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98화
다이곤의 잠재력은 역사로 증명되었으나, 다른 두 세력도 가벼이 지울만한 후보는 아니다.
명나라는 일확천금의 기회가 있고 홍태주는 그의 존재 자체가 많은 것을 의미한다.
후자는 다소 불안하긴 하다.
엄중한 경고에도 오히려 원기옥을 모아 들이받았으니.
그러고도 참패를 면치 못했으니, 어쩌면 그래서 반대로 안정적일 수도 있다.
두 번이나 대가리가 깨져봐야 할 정도로 아둔한 인물은 아니다.
무리해서 원정을 일으킨 것도 나름 선견지명이고. ‘지금 당장’이야말로 가장 승산 있는 순간임을 알아채고서 벌인 일이었으니까.
그 결과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는 분명했지만.
“이거, 참. 고민되는군요.”
하지만 행복한 고민이다.
아파태는 제 발로 굴러온 호박이고 어디에 넘긴들 이익이 있다.
실컷 고민한 다음, 끝내 넘기지 않게 되더라도 손해는 아니다.
그럴 경우는 아파태 본인이 낙점된 세력 이상으로 해줄 게 클 때뿐이니까.
“삼의정의 의견은 어떻겠습니까?”
이들이 원래의 역사는 알지 못하여 다이곤은 제하더라도, 선택지는 축소할 수 있다.
명나라와 홍태주를 두고 치열하게 갈려도 2 대 1이니까.
남은 쪽과 다이곤을 비교하면 선택은 더 쉬워진다.
“역시, 명나라가 더 좋지 않겠사옵니까?”
영의정 이원익.
“신 역시 그리 생각하옵니다. 오랑캐는 믿을 수 없습니다. 하물며 홍태주는 이게 찬탈한 이유라는 양 곧바로 아조를 침략해오지 않았사옵니까? 기회만 생긴다면 재차 변경을 노려올 것입니다.”
좌의정 박홍구.
“두 분이 다 말씀하셨는데 신이 사족을 붙여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만, 명이 제공할 수 있는 것과 아파태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이 같으니 이때는 쉽게 비교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우의정 이상의까지.
다이곤은 몰라도, 한 사람 쯤은 홍태주를 찍을 줄 알았는데 명나라가 몰표로 승리했다.
당연한 건가?
하기사 조선 사람 치고 홍태주에게 콩 반쪽이라도 나눠주고픈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심지어는 팔기를 우회시켜 한양의 근방까지 짓쳐들어왔으니.
이들에게 홍태주는 협상의 대상이라기보단, 줘 패고픈데 강 너머에 있어 주먹이 닿지 않는 쪽에 가깝겠지.
‘나만 고평가인가…….’
저울질하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다.
‘원래 역사에서는 홍태주가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천기누설할 수도 없고.’
천기누설하더라도 믿지 않을 거다.
조선 선에서 커트당했는데 무슨 명나라까지 가냐고.
이래서 너무 잘해도 탈이다.
2차 의주전투를 대승하고 나서는 조정의 공론이 ‘어라, 우리 실은 엄청 센 거 아닌가? ……요동 진공까지 가즈아악!’으로 통일됐지.
이때 내치에 신경써야 한다는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호기를 놓치게 될 거라며 회의적으로 보는 자도 많았다.
-나라가 이렇게 센데…… 내치?
-조선은 이미 『세계최강』입니다만?
이런 느낌이었지.
이 역사에서 조선의 신하들은 오리지널 인조가 지배한 조선은 복날 개 처맞듯이 줘터졌다는 걸 모른다.
아니, 그냥 맞기만 한 것도 아니지.
왕이라는 놈은 앞서 두 번이나 저지른 도망조차 똑바로 못 쳐서 홍태주에게 대가리 박고 살려달라 애걸했고, 세자 부부는 볼모가 되어 잡혀갔다.
그러나, 새로운 역사를 살아가는 이들은 이전의 역사를 아는 나와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홍태주는 대청제국의 동북아 패권을 개창한 황제가 아닌, 분노조절장애가 발작하여 급발진했다가 참패에 내란까지 연타석 맞고 몰락한 병신이며 다이곤은 제국의 실세이자 대청의 중흥기를 연 장본인이 아니라, 용상의 방석을 데워놓는 용도의 바지사장이었을 뿐이다.
“……삼의정의 공론이 일치하니 더 고민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이래서야 다이곤 쪽은 확실히 무리수가 되어버렸다.
그의 잠재력은 이 시점에서는 알 수 없는데 하물며 조정은 홍태주마저 하찮게 여기고 있으니.
다이곤과의 관계 개선을 고려해 봐야 ‘……굳이?’라는 반응만 돌아오겠지.
“만약 아파태가 충분한 몸값을 제공할 수 없다면 명나라에 문의해 보지요.”
“오가는 시일을 생각하면 미리 연락을 보내놓는 게 좋지 않겠사옵니까?”
이상의가 물었다.
