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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08화 (208/380)

인조, 명군이 되다 208화

알고 있었다.

헤이스버르츠는 조선유상이라는 숲에서 나무보다는 숲지기에 가까웠다.

대행수는 외부인이자 출신도 나쁜 헤이스버르츠의 신뢰도를 솔직하게 부정했다.

사략선은 그저 모국에서 공인받은 해적선일 뿐이다.

그리고 조선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해적국가의 해적선 선원을 좋게 볼 이유는 하등 없었다.

그럼에도 헤이스버르츠의 타고난 조건이 너무 좋았다.

이국의 고위층을 상대로 호감 및 관심을 기본으로 깔고서 자연스럽게 접촉할 수 있다는 건 첩보조직이 놓지 못할 이점이었다.

대행수는 이러한 객관적인 평가에 더불어 분명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무법천지인 강 너머에서는 사람이 죽어도 함구한다면 잊히지. 그건 자네에게도 익숙하리라 믿네. 굳이 당사자가 되어볼 생각은 없겠지.

지상의 사략선 선원 신세가 되고도 탈출은 생각하지 않는 이유였다.

부담스럽긴 하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행수의 말처럼 헤이스버르츠에게는 익숙한 환경이었다.

선원이 주어진 운명에서 회피하는 방법은 바다로 뛰어내리는 것뿐이다. 그럴 각오까진 없다면, 묵묵하게 맡은 바를 해내는 게 최선이다.

또한, 심리적 자위에 불과할지 모르나 진짜 사략선 선원 시절보다는 안정적인 느낌도 있었다.

사략은 나라에서 허락만 한 해적행위일 뿐 이외에 보장해주는 건 없는 방기에 불과하지만 이건 공적인 조직에서 공적인 목적으로 하는 일이니까.

단순히 험난하다기보단 비장하다는 느낌도 들고.

“뭘 하면 됩니까?”

인사치레는 잔뜩 주고받았으므로 헤이스버르츠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우리가 그동안 접선해온 인물이 있는데, 이 사람이 방을 빼다 못해 이쪽으로 말도 없이 날라버렸어.”

“……예?”

“섭정이라는 작자가 있었는데 아예 전 재산을 들고 귀부해 버렸다는 말이야.”

“…섭정이요?”

“이미 지난 일이니 깊게 생각할 필요 없네. 또, 그러지 않는 게 좋고. 안 그러면 자네만 혼란스러워질 테니까.”

행수의 말처럼 헤이스버르츠의 머릿속에는 의문만 한가득이었다.

섭정씩이나 되는 작자가 왜 나라를 버리고 조선으로 도망왔다는 말인가.

그러나 행수는 과거를 친절하게 설명해줄 용의가 없어 보였으므로, 헤이스버르츠는 일단 묻어두기로 했다.

“그 뒤로 뾰족한 접선책이 없었네. 지지자가 많았던 섭정이 튀자 다들 몸을 사리기도 했고, 의외로 애송이 황제의 능력도 좋았거든. 마땅히 찌를 만한 구석이 보이지 않았지.”

성경은 압록강 기준에서는 최북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자주 올 수 없는 곳이다 보니 안정적으로 내통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후보가 될만한 인물이 보이지 않았다.

미묘한 틈을 보이는 자들은 틈틈이 있었으나, 주시할 요량으로 기억만 해두었다가 다시 찾아오고 나니 실각했거나 생사조차 불분명해진 경우가 흔했다.

다이곤이 내부 단속을 철저하게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지금은 요동의 정세가 매우 급변하고 있단 말이지. 기약 없이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기보단 전략을 바꾸자는 결론이 나왔네.”

“어떻게 말입니까?”

“정면으로 들이받자고.”

헤이스버르츠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다.

“자네는 변경된 작전에서 선봉으로 임명됐네. 행운의 주인공이야. 기뻐해도 좋네.”

“왜…… 하필이면 접니까? 특이한 외모의 이점은 알지만, 신뢰받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는데요.”

