고 지냈던 조선에 구원을 요청했다. 의향부터 조심스럽게 물어오며 원하는 건 뭐든지 주겠다는 서찰의 내용이 동시에 절박함을 의미했다.
이에 구체적인 요구를 제안할 것과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선금으로 지불하라는 회신을 전하자, 답변은 쾌속으로 돌아왔다.
“축약하면 이렇습니다. 조선과의 동맹을 선포할 수 있게 해주고, 홍태주가 침공할 경우 남쪽에서 호응해주며, 사세가 위태로워져 피신할 필요가 생겼을 때 사신으로 파견될 명분을 만들어달라는 것.”
“하.”
박홍구가 짧게 조소를 토해냈다.
원하는 게 뭐 이리도 많단 말인가.
“과분한 부탁을 하는 대가로 성의는 얼마나 보여줄 수 있다 하옵니까?”
“금 5만 냥.”
“……음!”
“나는 이게 사재인지, 국가적으로 비축해 둔 보화인지 궁금합니다. 어느 쪽이든 놀랍지 않습니까?”
전자라면 일개 섭정이 이만한 재산을 단기간에 축적했다는 게 놀랍고, 후자라면 섭정이 개인의 생존을 위해 이만큼 나라의 부를 유출하는 게 놀랍다.
어느 쪽이라도 저지르는 자가 아파태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리 충격적인 일만도 아니지만.
“다만, 홍태주의 세력권 너머로 재화를 수송하는 데 한계가 있으니 금 천 냥에 달하는 재화를 주기적으로 보내겠다고 합니다. 나름 안전장치를 걸어보겠다는 의도겠지요.”
“참으로 건방지지 않사옵니까!”
“그래도 일국의 섭정이란 놈입니다. 순순히 당해주지는 않겠지요.”
여기에 이원익이 중요한 부분을 지적했다.
“아파태의 행위가 특히 괘씸한 건, 선금이 선금이 아니도록 대금을 분할하여 납부한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 외에도 또 괘씸한 게 있다는 말입니까?”
이상의의 물음에 박홍구가 휙 고개를 돌리며 대신 답했다.
“그놈에게 정말로 금이 5만 냥이 있는지, 없는지를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걸세!”
이상의는 아주 괘씸한 일이 아니냐며 분통을 터뜨리고는 이쪽을 향해 덧붙였다.
“오랑캐가 이처럼 사특한 의도로 기만하려 들었으니 어울려줄 필요가 없사옵니다. 물리치시옵소서.”
“그러하옵니다.”
이원익도 긍정하고 나섰다.
“저들의 말에 따르면 천 냥의 금을 보내왔을 터인데, 이 역시 받을 가치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대금의 완납을 요구하더라도, 아파태가 먼저 보낸 천 냥을 빌미로 하여 제멋대로 동맹을 빙자할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천금일지언정 조선의 외교를 번잡하게 만들기엔 푼돈에 불과하다는 소리였다.
아파태가 너무 욕심부렸다.
그에게 실제로 5만 냥을 지불할 여유와 의사가 있으며 정말로 적지를 통해 재화를 운송하는 데 극심한 한계가 있더라도, 조선으로서는 상관없는 문제다.
조선이 신경 써야 할 건 당장 눈에 보이는 위험성이니까.
아파태의 빈약한 제안은 위험성을 능가하지 못했다.
“좌상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의 생각도 다른 두 사람과 같사옵니다. 고작 천금으로 아조를 부리려 하다니요. 만금이라도 되었으면 모를까.”
나의 의견 역시 삼의정과 다르지 않았다.
황해도가 밑 빠진 독처럼 재화를 빨아들이고는 있지만, 아파태의 제안은 불투명했고 당장 전해진 천금은 간에 기별조차 되지 않았다.
게다가 전쟁이라도 나면 도와달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러다 정말로 전쟁이 나면 금 5만 냥을 다 받더라도 손익의 분간이 애매해진다.
폭증할 군비야 말할 필요도 없고 지금의 조선은 내치에 몰두하는 와중이다. 실제로 소모될 경비만 아니라 기회비용까지 따지면 절대 작은 액수가 아니다.
“아파태에게는 받은 푼돈을 돌려주고, 거부의 의사를 정중하게 전달하겠습니다. 그가 하찮은 수작이 통하지 않았다는 데서 어떤 억하심정을 품고 무슨 돌발행동을 벌일지 모르니까요.”
고작 천금에 조선은 허락하지도 않은 동맹을 과시할 수도 있었던 아파태다.
더욱이 딴에는 절박했으므로, 지푸라기마저 손에서 빠져나가는 심정일 테지.
“그리하시옵소서.”
이원익이 대표로 답했고 나는 세 사람에게 과자를 나눠주었다.
……좋은 떡밥에 삼의정을 동원하고도 성과가 없다니. 개운치 않았다.
* * *
무르익었던 한여름의 열기도 가시고 절기는 가을의 초입에 이르렀다.
조정의 열기 또한 계절을 따라 식을 법하건만 여전히 복잡다단했다.
양당에 몸담은 중신들은 눈치싸움 속에서 서로를 돌려깎고 논점을 회피하며 혀끝으로 싸움을 이어나갔다.
