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01화
“안 무거우십니까?”
의정부의 정사품직, 사인舍人 여이징呂爾徵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상대가 정일품이며 삼공三公의 일익인 우의정임을 생각하면 참으로 당돌한 패기였다.
“예끼, 이 사람아!”
“…….”
“하늘 같은 전하께서 입고 다니라며 반사하신 진귀한 선물이거늘, 무겁고 가벼운 게 어디 있겠는가?”
우의정 이상의는 여이징이 건넨 의문부터가 혐오스럽다는 듯, 고개까지 돌려버리고서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여이징은 그런 반응에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감…….”
왕이 새로운 초피 갖옷을 내렸으나, 이상의는 이전 것도 포기할 수 없었다. 함께한 세월이 몇 년인데 오래되었다고 처박아둘 수 있겠는가. 낡기로는 본인이 더 하거늘.
그래서 이상의는 확실하고도 명료한 해답을 선택했다.
그냥, 두 벌 다 입은 것이다.
“대감께서는 지금 갖옷을 겹쳐 입고 있으십니다.”
400년 뒤 미래로 치자면 겨울용 두꺼운 외투를 겹쳐 입은 셈.
올해 겨울이 딱히 예년보다 더 추운 것도 아니었으므로, 여이징의 눈에는 기행일 따름이었다.
누구 눈에라도 마찬가지일 테지.
이상의는 당당했다.
“자네도 이 나이 돼봐. 한여름에도 관절이 시리다니까.”
“한여름에도 갖옷을 겹쳐 입고 다니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자네가 그때도 전하의 하사품을 업신여긴다면, 내가 모범을 보여줄 수도 있겠지.”
“……잔소리는 그쯤 하라는 뜻으로 이해하겠습니다.”
이상의는 그제야 실소하며 끄덕였다.
여이징은 우의정이 자신의 호패에도 갖옷을 두 겹으로 씌우지 않았다는 데 만족하기로 했다.
본인이 간과해서 망정이지, 이걸로 빈정댄답시고 자각이라도 시켰다간 우의정은 아주 좋은 생각이라며 그렇게 하고도 남을 이였으니까.
자신의 추측에 내심 섬찟해진 여이징이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다른 두 분은 늦으신답니까?”
“그건 나도 모르지. 영상께서는 키가 작고, 좌상께서는 늙었으니 걸음걸이가 유난히 느린 걸 수도 있고.”
“…간밤에 올라온 육조의 수본부터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그러게.”
여이징이 각 조의 공문을 전달해주었고, 우의정은 먼저 업무를 시작했다.
비변사가 소리소문없이 철폐되고 의정부가 최고 의결기관으로 부활하면서, 육조가 편전 이전에 의정부에 먼저 업무를 보고하는 의정부서사제 또한 부활했다.
그리고 삼의정은 각기 육조에서 삼강과 삼약을 하나씩 맡아 전담했다.
삼강은 이조, 호조, 병조.
삼약은 예조, 공조, 형조.
육조의 전통적인 서열인 이호예병형공과는 차이가 있다. 이게 공식이라면, 삼강과 삼약은 현실적인 구분이었다.
이상의는 개중에서 호조와 공조를 맡았다.
우의정이 삼의정 중 말석에 놓인다는 것을 생각하면 병조와 형조를 맡는 게 마땅하겠으나, 두 기관은 중앙에서 가지는 비중과는 별개로 전담하는 분야가 민감했다.
그래서 우의정이 아닌 좌의정 박홍구가 맡는 중.
이조와 예조는 당연히 영의정 이원익의 몫이었다.
“오.”
이상의는 짧은 감탄과 함께 수본을 내려놓았다.
“놀라운 소식이라도 있으십니까?”
“사인께서도, 황해도 남부에서 먼저 선혜법을 시행할지 말지가 여전히 미정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북인과 서인이 다 죽자는 식으로 버티는데요.”
“그런데 호판이 시행하지 않는 쪽을 상정하고서 전반기 예산결산서를 올려버렸군.”
“공판과 합의를 했을까요?”
“글쎄.”
추수철 미리 황해감사에게 확인해본바, 해도는 이미 예년의 방식으로 세금을 징수하기로 확정해두었다.