“말했다시피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야. 우리는 연초부터, 그리고 그 이전부터 요동의 정세를 주시해왔네. 지금은 변화의 흐름이 더욱 급격해졌어. 자네는 지난 몇 달 동안 신뢰도를 증명했고.”

행수는 인정하겠다는 투로 덧붙였다.

“그래. 그게 충분했다고는 하지 않겠네. 우리가 자네를 전적으로 신뢰하기에는 아직 이르네. 그건 사실이지. 하지만 상황과 저울질해본 결과 자네의 신뢰도가 이런 상황에서도 부정될 정도로 심각하게 미달하지는 않더군.”

행수는 무작정 듣기 좋은 말만 해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헤이스버르츠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동고동락한 시기가 짧지는 않으나 고작 몇 달일 뿐이다.

하물며 자신은 외부인. 심지어 사략선의 선원 출신이지 않은가.

자신 같아도 사략선 선원 출신에게는 짧은 시간만으로 신뢰를 주지는 못할 테니까.

그래서 행수의 말이 더 진솔하게 들렸다.

냉정한 평가를 들려주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하다. 듣는 사람이 옹졸한 이라면 두고두고 원한을 품을 테니까.

그러니 솔직하게 말해준 것이 반대로 최소한의 신뢰를 증명해주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최소한의 진솔한 신뢰가, 추후에는 성과에 따라 더 나은 신뢰를 보낼 수 있다는 전제처럼 들렸다.

“하하…….”

헤이스버르츠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행수를 향해 말했다.

“너무 냉정하십니다. 제가 유상에서 한 고생이 얼마나 많으신지 아십니까?”

“뭐어…… 고생을 아예 안 한 건 아니지. 그런데 그건 상원들도 다 똑같이 하는 고생이잖나.”

헤이스버르츠가 농을 건네듯이 말했으므로, 행수 역시 농으로 답해주었다.

그는 조금 진지해진 어조로 덧붙였다.

“이참에 다른 상원들은 하지 않는 고생을 하면 대접이 달라질지도 모르지.”

“달라지는 게 아니라, 달라질지도 모른다고요?”

“나는 함부로 약조할 수 없는 몸이거든.”

“정말로요?”

“그나마…… 약조해 줄 수 있는 걸 굳이 찾아보자면, 자네가 일을 잘 해주었을 때 대행수 앞에서 자네 칭찬을 많이 늘어놓을 수 있다는 정도겠지.”

“흠.”

헤이스버르츠는 마음에도 없이 고민하는 척을 하고는, 결심했다는 듯이 답했다.

“좋습니다. 행수님과의 인연을 생각해서 받들지요.”

“이거, 개불이 때문에 눈물까지 나오겠는데.”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듣고 깜짝 놀라지나 말게.”

“각오는 했습니다.”

행수가 이미 정면으로 부딪치겠다고 했으니까.

그러니 쉬운 일은 아니겠다는 각오를 했으나, 헤이스버르츠는 듣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황제를 직접 공략한다고요?”

“이만하면 자네 존재도 입소문을 많이 탔을 테니까. 분명 핏덩이의 귓전에도 들어갔겠지.”

“그렇다고 황제가 일개 상인이나 만나려 들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자네가 널리고 널린 일개 상인이었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자네는 조선의 상인이잖나. 동시에 조선에서 사는 사람치고는 이질적이기도 하고.”

다이곤이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조선은 명나라와 마찬가지로 오랑캐라면 학을 떼는 나라이고, 과연 그런 나라의 최심부에 살았으면서 유감이 한 자락 없을 수 있을까.

“다이곤이 그런 부분을 살살 건드리면서 조선의 내밀한 사정을 알아보고픈 마음이 설마 없겠나?”

게다가 다이곤에게는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섭정의 행방도 무척이나 궁금할 테고.”

