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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00화 (200/380)

인조, 명군이 되다 200화

새삼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졌다.

반정 첫날로 떨어졌을 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건 놓치지 않고 짚고 넘어갔다.

김류와 김자점을 분리하는 것.

삼창의 목숨을 모두 취하되 온건한 방법으로 죽도록 하여 과열한 북인 숙청 기조를 완화한 것.

그러면서도 악질인 권신과 간신배는 모두 죽인 것.

반정의 주도권을 대비에게 넘기지 않으며, 반정의 명분으로 광해군의 친금배명보다는 민생파탄을 강조한 것.

등등.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한참 폭풍을 헤치고 나와, 처음으로 마주한 평온은 가족이었다.

익숙하지는 않았다.

한순간에 일면식도 없는 가족의 가장이 되었으니까.

어색하기도 했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중전은 미안하게도 꼬박 몇 년이 흘러서야 그녀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래도 가족이 내게는 유일한 쉼터였다.

아무리 어색하고 부담스러워도, 달리 의탁할 데가 없었다.

가족과 함께하지 않는 매 순간에 나는 나라와 백성 모두를 책임져야 할 왕이었다.

하찮은 악령과의 내기를 제하더라도.

나만이 가족을 필요로 한 건 아니었다.

가족들 역시, 내가 필요했다.

총명을 타고났으나 그것을 펼칠 기회는 주어지지 못하고 끝내는 가족마저 학살을 당한 비운의 세자.

삼형제를 제외하고는 자식을 모두 요절로 잃고, 끝내는 본인도 이른 나이에 산욕열로 세상을 등지게 된 중전.

졸지에 용상에 올라, 죽을 때까지 인조가 싸질러놓은 똥만 닦아내었던 봉림대군.

가장 등급 높은 종친이라는 이유로 빈번히 청나라 사행에 동원되어 이역만리에서 갖은 수모를 당해야 했던 인평대군까지.

어느 저능아가 왕만 아니라 가장으로서의 소임조차 다하지 못했던 탓에, 왕가는 누구도 행복하지 못했다.

대비와 정명공주, 세자빈과 원자들마저도.

그래서 난 내가 받은 만큼, 그들 역시 마땅히 받아야 했을 관심과 도움을 베풀었다.

시작부터 단추가 예쁘게 끼워진 건 아니었다.

대비와의 초반은 기싸움의 연속이었다. 그것을 근처에서 지켜봐야 했던 정명공주도 당시에는 제법 살 떨리는 심정이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이러한 과거는 그저 오래전의 골때리던 시절로 여길 만큼 행복해했다.

나랏일 못지않게 많은 것들이 제대로 된 자리를 찾아왔고, 나날이 그 이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나를 시험하고자 했던 저능아 악령이 하루하루 하찮아지는 이유다.

이 자식은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왕위를 찬탈한 걸까?

그것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없었으니 무턱대고 저지른 걸 테지.

이딴 놈이 비운에 의해 얻어걸린 것이 운명의 농간이라면 농간이겠다.

아무튼.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는 이유는 달리 있지 않았다.

봉림대군의 인상이 처음 세자를 보았을 때와 비슷해졌다. 분명 반정 날이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7년의 세월이 이렇게 짧았던가.

“봉림대군이 귀신 같이도 자랐구나.”

무릎에 앉혀놓은 봉림대군의 느낌은, 최초로 소현세자를 무릎에 앉혀놓았을 때와 비슷했다.

그때와 작은 차이가 있다면, 봉림대군은 어려서부터 무릎에 앉아와 소현세자와는 다르게 부담감이 없다는 걸까.

“귀신같이 자랐다는 게 무슨 뜻이옵니까?”

봉림대군이 고개를 돌리는 것도, 젖히는 것도 아닌 애매한 각도로 말똥말똥한 눈빛을 보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 컸다는 뜻이지.”

“……?!”

봉림대군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 나이대면 세월이 가장 느리게 흐릴 때지.

하지만 내 나이쯤 되면…….

크흠.

원래 살던 세상에서 흔히들 하던 말이 있다.

30대에는 세월이 시속 30km로 지나가고, 40대가 되면 시속 40km로 지나간다고.

나는 밤낮으로 왕업에 시달리느라 세월이 가는 줄도 몰랐다. 벌써 겨울이라니? 이거는 과속 아닌가?

