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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04화 (204/380)

인조, 명군이 되다 204화

종합하면 이거다.

“대군 신변에 관한 우려는 과장되어 있습니다.”

“음.”

“아버지로서 자식 걱정이 부족하다고는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이원익이 실소했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사옵니다. 전하께서 왕자들을 얼마나 각별하게 대하시지는 모두가 알지요.”

세자에게 서궐을 넘겨주기 위해 남루한 경운궁을 고수한다던가.

미리 왕업에 익숙해지도록 노련한 신하와 시간을 만들어주고 업무도 간간이 이관해 준다던가.

심지어는 공훈도 세워주었다.

2차 의주전투 당시 팔기군 일부가 한양에 다다랐는데 이들을 막아낸 주역 수방사의 주 무장이 총검이었다.

근접전에서는 몽둥이에 불과한 조총을 단숨에 단창으로 탈바꿈시켜주는 획기적인 무기.

세간에는 세자가 개발자로 알려져 있으나 알만한 이들은 다른 내막이 있음을 알았다. 세자부터가 부왕께서 고안하신 것을 옮기기만 했을 뿐이라 자인했으니까.

이상의는 생각했다.

선조의 치세였다면 상상조차 못 했을 후의라고.

또한, 차기 왕으로서 육성되는 세자에게는 교육이 다소 냉혹한 수준으로 이루어졌으나 그런 운명을 타고나지 않은 대군에게는 더욱 솔직한 부성애를 보여주었다.

때론 피도 눈물도 없는 모습을 보여주던 왕이 대군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실효라곤 하나도 없는 가시밭길을 걷고 있으니까.

“하지만, 세상 일이란 짧게 살지는 않았다고 자부하는 신조차 다 알지 못하는 것이니 거듭 염려할 수밖에 없지요.”

후대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왕의 예상대로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무수한 정황도 근거도 예상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쓸모가 없어지는 법.

“신이 늙고 병들어, 이 한 몸으로 저하의 치세는 지켜볼 자신이 없다는 게 저어될 따름입니다.”

그런 위험성을 감수하기엔 후계 문제는 너무 민감하다.

하지만 이상의는 이미 왕에게 조건을 전했다.

그것이 충족된다면 말을 바꿀 수야 없다. 하물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에게 한 약속이다.

그래서 이상의는 마지막으로 우려를 표했다.

우의정으로서 드러내는 최후의 미련이었다.

어쩌면, 금상의 바다와 같은 부성애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핸 노력이 후대에는 어떻게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그때 예상과는 다른 일이 벌어졌을 때 그것은 누가 막는단 말인가.

왕은 쓰게 웃었다.

“‘저하’가 치세를 펼칠 즈음 늙어 없어지는 건 우의정만이 아니겠지요. 그때는 세자가 부디 잘 해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교육하는 것이고요.”

최선을 다했다면, 후회도 없겠지.

“좋은 방법이 있을지 생각해봅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 보지요.”

“예에.”

이상의가 지친 목소리로 답했다.

지금 시간을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때였다. 아무리 밤잠 적은 늙은이라도 잘 때를 지나면 줄어든 체력이 더욱 줄어들 테니.

“이만 불청객은 가보겠습니다.”

“아, 배웅해드리겠습니다.”

“계십시오. 내가 출궁했다는 걸 굳이 알릴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방문을 빠져나가기 전에 일렀다.

“내일 늦게 일어나 등청에 늦는다면, 두 의정분들에게 전해주십시오. 조만간에 우상께서 늦은 이유를 알게 될 거라고요.”

“하하. 살펴 가시옵소서.”

일어나서 인사하는 이상의를 뒤로 하고 방문을 나섰다.

역시나 이상의는 잘 때를 지나 피로했던지 마당을 가로지르기 무섭게 홀로 켜져 있던 사랑방의 불이 뚝 꺼졌다.

동네에는 딱따기 치는 소리가 고고했다.

밖에서 대기하던 위사 및 내시들과 함께 다시 궐로 향했다.

* * *

다음 날 밤이 되어서는 남이공의 처소를 기습 방문했다.

범선의 설계도 건으로 호감을 사두었으니 설득이 비교적 수월하리라는 판단에서였다.

물론, 딱 그것만 믿고 가지는 않았다.

남이공 역시 예상치 못한 등장에 기겁하고는 약간 정신이 나간 채로 협조를 논했다.

그의 요구사항은 먼저 만난 이상의와 같았다.

“신이, 설사 온 힘을 다하여 대군의 출성을 옹호하더라도 다른 재상들이 굳건히 반대한다면 일의 성취는 어렵사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른 재상을 이미 만나보셨사옵니까?”

