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조 명군이 되다-205화 (205/380)

인조, 명군이 되다 205화

여섯 명을 설득한 다음에는, 다시 여섯 명을 설득했다.

그 영광스러운 차례의 첫 번째는 나보다 먼저 뒷방 늙은이가 되어 소싯적 이야기를 늘어놓아온 장만.

수방사 원수를 맡아 팔기군을 패퇴시킨 것도 꽤나 옛일이 되었으므로, 그는 다시 무료해하고 있었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허허. 쌩쌩하옵니다.”

원래 역사에서 장만은 부원수 이괄에게 군사의 과반을 맡겼다가, 인조의 반란 날조로 진짜 반란이 발생하자 피를 토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대뜸 정묘호란 때 적을 막지 못한 책임을 물어 유배도 당하는데…….

이번에는 똥싸개가 둘 없어져서인지 건강했다.

원래 역사에서는 심신이 고달팠던 와중 잃었던 왼쪽 눈도, 여기선 멀쩡했고.

“외유도 가능하겠습니까?”

“문제없지요. 하오나…….”

장만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이 나이에 외관을 맡는 건 벅차지 않을까 하옵니다.”

전쟁터에서 구를대로 구르고 관직이라면 학을 떼게 된 장만이다.

내직이라고 좋아하진 않았다. 명예직이라고 하사하고자 했으나 본인이 먼저 고사했다.

“휴식이 길어졌으니,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안하고파서 그럽니다.”

“으음….”

장만이 잠시 침음을 흘렸다. 일단은 들어보겠다는 투.

“대군이 출성하게 되면, 밖에서 교육을 맡아주셨으면 하옵니다.”

“으으음……!”

“대군과 함께 외유를 다니시게 되겠으나, 이전 같은 고생은 없을 겁니다. 또한 공을 많이 세우신 공께서 세자의 교육도 맡아주신다면 매우 고마운 일이고, 겸사겸사 각도의 명소를 구경해보시는 것도 괜찮지 않겠다 싶었지요.”

“음.”

장만이 현직자는 아니어도 의주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사다.

그걸 몇 년이나 우리다 보니 더 듣고싶어 하는 사람이 없어져서 그렇지, 예전에는 문간에 불이 나도록 사람이 오갔다.

그마저도 뜸해진 지금은 여러모로 무료할 터.

또한, 그의 지지는 봉림대군의 소원 성취는 물론 그 이후에도 큰 도움이 될 거다.

장만은 짧은 고민 끝에 빙그레 웃었다.

“전하께서 대군의 교육을 맡겨주신다면, 오히려 신이야말로 망극할 따름이지요.”

“경 이외에는 대군이 함양해야 할 품위와 지식을 가르쳐줄 사람이 없습니다.”

“하하…….”

교육자로서 적합한 후보가 장만뿐인 건 아니었지만, 지금 놀고 있는 사람은 장만뿐이었다.

장만 다음에는 마찬가지로 북방군의 옛 도원수였으며 현 수방사 원수인 김충선을 찾아갔다.

김충선은 대군의 출성 문제에 딱히 문제의식이 없었다.

출신도 출신이고, 변방의 무관을 오래 맡아 중앙의 관료들과는 후계 문제에 대한 민감도가 다르기 때문이겠지.

“전하께서 바라신다니 따라지요. 한데, 신을 찾아오신 이유는 그뿐입니까?”

왕이 뭐 이런 걸로 대뜸 찾아오지, 하는 느낌이라서 나는 없는 용건까지 현장에서 짜내어 장단을 맞춰야 했다.

의외의 난적이었다.

세 번째는 대비였다.

대비는 그동안 손주들 옷은 너무 많이 지었다고 생각했는지 대신 짬짬이 장신구를 만들었다.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복주머니나 노리개 등등.

그렇게 만들어진 장신구는 정명공주 부부와 손주들에게는 물론, 나와 중전 그리고 세자 부부에게도 나눠졌다.

손이 아주 많이 커진 셈이다.

대신 비게 된 시간에는 정명공주 부부와 손주들 및 광산부부인과 만나거나 이따금 그들과 외유를 다녔다.

‘봉림대군보다 팔자가 먼저 피셨어.’

대비는 말년을 알차게 보내면서 내적 평화와 거동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체득한 상태였다.

왕실의 웃어른으로서 만약을 걱정하긴 했지만, 봉림대군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다는 나의 의도는 좋게 봐주면서 지지를 약속했다.

