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09화
“아바타이가 누구입니까?”
헤이스버르츠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아바타이가 누구인지 모르느냐? 대청의 섭정을 자칭했던 자로, 과거에는 조선을 몇 번 방문했던 적이 있다.”
“음, 소인은 조선에 오래 살지 않아 아바타이라는 인물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가 조선과 관련한 일이 있다면, 알 법한 사람을 불러오겠습니다.”
헤이스버르츠가 짜놓은 작전은 ‘모른다고 잡아떼기’였다.
조선에서 통용되었던 아바타이의 이름은 아파태다. 발음이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충분히 변명거리가 된다.
황제의 모친부터가 이름은 아바하이고 조선에서는 아파해라고 칭해지니까.
그게 그 발음이다.
그러니 외부인이 분명한 코쟁이로선 본인 엄마라도 찾고 계시냐고 되물어보아도 완전히 무리수는 아닌 셈이다. 대신 목이 달아날 각오는 해야겠지만.
“……그런가.”
다이곤은 실망감에 쯧, 하고서 혀를 찼다.
아바타이의 거취를 알 법한 조선인을 불러오라고 하지는 않았다.
저보다 대응에 능숙할 행수를 대신 내세우고자 헤이스버르츠가 깐 밑밥이었다. 그 저의가 읽혔는지도 모르리라.
“알았다. 물러나라.”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더 수소문해 보겠습니다.”
“……그래.”
헤이스버르츠는 또 만날 여지를 남겨놓은 뒤 푹 고개를 숙이고는 어전에서 물러났다.
황제의 인가를 받았으니 곧장 관련 관청에 쳐들어가 물증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래야 군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성경 후금 각지를 당당하게 들쑤시고 다닐 수 있을 테니까.
지금이라고 딱히 사리면서 다는 건 아닌데, 황제의 공언을 방패로 삼게 되면 관군에 의한 공적 약탈 위협이 부쩍 줄어들게 된다.
정말로 그렇게 되는지 시험은 해봐야겠지만.
먹힌다면, 상단 인력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상단이 효율적으로 편성되면 그만큼 성경 후금에서는 눈과 귀를 더 많이 퍼뜨릴 수 있다는 뜻이고.
상단 자체로서 금전적인 효용은 말할 필요도 없다.
겸사겸사, 욕심만 많은 수문장도 이참에 닥치게 할 수 있을 테지.
* * *
“그래, 뭐 알아낸 건 있나?”
행수가 물었다.
“이제 황궁에서 귀환했는데 수고했다는 말은 안 해주시고 성과부터 물어보시는 겁니까?”
“수고를 했는지 안 했는지부터 알아야 수고했다고 칭찬해주지.”
……그런가?
헤이스버르츠는 속으로 수긍하고서 답했다.
“대놓고 캐묻지는 못했습니다. 신하들이 좌우에서 꼬나보는데 건수만 잡히면 사지랑 대가리를 분리해버릴 기세더군요.”
“그래서, 성과는 내지 못했지만 사지는 붙은 채로 돌아왔다? 그래놓고 수고했다는 칭찬을 바랐다는 말이지?”
“……뭐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헤이스버르츠는 음흉한 미소와 함께 관청에서 받아온 문서를 내밀었다.
이 상단은 대청의 이름으로 보호된다는 관인이 찍힌 공문이었다.
“약조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도 강조되지 않은 걸 보면, 황제가 직접 위신을 걸 자신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이것만 해도 어딘가.
“…놀랍군. 수고했네.”
행수는 감탄하고서 덧붙였다.
“정말로 수고했네. 이거라면 물어보지 않고도 이쪽의 사정을 확인할 수 있겠어. 모름지기 백문이 불여일견이지.”
물론, 직접 보는 건 귀로 듣기만 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고를 요한다.
하지만 상대방이 하는 말을 듣기만 할 수밖에 없던 그동안의 사정과 비교하면 선택지가 하나 늘어난 셈이다.
교차 검증도 가능하고.
그동안 직접 보는 게 불가능했던 건 아니지만, 험난한 세상이라 감수할 게 않았는데 부담을 크게 덜게 되었다.
“게다가 상단이 공인받았으니 위정자와 접촉할 때도 운신의 여지가 늘어난 셈이지. 그렇다고 너무 노골적이어서는 안 되겠지만 말이야?”
헤이스버르츠는 희희낙락 성과를 분석하는 행수에게 말했다.
“즐거워 보이십니다?”
“즐겁지 않을 수가 없지. 잘 해주었네.”
“제가 좀 믿을 만한 사람이 되었나요?”