남이공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협력자의 존재가 궁금하긴 했지만, 그들의 신원을 밝히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먼저 우의정께서 협력을 약조하셨고…….”

“아아.”

남이공은 그리 놀랍지도 않다는 듯 작은 감탄과 함께 끄덕였다.

초피 갖옷을 둘둘 둘러매고 여름에도 그렇게 살 것 같은 늙은이였다. 덥석 응하지는 않았더라도 왕의 부탁을 거절하긴 어려웠으리라.

“호조판서도 응했지요.”

“…김신국이도 말이옵니까?”

“예.”

“허어.”

예상치 못했던 남이공이 탄식을 토해냈다.

나는 김신국은 아직 방문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이건 구라다.

왜 구라를 쳤느냐?

“언제 예조판서께서 내게 물어보셨지요. 의정이 예정되어 있느냐고 말입니다.”

“아유, 신이 어찌…….”

남이공이 질색하고서 손까지 저었다.

“부임을 앞두고 생각이 많아져서 호조판서를 상대로 몇 마디 했을 뿐이옵니다. 그런데 그 치가 눈치란 게 없다보니…….”

전하께 함부로 상주드렸다는 양, 남이공이 한껏 송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내가 드린 대답을 기억하십니까?”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마땅한 하교를 내려주셨지요. 응당 일을 잘 해냈고, 또 잘 해낼 사람이 의정에 제수되는 게 지당하지요.”

“흠….”

“……아니옵니까?”

“그때는 분명 예조판서만 아니라, 호조판서도 의정의 후보이니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했었지요.”

씨익 웃어주니 남이공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역시나 김신국이 서로 경쟁하는 사이라는 건 알려주지 않은 모양.

“아…… 오. 하하…. 신은 듣지 못했사옵니다.”

남이공은 차마 배신감을 억누르기 어려웠는지, 멋쩍게 웃어대었다.

“호조판서라면 당연히 나의 부탁에 응할 듯하여, 우의정 다음으로 찾아가 말을 나눠보았습니다.”

“전하, 호조판서는 진지하게 대군의 소원을 성취시켜드리고자 응한 게 아니라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 응한 것이옵니다!”

남이공이 곧바로 치고 들어왔다.

이래서 거짓말한 거다. 김신국이 먼저 뒤통수 쳤다고 믿어버리면 내 부탁을 거부하기 힘들어질 테니까.

출세욕이 꽤 강한 사람이다.

내가 준비해 온 두 번째 수단이었다.

나는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대군의 소원을 성취시켜주고 싶으니 별 수 있겠습니까?”

“전하…!”

“예조판서. 도와주세요.”

“음……. 으음!”

남이공은 팔짱을 낀 채 똥 마려운 표정을 잠깐 지었다가, 더욱 똥이 마려운 얼굴이 되어서는 마지못해 답했다.

“전하께서 도움을 청하시는데 신하가 되어 어찌 냉혹하게 거부하겠습니까.”

“예조판서. 고맙습니다.”

“…그래도 대군의 출성에는 매우 조심스러워야 하옵니다.”

“내 어찌 모르겠습니까? 나도 염려하고 있습니다. 좋은 생각이 난다면 알려주세요.”

“예에.”

나는 뒤따라 일어서려는 남이공을 앉히고는 처소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곧장 김신국의 처소를 찾아가서 정확히 반대로 말했다.

“예조판서가 협력을 약조해주었습니다.”

“아니, 예조판서가 말이옵니까?”

막역지우 아니랄까 봐 김신국도 남이공과 똑같은 소리를 했다.

“전하. 예조판서는 출세욕이 과한 사람으로 일전에는 신을 시켜 감히 전하의 의중을 떠본 전적이 있사옵니다. 과연 그치가 순수히 충성하는 마음으로 협력을 약조했겠사옵니까?”

“알고는 있으나…, 내가 대군의 소원을 성취해주고 싶으니 어쩌겠습니까.”

그나마 진솔한 마음을 보여주니 김신국은 눈을 질끈 감고는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아마 머릿속에서 많은 계산이 돌아가고 있을 테지.

하지만 앞서 우의정과 예조판서가 협력을 약조했다는 점에서 부담감은 크게 덜었을 거다.

혹여 문제가 되더라도 독박 쓸 일은 없다는 뜻이니까.

게다가 예조판서는 득달같이 협력을 약조했다는 것도 거슬릴 터. 반대로 자신만 고민이 길어지면 왕의 마음이 다른 곳으로 향하게 되니까.

끝내 김신국이 입을 열었다.

