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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07화 (207/380)

인조, 명군이 되다 207화

-전수할 기술도 다 전수했겠다, 이제 무엇을 하고 살 생각인가?

-원하는 게 있으면 들어줍니까? 그동안 고생 많이 했는데.

-최대한 편의를 봐주겠네.

-좋습니다. 저는 원래 세계를 주유하는 상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나라 꼬라지를 보니 상인다운 상인은 없고 길바닥 장사꾼이나 어용상인뿐이더군요.

헤이스버르츠는 자신의 장래를 논의했다.

병기사관이었던 벨테브레이와 달리, 일개 선원에 불과했던 그가 전수할 기술에는 한계가 있었다.

범선 사업을 마치고 군기시에서 얼마 남지 않은 지식을 마저 털어내니 남는 건 그저 이상하게 생긴 외모뿐.

전문성이랄 게 없으니 군기시에서는 관료로서도, 장인으로서도 부적합했다.

딱 잡지식만 가지고 살다가 이세계에 떨어진 이가 맞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그렇게 단물만 쪽 빨리고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된 헤이스버르츠의 처우는 남이공이 맡았다.

원래 인연이 두터웠기도 했거니와, 헤이스버르츠가 범선 사업에 적극적으로 일조하고 가진 바 얼마 없던 단물도 다 짜내었으므로 그 공로를 고려하여 판서급이 친히 나서준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헤이스버르츠가 원하는 게 있다면 편의는 충분히 봐주기로 결정했다.

딱히 의제거리는 아니었다.

코쟁이들에게 더 짜낼 게 없다는 군기시정의 보고에, 그놈들이 해준 게 있으니 신경은 써줄까, 하고 넘어간 정도.

남이공은 헤이스버르츠에게 달리 생각이 없다면 수병으로 종군한 경력을 고려해 수군 장교로 자리를 옮겨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헤이스버르츠에겐 명확한 비전이 있었다.

비록 팔자가 대단하게 꼬여 이국에 난파했다가 현지인들에게 사로잡히고 얼마 없던 기술을 털어내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야매 선박설계자도 되어보고 임시 사관을 맡아 수부들도 가르쳤으나, 본래 헤이스버르츠가 자카르타를 거쳐 포르모사까지 건너온 이유는 미개척지로 여겨지는 지구 반대편에서 거금을 벌기 위해서였다.

하이리스크를 감수해야 하이리턴도 있는 법.

죽지 않고 거금을 모아 귀환에 성공하면, 본국에서 상단을 차려 부유한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다.

-흐음. 세계를 주유하는 상인이라. 자네에게 딱 맞는 자리가 있긴 하네.

-…그렇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본 적이 없지요?

-그야, 국외에서 활동하기 때문이지. 자네가 원한다면 그쪽 책임자에 연락해두겠네. 마침 나와 면식이 있는 사이라서 다행이군.

-그래요?

헤이스버르츠는 기대만발하여 남이공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헤이스버르츠는 자신의 판단력을 불신하게 되었다.

“해불.”

“……으.”

신음과 함께 눈을 반개한 헤이스버르츠는, 자신을 일깨운 시커면 면상과 그 너머로 보이는 밤하늘을 마주했다.

“정신차려. 자네 순번이야.”

“으, 시발. 방금 눈 감았는데.”

“자네에겐 방금이 세 시진 전을 의미하는가 보군. 특이한 시간관념에 대해서는 더 따지지 않을 테니 싸다구 갈기기 전에 일어나게. 나도 자야지.”

“……하아.”

헤이스버르츠는 흩어져가는 꿈의 기억을 상기하며,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남이공의 제안을 덥석 받아먹은 자신의 싸다구를 갈겨주고 싶었다.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 세계를 주유하는 상인은 맞았다.

다만 생각보다 훨씬 거칠고 피곤했다.

상인이 쉬운 직업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네달란드는 해양강국이자 동시에 무역대국이었고, 이 시기 바다는 무법천지였으니까.

하지만 이건 예상 이상이었다.

두 발로 혼란한 이국을 들쑤시면서 도적에 맹수와도 씨름하는 밀수꾼이라니.

‘이게 사략선 선원과 뭐가 다르지?’

뭍에서 일하느냐, 물에서 일하느냐의 차이뿐이지 않나.

그리고 그게 사실이기도 했다.

“정신이 좀 드나?”

동료의 물음에 헤이스버르츠가 잠에서 다 깬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안 들었으면 좋겠다, 이 자식아.”

“멀쩡하군. 가서 일 봐.”

“하.”

헤이스버르츠는 뱃가죽을 긁어대며 일어났다.

