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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02화 (202/380)

인조, 명군이 되다 202화

신하들이 황해도의 선혜법 건이라는 철 지난 주제를 가지고 진심으로 경쟁하는 동안.

왕은 뒤에서 자신만의 사업을 추진했다.

“이게 설계도라고요?”

“그렇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어설프군요.”

왕은 켜켜이 쌓인 도면을 넘기며 평가했다.

황색 종이들이 팔랑거리며 맥없이 늘어질 때마다, 그 광경을 보는 예조판서 남이공도 똑같이 침을 넘겼다.

남이공에게 아파태는 제 발로 굴러들어온 호박이었다.

덕분에 조정이 거금을 확보하면서 공적을 쌓았을 뿐 아니라, 거금을 깊숙한 적지에서 안전하게 운송해냄으로써 첩보 조직의 건사함을 증명해냈다.

남이공이 의주에서 한양으로 귀환하게 된 이유였다.

하지만…….

“종이를 싸구려로 쓴 건지, 보관을 개판으로 한 건지 쥐가 오줌이라도 갈긴 것처럼 변색됐군요. 덕분에 가는 선은 알아보기 힘듭니다. 차라리 부적에나 쓰는 게 낫겠어요.”

왕이 한쪽 입꼬리만 올려놓은 채 도면 무더기를 늘어뜨리자, 남이공은 의주가 다시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녹사錄事들이 미숙하여 설계도의 중요성을 간과한 모양이옵니다. 신이 엄히 일러 단단히 계도할 터이니, 염려치 마시지요. 설계도 또한 질 좋은 종이에 새로 옮겨놓겠사옵니다.”

“부탁하겠습니다.”

왕이 도면을 마저 늘어뜨리자, 남이공은 깊게 허리를 숙이고서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나는 조선에 장차 바다의 시대가 오리라고 확신합니다. 상업이 발달할수록 물동량은 폭증할 텐데, 운송의 용이함에 있어 육운陸運은 수운을 능가할 수가 없지요.”

육로로 화물을 운송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 형태의 기반시설인 도로를 면에 가까울 정도로 깔아두어야 한다.

또한, 이렇게 깔린 도로가 사람이나 자연물에 침범 또는 훼손되지 않도록 꾸준히 관리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당장 조선의 도로 사정은 어떻던가?

계획성이나 철저함 없이 중구난방으로 개척되고 또 일부는 잊혔다.

관용도로로 관리를 받는 길은 의주에서 한양까지 이어지는 명나라 사신의 사행로가 사실상 전부.

그나마도 명나라가 몰락하고 육로가 단절된 뒤에는 관리가 부실해졌다.

이렇게 비효율적인 경로에, 상태마저 부실한 도로로 화물을 옮기는 데는 많은 노동력이 소모된다.

조선의 행상 대부분이 마차나 수레를 이용하지 않고 직접 짐을 지고 도보로 이동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과 바다를 통한 운송은 어떤가.

이용에 필요한 기반시설은 점의 형태라 확보와 관리가 쉬우며 강에서는 힘들이지 않고 바다로 빠져나갈 수 있다.

또한, 운송에 필요한 노동력 역시 사람과 가축에만 의존하지 않고 상당 부분 수류와 풍력이 대체해준다.

대신 자연의 힘을 이용하기 위한 전문성이 요구되나 그 점을 고려하더라도 소모되는 인력은 운송량 대비 매우 효율적이다. 천 톤급 화물용적을 가진 무역선조차 승조원은 백 명가량에 불과하니까.

한 사람당 십여 톤의 화물을 지구 반대편으로 보내는 셈이다. 이것이 육로에서 가능하겠는가.

“그러니, 미리 범선을 건조해 두어야지요.”

왕의 확신에 남이공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범선이 대단한 이기利器임은 분명하나, 미리 건조해둔다고 용처가 있겠사옵니까?”

상업이 발전하고 있다는 하교는 분명 옳았다.

반정 이래 백성의 생활 수준은 꾸준히 개선되어왔고, 만성적인 굶주림에서 탈피하게 된 이들은 남는 재산을 다른 곳에 쓰고자 했다.

호패법이 그것을 확실하게 증명해냈다.

팔도 전체에 파문을 일으킨 이 법령은 아직 시행하지 않은 지역에서조차 백성들이 호패를 차고 다니게 만들었다.