“현재 등주는 자칭 등래대원수라는 자가 점거하고 있으니 무턱대고 사신을 파견하기엔 어렵지요. 바다야 뻥 뚫려있으니 곧장 북경으로 사람을 보낼 수도 있겠지만, 물 위에서 초행길을 가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고작 제주도 가는 데만도 유언을 남기는 세상이다.
원양항해에 유리한 범선을 도입하긴 했는데, 딱 한 척뿐이라 이걸로 위험을 감수하는 것도 과하고.
“아, 송구하옵니다. 신이 실언을 했사옵니다.”
실언까지야.
기왕 돈이나 타먹기로 한 거 아파태가 몸값을 많이 가져왔기를 빌었다.
양이 영 적다 싶으면 챙길 것만 챙기고 명나라에 팔아버릴 수도 있으니까.
* * *
요동과 접경한 의주는 가을이 일찍 찾았다.
중남부에서는 흔히 보일 금빛 들판은 이곳에서 찾을 수 없다.
반도에서 북방 한계를 구성하는 양계兩界, 평안도와 함경도는 추위가 일찍 찾아오고 토질이 척박하여 쌀 농사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대신 이르게 봄보리를 파종하고 여름에 수확하며, 그 땅에 다시 조를 심어 가을에 수확했다.
그래서 이 시기 의주 일대에서 보이는 건 말라가는 녹색 잎들과 그 가운데 돋아난 갈색 이삭덩어리의 연속이다.
금빛 찬란한 들판이 익숙한 이들에게는 그다지 감회 대단할 광경은 아니었다. 조밭은 일견 밭보다는 방치된 들판처럼 느껴진다.
하물며 조는 중남부에서 보리를 먹을 여력조차 없는, 극도로 가난한 가정의 식량.
평안도 사람이 여타 지역에서 쉬이 괄시당하는 건 이 영향도 어느 정도 있으리라.
그러나 수확을 앞둔 농군의 기쁨은 작물에 따라 달라지지 않았다.
농군들은 뿌듯한 얼굴로 수확기 맞은 밭을 정리해나가며, 한해 농사에 마지막을 고했다.
“대감께는 생소한 광경이겠지만,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은 이곳에서도 다르지 않지요.”
의주판관이 말했다.
남이공이 올해 의주에 방문했으므로 딴에는 생소할 광경인 조 수확을 소개한 것이었다.
“음.”
남이공은 판관의 소개에 멋쩍게 웃었다.
이미 가도와 명나라를 오가는 와중 같은 평안도인 철산부를 거듭 오갔으므로, 비록 그때는 수확철이 아니었으나 무르익어가는 조밭을 본 경험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이미 철산부를 거듭 오갔음을 모르냐며 경력을 내세우는 것도 판서대감 체면에는 하찮은 일이었고, 또 굳이 항의할 것도 아니었던 만큼 남이공은 적당히 어울려 주었다.
“판관의 말씀이 옳네. 어디라도 농업이 근간이 되는 법이고, 그것을 실현해주는 농사꾼들이 가장 중요하지.”
“백성들 말로는 요 몇 년 들어서 이삭이 아주 탄실하다고들 합니다. 그 이유라고 드는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르겠군.”
“호병胡兵의 피를 마셔서 그런 것 같다고들 합니다! 하하!”
판관의 파안대소에 남이공도 웃음을 터뜨렸다.
살이호지전薩爾滸之戰 이래 기세등등했던 후금이었다. 비록 폐주라고는 하나, 일국의 왕을 상대로 겁박하며 사신의 파견과 굴종을 요청했던 누르하치다.
하지만 그런 누르하치도, 그의 뒤를 이어서 몽고군까지 끌어온 홍태주도 모두 이곳에서 야망의 종식을 고했다.
몇 번이고 거듭해도 질리지 않는 통쾌한 이야기.
“누군들 호병의 피를 마다하는 이 없는데, 작물이라고 다르겠는가? 말 못 하는 생명이라도 좋은 건 아는 법일세.”
“그런가 봅니다.”
“판관은 그때 의주성에 있었나?”
“예! 성에서 토병들을 이끌었지요. 직접 몽고군을 쏘아 맞추기도 했습니다, 후후!”
판관은 회상과 함께 긴장이 올라왔는지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적의 주력은 북방군이 도맡아 상대했으나, 앞서 홍태주가 화살받이 삼아 내몬 몽고군은 일부가 의주성까지 엄습해왔다.
그러나 전쟁을 앞두고 일대의 방비가 강화되며 함께 개축된 의주성은 몽고군이 맨몸으로 공략할 상대가 아니었다.
“나도 지금이 아니라 그때 의주에 있었어야 했는데. 그럼 화살 몇 순이나마 거들고, 오랑캐도 직접 죽일 수 있었겠지.”
그러나 그때 남이공은 소홍이포를 팔기 위해 명나라로 넘어가 있었다.
더욱 아쉬운 건 끝내 소홍이포는 팔지 못했다는 점.
“대감께서는 육조의 판서이시니 큰일을 하셔야지, 이런 데서 화살을 쏘고 계셨다면 그거야말로 문제 아니었겠습니까?”
“……큰일이라.”
대포는 못 팔았어도 명나라에서 큰일을 하긴 했다.
