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99화
“아오. 뒈지는 줄 알았네.”
아파태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회를 밝혔다.
“……풀어주는 겐가?”
“몸만. 자네는 한양으로 가게 될 거야. 간만에 보는 여러 사람들과 인사할 준비 하게. 전언의 답은 그곳에서 듣겠군.”
“언제쯤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는 건가. 딱히 갈 데도 없구만.”
“그건 2만 냥의 소재가 확인된 다음에 물어보시게.”
남이공이 무심하게 답하니 아파태가 정색했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 자네를 속일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자네는 신뢰도가 높은 사람이 아니지. 평범한 사람이라면 저 죽을 짓은 하지 않겠지만, 자네는 노아합적을 포함해 여러 사람을 배신했고 아예 자기가 세운 나라까지 저버리지 않았나?”
인간의 신뢰도를 객관적으로 계측할 수 있다면 아파태의 신뢰도는 0보다도 음수에 가깝다.
“자네는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수가 없어. 실은 메주를 팥으로 쒀야 하는 게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정도지.”
“그거 아나?”
“무엇을 말인가?”
“메주는 콩으로 쑨다네.”
“…….”
그나마 제 한 목숨 살리고자 부와 권력을 모두 버렸기에 만성적인 배신자라도 지금은 위험성이 크지 않았다.
개 버릇 남 못 주고 설쳐봐야 삼류 사기꾼으로나 살아갈 수 있을 따름.
그 이상의 민폐를 도모하려 든다면, 아파태의 본질을 잘 아는 조정에서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나오게.”
“이건 마저 안 풀어주나?”
아파태가 두 발을 들어 묶인 발목을 보였다.
“아직은. 더러우니 내리고 나오게.”
구속을 풀어준 건 말에 태우고 갈 때 두 손이나 발이 묶여있으면 이목을 사기 쉬운 탓이다.
아파태의 존재는 아직 기밀.
의주는 피난한 여진족이 많고, 그가 몇 번 드나들기까지 한 근방에서는 죄수인가 싶어 흘깃 보았다가 정체를 알아차리는 이가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말에 올라타지 않은 지금은, 두 발까지 다 풀어줄 필요가 없었다.
남이공이 먼저 등을 돌리자 아파태는 제가 대감이라는 양 뒷짐을 지고 허리까지 숙인 채 볕으로 나왔다.
그리고 금군의 따가운 주시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반개한 눈으로 간만에 보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 날씨 좋다.”
* * *
남이공은 아파태에게 밥 한 끼 먹인 다음 가마에 태워 의주 밖으로 보냈다.
인적이 드문 곳에 다다르면, 말로 갈아타 한양까지 내달리리라.
중간중간 필요한 지원은 내수사에서 제공할 예정이었다.
준비와 대비가 철저했던 만큼 남이공은 떠나간 아파태에 대해서는 싹 잊어버렸다.
대신, 그가 알려준 금 2만 냥의 소재만을 머리에 남겼다.
정보는 의주 일대의 조밭이 모조리 정리된 뒤에야 검증됐다.
쿵!
한윤이 상자를 내려놓자 서안이 묵직하게 울렸다.
상자의 외관은 일견 평범하다 못해 남루할 정도였으나, 뚜껑을 열자 내부에는 금빛 찬란한 조각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남이공은 표면의 금조각 하나를 집어들었다.
“다 이런 식이던가?”
“일부는 온전한 금자와 금괴로 존재했으나, 적지 않은 양이 이렇게 세공품을 뭉개거나 쪼갠 형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운송의 용이함을 위해 의도적으로 가공한 것이겠지요.”
“흐음.”
“여러 사람의 손이 타면 도난되기 쉬운 형태라 금자와 금괴는 두고 조각들부터 가져왔습니다.”
“잘 생각하셨네.”
남이공은 금조각을 내려놓고 다시 뚜껑을 닫았다.
“이런 조각이 얼마나 더 있던가?”
“아직 수천 냥은 남아 있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마저 운송하겠습니다.”
“혹 공작금이 부족하다면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쓰되 무게만 달아 알려주게.”
“말씀은 감사합니다. 사정이 그리 급하지는 않습니다.”
한윤 이하의 공작원들은 밀수상으로 가장한 채 활동했다.
