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97화
이건 인정해야겠다.
아파태는 뒤통수의 전문가다.
아민도, 누르하치도, 홍태주도 다 아파태에게 뒤통수를 맞았고 심지어는 그가 직접 바지사장으로 추대한 다이곤과 그의 생모인 아파해阿巴亥마저 예외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나조차 골때리게 만들었지.
“……전하?”
영의정 이원익이 중신을 대표해 물었다.
“일단은 논의부터 마치는 게 좋겠습니다. 황해도 남부에 선혜법을 먼저 시행해야겠습니까, 말아야겠습니까?”
논제로 복귀를 요청하니 김신국이 다시 입을 열었다.
“……크흠. 공조판서께서도 형평성에 주안을 두고 보신다면 이 사람의 말을 이해하시게 될 겁니다.”
“형평성이 훼손된다 해도 고작 한두 해 먼저 시행되느냐, 마느냐의 차이지 않은가?”
“그 사소한 차이로 형평성이 훼손되니 백성들의 반감이 더욱 심하겠지요.”
막 논의가 재개될 때는 어색한 기류가 흘렀으나 논쟁이 궤도에 오르자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쇠뿔을 단김에 뽑으려는 자와 하는 김에 철저히 하자는 자.
두 사람을 두고 저변에 정치적 의도가 짙게 깔린 양측 당여들이 대장을 둘러싼 잡졸처럼 찬동하고 반발했다.
나는 개입하지 않았다.
김류와 김신국 모두가 지적했듯 황해도의 남부지역에 한하여 고작 한두 해 선혜법을 먼저 시행하느냐 마느냐의 차이다.
이런 일에까지 일일이 간섭한다면 조정의 존재의의가 무엇이겠나.
자잘한 논쟁을 다 떠안고 여기에는 이래라, 저기에는 저래라 규정하는 것도 피곤한 짓이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중대한 화제가 있다.
아파태.
조선을 팔아보려다 여의치 않으니 자기 나라마저 버리고 대뜸 조선에 밀입국한 초유의 인물.
공공연히 거론할 일은 아니었다.
세간에 알려졌다간 백관은 물론, 젠차하기를 좋아하는 이라면 시정잡배들까지 아파태의 처우를 두고 동네방네 시끄럽게 떠들어댈 터이니.
남이공이 밀서로 보고한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전하……?”
논쟁의 열기도 좁혀지지 않는 간극에 사그라들고, 중신들은 이원익을 대표로 용상에 이목을 모았다.
“호조판서와 공조판서 모두 주장하는 바와 근거가 합당하여서 가벼이 결론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서둘러 결론을 내리더라도 내년 봄이 되어서야 세곡 또는 공물을 운송할 터이니, 그 전에 충분히 논의를 거쳐 공론에 일치를 보는 게 좋겠습니다.”
중신들이 일제히 끄덕였다.
김류와 서인들은 아쉬운 기색.
시일이 흐를수록 황해도의 더 많은 고을이 선혜법 시행의 제반을 갖출 테니 결정의 연기가 꼭 그들에게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아니면 이참에 서인들이 작정하고 황해도 전체의 선혜법 도입에 힘을 모을 수도 있고.
그러면 김신국의 신중론이 빛을 발할 거다.
나라의 일을 날치기로 하려들면 안 되지.
“다른 논의사항이 없다면 금번의 회의는 여기서 마치지요.”
“…….”
“삼의정을 제하고 모두 해산하세요.”
어전회의의 종결을 알리자, 병조참판 이귀가 곧장 목소리를 높였다.
“어인 일이기에 여타 재상들은 다 해산시키고 삼의정만 남으라고 하십니까?!”
중신들은 해산하는 대신 용상만 지켜보는 것으로 무언의 지지를 드러냈다.
“민감한 사안이니 공개 이전에 삼의정과 논의하여 분란의 여지를 제하려는 것뿐입니다.”
“이곳에 모인 자들은 전부 재상이거나 당상, 또는 그에 준하는 자들입니다!”