그런데도 북인과 서인은 새해를 앞둔 지금 시점에도 황해도를 두고 팽팽하게 싸우는 중.
두 영수 사이에서 합의가 이루어졌다면 진즉 조용해졌을 거다.
“호판이 아예 강짜를 놓은 모양이야.”
“앞으로 조정이 더 시끄러워지겠습니다.”
예결이 호조의 영역이긴 하나, 일방적으로 무시당한 공조판서가 조용히 넘어갈 리 없다.
황해도가 이미 예년의 방식으로 세금을 징수하기로 확정했다는 점에서 명분은 더더욱 호조판서에게 있지만, 조정의 세력비는 공신들을 주축으로 한 서인이 앞섰다.
분명 치열한 싸움이 될 테지.
희극인 건 이 모든 게 뒷북이라는 거다.
아니, 세금은 이미 다 거두었다니까?
그래도 싸운다. 알면서도 싸운다. 다 당쟁의 연장선이라서 그렇다.
“벌써부터 징그럽군.”
이상의가 소회를 밝히자 여이징이 물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뭘 어떻게 하냐니.”
“대감께서는 호조와 공조를 전담하시잖습니까.”
심판을 자처하여 한쪽의 손을 들어주고 싸움을 종결시키는 건 일도 아니었다.
“나야……, 소싯적도 아니고 지금은 힘없는 늙은이일 뿐인데 정쟁 한가운데에 뛰어들 수야 있나.”
반정과 환국을 거치며 죽다가 살아난 신세였다. 당쟁이라면 질릴 대로 질렸다.
이따금 청춘을 회고하곤 하지만, ‘반정을 맞아 정권은 빼앗기고 목숨마저 순전히 왕의 후의 덕에 건진 대북 원로’라는 경력은 당쟁에 있어 족쇄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마당에 혹 소싯적을 흉내 내기라도 했다간, 서인은 물론 큰 범주에서는 같은 출신인 북인들조차 퇴물이 나댄다며 이구동성으로 쓴소리하겠지.
“그리고, 전하께서도 패거리들이 싸우는 걸 지켜보고만 계시는데 내가 나설 수 있겠는가.”
“전하께서는 왜 이 난장판을 내버려 두시는 걸까요. 선혜법을 강경하게 추진하던 분 아니셨습니까?”
여이징의 물음에 이상의가 작게 웃었다.
“멀리서 냉정하게 살펴보면 고을 몇 곳에서 선혜법을 한두 해 일찍 시행하느냐 마느냐는 그다지 중대한 문제가 아닐세. 전하께서는 북인과 서인들이 서로 치고받을 건수로 계륵 하나 던져놓고 관망하시는 것이지.”
완급 조절이다.
“정치하는 인간들이 패거리를 만들어 서로 싸우는 건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그걸 다 틀어막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애를 쓴들 흐르는 물줄기를 틀어막을 수는 없다.
최선은 그 흐름을 통제하는 것.
“후일 중대한 문제를 두고 정쟁을 벌이게 할 바에야, 지금처럼 하찮은 건수나 두고 계속 싸우도록 내버려 두는 게 훨씬 낫지.”
어차피 황해도 전역에 선혜법이 도입될 예정이다.
이건 일부 지역이 먼저 도입하건, 도입하지 않건 달라지지 않을 사실이다.
그것은 북인도 서인도 다 아는바.
단지 싸울 데가 필요하여 싸우는 것이었으므로, 굳이 중재한들 새로운 곳만 또 개판이 될 뿐이다.
“그래서 일부러 내버려 둔다는 말입니까.”
“썩 내키는 투는 아니로군.”
이상의의 말에 여이징은 그게 말이냐는 느낌으로 퉁명스럽게 답했다.
“붕당朋黨은 국법으로 엄금하는 행위가 아닙니까? 따지자면 위법행위를 별다른 수가 없다며 묵과하는 꼴인데, 당연히 내킬 수가 없지요.”
“흐흐. 자네가 소싯적 나보다도 훨씬 양반이로군그래.”
이상의가 실소했다.
“세상 사람이 다 자네 같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여이징은 폐주 때 폐모론이 일었을 때는 곧장 관직을 버렸었고, 그 기개에 반한 서인들이 반정에 가담할 것을 권유했으나 여이징은 그 또한 거부했다.