휴식이 충분치 못해 온몸이 찌뿌둥했고, 또 뻣뻣했다.

한겨울과 비교하면 지금은 천국이지만 요동은 위도가 높아 계절이 바뀌어도 여전히 추웠다. 여름이나 되어야 날이 더워진 게 체감이 될까.

‘땀 줄줄 흘리는 여름보다는 차라리 추운 게 낫겠지만…….’

극동은 계절 자체가 지랄맞았다.

그의 고향에서도 계절이야 존재했으나, 이렇게 극단적으로 더웠다가 추워지기를 반복하지는 않았으니까.

굵직한 나무둥치에 대고 오줌을 갈기는 동안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달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새카만 물줄기가 어째서인지 다른 동료의 침낭쪽으로 흘러갔지만, 헤이스버르츠는 헛기침 몇 번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 * *

“이놈은 쳐 자다가 오줌쌌네.”

“아니야! 내가 아니라고!”

“그럼 누가 네 침낭에다 일부러 오줌이라도 갈겼다는 말이야? 너, 어디서 원한 사고 다니냐?”

헤이스버르츠는 구석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애써 외면하고서 채비를 시작한 상단에 맞춰 짐을 챙겼다.

안타깝게도 상단은 가축을 이용하지 않았다.

‘로마 시대도 아니고 사람이 직접 짐을 옮기다니. 아니, 로마 때도 사람이 직접 짐을 옮기지는 않았을 텐데.’

상부는 그럴만한 이유를 댔다.

요동은 오랜 전쟁에 이은 내란으로 파탄 상태에 놓여 있었고, 심해지거나 덜할 때의 차이만 있을 뿐 항상 도적이 횡행했다.

상단은 노출된 길은 피해서 이동했고 거친 지형에서 가축은 쓸모가 없었다.

혹 무리하여 동원하더라도 맞추기 쉬운 표적일 따름이다.

‘원래 상인이 다 이런가.’

헤이스버르츠는 속으로 툴툴대면서도 겉으로는 묵묵했다. 모두가 같은 고생을 하니 내색도 한두 번이다.

‘그나마 돈이 되어서 망정이지.’

강 하나를 두고 식량 가격이 널뛰기를 하였으므로 조선에서 양곡을 떼어다 요동에 팔면 이문이 톡톡했다.

그리고 요동에서 양곡을 주고 값싸게 매입한 재물을 다시 강 건너에서 매입하면 또 이문이 톡톡했다.

밑천만 있어도 재산 증식이 가능할 정도.

‘단, 재수없이 뒈지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헤이스버르츠는 흐흐 실소했다.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멀리서 행수가 외쳤다.

“짐 다 챙겼냐?! 움직이자! 오늘은 많이 걸어야 제때 성경에 도착할 수 있다! 또 노숙하고 싶은 놈은 없겠지!”

“떠들 시간에 빨리 갑시다!”

“뭐……? 언놈이야?!”

상인들이 빵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 몸고생은 심하고 웃을 일은 별로 없어서인지 다들 허파에 바람이 반씩 들어가 있었다.

헤이스버르츠도 낄낄대며 동료들의 뒤를 쫓았다.

* * *

성경에 도착한 건 별이 총총한 한밤중이 되어서였다.

시국이 워낙 하수상한 만큼, 성경의 성문은 꾹 닫힌 채였고 상단 행수는 상인들을 떼어놓은 채 문지기와 무어라 말을 나누고 있었다.

“시벌롬들. 어차피 통과시켜 주면서 일부러 시간 끌기는.”

헤이스버르츠가 성문을 향해 유창한 조선어로 욕지거리를 지껄이자, 가까이 있던 상인이 받아 말했다.

“다 뇌물을 더 받아처먹을라고 저러는 거지. 우리가 성경에 한두 번 왔나? 면식 다 뻔히 아는데 저 지랄할 이유가 뭐겠어.”

“그러니 시벌롬들이라고 한 거 아니냐.”

헤이스버르츠는 툴툴대면서 덧붙였다.

“거지놈들 때문에 공금만 날리겠네.”

성경으로 오기 전, 상단은 거지떼와 마주하여 살벌한 신경전을 벌였다.

거지떼는 언어가 통하지 않는 조선인 상단을 상대로 굳이 식량을 구걸하지 않았다.

대신, 부엌칼과 농기구 따위의 조잡한 무장을 하고서 불길하게 중얼거리며 상단을 에워싸올 따름이었다.

상황을 타개한 건 행수였다.