“이를 말이겠나. 하지만, 섣부른 판단은 지양하겠어. 아직 자네가 해줘야 할 일이 남아 있거든.”
“……또요?”
헤이스버르츠가 죽상이 되어 묻자, 행수가 실소했다.
“공적인 업무를 봤으면 당연히 서면으로 보고도 해야지. 황제 앞에서 오간 말을 토씨 하나 빼놓지 말고 전부 기록해서 올리게.”
“……전, 부요?”
벌써 다 까먹은 거 같은데?
“당연히 전부지. 중요한 건 일관성이야. 자네가 해놓은 말이 있는 데 이어지는 우리 행보가 혹 일관성이 없다면 신뢰도가 얼마나 타격을 입겠나?”
“……그렇게까지 민감한 발언은 안 했던 거 같은데요.”
“그건 우리가 판단할 일이고. 자네는 기억만 되살리게. 시간 끌어서 좋을 거 없으니 당장 착수해.”
행수는 황망해하는 헤이스버르츠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준 뒤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헤이스버르츠의 머릿속에는 ‘아, 조졌다’라는 생각뿐.
* * *
의주에서 꽤 구체적인 요동의 정황을 보내왔다.
홍태주와 다이곤조차 다 알지 못할 각지의 세력 흐름이 켜켜이 쌓인 지도를 통해 밀물과 썰물처럼 교차하기를 반복했다.
100% 완벽하지는 않았다.
현지에 눈과 귀를 뿌리는 데도 한계는 있었고, 지도의 많은 영역이 추정을 의미하는 빗금으로 쳐져 있었다.
그러나, 이국이며 적지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대단한 완성도였다.
지도를 통해 드러나는 시간순에 따른 세력 흐름은 일진일퇴를 반복하는 듯하나, 여기에는 명확한 방향성이 있었다.
세력 주권이 불분명했던 요서에는 점차 선양 후금 측의 빗금이 지워져 나갔고, 요양 후금과의 접경지는 엄습하듯 남하했다.
요양 후금 역시 동쪽과 남쪽으로 빗금과 군소 세력을 지워나갔다.
그러나 두 세력 사이의 경쟁에서는 우열이 분명했다.
‘원래 역사에서도 홍태주는 끝내 다이곤의 고삐를 잡지 못했지. 이대로라면 역사가 형태만 다르게 반복하겠군.’
각자가 가진 장점에 비해 환경의 유불리가 분명했으니까.
청나라 역사에서 홍태주와 다이곤의 업적은, 고구려로 치면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다.
광개토대왕은 급진적이면서도 성공적인 확장을 거듭하여 국가의 강력함을 증명했고, 장수왕은 팽창이 필연적으로 시험하게 되는 내실을 탄탄히 붙들었다.
두 사람의 우열을 직접 비교할 수는 없다. 어느 쪽이건 뛰어난 군주이고 각자 성취를 드러낸 분야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요동의 상황이 어떤가?
개판에 말판이고 소판이다.
전쟁 잘하는 사람보다 망가진 세상을 수습할 줄 아는 군주가 필요했다.
홍태주가 앞서 명과 선양 후금의 연합군을 패퇴시키면서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했지만…….
다이곤도 만만치 않다.
어린 시절부터 반란군벌의 바지사장이라는 환경에서 자라왔고, 끝까지 생존하여 주도권을 잡는 데 성공했다.
원래 역사에서 보여준 천부적인 자질을 입증한 셈이다.
그리고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말세에 천하를 두고 싸웠던 유방과 항우의 결과가 어땠던가.
‘대치가 이어지다 보면 더 불리해지는 건 홍태주다. 완전히 끝장나기 전에 한 판 붙고자 하겠지. 하지만 다이곤이 순순히 우열이 분명한 회전에 응해줄까?’
금주성 전투의 결과가 의미하는 바는 역시 다이곤이 홍태주를 무력으로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양자의 전황이 완전히 기울기 전에 회전이 벌어진다면 이는 항우를 패왕으로 만들어준 거록대전의 재현이 될 터였다.
반대로 선양 후금이 각지에 쐐기를 다 박아놓은 다음에야 붙는다면 이는 초한전을 마무리 지은 해하 전투가 되겠지.
이것은 홍태주도 다이곤도 다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요동은 중원만큼 방대하지 않았다.
다이곤이 싸움을 피하고 싶다고 한없이 피할 수 있을지가 미지수다.
‘……그렇다면 원점인가.’