“내가 만약 경들에게 숨길 일이라고 여겼다면, 이 자리에서 공공연히 삼의정에게 남을 것을 주문할 게 아니라 패초를 돌렸겠지요. 병조참판은 호기심이 강하여 어떻게든 알고 싶은 듯하니, 남아도 좋습니다.”
“…….”
삼의정과 더불어 덜렁 남게 된 이귀가 당혹해하는 가운데.
“만약 이 일이 나와 삼의정이 원치 않는 때 외부에서 거론된다면 누구의 입이 가벼운지 알게 되겠지요.”
삼의정과는 이미 같은 주제로 회담을 가졌었거든.
“참판께서는 호기심에 상응하는 책임감을 발휘해 주기를 바라겠습니다. 더 남고 싶은 사람 있습니까?”
신하들은 앞다투어 인사를 올리며 도망쳤다.
삼의정과는 저만치 떨어진 말석에서 저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된 이귀만이 자기도 도망쳐야 하나, 자존심을 지켜야 하나 고민할 따름.
필요한 절차였다.
판서가 밀서를 보냈다는 게 보통 중대한 일은 아닌 만큼, 최 상선은 회의가 파할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난입하여 전달하는 쪽을 택했고 그래서 신하들의 관심을 사버렸다.
저마다 논쟁하는 와중에도 한구석에서는 상선의 전언을 궁금해하지 않았겠나.
그래서 이귀를 통해 ‘나중에 다 알려줄 건데, 지금 쓸데없이 호기심 발휘하는 놈은 이렇게 대놓고 면박 줄 거다’라는 뜻을 밝혔다.
이만하면 신하들도 인내심을 조금 더 발휘하겠지.
“참판 덕분에 신하들의 궁금증을 누르게 되었습니다. 시기적절하게 나서주셨군요.”
“…예? 아. 예! 크흠.”
면을 세워주니 이귀가 손을 모으고서 덧붙였다.
“그럼, 신 또한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조만간 알려드리지요.”
“예에.”
정당하게 도망칠 명분이 생긴 이귀는 이때다 싶었는지 어전을 빠져나갔다.
삼의정 중 자신을 밉게 보는 이가 있어 이 비밀스러운 논의를 세간에 흘렸다간, 자기만 억울하게 얻어터질 게 분명했으니까.
특히 박홍구가 무섭지 않았을까.
그렇게 드넓은 어전에는 나와 세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지금까지 좌충우돌이 많았으니 거두절미하고 말하겠습니다. 방금 들어온 예판의 보고에 따르면, 아파태가 입국했다는군요.”
“……예?”
천하의 삼의정조차 뇌가 정지되어버리는 소식이로군.
확실히 그만한 파괴력이 있었다.
홍태주의 요양 후금과 대비되는 다이곤의 성경 후금은 실상 아파태가 왕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이곤은 아직 어렸고 그의 생모인 아파해는 모후의 신분으로 얻는 힘이 있지만, 그만한 제약 역시 존재했으니까.
이에 반하여 아파태는 반역을 주도하고 성사하였으며 섭정에도 올랐다.
홍태주의 후금을 멸망시키고 요동을 통일한 다음에는 다이곤과 아파해를 숙청하고 후금의 진정한 주인으로 거듭나고자 했겠지.
공공연한 비밀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아파태가 자신이 세우고 지배하는 나라를 버리고 조선으로 도망왔다.
한반도 역사를 통틀어도 전례 없는 일이다.
후백제의 창건왕인 견훤이 고려에 의탁하긴 했으나 그 전에 자식에게 쫓겨난 신세였고.
그나마 선조가 왕의 신분에도 조선을 버리고 튀려 했으나 신하들이 ‘그랬다간 너는 왕도 아니다!’ 하고 엄포를 놓아 마지못해 포기했다.
어쩌면, 그래서 삼의정에게는 더 충격적인 걸지도.
선조조차 못한 걸 아파태는 저질렀으니까.
“그자가 왜…….”
먼저 정신을 차린 이상의가 입을 열었다.
“조선으로 왔다는 말입니까?”
뒤이어 제정신을 찾은 박홍구가 침음과 함께 답했다.