중립을 반대로 말하면 곧 누구의 편이 아니기도 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도리어 양측 모두에게 얻어맞을 수 있는데도 여이징은 자신의 정의를 단호하게 관철했다.
내로라하는 의정들을 보좌하는 사인 자리에 제수된 이유였다.
이상의가 일개 정사품 당하관원이 연신 까불어대어도 개의치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다른 정사품 관리가 그랬다면 용납지 않았겠으나, 여이징은 그래도 되는 사람이었다.
“그럼, 열심히 일하고 공훈도 잔뜩 쌓아서 자네가 직접 붕당 패거리짓을 단속하지 그러나?”
“직접 모범을 보이지는 않으시고요?”
여이징이 은근히 빈정대자 이상의가 발끈했다는 투로 답했다.
“이건 전하의 하사품을 존중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야. 그리고 나라에는 자네 같은 충신도 필요하지만 나 같은 충신도 필요해.”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정의를 고수하는 신하도 좋지만, 조정에 그런 신하밖에 없으면 얼마나 시끄럽겠는가?
그런 사람이 선을 넘어버리면 병조참판 같은 악질이 되고 마는 것이다.
뭐든지 과유불급이지.
그리고 응당, 전하의 의중을 묵묵히 따르는 충신도 필요한 법.
그 역시 과하다면 이이첨 같은 간신이 되겠으나 이상의는 자신이 중도를 지키고 있다는 데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잡설을 마친 뒤 공무에 몰두하던 이상의는 마지막 수본을 치워버리고서 물었다.
“이게 다인가? 더 있으면 가져오게. 다른 쉰내 나는 노친네들 오기 전에 먼저 퇴청해야겠어.”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흐음. 그럼 퇴청해야겠군.”
이상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밀어 넣었다.
일반적으로 관리들은 해 질 무렵 퇴청하지만, 의정쯤 되면 규율에 얽매일 위치도 아니거니와, 결정적으로 해가 져버리면 갖옷의 자태를 세상에 뽐낼 수가 없었다.
* * *
새해를 앞두고 요동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추수는 홍태주에게 익사 직전에 주어진 호흡과 같았다.
비록 요동 전역이 거듭된 전화戰禍에 황폐해졌다곤 하나, 어딘가에서는 농사가 지어지고 있었고, 제때 보급된 식량은 아사 직전의 요양을 소생시켰다.
약간의 피와 마찰을 감수한 대가로는 충분했다.
그러나, 식량 부족 문제는 근본적으로 달라진 게 없었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이른 시점에서 사람들이 굶주리게 되리라.
어렵지 않게 미래를 짐작해낸 홍태주에게는 식량 문제의 타개책이 절실했다.
그보다 더 북쪽에서는, 다이곤의 선양 후금이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섭정 아파태가 한순간에 증발한 탓이었다.
그동안 아파태는 다이곤과 그의 생모 아파해에게 목구멍에 걸린 가시와 같은 불쾌하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존재감을 과시해왔다.
또한, 아파태가 금주성 정복에 실패한 다음에도 지지자는 상당수가 남아 있었는데 이는 핏덩이 다이곤과 후처 아파해라고 신뢰감 있는 존재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파태는 사라졌다.
선 한汗, 노이합적이 선양 황궁에 축재해놓은 진귀한 보화들도 함께였다.
막 불꽃이 꺼진 자리에서 피어오른 연기처럼 아파태가 무수한 보화와 함께 종적을 감춰버리자, 그의 지지자들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지지자들의 존재와 생명이 말소되어버린 건 아니었다.
당장 다이곤과 아파해에게는 유력자 집단의 말살을 기도할 정도로 확고한 지배력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럴 필요 또한 없었다.
아파태의 증발은 명백한 배신이었다. 먼저 배신당한 아파태의 지지자들은 배신자에게서 확실하게 등을 돌렸다.
또한 그들이 원컨, 원치 않건 선양 후금에는 다이곤만이 유일한 선택지로 남았다. 줄을 나눠 서고자 해도 줄이 하나밖에 남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을 벌었을 뿐인 홍태주와 마지못해 지지가 결집한 다이곤이 대치했다.
두 팔 없는 자와 두 다리 없는 자의 싸움처럼 요동의 향방은 더더욱 오리무중으로 빠져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