아파태는 아무리 몰락하더라도 산간벽지에 숨어 도나 닦으면서 살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조선마저 그렇게 확신할진대 조선보다 더 가까이서 오래 아파태를 겪어보았던 다이곤이 설마 모를까.

더군다나 다이곤에게 아파태는 단순한 야심가가 아니었다.

자신을 이용해 황위를 쟁취하려던 자였으므로.

“장차 후환이 될지도 모르는 인물의 거취를 분명히 알아두고픈 마음이 없을 수가 없지.”

“황제가 물어보면 알려줘야 할까요?”

“당연히 모른다고 해야지. 자네는 지금 어쩌다 보니 요동에서 밀수로 먹고살게 된 신세야. 그 점을 항상 숙지해야 하네.”

“후우.”

헤이스버르츠는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멍청한 질문이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몇 가지 핏덩이 황제의 예상 질문을 시험해 보지…….”

* * *

“조선의 분위기는 어떠한가? 이국의 사정이기도 하지만, 성경과 압록강 사이를 찬탈자가 가로막고 있어서 말이야.”

핏덩이 황제가 말했다.

적어도 행수는 그렇게 칭했다. 핏덩이라고.

하지만 헤이스버르츠가 직접 만난 황제는 ‘핏덩이’라는 호칭과는 거리가 멀었다. 십대 후반이었으니까.

원숙하다고는 못해도 아주 미숙하다고는 못 할 나이다.

“그게…….”

헤이스버르츠는 말끝을 늘어뜨렸다.

“소인이 강을 넘은 지 오래되어 조선의 사정을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거기서 색목인들이 무슨 일을 했다고도 들었는데.”

“고국에서 사용하는 배를 건조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음, 그거 참 대단한 고생이었겠군…….”

다이곤이 호평과 함께 헤이스버르츠를 직시했다.

마치, 그 고생을 하고도 이곳 강 너머에서 또 고생하는 모습이 불만스럽지는 않냐는 투였다.

“현재 대청제국은 변방에서 벌어지는 우환들로 당장 바다와 인접한 곳이 없지만, 이 혼란이 모두 진압된 다음에는 반드시 뛰어난 배가 필요하네.”

두 제국이 한 시대에 공존할 수 없다는 건 홍태주만 아니라 다이곤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그리고 다이곤은 요동 다음으로 중원을 평정할 생각이었다.

강 너머 조선의 성세가 눈부시다 못해 눈깔이 따가울 정도지만, 굳이 건드리지 않는다.

홍태주가 어떻게 망했는지 알고 있으니까.

대청이 중원까지 평정하고 천하의 유일무이한 제국으로 등극하면 어차피 조선은 체급에서부터 불리하게 된다.

현 조선의 왕은 정복욕이 그리 강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 점은 대청이 분열하여 몰락을 앞두었을 때 무리하여 요동을 정복하지 않음으로서 확실하게 입증되었다.

그러한 조선의 왕에 제국과 생사를 두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각오하지는 않을 터.

대청의 질서를 존중해주는 대가로 하하호호 웃으며 공존할 용의를 보여준다면, 굳이 마다하지는 않을 터였다.

이 원대하고도 장대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요동을 정복해야 했고 그다음으로는 수군을 확보해야 했다.

천하의 금성탕지인 산해관을 정면에서 공략한다는 건 무리수이기 때문.

홍모이가 좋은 배를 만든다는 거야 다이곤도 들어 알았고, 제국의 부족한 기술력을 충당하고자 색목인을 우대하는 건 천하를 제패했던 몽골제국의 관습이기도 했으므로 제안은 진심이었다.

“이곳에서도 조선에서 만든 배와 똑같은 배를 만들어준다면 그대의 몸과 같은 무게의 금을 내려주지.”

당장은 황궁에 금싸라기 한 톨 없지만, 그래도 약속한다. 요동 전체를 정복하고 난 뒤에도 그만한 금이 없을까.

이에 헤이스버르츠가 답했다.