그러한 과정 대부분은 무의미한 기력 낭비로 비쳤으나, 이따금 건실한 토론이 되어 국정을 한 발자국 진전시켰다.
최근의 논점은 황해도 남부 고을의 수령들과 식자들이 올린 연명상소였다.
그 내용은, 올해 안에 황해도에 선혜법이 시행되긴 힘들어 보이니 저들 지역만이라도 먼저 시행해주면 안 되겠느냐는 것.
“황해도 남부로서 경기도와 인접하여 운송의 부담이 적고, 또한 같은 이유로 기반시설의 확충이 먼저 이루어졌으므로 억지만은 아닐 것이옵니다.”
이원익은 항상 백관의 대표로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고자 했지만, 선혜법은 그가 일관적으로 추진해온 일생의 비원이었다.
저울이 조금 기울어져 보인다면 착각일까.
조정의 중신들은 이를 두고 허락해 주어야 한다, 말아야 한다 난상토론을 이어갔다.
“제반이 갖춰졌으며, 선혜법은 물론 함께 시행될 호패법은 실리가 분명하니 일부 지역이나마 먼저 도입할 수 있다면 그리하는 게 옳지 않은가?”
공조판서 김류.
“같은 황해도인데 경기도와 가까워 시행에 유리하다는 이유로 정책 시행에 차등을 둔다면, 과연 나머지 지역의 수령과 백성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호조판서 김신국.
“호조의 판서라면 응당 세액의 입출부터 생각해야지, 여론을 따지고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호조의 판서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지요. 고작 고을 몇 곳에서 한 해 앞서 세미를 징수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건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형평성이라던가.”
김신국이 범선 사업의 뒤를 봐줬다가 한겨울에 냉수 마찰한 일은 김류가 가진 ‘김신국 자유이용권’의 종말을 고했다.
자유의 몸이 된 김신국은 남이공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소북의 영수답게 서인 천하를 표방하는 김류와 치열하게 맞섰다.
“공판께서는 수도와의 원경을 두고 하나의 도道 안에서 존귀를 만들어내고자 하십니까?”
그렇다고 김신국이 북인의 동기를 답습한 건 아니었다.
일부 북인은 경상도와 전라도에 선혜법 확대를 지연시키고자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었으나, 김신국은 신중하기만을 바랐으니까.
훗날 조선의 유지를 이어받은 대한민국이 서울 공화국이 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의 지적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 번 전례를 만들어버린다면, 두 번째는 더 쉬워진다는 걸 모르십니까? 만약 이 일이 가납되면 차후 선혜법이 도입될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도 중구난방 선혜법을 먼저 시행하게 해달라 목소리를 높일 것입니다.”
김신국이 선혜법이라는 글자 앞에서는 민감해지는 지명을 건드리자 북인 당여들은 불에라도 덴 양 적극적으로 찬동했다.
“호조판서 대감의 말씀이 옳습니다!”
“전례를 함부로 만들어선 안 되지요!”
어쩌면 김신국은 자신과 북인 당여들의 의견이 부합하는 지금, 다시 북인의 영수로 등극하여 중구난방 국가사업에 훼방 놓는 당여들을 통제하려는 심산일지도 몰랐다.
몇몇 떨거지들이 원컨, 원치 않건 선혜법의 확대는 저지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다.
인조가 질펀하게 똥을 싸질러 개혁의 추진력을 분질러 놓았음에도 기어코 50년 간의 대장정을 거쳐서라도 하삼도에 선혜법이 도입된 이유가 무엇이겠나.
이때 대하大河 앞에서 쓸데없이 짖어대어 진만 빼는 개들을 어르어 하삼도에 잡음 없이 선혜법을 이식하는 데 큰 공을 세운다면 김신국은 의정 자리에 훌쩍 가까워진다.
여기에 선혜법이 숙원 사업인 영의정의 짙은 후의와 북인 영수의 지위는 덤.
그러나 이런 내막을 알 리 없는 김류는 김신국의 맹공에 눈을 찌푸렸다.
아마 속으로는 얘가 뭘 잘못 처먹었나 싶을 테지.
흥미진진한 와중이었다.
내시가 난입하기 전까지는.
“전하.”
최 상선이 용상에 올라 나에게 허리를 숙이므로, 나는 모여든 이목을 상대로 손바닥을 보인 뒤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한참 재밌는데.”
“예조판서가 밀서를 보내왔사옵니다.”
“……밀서요?”
남이공이 외지에서 일해도 일국의 재상이다.
그만한 위치에서 뭐가 얼마나 비밀스럽다고 밀서까지 보낸 걸까.
“봅시다.”
최 상선이 품에서 서찰 하나를 꺼냈고, 받아서 펼쳐들었으나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여러 한자가 종잡을 수 없는 의미로 나열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곧 이것이 남이공이 북경에서 활동할 때 지령을 전달하고 보고받을 때 이용한 방식의 암호문임을 깨달았다.
머릿속에 천자문을 펼쳐놓고 암호문을 차근차근 해석하니 남이공이 어째서 이런 갖은 호들갑을 떨어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파태 밀입국.
이놈 돌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