오죽하면 세월에 누구 허락 맡고 이렇게 빠르게 가는 거냐고 캐묻고 플 정도다.

하지만, 물어볼 수는 있어도 답을 기대하긴 어렵겠지.

어쩌면 세월을 느리게 가게 하는 비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영혼을 400년 전으로도 보내는데, 설마 시간을 느리게 가도록 못 하겠어?

하지만 내가 비술을 익히려면 오리지널 인조가 그랬듯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더 치명적인 단점은 지옥행이 보통 편도라는 것.

갖은 비술을 배워 끝내 부활한 삼류 마귀사탄 인조조차 현세로 현현할 때까지 근 400년 세월이 걸렸다. 놈은 덜떨어졌다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내가 지금 지옥으로 갔다간 제때 부활하기 어렵다.

게다가, 내가 성취해놓은 업적들을 돌아보면 사망 시 지옥보다는 천당에 가게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오호통재라.

정녕 세월을 느리게 할 방법은 없단 말인가.

“씁쓸하구나.”

소회를 드러내며 턱을 봉림대군의 정수리에 얹으니, 봉림대군이 움찔거리며 안겨 왔다.

“슬퍼하지 마시옵소서. 소자가 안아드리겠사옵니다.”

“하하.”

세자가 어렸을 때 딱 이런 느낌이었지.

다르게 말해, 다시 7년이 지난 다음에는 봉림대군도 아비를 골방 늙은이로 여기는 못된 녀석이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이거야말로 진짜 세월의 비극이지.

계속 귀여운 상태로 남아 있으면 될 텐데, 어째서 사람은 늙어가는 걸까.

분명, 성격 괴팍한 이귀에게도 귀여웠던 시절은 있었을 테지. 하지만 그는 세월에 좀먹히고 궁중 광대가 되어버렸다. 끔찍해라.

‘……요즘 늙었나.’

이상하게 감수성이 팡팡 터진다.

남자가 늙으면 남성호르몬 분비가 줄어들어 여성화된다던가?

쌍불알 네 이놈들! 다시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할까!

엄포는 놓았지만, 쌍불알이 ‘사용하지 않는 앱 삭제 및 여유 공간 확보’ 기능을 작동한 거라면 할 말은 없다.

“전하.”

최 상선이 다가와 접시에 고기를 놓아주었다.

이어서 곁에 앉은 중전에게도, 세자 부부에게도, 대비와 광산부부인 그리고 공주 부부에게도 나눠주었다.

“이만하면 우리는 많이 먹었으니, 최 상선도 식사하세요.”

“받들겠사옵니다.”

최 상선은 꾸벅,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물러났다.

봉림대군은 김 모락모락 나는 고기에 입맛이 돌았는지 몇 점 집어먹다가, 배가 불러서인지 금세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많이 먹긴 했지.

“끄윽.”

태평하게 트림하는 봉림대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대군이 장성하여 출궁할 날이 머지않았는데, 우리 대군은 사가에 들어선 다음 무슨 소일을 하며 지내고자 하느냐?”

“으으음…….”

봉림대군은 한참을 고민했다.

아비, 어미와 떨어져 독립한다는 것부터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후계자가 아닌 왕의 후사가 언제까지고 궁궐에서 지낼 수는 없다. 언젠가는 해야 할 독립이다.

“으음, 허락해 주신다면 명승을 다녀보고 싶사옵니다.”

봉림대군이 조심스럽게 청했다.

과거에는 종친이 비교적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종친과 연루된 사건 사고가 역사에 축적되며 그만큼 종친들이 운신할 수 있는 폭도 좁아졌다.

특히 대군처럼 품급이 높은 종친은 도성 바깥에서의 삶이 거의 허락되지 않았다.

선왕의 다른 적자 소생들은 왕위에 대한 위협이자 동시에 보험이기도 했던 만큼, 한양에 구속해두어 엄중한 감시와 보호를 동시에 한 것이다.

봉림대군도 잘 알고 있는 사정.

하지만…….

“대군이 바라니, 이 아비가 방도를 고민해 보마.”

세자와는 다르게 활동성이 강한 봉림대군이다.

원래 역사에서는 왕위에 오르고도 칼자루나 활 따위가 아닌, 무려 언월도를 휘두르며 무예를 연습했을 정도.