경쟁이 그만큼 치열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다르게 말하면, 어느 쪽이 승자가 될지는 조선의 의향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장 홍태주가 자멸하지 않도록 뒤만 봐주어도 홍태주가 승리할 가능성이 한없이 커지고, 반대로 홍태주가 더 괴로운 상황이 놓이도록 견제를 강화한다면 다이곤의 승산이 한없이 커지겠지.
요동의 미래가 조선에 달린 셈이다.
* * *
“아파태의 운명을 결정할 때와 비슷하군요.”
박홍구가 중얼거렸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몸값만 받고 빠진다는 선택지가 없다는 겁니다. 요동의 사정을 외면할 수야 있겠으나 그래서는 이득이 하나도 없지요.”
숟가락만 들어도 밥상이 따라오는데 그러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나.
“어느 쪽도 조선의 도움이라면 간절합니다. 거래를 대가로 상당한 이권을 챙길 수 있을 테고, 그 이권은 요동의 패자에 의해 영토 전역에서 행사하게 되겠지요.”
“저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내어줄 수 있겠습니까? 그저 황제를 참칭하고 제국을 자칭하는 오랑캐 무리에다, 완전히 결딴 나버린 요동이지 않사옵니까.”
박홍구는 미간을 찌푸리며 혐오감을 드러냈다.
마치 맨손으로 변기 안쪽을 청소하게 되었다는 듯이.
근묵자흑의 고사를 국가 단위로 실천하는 시대였다. 오랑캐들과 말을 섞는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라의 위신이 그들 수준으로 추락한다고 여겼다.
더욱이 상대는 주제 파악이라도 되는 번호藩胡가 아닌, 자칭 제국 놀이에 심취한 적호賊胡 찌끄레기들.
그래서 아파태의 송환을 고려할 때도 두 후금을 지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 줌 이익을 위해서 나라의 위신을 시험하자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전하의 저의가 무엇이옵니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요동의 패자에 의해 영토 전역에서 이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요.”
박홍구가 그게 그 말 아닌가 싶었는지 미간을 좁히자 영의정 이원익이 대신 답했다.
“홍태주와 다이곤 중 누가 승자가 되었건 요동의 오랑캐들은 노아합적 시절처럼 하나로 합쳐질 것인데, 그들의 위협이 얼마나 강하겠소이까?”
“그대로, 아조의 위용과 비교해보면…….”
“굳이 비교까지 할 여지를 만들어주지 말자는 것이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말했다.
“명나라가 반병신으로 전락하다 못해 그냥 병신이 되어버린 지금, 이대로 놈들이 활개를 치게 된다면 누가 승자가 되었건 성세를 얻어 중원까지 정복하게 될 테지요.”
이때 조선이 중대한 이권을 타내면, 짜내는 만큼 청나라를 제한할 수 있다.
“흉포한 맹수의 발목에 족쇄를 채워 혼란한 중원을 보호하기 위해서인데, 어찌 이익을 위하여 아조의 위신을 시험하는 것이겠습니까?”
이익은 덤이지.
어디까지나 공익을 위해서다.
“……흐음.”
박홍구도 통일 후금의 위협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뭉치면 곤란해지는 놈들이다. 하나 된 기마민족의 폐해야 역사를 상고해 보면 너무나도 분명하다.
“조선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개입해야 합니다.”
이에 영의정 이원익이 단호하게 말했다.
“홍태주는 아조에 씻지 못할 죄를 저질렀으니, 다이곤을 밀어주는 게 옳사옵니다. 이는 병법의 삼십육계 중 하나인 원교근공의 계책에도 부합하며, 다이곤이 이미 우세를 점하여 밀어주는 게 쉽고, 홍태주는 인접하여 견제하기 유리하기 때문이옵니다.”
다른 두 의정도 이견이야 있겠냐는 듯이 끄덕였다.
‘삼의정에게는 최선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나 보군.’
곧장 명확한 대답이 나오는 걸 보아서 말이다.
홍태주에겐 원죄가 있긴 하다.
조선에 입힌 절대적인 피해와는 별개로, 인조의 지배였다면 원 역사 이상으로 국운이 불투명했을 원정을 일으켰으니까.
원 역사의 인조는 홍태주에게 그만한 위기심을 들게 하지도 못했지만.
어쨌거나, 홍태주의 의도는 상승세인 조선을 미리 꺾어두어 후일의 경쟁자가 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상승세가 꺾인 건 본인이었으나, 의도가 너무 투명했고 괘씸했다.
왕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보필하며 국운과 종묘사직을 융성하게 할 의무가 있는 삼의정에게는 특히나 더.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내게도 답은 정해져 있는 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