“폐하의 관대한 제안에는 무척이나 감사드립니다만, 조선에서 배를 만들 수 있던 건 사관이었던 벨테브레이라는 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개 수부 출신인지라 혼자 온전히 배를 설계할 자신은 없습니다.”

“……흐으음. 그런가.”

다이곤은 아쉬워하면서도 이내 수긍했다.

헤이스버르츠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었다면, 애초에 특별한 출신을 가지고도 강 너머에서 막일이나 하지는 않았을 터이니.

“폐하, 외람되지 않는다면 질문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헤이스버르츠가 반대로 물어오자, 다이곤의 눈이 금세 가늘어졌다.

좌우에 시립한 신하들 역시 불경하다며 언성을 높이는 중.

아파태가 증발하고 그의 지지자들이 자취를 감추거나 변절한 이래 처음 벌어진 일이었다.

“……되었다.”

다이곤은 신하들을 진정시키고는 답했다.

“물어보라. 짐에게 무엇이 궁금한가?”

“감사합니다. …폐하께서 이미 아시다시피, 소인은 일개 상인에 지나지 않고, 상인이 가장 신경 쓰는 건 이문입니다.”

“그런 것 치고는 나의 후한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더냐?”

“단독으로 수행할 자신이 없으니, 무턱대고 받아들인다면 이문은 없고 목숨만 위험하니 감히 사양했을 뿐입니다. 제안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실현할 방법을 고민해 보겠습니다.”

“유효하다.”

헤이스버르츠는 망극하다는 의미로 허리 숙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마저 말씀드리자면, 상인에게는 이문이 우선이며, 이문은 크기만 한 것보다는 안정적인 것이 더 좋습니다. 그러나 지금 요동은 너무나도 혼란하여 이문을 안정적으로 내기가 힘듭니다. 황도로 오는 와중에도 걸인들과 대치하였지요.”

“…그건 짐의 실책이 아니라 할 수 없구나. 내가 보상이라도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냐?”

“아니옵니다. 다만, 상행을 보호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저희가 위축되는 건 굶주린 도적과 거지 떼 앞에서만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헤이스버르츠는 최대한 에둘러 말했으나, 다이곤에게는 충분히 모욕적인 언사였다.

너의 군대도 도적질하는 거지 떼와 다름이 없다는 뜻이었으니.

하지만 그게 상인들의 잘못은 아니었다. 뻔뻔하게 자존심만 세우기엔 이 떠돌이 밀수꾼들이 부족한 식량 수급에 보탬이 된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좋다. 앞으로 너희들은 나의 제국에서 보호받을 것이다.”

“관대한 약조에 감사드립니다.”

“앞서, 그대는 조선의 사정에 대해서는 귀가 어둡다고 하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귀가 막힌 건 아닐 테지. 혹, 아바타이라는 자에 대해서 들어본 말은 없는가?”

황제가 대놓고 물어보니 헤이스버르츠는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호에 대한 대가인 걸까.

무작정 부정하기엔 아파태의 밀입국은 큰 사건이었다.

왕과 삼의정이 중대 사항을 놓고 꿍꿍이가 있다는 소문이 돌아갔다가 그 정체가 밀입국한 아파태의 처우 결정이었음이 드러나면서 온 한양이 한참 시끄러웠으니까.

일자무식인 백성들이야 ‘그래?’ 하고 딱히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는 양 치부했으나 갓 쓴 이들은 아니었다.

소위 식자란 자들은 이미 처우가 결정 난 아파태를 죽여야 한다느니 살려야 한다느니 어디로 보내야 한다느니 입술 부르트도록 사흘 밤낮을 떠들었다.

이러니 물어보는 사람이 당장 모른다고 똑같이 모른 척하면 나중에 수습이 어렵다.

적당히 말을 사리자니 조선을 저버리고 밀수나 하는 코쟁이가 그럴 당위성이 없다.

이미 행수와 논의해 본 질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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