그가 눈 깜짝할 사이에 화살을 너덧 발 날려 거지들을 쓰러뜨리니, 나머지 거지들은 놀란 원숭이처럼 흩어졌다.

통틀어 한 식경 가량에 불과했던 소동이었으나, 대치하는 동안 혈전을 각오한 상인들의 심신이 많이 피로해졌다.

서둘러 현장에서 멀어진 다음에는 따로 휴식까지 취하느라 총체적으로는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다.

“행수님 진짜 대단하지 않냐? 어떻게 화살을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날리지?”

거지떼 일이 거론되자, 그때를 상기했는지 한 상인이 중얼거렸다.

“원래 무관하던 사람이라는 말이 있던데.”

“그러면 활 잘 쏘는 것도 이해가 되네. 그런데 양반 하던 사람이 왜 위험하게 밀수나 하고 있지?”

“돈이 안 됐나 보지.”

오가는 잡담에 또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감투 쓴다고 나라에서 다 녹봉 주는 것도 아니라더만?”

“…그러면 녹봉 안 받는 사람들은 뭐 먹고 산대냐?”

“뭐, 있는 집사람 같으면 집에서 보내주는 걸로 먹고 살 테지만, 아니면…….”

젠체하던 상인이 성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 행수는 수문장과 뇌물의 총액을 타결했는지, 웅얼거리던 잡담도 그치고 서로 무언가를 주고받았다.

“불쌍하네.”

한 상인이 촌평했으나, 잡담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협상을 마친 행수가 얼굴을 찌푸린 채로 돌아오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행수가 다다르자, 상인들도 눈치껏 엉덩이를 털고 있었다.

“씨부랄 되놈색기가 많이도 받아처먹네.”

“얼마 뜯기셨습니까?”

“은자 열 개.”

“우와.”

“이 개자식들이 두당 하나씩은 받아야겠다잖아. 내가 너희들 야숙 안 시키겠다고 마지못해 줬다.”

“근데 그거 공금에서 나가는 거 아닙니까?”

“……쌉쳐.”

행수가 짐을 챙기고서 성문으로 향하자 상인들이 줄줄이 뒤따랐다.

수문장은 낮은 목소리로 수문병을 채근했고, 성문을 사람 하나 반쯤 통과할 정도로만 열어놓은 채 상인들에게 빨리 들어가라 손을 펄럭였다. 받아처먹은 게 있어서인지 얼굴은 희희낙락이었다.

상단이 안으로 들어서자 성문은 소리소문 없이 닫혔다.

숙소는 상단이 항상 의탁하던 장원이 있었으므로, 무리없이 여장을 풀 수 있었다.

상인들은 집주인의 도움을 받아 늦은 식사를 든든히 마치고는 곧바로 퍼질러졌다.

이내 방마다 코 골고 이 가는 소리로 행랑 전체가 시끄러워졌고, 그 틈을 타 헤이스버르츠를 방문하는 사람이 있었다.

불청객은 아니었다.

“해불이. 자나?”

전직 무관으로서 놀라운 활솜씨를 보유한 행수였다.

그런데, 상인들이 착각하는 게 있었다.

행수는 현직 무관이었다.

“해불이가 뭡니까? 개불이도 아니고. 개불, 그거 보니까 생긴 것도 ?같이 생겼던데.”

물 밖으로 꺼내면 오줌을 싸는 것까지 영락없이 따로 노는 꽈추의 모습이었으나 생긴 것보다도 더 충격적인 건 식용이라는 점이었다.

배를 만드는 동안 먹어볼 기회가 주어졌지만, 헤이스버르츠는 입에 대지 않았다.

……정력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그렇다고 첫인상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자네 본명은 발음하기 너무 어려워서 그렇지. 애초애 이름을 부르기 편하게 짓지 그랬나.”

“행수께서 제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를 찾아가서 그렇게 말씀해 주셨으면 됐을 텐데요.”

“그땐 자네가 자네 이름에 불만이 있을 줄 몰랐지.”

두 사람 사이에서 시답잖은 농담이 오갔으나, 행수가 헤이스버르츠를 찾아온 이유는 고작 농담 따먹기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헤이스버르츠의 외모는 극동에서 관심을 끌기 쉬웠고 청나라가 들어선 요동에서는 특히 그러했다.

과거 몽골이 세계를 제패하던 시절 몽골인 다음의 신분을 지녔던 색목인色目人인이다. 역사적인 존재감은 기마민족들 사이에서 매우 뚜렷했으나 정작 요동에서는 오랫동안 색목인과의 접촉이 없었다.

성경 후금의 고위층과 자리를 만들기엔 굉장히 좋은 조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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