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03화
봉림대군의 소원을 들어주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난이도를 해골 개수로 비유하면 다섯 개 만점에 여섯 개쯤일까?
봉림대군이 한양을 나서기엔 굉장히 민감한 조건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왕의 적차남.
만에 하나 세자에게 변고가 생겼을 경우 곧바로 차기 왕이 되는 존재다.
그리고 후계 문제가 일으킨 사태는 역사에 셀 수 없이 많다.
동서고금을 다 통틀지 않고 조선만 따지더라도 그렇다.
시조와 그다음 군주인 태조와 태종부터 굵직한 후계 문제로 몸살을 앓았다.
세종과 문종 역시, 어린 후계자가 왕위를 계승했다가 작은아버지에게 기습 찬탈을 당하고 본인은 살해된 초유의 사건을 겪었다.
신하들이 후계 문제라면 일단 기겁부터 하는 이유다.
거론된 네 명의 왕들은 새 나라를 개국하고 기틀을 닦아냈으며 황금기를 일으킨 명군이었으니까.
그런 명군들조차 막지 못한 후계 문제다.
당연히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무턱대고 억지만 부려봐야, 신하들이 이구동성으로 돌아버린 게 아니냐고 항의만 하겠지.’
그래도 봉림대군의 소원은 들어줘야 한다.
원래 역사에서는 왕이 되었던 봉림대군이다.
내가 역사를 바꿔 이제는 평범한 대군 중 하나로 남게 되었는데, 소원 하나 못 들어주겠는가?
후계 문제야 당연히 민감한 거고, 왕업은 비장한 게 마땅하지만, 여기에서는 아니다.
인조가 며느리를 살해하고 핏덩이 같은 세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 내심 변명이랍시고 주워섬긴 게 후계의 민감함과 왕업의 비장함이니까.
그런데 그건 ‘1 더하기 1은 2’라는 이유로 인조가 자신은 병신이 아니라고 변명한 것과 마찬가지다.
왜냐?
인조 본인이 병신이라 전쟁에서 참패했고, 세자는 전리품이 되어 이역만리에서 볼모로 지내야 했다.
또한 청나라가 세자를 수단으로 삼아 인조를 압박하니, 인조는 선조처럼 자기 자식을 압박하여 분풀이했다.
그렇게 세자는 심신이 모두 고되어 요절해 버렸다.
세상에 어린 원손들만 남아버린 책임소재가 이렇게 분명하다.
그런데, 어떻게 후계 문제가 민감하고 왕업이 비정한 게 며느리와 세손을 학살할 이유가 되나.
내가 처한 상황도 마찬가지다.
나쁘지 않았던 효종 대신 소현세자를 왕으로 세우기로 했으니, 왕이 될 운명을 박탈당한 봉림대군에게는 마땅히 위로가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책임지는 게 도리다.
제삼자도 아니고, 봉림대군의 아버지니까.
여기에 왕업의 비정함을 들이미는 건 인조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 행동의 결과를 회피하려는 치졸한 짓에 불과하다.
그래서 당면한 문제는 두 가지.
첫째로 봉림대군의 소원을 들어주면서도 후대에 불거질 수 있는 위험을 차단해야 한다.
둘째로 이를 실현하기 위해 신하들을 설득해야 한다.
신하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위험 소지를 차단할 방법이 필요하니 이건 하나의 문제이기도 한 셈이다.
‘쉽지 않군.’
고개를 들어보니 참으로 고즈넉한 밤이었다.
하늘은 맑아 은하수가 찬란했고, 몇 없는 구름은 보름달의 창연한 빛을 받아 밝게 빛났다.
그 아래에서 나는 간만에 출궁했다.
신하들을 설득하려면, 먼저 찾아가야 한다.
* * *
“나를 도와주세요.”
“…….”
처음으로 방문한 장소는 우의정 이상의의 거처였다.
보통, 왕이 신하와 만나고자 직접 찾아오는 경우는 흔치 않다. 패초를 써도 되고, 내시를 통해 불러낼 수도 있는데 직접 거동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니 나의 방문은 기습이었다.
효과가 제대로 들어갔는지, 이상의는 방문 이래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냉정하게 생각할 시간을 주면 안 되지.’
생각이 길어지면 사람은 부정적으로 변한다.
그리고 봉림대군을 놓아주어서 발생할 위험성은 부정할 수 없다.
-왜 풀어줌? 뭘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거로 위험을 회피할 수 있는데…….
냉정한 상태로 생각할 시간을 주면 이런 당연한 결말이 나오겠지.
그래서야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방문이 갑작스럽긴 했지만, 그래서라도 우의정은 내가 방문한 이유를 아실 겁니다.”