금으로 가득 채운 상자를 의주까지 운송해낸 것도 그 덕분이며, 평소에는 밀수 활동으로 공작비를 자체적으로 조달했다.
밀수가 불법이긴 하나 애초에 공작부터가 떳떳하지 못한 짓.
반하여 밀수를 수행하는 건 밀수상 가장의 완성도를 기하며 더불어 자연스러운 활동이 가능하고, 동시에 공작금까지 확보한다는 일석삼조의 이득이 있다.
첩보전에 있어 효자와 같은 일.
“단발적으로 허락한 게 아니니, 혹 이후에 필요해진다면 그때는 마다하지 말게.”
남이공은 당부를 잊지 않았다.
한윤이 직접 금을 가지고 의주를 방문했다는 점에서 그도 은밀함을 추구했다는 건 알지만, 그 많은 양의 금을 혼자서 다 운송하기란 벅찬 일이다.
어쩌면 가까운 사람 몇은 금의 존재를 알 테고, 한윤이 신뢰할 정도라면 흔한 시정잡배와는 다를 테지만, 사람의 마음이야 갈대와 같아 크건 작건 견물생심見物生心이 이는 건 부정할 수 없는 법이다.
그때 일탈을 저지를 정당성을 부여해서는 안 됐다.
눈앞에 금이 한 무더기 쌓여 있는데 당장 공작금이 절실한 상황이라면 일탈을 합리화하기 참으로 좋지 않겠는가?
그런 일이 일어나게 두어서도 안 됐다.
이미 저질렀다, 라는 죄책감이 봇물 터진 과욕과 얽혀드는 순간 감정은 폭주하니까.
절실한 필요에 의해 열 냥 유용했던 것이 곧바로 백 냥, 천 냥으로 불어나고야 마는 것이다.
왕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과거 남이공 본인이 북경에서 대신들에게 금은을 타내 본국으로 보낼 때, 왕은 그에게 필요한 만큼 쓰라고 했다.
그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활동에는 물론이고, 마음에도.
남이공이 한윤에게 거듭 공작금을 정당하게 사용할 권한을 강조하는 건 자신이 이미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신임을 받고, 필요할 때는 정당하게 자신을 도울 수 있어야 충성하고 본연의 힘을 다하는 법이다.
남이공은 금 상자를 서안 아래에 내려놓고 덧붙였다.
“덕분에 아파태가 숨겨놓았던 금을 안전하게 회수하게 되었군. 고생하셨네. 전하께서도 자네의 공적에 매우 기뻐하실 걸세.”
“맡은 일을 했을 뿐입니다.”
“보통은 그조차도 어려워하는 법이지. 이 일은 나 역시 따로 상주하겠네.”
“감사합니다.”
* * *
금을 얼마나 알뜰하게 채워놓았는지, 부스러기들 사이로 손가락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고전 무협 영화에서는 스님들이 불에 달군 모래로 철사장을 수련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철사장이 대성에 이른 소림승도 이 금 상자는 파헤치지 못할 거다.
쇠보다도 더 무거운 게 금이니까. 박력있게 손가락을 쑤셔박았다간 관절 마디마디가 박력있게 박살날 테지.
“다소 번잡한 절차를 거치게 되겠지만, 국고에 큰 보탬이 되겠습니다.”
민간에서야 조각 형태의 금이 유통에 훨씬 유리하겠지만, 거금을 만지는 국가 단위에서는 그렇지 않다.
나는 먼저 이 금을 내수사에 보내 순금 금괴의 형태로 정제해 낼 생각이다.
엄중한 관리 하에서 체계적인 형태로 가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합당하게 국고로 편입시킨 다음, 다시 내수사에서 올해 가을 소출로 웃돈을 주고 매입할 거다.
국가의 사업에 보태면서도 동시에 금을 안전하게 비축하기 위한 수법이다.
남이공이 북경에서 보낸 금도 이렇게 비축했다.
굳이 이 번잡한 과정을 거치는 건 금이 인류 역사상 가장 안정적인 자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용화폐의 담보도 될 수 있는 이 귀금속을 사업에 직접적으로 소모하여 민간으로 녹여버리는 건 그야말로 바보에 멍청이 같은 만행이다.