선혜법과 균형을 맞추겠다는 원래의 의도가 무색해질 정도.

그러나 이것은 전조일 뿐이다.

남이공이 보기엔 당장의 상업 수준이 범선을 요구할 정도가 아니었다.

그의 우려에 왕이 답했다.

“범선을 건조한다는 사실만큼이나 ‘미리’라는 대목도 중요하지요. 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잖습니까.”

배 한 척 건조하는 데 거의 반년이 걸렸다.

남이공이 예조판서의 권위를 내세우고, 서인과 호조판서가 힘을 보태주었음에도 그랬다.

“충분한 용처가 생겨난 다음 건조에 들어가면 늦습니다. 그리고, 운송 수요는 조정이나 상인들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지요.”

왕의 사유재산을 전담하는 내수사는 이 땅에서 조정 바로 다음가는 규모의 경제집단이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운송 수요를 만들어내는 건 공장이 아닌 논밭인 만큼, 연말이 지나면 내수사도 비수기가 되어버리긴 한다.

하지만 내수사보다 더 크고 방대한 규모에서 활동이 이루어지는 조정은 봄철에도 세곡의 운송이 이어진다.

“내수사의 운송 수요를 충족한 다음에는, 조정에 놀게 된 범선을 대여할 생각입니다. 분명 큰 도움이 될 테지요.”

단순히 일손만 보태기 때문이 아니다.

세곡을 운반할 때의 운송 수요에 맞춰 범선을 찍어냈다간, 소강기 때 막대한 선박 유지비만 공허히 새어나가는 꼴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가장 필요한 때에 범선이 기간제로 충원된다면 조정은 굉장히 많은 비용을 절약할 수 있는 셈이다.

“봄이 지나고, 태풍 시기에 잠시 휴업한 다음 늦여름을 맞으면 내수사도 조정도 모두 비수기가 되겠지요. 그때는 범선의 운송 역량을 민간에 제공하면 됩니다.”

사람과 상품의 운송 수요라는 게 늦여름부터 초가을에만 의도적으로 집중시킬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아주 먼 곳을 가야 하는 여행객이나 변질 우려가 적은 상품이라면 내수사가 운송 능력을 제공하는 시기에 일정을 맞출 수 있을 터다.

“또한, 부족한 상업의 발전이 단점으로만 작용하는 건 아닙니다. 그만큼 절대적인 수요는 분명 작겠으나 같은 이유로 대부분의 경제주체가 단독으로 활동하고 있지요.”

그들에게 막대한 건조비가 소요되는 범선의 초장거리 신속 운송 능력은 다른 경제주체가 흉내 낼 수 없는 특권이다.

배를 놀리지 않고 운영비만 충당하겠다는 느낌으로 값싸게 운송 능력을 제공한다면, 범선은 항상 만석을 채우리라.

그렇게 한 번 편의를 맛보게 되면 더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배를 타지 못한다면 이전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편의를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범선의 존재와 범선이 제공하는 편의에 익숙해지면, 수요와 편의 부재에 대한 두려움은 집단적인 외력이 되어 상업 발전과 범선 확대의 선순환을 촉진하겠지요.”

“……음!”

남이공이 작게 감탄했다. 전하께서는 여기까지 다 구상해놓으셨다는 말인가.

그러한 반응에 왕이 가볍게 웃었다.

“지나치게 원대한 계획처럼 들렸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범선을 동시에 백 척씩 찍어내겠다는 것도 아니에요. 내수사에 필요한 만큼, 그리고 현실이 내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도 충분히 감당 가능한 규모로 건조될 겁니다.”

“신이 불필요한 노파심을 발휘했사옵니다.”

“나는 경이 나를 걱정해 주었다는 게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신경 써주어서 고맙군요.”

왕은 남이공의 어깨에 손을 얹고서 덧붙였다.

“범선이 완성되어 조정에 대여하게 된다면 그 비용은 무상이거나, 무상에 가까운 수준이 될 겁니다. 재물을 벌고자 제공하는 게 아니니까요.”

“감히 조정을 대표해 감사드리옵니다.”

남이공은 내심 생각했다.

금상께서 자신을 가혹하게 굴리기는 해도 명군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고.