“…봉림대군 때문이옵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씨익 웃어주고는, 괜히 방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원래 늦게 주무십니까?”
“……아니옵니다. 슬슬 불 끄고 잘 생각이었사옵니다.”
“그런데 이부자리가 보이지 않는군요.”
봉림대군 이야기를 하다가 왜 뜬금없는 소리가 나오느냐.
제삼자가 대화만 듣는다면 정말로 뜬금없이 여기겠지만, 대화 당사자들은 아니다.
이상의는 내가 선물한 초피 갖옷을 두 벌 다 겹쳐 입고 있다.
이부자리를 깔지 않은 이유?
잠을 늦게 자서 아직 깔지 않은 게 아니라, 겨울용 방한복을 두 벌이나 겹쳐 입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적한 게 그것이었다.
‘내 하사품을 이렇게 중증으로 끼고 살면서 부탁 하나 안 들어주겠다고요? 사람이십니까?’
이상의도 마음에 걸리긴 했는지 쓰게 침음했다.
내심 안도했다.
이상의가 엄격, 근엄, 진지하게 이건 봉림대군의 문제와는 별개라며 선을 그을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사적인 영역에서 만났기 때문일까.
이상의의 두뇌가 우의정보다는 빚진 게 많은 개인으로서 기능하는 모양이었다.
“우의정.”
고민이 길어지는 듯해서 채근했다.
이상의는 곤란하다는 얼굴로 흰머리 성성한 옆머리를 긁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전하….”
“말씀하세요.”
“대군을 성 밖으로 보내는 것은 노신 혼자만의 힘으로는 해낼 수 없사옵니다.”
“대신, 내가 있지 않습니까?”
“성심이 함께하니 신이 무엇이 두렵겠사옵니까 다만 일의 성사를 장담할 수 없음을 우려하는 것이옵니다.”
의미가 함축된 대답이었다.
곧이곧대로 듣더라도 딱히 문제는 없지만…….
자세하게 살펴보면 의도하는 바가 더 있다.
성심이 함께하니 두렵지 않다는 건, 내가 자신을 버리지 않는 한 이 일이 논란이 되더라도 뒈지지는 않겠다는 전제다.
후계 문제를 섣불리 건드렸다간 당색을 막론하고 조정 전체와 적이 될 수 있으니 당연히 신경 쓰일 부분.
일의 성사를 장담할 수 없다는 건 앞서 내재된 의미와 결합해 ‘죽지야 않을 테니 까라면 까겠는데, 깐다고 까질까요?’라는 뜻.
옳은 지적이다.
이상의 혼자 조정과 싸워 이길 수는 없다.
‘지적과 함께 내게 조건을 건 셈이기도 하고.’
첫째로, 자신의 전제에 확신할 수 있도록 버리지 말라는 거다.
혹여 조정의 반감이 과대해지면 꼬리 자르기를 해버릴 수 있으니까.
두 번째 조건은 동료가 더 많아야 한다는 거다.
혼자서는 깔 수 없다면, 여럿이서 까야 한다.
“그 부분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우의정에게는 말도 없이 찾아왔지만…… 설마 생각까지 없어서 이렇게 찾아왔겠습니까?”
“…음!”
“봉림대군의 위치가 민감하긴 하지만, 세자에게 갑자기 중대한 변고라도 발생하지 않는 한 대군의 민감한 위치가 문제로 이어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후계에 관해서 신이 감히 무엇을 거론하겠습니까만, 외지를 다니다 보면 신변에는 변고가 생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충분한 호위를 대동한다면 일신의 안녕에 직접 위해가 가해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간접적인 위해는, 내 생각에는, 대군이 스스로 조심할 것 같군요.”
이상의가 두 눈을 깜빡였다.
“분명 대군이 성을 나서면 처음 몇 고을에서는 순행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질 겁니다. 그러면 분명 많은 백성이 대군의 앞길을 가로막고 저마다의 문제를 호소하겠지요. 그런데, 대군에게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지위를 이용해 현지 수령에게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정도일까.
하물며 명승을 탐방하기 위해 나온 입장이다. 문제가 해결이 잘 되는지, 아닌지 남아서 지켜볼 수도 없다.
“나서더라도 한두 번입니다. 좋은 품성을 타고났으니 잠깐은 열의를 가지고 임할지 모르나, 세상 모두의 문제를 혼자서 해결할 수는 없지요.”
행적이 공개되는 한 끝없는 호소의 파도에 시달릴 테지.
이건 세자도 당한 일이다.
