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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06화 (206/380)

인조, 명군이 되다 206화

당사자가 원하는데 왕이 허락했고, 재상들은 인정했으며, 차기 왕마저 긍정했다는데 무슨 말이 더 나오랴.

그렇게 봉림대군은 소원대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날이 춥지는 않으냐?”

봉림대군은 출성을 앞두고 단단히 껴입은 채였다.

그래도 외풍을 다 막지는 못하는지라, 코끝이 빨갛게 얼어 있었는데 상기된 이유가 꼭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혀 춥지 않사옵니다!”

“신이 났구나.”

“예!”

중전은 걱정이 많아 보였다.

“대군이 성을 떠나기엔 이른 계절이 아니옵니까?”

“내가 경험해 본 바, 십대는 무적입니다. 추운지 안 추운지도 몰라요. 추울 수도 있긴 한데, 재미있으면 안 춥습니다.”

봉림대군도 전혀 춥지 않다지 않나.

그리고 시기를 따지면 지금 나가는 게 맞다.

연초라 바쁠 사람은 바쁜데, 안 바쁠 사람은 진짜 한없이 안 바쁘다. 천하의 운행이 종결을 맞는 계절이라서다.

미래는 몰라도 전근대인 오늘날에는 영역에 따라 얼마든지 게을러질 수 있다.

바깥도 많이 춥고.

국가적으로 비수기인 셈이다.

나갈 거면 이런 때 나가야지. 바쁠 때 행사가 생기면 여러 사람 피곤해진다.

“제조.”

“염려치 마시옵소서.”

장만이 씨익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그에게는 콩알만 할 봉림대군이 제법 귀엽게 보인 탓일까?

늦둥이를 바라보는 듯한 애정이 느껴졌다.

본인부터가 소싯적을 떠벌이길 좋아하는 할아버지이니, 봉림대군과 조합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장만이 맡은 제조직은 봉림대군의 보호 겸 교육을 위해 임시로 설치된 행종청行從廳의 장관이었다.

이름은 과거 왕의 호종을 위해 임시로 설치되었던 행종도감行從都監에서 따왔다.

단위가 도감이 아닌 청인 이유는 호종 대상이 대군이라서다. 도감은 왕과 세자를 위한 단위다.

나는 일별을 앞두고 무릎을 접었다. 대군과 눈높이를 맞추고는, 무적이라고는 하나 연약하기 짝이 없는 손을 붙잡아 매만졌다.

“다시 보자꾸나. 그동안 할아버지 말 잘 들어라.”

“…할아버지요?”

봉림대군은 눈이 동그랗게 되어서, 할아버지라면 달리 후보가 없는 장만을 쳐다보았다.

장만은 자신이 대군의 할아버지로 불릴 줄은 몰랐는지 멋쩍게 웃다가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신이 살다보니 대군의 할아버지가 다 되어보는군요.”

나는 피식 웃어주고는 다시 봉림대군을 바라보았다.

“조심해서 건강하게 지내거라.”

“예, 아바마마.”

나는 여러 재상들의 만류에도 이 여행의 끝을 분명하게 정해두지 않았다.

봉림대군이 팔도의 유람을 충분히 즐기기를 바라서였다. 혼자 놀러가는 것도 아닌데 일정을 정해놓는다면 매번 일정에 쫓겨다닐 수밖에 없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보았을 상황.

그래서야 소원 성취라고 부르긴 어렵지.

대신 아비가 무리해준 만큼 여행을 충분히 즐기고 또 즐겨서, 왕위에 올랐던 역사보다 더 행복하고 알찬 삶을 보내기를 바랐다.

“그래. 가거라. 인사를 더 오래 나눴다가는 이 아비가 미련이 생기겠다.”

진심이었다.

봉림대군은 마지막으로 폭 안겨왔다.

이런 느낌을 받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지 않을까. 봉림대군이 충분히 팔도를 유람하고 돌아온다면, 지금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을 테니까.

“다녀오겠사옵니다.”

“그래. ……제조?”

“예.”

장만은 대군을 가마에 태우고는, 자신은 저만치 앞서가 안장에 올랐다.

그리고 가볍게 박차를 가하여 호위를 맡은 기병들 및 봉림대군을 태운 가마를 이끌고 나아갔다.

일행이 오십 보쯤 멀어졌을까.

