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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10화 (210/380)

인조, 명군이 되다 210화

“다이곤은 홍태주에게 대항하여 일어난 반역자들의 수괴로, 본질만 따져보자면 명나라 등주에서 들고 일어난 자칭 등래대원수와도 별반 다를 바 없는 자입니다.”

삼의정은 그게 문제라도 되냐는 듯 눈만 말똥거렸다.

그들에게 오랑캐란, 적통이건 아니건 다 똑같이 하찮고 야만스러운 오랑캐들이기 때문이겠지.

민속놀이처럼 이전투구를 거듭해 온 족속이다. 무엇이 적통인가.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딱히 이상할 평가도 아니다.

그러나, 먼 관점에서 분석해 보면 어떨까.

“아파태의 추대를 입어 자칭 황제에 등극한 꼬맹이 반란 수괴입니다. 내부적으로 혼란이 엄청났을 텐데, 그것을 수습하고 홍태주까지 마저 몰아붙인다는 건 보통 비범한 재능이 아닙니다.”

신흥세력은 항상 진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하물며 신흥세력이 항거한 기존의 세력이 멸망하지 않고 존속해 있다면 더욱 그렇다. 세력 간의 생존을 건 대항전이 내우외환까지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설사 숭고한 목적을 위해 들고 일어났더라도 미래는 희망적이지 않다.

한반도 역사만 상고해 보아도 그렇다.

망국을 부활시키고자 봉기해 초반부터 상당한 호응과 기세를 얻었던 백제부흥군의 말로가 어땠던가?

왕자에서 추대된 풍왕, 그를 옹립하고 부흥운동을 주도한 귀실복신, 방계왕족인 부여자신 및 그와 연합해 불교계를 이끌었던 도침 등 주요 인물들이 서로 경쟁하고 죽여대다가 자멸해 버렸다.

다이곤은 이런 환경에서 질서를 구축해냈고, 구 세력을 몰아붙이는 데 이르렀다.

“홍태주라고 무능한 인물은 아니나, 몰락을 거듭한 지금은 군재 외에 내세울 게 없습니다. 다이곤은 아니지요. 앞으로도 그 비범한 재능을 활용할 여지가 무궁무진합니다.”

홍태주가 아무리 잘났어도 현재의 요동은 밑천이랄 게 없는 동네다.

제국의 세대교체를 이루어낸 인물조차, 타고난 군재에도 반란군 하나 밀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내치에 뛰어난 자질을 가진 다이곤에게 요동은 사뭇 다르게 여겨질 거다. 개척만을 기다리는 미개발지에 더 가깝지 않겠는가.

이원익이 말했다.

“만약 홍태주를 지지하게 된다면, 이것의 실현법은 한참 북쪽에 소재한 다이곤의 세력을 견제하기보다는 홍태주를 지원하는 식으로 이루어질 테지요.”

“…….”

“한데, 아조에 크나큰 죄를 저지른 홍태주를 벌주기는커녕 도리어 보듬어준다면 백관 모두가 입을 모아 반대할 것이 분명합니다.”

다이곤을 지지한다면 정치적인 부담은 훨씬 덜하다.

죄인 홍태주를 괴롭히는 게 문제 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대놓고 다이곤을 위해서라고 공공연히 떠들지만 않으면 된다.

그러나 홍태주를 지원하는 건 어떤가?

뒤늦게 해명하든가 앞서 설득하든가 둘 중 하나는 각오해야 한다. 어느 쪽도 쉬운 길은 아니며, 양쪽 다 논란이 뒤따를 터였다.

“홍태주를 지지한다면 정치적 비용이 상당하다는 점은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이곤을 지지하게 되면 훗날 더 큰 비용을 지불할 수 있어요.”

“전하, 홍태주라고 훗날의 우환이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겠사옵니까?”

“홍태주는 후금이 가장 강성할 때 전력을 다해 맞서왔고 패퇴했습니다. 부담이 훨씬 덜해요.”

“하오나 그가 배반한다면 아조는 안에서부터 큰 혼란을 낳지 않겠사옵니까?”

“……음.”

이원익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훗날 오랑캐가 칼자루를 거꾸로 쥐었을 때 다이곤이 더 위협적이라는 건 신 또한 긍정하옵니다. 그러나 백관의 반대에도 전하께서 무리해서 요동의 패자로 만들어준 이가 재차 반역을 일삼았다면, 그때는 안에서부터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홍태주가 강적은 아닐지라도 조선은 내우외환에 놓인다.

과연 그것이 다이곤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 나은 최악일까.

이원익이 위로하듯이 말했다.

“홍태주가 사신을 보내 먼저 굴복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를 도와주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으나…… 먼저 죄를 짓고도 사죄하지 않았으니 이는 홍태주가 자초한 결말이옵니다.”