“불구대천의 원수인 홍태주야 당연히 선택지가 되지 못했을 테고, 명나라는 아파태를 제 발로 굴러들어 온 포로로 여길 테지.”
명나라의 핵심 영토인 요동을 떡하니 점령한 후금이다.
그 후금의 섭정을 좋게 대할 이유는 없다. 무언가 달라질 여지라곤 이용의 방식뿐.
안팎으로 외침과 내란이 겹쳐 국토의 상당부분이 날아간 명나라다.
추락한 위신을 수습하고자 아파태를 전리품으로 포장해 생사 여부와는 별개로 공공연히 조리돌릴 가능성이 가장 크고, 그나마 대우가 좋다면 요동에 개입할 여지를 남겨두고자 구금해 놓는 것이다.
어느 쪽이건 아파태가 원할 만한 결말은 아니다.
“후금보다 더 야만스러운 부족들이 살아가는 동쪽이나 북쪽도 내키는 선택지는 아니었을 테지. 요동의 부와 문화를 맛본 그가 어떻게 삭풍 부는 진창에서 방랑자 노릇을 할 수 있겠나.”
그래서 처음부터 선택지는 조선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인연도 두텁고 공모한 일도 여럿이다. 처우에 최악은 면하겠다는 판단이 섰겠지.
그러나 이게 중요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아파태의 입국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추방한다면 국경 너머로 보낼 것인가, 혹은 신변을 확보해 특정 세력에 넘길 것인가. 또한 이 과정을 공개적으로 진행할 것인가, 비공개적으로 진행할 것인가지요.”
“그러하옵니다.”
이원익이 대답과 함께 불필요한 추측은 일축하고서 덧붙였다.
“아파태가 그간 보인 행태를 고려한다면, 절대 아조에 빈손으로 입국하지는 않았을 것이옵니다.”
지푸라기를 잡는 와중에도 수작을 부린 아파태다.
수작이 아니라 불가피한 상황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건 조선이 고려해 줘야 할 사항이 아니었다.
금 천 냥 선금에 다이곤의 선양 후금과 공개적으로 동맹을 맺고 홍태주가 공격하면 후방에서 개입해달라?
암튼 금 5만 냥 있음?
먹고 쨀 가치조차 없는 제안이었고, 그래서 모욕적이기까지 했다.
아파태가 면전에 있었다면 0.3초만에 누런 옥수수를 한 줌 수확했을 거다.
면전에 없으니까 모욕적인 제안을 잘도 한 거고.
그런데 이런 놈이 믿을 구석 하나 없이 밀입국을 했다?
절대로 아니겠지.
이원익은 마저 분석했다.
“아파태가 일전에 거론한 금 5만 냥이 허언이 아니었다면 일부는 밀입국하는 과정에서 가져왔을 테고 나머지는 본인만 아는 비밀스러운 장소에 숨겨두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장소의 소재로 우리와 협상을 하려 들겠지요?”
“예에.”
박홍구는 탄식과 함께 괘씸하다며 열을 올렸다.
“혹, 숨겨놓았다면서 없을 수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이상의가 지적했으나 이건 현실성 없는 기우였다.
“신변이 아조의 손에 달렸는데, 고작 며칠의 생존을 기하고자 앙심을 사겠는가.”
그러면 곱게는 못 죽지.
재물을 대가로 입국을 받아주었다는 건 다른 세력에 팔지 않을 용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럴 용의‘가’ 있다는 게 아니라 그럴 용의‘도’ 있다는 게 아파태 딴에는 불안하겠지만, 어차피 대안이 없어 조선을 찾아왔다.
그런데 자신을 받칠 유일한 기둥마저 뒤통수를 까버린다?
아무리 뒤통수 치는 데 중독인 놈이라도 쉽지 않다.
게다가 내가 누구냐.
그런 일을 벌였다간 어떻게 복수할지 벌써 방법이 떠오른다.
아파태를 아/파/태로 만들어 명나라와 홍태주, 다이곤 세 세력에 한 조각씩 팔아버리는 거지.