2차 의주전투를 앞두고 대보와 국새를 가지고 잠깐 외지에 피신했었는데, 아예 거기서 수령 노릇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면 본인 스스로가 피해 다니는 법을 깨우칠 겁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명승을 관람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이룰 수도 없을 테니까요. 어쩌면, 본인이 더 지쳐서 탐방을 일찍 포기하고 귀환할지도 모르지요.”
“음.”
이상의는 짧은 침음과 함께 긍정했다.
“간접적인 위해라면 염려할 여지가 적다는 건 알겠습니다. 하오나…….”
몇몇 미치광이가 상대라면 호위들이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왕부터가 기습 반란을 통해 이전의 왕을 사로잡았던 사람이다.
이처럼 특정한 세력이 봉림대군의 신변을 노린다면 소수의 호위로 감당할 수 있을까.
“대군의 신변을 노리는 건 극단적인 행위이고, 실패했을 경우 벌어질 일은 확실합니다. 그만한 위험성을 감수할 정도로 정치세력들이 극단적인 상황에 놓여 있습니까?”
당장 그들은 황해도 남부라는 내가 제공한 놀이터에서 서로 흙을 묻혀대는 것으로 정쟁의 본능을 해소하고 있다.
당여들마다 크고 작은 불만이 있을 수는 있겠으나, 조직력을 발휘할 정도로 당 차원에서 절실한 요구사항 또한 포착되지 않았다.
“즉위 초반에는 다소 혼란스럽긴 했지요. 선혜법 도입에 반대하는 부패 관료들이 합심해 종친을 매수한다던가. 철저하지 못했던 북인 숙청에 반감을 품은 서인 강경파들이 괴서를 붙이고 다닌다던가.”
하지만 지금은, 그들 모두 일소되었다.
부패 관료들은 외지에 던져놓은 이괄을 물어버리면서 대거 숙청됐다.
이괄이 한양에서 독살까지 당하면서 숙청의 분위기가 더욱 살벌해진 덕이 컸다. 적발된 일부만으로, 사사로운 인연을 공유해 둔 다른 관리들마저 모조리 관료계에서 축출됐으니까.
일부는 억울하겠으나, 종양을 절제하는데 종양만 딱 잘라내기란 불가능한 법이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 해야겠지.
당시에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던 자들이야 여전히 관료계에 기생하고 있겠으나, 집단은 사실상 해체되어버렸다.
애초에 분명한 실체 없이 개인의 사리사욕을 수호하고자 발생한 엉성한 집단이었고, 이괄의 건에 연루되어 죽거나 축출된 자가 많으며, 북인과 서인 모두 부정하지 않게 된 선혜법을 이제 와 궤도에서 탈선시킨다는 건 너무 무리한 목표였으니까.
잔당들은 과거의 일은 뇌리에서 모조리 지워버린 채 흔해 빠진 관리 중 하나로서 묵묵하게 제 일이나 하고 있을 터였다.
서인 강경파들의 자작극도 결과는 같았다.
끝내 단서가 잡히면서 체포령이 떨어졌는데 이중 핵심 인물인 전 정무목사가 청나라에 귀부해 버렸기 때문이다.
사태가 정치적 음모에서 오랑캐 부역자들의 내부 혼란 기도로 발전하자 내심 북인 숙청에 동조하던 여타 서인 당여들조차 견디지 못하고 꼬리를 잘라버렸다.
그렇게 조정을 양분한 북인과 서인 모두가 오랑캐 부역자들은 죽여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쳤으므로, 당연히 그렇게 되었다.
“그 뒤로 문제가 된 게 있습니까?”
솔직히 그 뒤로 조선의 정치 분위기는 얼어붙은 호수보다도 더 잔잔하게 변했다.
나댈만한 놈들은 다 뒈지거나 찌그러졌으며 북인과 서인 모두 영수와 중진들이 왕과 맞설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살려준 사람이 분명한 북인 중진들이야 당연히 얌전했고.
서인 중진들은 강경파의 자작극 때 한 번씩 죽다 살아났으니까.
그 뒤로는 모문룡의 동강진과 후금을 상대로 전승을 겪으며 한껏 충천한 국뽕으로 왕의 평가가 올라갔다.
과거에는 왕이 서인들이 만들어준 바지사장에 불과했다면, 지금은 조선을 망쳐놓은 광해군을 분연히 처단하고 나라를 다시 반석에 올려놓은 명군이었다.
위에서는 영수와 중진들이 단속하고 아래에서는 새로 유입되는 신입들부터 왕에게 의문이 없으니 당연히 혼란도 발생할 수가 없다.
치세 초반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
인조는 한평생 도달하지 못했던 영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