이렇게 진심으로 나라와 백성들을 신경 쓰는 왕이 역사에 몇 분 계셨던가. 절대 흔치는 않았다.

감명에 젖어 든 남이공에게 왕이 고개를 저었다.

“……?”

“주인된 몸으로 내 나라를 신경 쓰는 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조정이 입은 편의가 당연하게 되는 건 아닙니다.”

“……예에.”

김이 조금 빠진 남이공이 생각했다. 다른 요구를 하시려는 걸까.

“내가 범선을 대여해 주는 것으로 조정이 입게 될 편의는 당연한 게 아니며, 그 공적은 오롯이 예판에게 있습니다.”

“……?!”

“예판이 설계도를 백지에서 새로 옮기는 건 왕으로서의 나를 위한 공무가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나를 위한 수고이지 않습니까.”

잠자코 듣고만 있던 남이공이 허억, 숨을 삼켰다.

원래 많이 부려졌던지라 또 부려졌다고 별다른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내수사에서 범선을 건조하는 데 쓴다고 해도 그러려니 했을 뿐.

그런데 이 일은 예조판서로서의 공무와는 별개라고 친히 구분해주시고, 조정이 얻을 편의를 자신의 공로로 공언해주니 망극할 따름이었다.

덕분에, 누구 덕에 전하 배를 공짜로 쓰는 줄 아느냐고 으스댈 거리가 생겼다.

그런 것이 곧 신하들 사이에서는 권위이자 더 높은 자리에 설 명분이었다.

“아, 아니옵니다…….”

남이공은 얼굴이 빨개져서는 몸을 비틀었다.

“범선의 설계도는 중요한 사료로서 엄중하게 보관해야 하는데, 종이가 변색된 줄도 모르고 있었으니 이는 신의 잘못이고 새 종이에 옮기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옵니다.”

남이공은 겸양하면서도 짓궂은 왕이 옳다고 긍정하지는 않을까, 살짝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왕은 그렇게까지 짓궂지는 않았다.

“배의 설계는 여러 사람의 목숨과 직결된 것이니, 옮길 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하세요.”

“여부야 있겠사옵니까. 각골명심하겠사옵니다.”

왕은 당부를 마치고서 과자 하나를 건넸다.

남이공은 망극하다며, 과자를 물고는 어전에서 공손한 태도로 물러났다.

* * *

설계도를 내가 직접 옮기는 건 여의치 않았다.

변색으로 분간하기 어려워진 실선을 창작으로 때울 수는 없잖은가?

남이공에게 강조했듯이 배의 설계는 그 위에 탄 무수한 선원들의 생명과 직결된다.

그러니 누군가 설계도를 옮겨야 한다면 적임자는 응당 범선 건조를 감독한 남이공이다.

그렇다고 책 몇 권 분량의 설계도 이전을 대충 맡겨놓았다간 무슨 사고가 벌어질지 몰랐다. 귀찮은 작업일 테니까.

그래서 남이공에게 또 강조했다.

조정이 완성될 배를 빌려 쓰는 건 전적으로 예조판서 덕분이라고.

‘좋아해 주니 다행이다.’

반응을 보아 설계도를 건성으로 옮길 것 같지도 않고, 마음도 단단히 사로잡은 듯했다.

사람의 마음이야 갈대인 법이므로 이 환심이 얼마나 갈지 미상이지만 당분간이라도 상관없다.

재상의 절대적인 지지가 당장 급한 상황이니까.

‘둘째랑 약속해놓은 게 있어가지고…….’

대군을 도성 밖으로 빼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봉림대군은 서자도, 막내도 아닌 적차남.

당장 세자에게 이상이 생기면 차기 왕이 되는 몸이다.

그런 봉림대군이 도성을 빠져나가 외지를 탐방하도록 허락해준다면 신하들 모두가 들고일어날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일전의 모임을 통해 예고하긴 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여러 사람이 내가 봉림대군의 소원을 어떻게 들어줄지 주시하고 있을 터였다.

사실상 다들 할 말을 뇌리에 미리 장전해두고서 내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봐야겠지.

서부시대 영화로 치면 닳고 닳은 건맨들이 나를 360도로 포위하고 있는 셈이다.

어설프게 봉림대군과의 약조를 거론했다간 눈 깜짝할 사이에 걸레짝이 되어 나뒹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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