그러니 후일을 위한 포석으로서 귀찮더라도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거다.
영의정 이원익이 말했다.
“아파태가 몸값을 충분히 가져왔으니 굳이 위험을 감수하여 명나라에 의향을 물어볼 필요성이 크게 줄었사옵니다.”
“흐음. 등주는 여전히 자칭 등래대원수가 등판한 이래 다른 소식이 없습니까?”
“예.”
“명나라 조정에서도 감감무소식인 듯하고요.”
“그러하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국토의 3할이 반란군에 넘어가 정신이 없기 때문일까.
토착민도 반란을 일으켜, 농민도 반란을 일으켜, 그걸 진압해야 할 군대까지도 반란을 일으켜, 심지어는 요동 없는 요동군까지 반란을 일으켰다.
마지막은 농담이 아니다.
오교병변의 주역은 요동 없는 요동군이었으니까.
지금 이 순간 중원을 지도로 그린다면 아주 알록달록하겠지.
어쩌면 좌우로 토사의 반란과 후금의 발호를 맞고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명나라였으므로 여전히 아무런 생각이 없을 수도 있겠다.
애초에 농민반란으로 세워진 명나라라 반란이 근본이고 정통이긴 하다.
백성들이 전통민속놀이를 좀 즐기겠다는데 무슨 문제라도?
확실히, 바다 건너에서 불구경하는 입장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명나라의 신민들이 열심히 전통민속놀이를 즐겨주기를 바란다.
‘그래야 망해버린 후금과 균형이 맞지.’
자칭 등래대원수가 점거한 등주를 거치지 않고 바다로 북경까지 사람을 실어나르는 방법도 있으나 역시 물 위의 총행길은 위험하다.
혹 아파태의 금 5만 냥 타령이 완전히 헛소리에 불과했다면 모르겠으되…….
그런 위험을 감수하기엔 아파태가 충분한 몸값을 가져왔다.
남이공의 추산으로는 도합 2만 2천 냥가량. 전량 회수까지는 시일이 다소 소요되겠으나 결국 시간문제일 뿐이다.
반하여 명나라에서 아파태의 몸값으로 몸무게만큼의 금을 준다고 쳐도 고작 2천 냥.
대국의 배포로 그 두 배를 준대도 4천 냥이고, 따따블이면 8천 냥이지만 소싯적 명나라도 아닌 위충현 지배하의 명나라가 그렇게 많은 몸값을 지불할지 미지수다.
나라에 그만한 여유가 있었으면 위충현이 먼저 벗겨먹었을 테니까.
설령 8천 냥짜리 거래가 성사되더라도 위충현이 반절쯤 용돈으로 요구하지 않을까?
물론, 4천 냥이라도 덤으로 치자면 결코 작은 액수는 아니지만…….
‘2만 2천 냥이나 받아먹어서 그런지 뒤통수까지 쳐서 깔끔하게 발라먹는 건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원래 인심은 곳간에서 나는 법.
그리고 조선의 곳간은 아주 풍족해진 참이다. 없던 인심도 나게 할 정도.
“신이 간언드리건대, 아파태가 거금을 지불하였으므로 조선이 추가로 신의를 시험할 필요는 없다 사료되옵니다.”
이원익은 이전에도 조선의 신뢰도를 고평가했다.
아파태 같은 삼류 졸부의 몸값으로 조선의 신의를 시험한다는 건 그에게는 밑지는 행위.
애국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두 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신은…….”
좌의정 박홍구는 대답을 마치는 대신 우의정 이상의를 돌아보았다.
“……?”
“우상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음. 영의정 대감의 말씀이 옳지 않겠습니까?”
그리 말하면서도 어조에는 확신이 깃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두 사람은 공돈 4천 냥이 아까운 모양이다. 하지만 그만한 액수를 정말로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신의부터 걸어야 하니 긴가민가하겠지.
“두 분께서는 결심이 서지 않으시는 듯합니다. 그럼, 영의정의 확고한 의견을 따라도 무방하겠지요?”
“그리하시옵소서.”
“여부야 있겠사옵니까.”
그렇게 아파태의 조선 체류가 허락됐다.
……그런데, 남의 나라에서 금을 0.8톤이나 빼돌려왔으면 거의 공신이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