* * *

요동의 거시적인 흐름을 파악한 건 조선만이 아니었다.

당사자인 홍태주 역시 다이곤과의 경쟁에서 자꾸만 밀려나는 자신의 세력을 주시하고 있었다.

몇 번, 이러한 흐름을 타개하고자 군사를 이끌고 출진도 해봤다.

하지만 다이곤은 산발적인 유격전만 걸어오며 노골적인 지연전 의도만을 보여줄 뿐, 싸움에는 추호도 응해오지 않았다.

‘선양을 점령하지 않는 한 답이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선양의 점령도 쉽지 않다.

홍태주에게는 당장 손아귀에 쥔 군사와 세력만이 그가 가진 전부였다.

반하여 공성이란 공세가 반드시 불리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인명과 비용의 영역을 모두 포함한다.

집안의 기둥뿌리를 뽑아다 공성추로 써먹는 격이다.

이 한 줌의 군사와 재력을 모두 퍼부어서 선양을 공격한다면, 설사 공성에 승리하더라도 공멸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고사할 것이냐, 요란스럽게 파멸할 것이냐.’

금주성에서 대승을 거둔 이래 홍태주는 자신의 시대가 다시 돌아왔다고 여겼다.

명나라는 물론, 그들과 연합한 반란군 역시 모조리 몰살하였으니.

하지만 착각이었다.

조선을 공격한다는 성급한 판단을 한 이래 그와 제국은 몰락에 영락을 거듭했고 이제는 황무지만 남아버린 요동에서 생존마저 위협당하고 있다.

‘타개할 방법은 없는가.’

상황은 절망적이다.

부족 단위로 경쟁하던 시절이라면, 혹 패퇴하더라도 멀리 벗어나 재기를 시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금은 압록강과 산해관 너머의 땅을 모조리 차지했다.

이곳에서 경쟁에 탈락한다면 도망조차 불가능하다. 어디로 갈 수 있다는 말인가. 야만스러운 족속이 살아가는 북방의 한지? 아니면 동쪽의 바다?

“…….”

상황은 절망적이고, 미래는 비관적이었다.

요동의 형세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분명했으나, 요동 전역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흐름을 뒤틀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혹, 조선의 도움을 입을 수 있다면 모를까.

객관적으로 보아도 다이곤의 성장세는 위협적이다. 추대된 반란군의 간판에 불과했던 핏덩이가, 이제는 요동 전체를 잠식하고 있지 않나.

요동을 직접 지배할 야욕까진 없더라도 충분히 주의 깊게 주시하고 있을 조선의 왕이라면 자신보다는 다이곤을 더 경계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사실, 요동에서 횡행하고 다니는 조선인 상단이 죄 조선 왕의 눈과 귀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 아니냐.

“……후.”

홍태주는 탄식인지, 웃음인지 모를 날숨을 토해냈다.

이런 작자를 상대로 제국의 모든 것을 걸어 전쟁을 일으켰다니?

그 결과가 이 꼴이다.

고작 핏덩이 하나 제압하지 못하여 생존마저 불투명한.

자신이 조금만 더 현명하고 시야가 넓었다면 지금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겠지.

너무 오만했다.

이러고 황제를 자처한다는 것부터가 농담거리 아니냐.

“…….”

홍태주는 자기 앞에 놓인 대원의 옥새를 매만졌다.

선 한이 몽골의 대칸에게서 강탈한 전리품.

쇠락에 영락을 거듭한 몽골 역시 제국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해진 상태가 되었다.

지금의 요동처럼 분열과 내란을 거듭하여, 여타 몽골 부족들은 모두 외면하는 상황에서 릭단 칸만이 근근이 저항하다 종래에는 한 줌 추종자들만 데리고 불교의 성지로 떠나지 않았던가.

그때는 릭단 칸이 한심하다고 여겼으나, 자신이 맞을지도 모를 최후를 생각해본다면 오히려 부러울 정도였다.

요동에서는 도망칠 데도 없으니.

“이런 마당에 황제가 무어냐? 이 짓거리도 다 우습구나.”

홍태주는 피식피식 웃다가, 밖을 향해 일렀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그 부름에 한간 환관이 집무실로 들어섰다.

“부르셨사옵니까.”

“요양을 방문한 조선인 상단이 있다고 들었다.”

“예.”

“얼마 전에, 놈들이 나의 영토를 오가다가 도적들의 습격을 당했다던데.”

“……예.”

한간 환관은 황제가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을 거론하는 것이 의아했다.

새해를 맞아 다시 말세에 처박힌 요동이다. 도적이 횡행하고 누가 습격을 당하는 건 일상처럼 느껴졌고, 굳이 거론될 일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나야 제국의 실상을 모르지 않으나, 외부인에게 치부를 보이고도 신경 쓰지 않는다면 부끄러운 일이 되겠지. 놈들을 불러라. 가볍게라도 위로해야겠다.”