“주상이 나라를 올바르게 이끌어 태평성대를 일으켰고, 또 세자의 교육에 각별히 힘쓰고 있으니 내가 무어라 할 부분은 없구려.”

알아서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봐 왔기 때문일까.

나 역시 대비가 계속 나마스떼하기를 기원했다.

“나마수태.”

“주상도 나마수태 하시오.”

음…….

나는 나마스떼할 수 있을까.

의문을 뒤로하고 네 번째로는 공조판서 김류와 만났다.

서로 호감이 큰 관계는 아니지만 인연은 두터웠다.

함께 김자점을 솎아낸 적도 있고, 또 출세에 목매지 않는 대신 토사구팽당하지 않기로 나와 약조도 했다.

다만 김류는 대군의 출성을 썩 탐탁지 않아 했다.

“봉림대군의 출성 문제는, 전하께서 친히 신을 찾아와서 거론할 거리는 아닌 줄로 아옵니다.”

오늘날 조정의 형세는 김류가 믿어온 서인 천하와는 달라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천하의 안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에게 대군의 출성은 충분히 천하의 안정을 위협할 소지가 있었다.

“더욱이, 다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후일 봉림대군의 신변이 불온한 무리와 연루된다면 어떠한 우환을 일으키겠사옵니까?”

그동안 우려를 표해온 이들과 비교하면 훨씬 직설적인 표현.

반정을 일으키고 왕을 추대한 장본인으로서 이 정도는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가 얌전하게 지내는 대가라면, 충분히 용납할 수 있다.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요. 북인은, 요즘 기가 살았다곤 하지만 불충하지는 않거니와 서인은 경이 단단히 단속하고 있지 않습니까?”

서인에 대한 평가에는, 김류가 앞으로도 계속 서인의 영수를 맡아주길 바란다는 당부도 담고 있었다.

왕이라고 아무나 당파의 영수로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미 영수인 자라면 자리를 계속 지키게 하는 정도는 가능했다. 숙청의 계기가 될 수 있는 사건은 잠재우고 경쟁자는 압박하는 식으로 말이다.

“흐음…….”

* * *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는 그동안 설득해온 누구보다도 중요했다.

이미 재상급 인사를 열 명이나 설득한 만큼, 봉림대군의 출성은 충분히 가시권에 들어왔다.

가능성이 마련되었다면 마땅히 실현되었을 때도 대비해야 한다.

“세자야. 그리고 봉림대군.”

“예, 아바마마.”

봉림대군은 자신이 형과 함께 불린 이유를 모르는 듯했으나, 세자는 깨우친 듯 진지했다.

“길게 말하지 않으마. 세자도 같은 자리에 있었으니, 동생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고 있겠지.”

“그러하옵니다.”

“네 동생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구나.”

이미 거듭 생각해온 바가 있을 텐데도, 막상 말을 꺼내기 힘들어졌는지 세자는 답하지 못했다.

아바마마의 뜻대로 하시라…….

그런 식의 대답은 내가 세자를 불러내어 의향을 물어보는 이유의 답은 되어주지 않는다.

봉림대군의 유람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일정이 많이 길어지거나, 혹은 유람하는 와중 논란 될 일이 발생한다면 후대에 다시 거론되기 십상이었다.

그러니 나 못지않게 세자의 의향도 중요했다.

“…세간에서는 대군의 행보를 어떻게 받아들이건, 아바마마께서 허락하셨다면 소자 역시 마땅히 그리 알고 따를 것입니다.”

“나는 너희들을 한없이 사랑하고, 원하는 바가 있다면 들어주고자 애쓰고 있다만, 가장 걱정되는 것은 신하들의 반발이나 세간의 곡해가 아닌 너희 형제들 사이에서 분란이 발생하는 것이다.”

“염려치 마시옵소서.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사옵니다.”

“세자가 하는 말이어서 믿겠다. 그리고 봉림대군.”

세자에 이어 봉림대군이 아차 하며 고개를 숙였다.

“예, 아바마마.”

“나와 세자가 봉림대군을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세상 모두가 힘을 합쳐 부러 논란을 만들고자 한다면 누군가는 책임지게 될 수밖에 없다.”

“…….”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군이 대군으로서의 지위를 포기하는 것이 있다.”

종친이 형벌로서 폐서인된 전례는 있어도 직접 지위를 포기한 적은 없다.