“전하의 의중이 분명하니 신하된 자로서 받들겠으나, 삼가 고하건대 대군의 출성은 가벼운 일이 아니옵니다. 혹여 후일 논란될 여지는 사전에 차단할 필요가 있사옵니다.”

결연한 표정이었다.

출세욕으로 선비의 혼을 팔아버린 호조판서는 이런 우려는 쥐뿔도 하지 않을 테니 자신만이라도 정신 바짝 차리겠다는 이 느낌.

이미 겪고 왔지.

“함께 좋은 방도를 마련해 봅시다. 그 다음에, 내가 모두의 앞에서 거론하지요.”

“망극하옵나이다.”

나는 뒤따라 일어서려는 김신국을 앉혀놓고는, 어깨를 몇 번 두드려준 뒤 김신국의 처소를 나섰다.

“오늘은 날씨가 좋구나.”

하늘 맑고.

바람 시원하고.

두 사람의 끈끈한 우정 덕에 판서 두 명의 지지를 약조받았다.

재밌는 건, 두 사람 다 똑같이 나라를 걱정해서 대군의 출성이 혹 훗날의 우환이 될까 우려하면서도 서로는 믿지 않았다는 점이다.

두 사람을 같은 자리에 앉혀놓고서 도움을 청했다면 주거니 받거니 나를 압박해왔겠지.

그런데 따로 떨어뜨려놓고 상대방이 먼저 뒤통수를 쳤다고 하니까 곧바로 질 수 없다며 응해왔다.

……막역지우가 맞나?

악역지우라는 표현이 더 옳지 않을까.

아무튼 재밌는 사람들이다.

나중에 술자리에서 서로 영혼을 팔았다고 비난하다 보면 내막이야 금방 드러나겠지만, 그때 가서 당했다는 걸 깨달아서야 무엇하리?

이미 대세는 정해진 뒤일 텐데.

그럼 뭐 입 꾹 닫고 그대로 가야지…….

* * *

세 사람 다음으로는 다시 세 사람을 설득했다.

첫 번째는 좌의정 박홍구.

나와 꽤 가까운 사이고 잔머리도 제법 돌아가는지라 이괄과 흥안군을 지옥으로 보낼 때도 합을 맞췄었다.

“대군이 외지를 방황하다가 발생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고려하셨을 테지요. 신은 승산만 충분하다면 가세하겠사옵니다.”

두 번째는 외척인 한성부 판윤 구굉.

전형적인 충신으로, 왕가의 안녕에 해가 될 사안이라면 보수적으로 나올 가능성을 점쳤다.

“대군의 안전을 보장할 방법이 있사옵니까?”

“협력을 약조한 분들 모두가 경과 같은 우려를 표했습니다. 짜고 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에요. ……아니겠지요?”

“아니옵니다.”

“경과 신하들이 안심할 수 있다면, 과격한 방법일지라도 쓰고자 합니다. 그전에 대군의 의사는 확인하겠지만요.”

“망극하옵나이다.”

예상대로 구굉은 다수의 지지자는 거들떠보지 않고 대군과 왕실의 안녕에만 집중했으므로, 나는 본심 일부를 드러내야 했다.

과격한 방법이라고 했지만 봉림대군에게 위해가 되는 건 아니다.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세 번째는 도승지 이덕형이었다.

도승지는 정삼품으로 앞서 만난 재상들과는 품계가 떨어지지만, 대신 승정원의 장관이다.

그리고 승정원은 왕과 백관을 이어주는 창구.

그런 기관의 장관이 정삼품인 건 여타 승지들도 정삼품으로 통일되어서 그렇지 기관장으로서의 존재감은 육조 장관들 못지 않다.

미래의 도승지인 대통령비서실장도 장관급 공무원이다. 행정부의 실질적인 2인자라고도 하고.

“경이 우려하고 계실 많은 부분은, 나 역시 거듭 고민했고 또 여전히 고민하는 중입니다.”

“……받들겠사옵니다.”

이덕형의 설득은 쉬웠다.

그 역시 박홍구처럼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라 남들이 했던 말을 또 굳이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가 생략한 부분도 칼같이 알아들었다.

나는 과거에 이덕형의 소원을 들어준 적이 있었다.

반정 때 광해군과 폐세자를 이미 한 번 살려주었는데, 폐세자가 그만 배소에서 탈출 사건을 벌여 또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였다.

이덕형은 그들을 죽이지 않기를 절실히 바랐고, 나는 이덕형의 마음을 얻고자 광해군과 원수 관계인 대비는 물론 여럿을 설득해야 했다.

이번에 이덕형이 긴말 않고 응해준 이유다.

뿌린대로 거둔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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