“……예, 폐하.”

* * *

혼란한 요동을 헤치고 요양과 선양에 상단을 파견하는 건, 아무리 피가 흐르더라도 그칠 수 없었다.

적의 수도에서 공공연히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야말로 조선유상의 존재의의였으니까.

다행히 밀수상들은 극도의 위험성에도 상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애초에 막대한 이문을 취하고자 목숨을 내놓은 작자들이다.

많은 인구가 집중된 적의 수도들은 밀수상들이 지향하는 막대한 이문을 실천하기 가장 좋은 환경이었고, 그래서 무수한 도적과 거지들이 난립하는 험지를 주파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지로 나아가며 갖은 위협을 감수하는 첩보원을 숨길 숲으로 이보다 더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자들이 있을까.

겸사겸사 밀수상들이 내는 회비는 조직의 운영비를 제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한윤 자신이 공무를 마친 다음에는 이대로 상단 주인으로 눌러앉아도 썩 괜찮겠다 싶을 정도로.

……그러나, 이제 한윤은 조선유상과 여기에 내재한 첩보조직의 무결성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홍태주가 이걸 자네에게 주었다는 말인가?”

요양으로 파견된 상단의 행수는, 갖은 변수와 가능성을 경험으로 체득한 한윤조차 예상치 못한 성과를 가져왔다.

“그렇습니다.”

“…….”

홍태주가 상단 행수에게 도적의 일을 사과하며 내린 하사품에는, 응당 하사품이지 않아야 할 물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부러 눈에 띄게 포장된 함 내부에는 밀봉된 편지와 오래된 도장, 그리고 허술하게 동봉된 서찰이 있었다.

서찰에서는 도장의 정체가 대원제국의 옥새이며 이와 함께 밀봉된 편지를 조선의 왕에게 보낸다고 했다.

하사품을 내릴 때는 전혀 거론되지 않은 부분이었다.

상단 행수가 물었다.

“진품일까요?”

“……그럴 가능성은 있다.”

행수가 기대하지 않은 대답이었는지, 그는 불신이 가득한 채로 말했다.

“홍태주가 미친 게 아니고서야, 진짜 원나라의 옥새를 넘기겠습니까?”

“가짜를 넘길 이유는 있단 말인가?”

“전하의 환심을 살 수 있잖습니까.”

“그건 옥새를 선물하는 이유이지, 가짜를 넘겨야 할 이유는 되지 않네.”

“진짜를 넘기는 건 아깝잖습니까.”

한윤은 고개를 저었다. 행수가 가짜라 짐작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으나, 그는 회의적이었다.

“병조참판을 지내고 있는 묵재默齋가 옥새를 얻기 위한 노아합적의 원정에 동행했고, 황제 즉위식에도 참가했으니 아조에는 옥새의 진위 여부를 판가름할 능력이 있네.”

그 능력이 확실하다고는 장담하기 어려우나,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런데 가짜를 보내 환심을 사고자 한다?

“지금 홍태주가 놓인 상황이 가짜 옥새로 수작질을 벌이고도 괜찮은 정도라곤 판단되지 않는군.”

그 반대라면 모를까.

“진짜 옥새를 내놓는다면 내부에서부터 곤란해질 텐데요.”

“그렇긴 하겠지만, 안 내놓는다고 안 곤란해질 상황도 아니잖은가.”

자칭 적통이 발호한 지 한참이고, 이를 진압하긴커녕 반대로 진압당하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망국의 옥새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국의 실력자에게 환심을 사는 것 외에는 정녕 쓸모가 없다. 그래서 홍태주가 왕에게 보내려는 것이리라.

이런 마당에 가짜를 보내 환심과 대비를 모두 가지고자 하는 건 너무 무모한 과욕이었다.

홍태주가 탐욕에 눈이 멀어 그렇게까지 사리판단을 못 할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홍태주가 외신상담을 각오했다는 편이 그나마 더 가능성 있겠군.”

“옥새로 환심을 사고, 상황이 반전되면 다시 찾고자 조선을 적대할 거란 말입니까?”

“반성이 덜 되었거나 팔자가 풀렸다고 올챙이 시절을 망각한다면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그편이, 가짜를 보내 이른 망국을 시험하는 것보다 더 유리하지 않겠나.”

“흐음.”

“하지만, 나나 자네가 홍태주의 진의를 어떻게 보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네.”

“왜요?”

“여기서는 옥새의 진위를 파악할 수 없으니까.”

조정에 보내고, 왕과 신하들의 판단을 기다리는 게 최선이자 유일한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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