하지만 전례가 없기란 종친이 팔도를 횡행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논란을 없애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논란이 될 여지부터 없애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봉림대군이 애초에 유람을 떠나지 않는 것이지만, 본인이 절실히 원한다면, 다른 것이라도 내어주어야 한다.

“아바마마.”

세자가 조금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말하거라.”

“비록 봉림대군의 출성에 논란이 될 여지가 있사오나, 아직 논란이 된 것은 아니오니 과격한 방법은 미뤄두는 게 옳은 줄로 아옵니다…….”

“차후에 논란이 되었을 때, 그런 문제가 있음을 세자도 봉림대군도 알고 있기를 바란다.”

“…명심하겠사옵니다.”

“봉림대군은 감수할 수 있겠느냐?”

다시 고개를 돌려 물어보니, 봉림대군의 고민이 오래 이어졌다.

이만한 논란까지 감수해가며 자신이 억지 부릴 필요가 있는지 고심하는 거겠지.

물론, 그래도 된다.

나는 이미 준비를 거의 마쳤고 화룡정점을 찍기 위해 당사자들의 의향을 확인하고자 왔다. 그것을 알려주려는 찰나였다.

“……!”

세자가 먼저 봉림대군을 돌아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놀란 봉림대군은, 이내 결심한 얼굴로 따라 끄덕이고는 이쪽을 향해 답했다.

“소자는 각오했사옵니다. ……한양을 떠나 다시 돌아올 수 없게 되더라도, 드넓은 세상을 직접 둘러보고 싶습니다.”

“알겠다. 조만간 좋은 대답을 돌려주마.”

“망극하옵니다, 아바마마.”

* * *

며칠 뒤.

당상이 좌우로 시립한 자리에서 일렀다.

“경들 모두 봉림대군이 내게 했던 말을 알고 계실 겁니다.”

“…….”

당상들 사이에서 올 게 왔다는 결연함이 퍼졌다.

누군가는 기를 쓰고 이구동성으로 대군의 출성을 막아야겠다 내심 결심했겠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을 터였다.

아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내가 대군의 하나밖에 없다는 소원을 성취해주고자 하는데, 혹 제신 중에 이견이 있습니까.”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출발하지 않았다.

의정들과 육조판관이 침묵하고 헛기침만 간간히 터뜨리니, 뒷줄에 선 사람들은 어리둥절 눈알만 굴려대면서도 차마 먼저 입을 열지는 못했다.

재상들이 다 묵언수행을 하겠다는데 말석의 관료가 무슨 배짱으로 나선단 말인가.

저들 모르는 사이에 이미 다 합의가 되었다는 결론을 도출해 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그건 병조참판 이귀도 마찬가지였다.

그간 매도 많이 맞고, 태평성대에 찌들어 성격도 제법 죽었기 때문일까.

이귀는 차마 재상 모두를 거슬러가며 혼자 왕을 맞대결을 펼치고픈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귀마저 침묵하는 상황에서 그를 제치고 나서고픈 사람 역시 없었다.

어리둥절한 건 영의정 이원익도 마찬가지였다.

이원익은 전형적인 충신이었고, 백관의 대표로서 더 냉정해야 할 필요가 있는 만큼 왕은 그를 따로 설득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머지 재상들이 모두 찬동하는 판국이니, 백관의 대표로서는 도리어 홀로 간언을 올리기 난처한 마당이었다.

그러면서도 이원익이 간언의 필요성을 고심하던 순간이었다.

“제신이 허락하니, 내가 안심하고 대군을 출성시킬 수 있겠습니다. 영의정?”

“…예에.”

“그렇다고 대군 혼자서 무턱대고 궐을 나설 수는 없겠지요. 미안하지만, 의정부에서 자세한 계획을 마련해 준다면 고맙겠습니다.”

“아니옵니다. 종친의 안녕은 국가의 안녕과도 직결된 사안이므로, 중대함을 따져본다면 의정부가 나서는 게 옳습니다.”

이원익은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은근히 드러냈으나, 이미 저만치 진도가 나가버린 의제를 뒤집지는 못했다.

날치기로 중대사안이 통과하자 말석에서는 당혹감이 번져나갔다.

아무리 왕이 재상들과 다 합의한 사안이라도 개인의 감상까지 어찌할 수는 없는 법.

그것에 답해주겠다는 듯 왕이 일렀다.

“여담인데, 내가 세자와 봉림대군을 다 앉혀놓고 출성에는 이러한 문제가 있다, 각오는 되었느냐 물어보니 세자가 먼저 봉림대군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더랍니다.”

애가 참 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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