그런 꼴이 되려고 아파태가 조선을 찾아온 건 아닐 터다.
“아파태가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얼마나 많은 몸값을 제공할 수 있는지는 곧 알게 될 것이옵니다.”
이원익이 분석을 이어나갔다.
“다른 선택지는 아파태를 명나라나 홍태주, 다이곤 중 어딘가로 넘겨버리는 것이옵니다. 전하께서 거론하신 대로 강 너머로 추방하는 방법도 있겠으나 이는 아파태와 연루되지 않겠다는 목적이 없다면 이득 또한 없겠지요.”
“세 세력 중 한 곳에 넘긴다면 각자 어떤 이득이 있겠습니까?”
“공통적으로 세 세력과의 우호를 도모할 수 있겠으며, 명나라에서는 몸값을 크게 지불할 용의가 있을 것이옵니다. 다른 두 세력은 명나라 만큼의 몸값은 지불할 수 없겠지만, 대신 아조와 인접한 요동에 할거하였으므로 변경의 안정에 도움 되겠지요.”
이에 박홍구가 단호하게 말했다.
“일단 다이곤은 제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들 역시 요동에 있으나 아조와는 거리가 멀고, 아파태마저 우리 손에 들어온 지금 성경의 후금을 이끄는 건 그저 핏덩이와 후처이지 않습니까?”
다이곤이 갑자기 각성이라도 하지 않는 한 홍태주와 맞서기란 불가능해 보이겠지.
박홍구 말마따나 당장 다이곤과 아파해는 핏덩이와 후처일 뿐이니.
하지만, 내가 아는 역사에서 다이곤은 ‘그저 핏덩이’로 치부될 존재가 아니었다.
홍태주는 다이곤이 가진 적자의 혈통을 우려했고, 조선의 예법대로라면 자기 어머니가 되는 아파해를 생매장해버렸다.
응당 다이곤에게는 홍태주가 자기 어머니를 죽인 원수가 되고, 홍태주 역시 이를 알 터인데도 끝내는 다이곤이 세운 무수한 공적을 무시할 수 없어 그를 팔기의 수장으로 삼았다.
그뿐이랴.
홍태주 사후에는 황위를 두고 홍태주의 적자인 호격豪格과 후계를 다투었으며, 끝내는 호격을 후계구도에서 이탈시키고 대신 핏덩이였던 홍태주의 9남 복림福臨을 추대했다.
그리고 본인은 섭정에 올라 황제와 다름없는 권위를 행사했다.
직접 황위에 오르지 못하고 섭정으로 타협하게 된 건 물리적으로 황위를 차지하려던 시도가 저지되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경쟁자인 호격이 아닌 핏덩이에게 양보하고서 본인은 실권을 챙겨 섭정으로 물러남으로서, 훗날 여건이 갖춰졌을 때 다시 물리적으로 제위를 차지할 여지를 남겨놓은 것이다.
아파태가 다이곤에게 저지른 일은 실상 다이곤 본인이 원래 역사에서 저지른 일과 똑같은 셈.
이러한 촌평을 잠시 미뤄두고 원래 역사에서 다이곤의 행보만 살펴보면, 그도 홍태주 못지않은 천재였다.
아니.
홍태주마저 끝내 후계를 안정시키지 못하여 적자가 황위를 두고 다이곤과 경쟁했으며, 끝내는 적자가 탈락하고 실권마저 넘겨줬다는 점에서 다이곤이 홍태주보다 더 윗줄일 수도 있다.
‘당장은 몰라도, 다이곤이 일단 살아남는 데 성공한다면 요동의 향방은 아무도 모르지.’
원수를 주인으로 모시면서도 섭정에 오른 다이곤이다.
지금은 다른 형태로 경쟁하게 되었을 뿐. 홍태주와 맞섰다는 건 원래 역사와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어쩌면 천장 없는 이 역사에서는 다이곤이 떡떡상을 맞아 요동의 패자로 거듭날 수도 있다.
박홍구의 말과 다르게 다이곤을 ‘그저 핏덩이’로 치부하여 후보에서 지워버릴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