그리고 지금도, 남이공은 큰일을 맡고 있었다.
모두가 그 사정은 알지 못하여서 ‘판서씩이나 되는 사람이 어인 일로 의주까지 다 왔지?’ 하고 의아해하는 자가 많았다.
심지어는 곁의 판관조차 예외는 아니었으니, 첩보라는 게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어쩔 수 없었다.
“덕분에 좋은 광경을 보았네. 마음이 따스해지는군. 이미 잘 해주고 있다는 건 알지만, 백성들에게 판관의 관대함을 더 보여준다면 나 역시 조정에서 그대를 더 빨리 볼 수 있겠지.”
“…각골명심하겠습니다.”
남이공은 판관에게 흐뭇하게 웃어준 뒤, 발을 돌려 의주성으로 향했다.
문득 거센 바람이 불며 밭마다 사그락대는 소리가 났다.
그와 함께, 따뜻해졌다던 가슴은 어느새 차갑게 식었고 남이공은 불청객을 찾아 자신의 심처로 향했다.
“대감.”
대문을 열자 마당을 지키던 노복이 곧장 인사해왔다.
신분에 걸맞게 옷차림은 남루했으나 눈빛만은 그렇지 않았다.
남이공의 활동을 위해 한양에서 붙여준 금군이니 당연했다. 위장인 만큼 남들 앞에서는 순박한 노복이었다.
“연락이 왔습니다.”
금군이 품에서 쪽지를 건넸다.
남이공은 그 내용을 확인한 뒤 부엌으로 가져가 불살랐다. 부지깽이로 재를 뒤섞어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이어 후원으로 향하니, 노복으로 위장한 다른 두 금군이 창고 앞에서 맞아주었다.
마치 뒤켠의 창고를 철저히 지키는 모양새.
실제로도 금군의 역할이 그러했으며, 개방하라는 뜻을 전하는 건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충분했다.
잠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난 뒤.
금군은 자물쇠와 함께 창고의 문을 열어주었다.
환한 햇살이 바람과 함께 창고 안쪽으로 쏟아졌고, 먼지가 확 뿜어져 나왔다.
아파태는 그곳에 있었다.
“어이구, 눈부셔라!”
아파태는 눈살을 찌푸리며 태연하게 엄살을 부렸다.
쏟아지는 햇살을 막는 양손은 몇 뼘 간극을 두고 묶인 채였다. 그리하여 손을 움직이는 건 자유로우나 돌발행동을 벌이는 건 불가능했다.
두 발목도 마찬가지. 걸을 수는 있어도 뛸 수는 없었다.
“이것 좀 슬슬 풀어주면 안 되겠나? 도망갈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오지도 않았지.”
아파태는 두 손을 보이며 툴툴거렸다.
“그래서 일부러 넉넉하게 간격을 두고 묶어주지 않았나.”
“그래도 불편한데.”
“그 정도 불편은 감수해야지. 무턱대고 찾아온 타국의 섭정이 어떠한 절차도 거치지 않고 자유를 누릴 수 있겠나?”
“내가 가져다준 금이면 자유의 값으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거야 자네 생각이고.”
왕과 삼의정이 예견한 대로 아파태는 막대한 금전을 가지고 입국했다.
정확히는, 그 금전이 위치한 정보를 가지고서였다.
단 천 냥의 금조차 무게만 37.8kg에 달한다. 도망자 신세로 강까지 넘어오는 와중 지닐 수 있는 양이 아니다.
“용돈은 챙겼나? 딱 칼같이 삼천 냥을 맞춘 건 아니어서 잔돈 정도는 챙겨도 무방했을 텐데.”
“아니.”
“왜?”
“나는 자네가 아니어서. 하지만 자네가 원하는대로 전하께 상주드렸네.”
“눈물나게 고맙군.”
아파태는 강 너머 가까운 위치에 삼천 냥가량을, 그보다 더 깊숙하고 먼 장소에 이만 냥 조금 미치지 못하게 숨겨두었다.
원래 그가 축재해놓았던 재화의 양은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급하게 취급이 용이한 상태로 처분하는 과정에서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만하면 자신 한 사람의 몸값으로는 충분할 터.
“방금 한양에서 기별이 왔더군.”
능청맞았던 아파태의 얼굴에 일순 긴장이 서렸다.
“뭐라던가?”
“자네가 부탁한 전언의 답은 아니고, 불청객이 찾아온 건에 대한 지시일세. 칼.”
“칼?”
남이공은 곁의 금군에게서 환도를 받아 챙겼다.
가을철 의주의 햇볕이 그리 따갑지는 않았지만, 퀴퀴한 창고에 유폐되어 있었던 아파태에게는 충분히 눈 부시는 광경이었다.
“아니, 잠깐! 무슨 짓이야! 전언의 답은 들어야지!”
남이공이 다가오자 아파태는 기겁하며 물러났다. 하지만, 좁은 창고에서는 오래 도망칠 수도 없었다.
남이공은 구석에 바짝 웅크린 아파태를 보며 실소하고는, 그의 양손 사이에 환도를 걸어 줄을 끊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