봉림대군이 가마의 창을 열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녀석이 탄 게 자동차 같았다면 기겁했겠지만, 태평하게 가는 가마였으므로 나는 대군에게 똑같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 * *

“어찌하여 제게는 말씀도 없이 이 일을 멋대로 정해 버리십니까?”

막상 둘째를 외지에 떠나보내니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을까.

그간 별말 없었던 중전이 불만을 드러냈다.

“자식 소원이라는 데 들어줘야지요.”

“소원이라고 다 들어달라고 하면 안 될 게 어디 있겠습니까?”

“분명 건강하게 돌아올 텐데, 중전께서 근심하신다면 기력만 낭비하는 셈이 되지 않겠습니까?”

“…….”

“내가 왕으로서 책임지고 대군을 안전하게 보호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신하들도 대군 보호에는 진심이었다.

내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행종청의 규모를 확대했으니까.

호위하는 위사들의 숫자는 물론이고, 잡일을 수발해줄 내시와 잡물을 옮겨다줄 일꾼의 수도 늘어났으며, 혹 발생할지 모르는 질병을 다스리고자 어의에, 대군의 교육을 보조하기 위해 종부시宗簿寺의 말단 몇도 왕자사부王子師傅라는 이름으로 대동했다.

거기에 대군의 행차와 행보를 글 및 그림으로 기록하고 책으로 엮어내기 위한 홍문관과 도화서의 관리가 동행했다.

신하들은 여기에 대군의 행차를 상징할 다종다양한 의장과 이것을 들고 다닐 사람까지 원하였으나, 내가 동네방네 대군 행차를 소문내고 다닐 거냐는 호통에 마지못해 좌절했다.

물론,

-대군의 행차라면 소문내고 다니는 게 맞지 않을까?

이런 의문들이 많았던지라 나는 행차가 불필요하게 이목을 사로잡을 경우 발생할 갖은 귀찮은 사례를 거론해야 했다.

그동안 벌려놓은 것만으로도 과했다.

대군의 행차를 유람이 아닌 조선판 순회법원으로 만들 생각인 걸까?

오죽하면 신하들이 다시는 이러지 말라는 의도로 일부러 판을 키우나 진지하게 의심했을 정도다.

“내가 인평대군은 얌전하게 키우겠습니다.”

“이미 가까운 사이에 사례를 만들어놓지 않으셨사옵니까?”

“그래도, 반드시 시서화를 좋아하는 얌전한 모범생으로 길러내겠습니다.”

두 대군을 싹 다 밖으로 돌리려 들었다간 중전도 내 머리채를 붙잡고 밖으로 돌려버릴 거 같거든.

“약조하겠습니다.”

거듭된 약속에 중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데, 봉림대군이 유람을 떠난 건 진짜 특수한 사례라서 그렇다.

왕위를 빼앗았는데 본인은 알지도 못한다고 입 싹 닫아버리겠는가?

하물며 아버지가 되어서?

내가 인조도 아니고.

생물학적으로는 인조가 되어버리긴 했는데, 그렇다고 정신상태까지 인조는 아니지!

“중전, 그래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대군이 눈치 봐 가면서 부탁했는데 내가 안 들어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중전께서 대군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었다면 마땅히 들어주지 않으셨겠습니까?”

진솔한 설득을 위해 중전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그러자 중전도 못내 항복했다.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아유…… 중전께서 하시는 걱정을 어찌 이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한참, 진짜로 한참 고민해서 내린 결정입니다. 자…….”

날이 춥다는 건 사실이었다.

중전의 손가락 마디마디는 희고 가늘었으며, 손끝이 닿는 지점마다 한기가 올라왔다.

“이만 안으로 듭시지요. 봉림대군도, 중전께서 밖에서 찬바람 계속 맞는 건 원치 않으실 겁니다.”

봉림대군은 떠났다. 일행의 뒷모습도 완전히 사라진 지 오래. 더 지켜보고자 해도 지켜볼 모습이 없었다.

결국, 중전은 인도에 이끌려 안으로 향했다.

* * *

봉림대군의 출성은 왕 개인에게나 조선 조정의 입장에서는 중대사항일지라도, 외부의 눈으로 보자면 태평한 소동에 불과했다.

강 너머 요동에서는, 계절이 바뀌어 봄에 다다르자 그동안 웅거하며 힘을 비축했던 홍태주와 다이곤의 세력이 마주했다.