그런 녀석을 한양에 가둬놓고 가만히 먼지만 앉힌다니?

그거야말로 인권 유린이지.

세자가 즉위한 다음에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세자도 천성이 그리 팍팍한 녀석은 아니었다.

아비가 여차하면 쓰라고 손에 비수를 들려줘도 영 시큰둥할 정도.

그야말로 바른 생활 어른이의 표본이다.

설령 세월이 비정하여 낙관론이 배신당하더라도, 내가 요절이라도 하지 않는 한 봉림대군은 한창 혈기방장할 때 원 없이 명승을 탐방할 수 있을 거다.

“아바마마!”

봉림대군이 다시 몸을 돌려 안아왔다. 위로해주고자 폭 파고들 때와는 완력이 차원이 달랐다.

“아바마마, 사랑하옵니다.”

“아이고.”

우리 봉림대군이 벌써 언월도를 휘두를 준비가 되었구나.

“둘째 사랑에 아비 늑골이 부러지겠구나. 살살하여라.”

“예.”

엄살을 부리니 봉림대군이 힘을 조금 빼고서 가슴에 얼굴을 비벼왔다.

나 역시 뺨을 둘째의 정수리에 비볐다. 오가는 턱을 따라 둘째의 상투가 꼬리처럼 좌우로 움직였다.

그러다 문득 중전과 눈을 마주쳤다.

별말 없이 그저 눈살만 묘하게 찌푸리는 중전.

“……왜요?”

“아니옵니다. 계속하시지요.”

그렇게 말해버리면 계속할 수가 없잖습니까.

* * *

겨울이 오면서 날이 추워진지라 늙은이들, 특히 삼의정의 건강이 어떤가 걱정이 많이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좌의정 박홍구과 우의정 이상의 모두 양호했다.

박홍구는 원래의 역사에서 숙청당해 죽은 몸인지라, 그런 일이 없어진 이 역사에서는 여전히 건강하더라도 딱히 이상하진 않았다.

놀라운 건 우의정 이상의 쪽이다.

원래 이상의는 인조 2년에 귀천하니까.

역사가 달라지면서 숙청의 위협을 벗어나 마음이 편안해지기야 했겠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정정할 수 있나 싶을 정도다.

심지어 겨울이라고 약해지기는커녕, 초피 갖옷의 계절이 왔다는 건지 건강에 유의하라는 왕의 당부를 왕명으로 빙자하여 매일 같이 산책 다닌다고 한다.

한겨울에 찬 바람 맞아가면서.

그러면서 고뿔 한 번 걸리지 않는다.

이상의를 보면 사람이 가진 마음의 힘이란 이렇게 강하구나, 찬탄하게 된다.

영의정 이원익은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원래 역사에서도 인조 12년, 무려 여든여섯의 연배로 귀천하는 사람이다.

현대와 비교하면 위생도 의료도 원시적인 시대에 여든여섯이라니, 대단히 장수한 셈.

더욱이 이 역사에서는 이원익 말년의 심적 악성종양이었던 인조가 사라지고 일생의 과업인 선혜법은 차근차근 잘 도입되는 중이다.

마음의 안정이 우의정과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면 아흔 세는 거뜬하고 백 세도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오히려 정반대로, 너무 안심하여서 미련 없이 세상을 일찍 등지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

그러니, 야심한 시각 남몰래 정화수를 떠놓고 삼의정의 줄초상을 기원하는 서인 떨거지들에게는 참으로 미안하게 된 셈이다.

꼬우면 더 오래 살면 된다.

떨거지라도 못해도 200년쯤 경력을 쌓으면 무리 없이 의정에 오르겠지.

능력 없는 사람이 의정을 해먹으려면 그만큼 장수하는 노오력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어려우신가요? 그렇다면 그건 본인의 노오력 부족한 거지, 나나 삼의정의 잘못은 아니로군요.

이상의는 장수하는 노력이 가상해서 새 초피 갖옷을 내렸다.

천명이 이미 지나간 사람보다 옷이 세월을 더 못 견뎌서 초피에 윤기가 다 사라졌더라고.

그런데도 하사품이라며 아직도 자랑하고 다니니 내가 다 망신이다. 기왕 자랑하고 다닐 거라면 좋은 거로 입고 다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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