춘궁기春窮期는 요동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두 세력은 겨울을 나는 동안 얼마 없는 식량을 대부분 소모했다.

여름의 잡곡 수확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그동안 군대는 어떻게 먹일 것인가?

치열한 대치 상황에서 군대를 해산한다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굶주린 장정 집단을 세상에 풀어놓는다는 건, 방구석에 도적을 양산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민간에는 얼마간의 양곡이 남아 있었다.

딱 생명을 연명하기 위한 정도에 불과했으며, 국가적인 관점에서 평가했을 때는 이마저도 모두가 춘궁기를 나기에는 부족했다.

분명 올해에도 많은 사람이 빈자에 걸인으로 전락하여 세상을 방황하리라.

난처한 상황에 놓인 홍태주와 다이곤의 두 세력은 동일한 결론에 이르렀다.

군대를 먹여야 하나, 민간에서 수탈한다면 자멸할 판국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양곡을 빼앗아야 한다면 꼭 저들 백성의 것일 필요는 없잖은가?

상대방 백성의 양곡을 빼앗으면 되는 것이다.

전쟁의 결론이 꼭 이상적일 필요도 없었다.

일방적인 대승을 거두지는 못하고 접전만을 거듭하며 대치만을 유지하더라도, 그 나름 군대가 쓸모를 다하는 셈이며 죽어 입까지 덜어준다면 모두에게 이로운 셈이었다.

밑질 건 없고 빼앗을 건 있다.

두 자칭 제국이 식량 쟁탈전을 일으키게 되는 계기였다.

식량 쟁탈전의 광기는 접경지대의 전역에서부터 시작했다.

양 제국 모두 의도하는 바가 건곤일척의 승부가 아니라 일단 식량부터 확보하는 데 있었으므로, 소규모의 산발적인 접전이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접경지대에서 시작한 약탈전은 점차 깊고 넓게 퍼져나갔다.

여기에, 약탈에 희생된 백성들 역시 생존을 위해 그들만의 약탈전에 뛰어들면서 혼란은 점차 가중되었다.

진정되었던 도적이 다시 들끓고.

요동인의 초적과 여진인의 마적이 중구난방으로 창궐하며 서로 이합집산과 분투를 반복하니…….

불길은 점차 요동의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예외란 없었다.

* * *

[商流鮮朝]

조선유상, 조선의 흘러다니는 상인이라는 간판을 뻔뻔하게 내걸고 있는 건물이 있었다.

의주 바로 맞은편에 당당히 위치하여, 강변에 난립한 군소 부족들 사이에 의탁한 이 조직은 겉으로 상인집단을 표방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여타 세력과의 사무역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나 이곳은 강 너머의 땅.

그것이 조직이 가진 뻔뻔함과 당당함의 발로였고, 순진한 밀수상들은 홀린 것처럼 의탁하여 오늘날에는 제법 굵직한 성세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유상의 실체는 의주부윤 및 한양의 왕과 직결된 첩보 조직으로, 험난한 호지胡地에서 서로 안전을 담보하고자 서로 뭉쳐다니는 밀수상들을 통제 및 이용하여 적지의 정보를 수집하고 본국으로 보내고 있었다.

최근 조선유상은 성수기 아닌 성수기를 맞았다.

요동 전역에 찾아온 식량난에 의해 식량값이 폭등하였으나, 반대로 식량을 노리고자 설쳐대는 굶주린 도적들 역시 폭증한 탓이었다.

조선유상 대행수大行首를 도맡은 한윤은 복잡한 고민에 빠졌다.

-도적들과의 교전으로 두 명 사망, 두 명 부상. 시신과 환자를 옮길 인원이 차출되면 화물의 운송이 불가능해지므로 상행은 중단.

이문이 높아질수록 위험성 역시 커지는 법이다.

조직원 다수가 사상하고 계획된 일정이 어그러졌으나 한윤은 개의치 않았다.

그가 조직의 대행수이긴 하나, 이는 변장이었고 해당 상행에서 그의 진짜 수하라 할만한 이는 다치지 않았다.

다만 정기첩보 보고의 한 구석이 빈약해지는 게 걱정이었다.

의외로, 우위로 여겼던 홍태주가 좀처럼 핏덩이 다이곤을 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요양에서 고위관계자들을 상대로 탐문해 본다면 중요한 정보를 얻을지도 몰랐을 테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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