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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11화 (211/380)

인조, 명군이 되다 211화

“어찌하여 신을 찾으셨사옵니까?”

이귀가 뒤룩뒤룩 눈을 굴렸다.

이곳은 왕과 삼의정이 모인 자리.

이들이 재상들보다 앞서 최고 중대사를 먼저 논의한다는 건 비밀조차 되지 않았다.

과거 이귀는 자신도 이 자리에 끼어들 자격이 있다고 여겼으나, 도리어 경고만 받고는 뇌리에서 지우게 되었다.

잊지 않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앙심을 품기엔 지금의 왕은 너무 강대했으므로.

그러다가 불려왔으니 이귀는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왕이 말했다.

“병조참판의 안목이 필요하여, 이렇게 자리에 청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너무 부담을 주지는 않았겠지요?”

삼의정이 왕과 함께 이목을 모아 빤히 쳐다보니, 이미 기가 죽은 이귀로서는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턱 숨부터 막혀 일단 호흡부터 바로잡은 이귀가 입을 열었다.

“아니옵니다. 하명하시옵소서. 신이 무엇을 하면 되겠사옵니까?”

왕은 빙긋 웃고는 일렀다.

“이 물건의 진위를 파악해 주셨으면 합니다.”

“……?”

이귀는 의아했다. 어떤 물건이길래 진위를 판단하는 데 자신의 안목이 필요하단 말인가.

하지만 삼의정 사이로 나아간 이귀는 곧 물건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건.”

금빛 옥 덩어리를 양감하여 무늬를 새긴 이 덩어리는, 노아합적이 릭단 칸에게서 강탈하고 황제 즉위의 명분으로 삼았던 원나라의 옥새가 분명했다.

그런데,

“이게…… 왜.”

여기에 있지?

이귀는 순간 꿈이라도 꾸는 줄 알았다.

오랑캐들이 그들 소굴의 가장 깊은 곳에 모셔두었을 옥새다. 여기에서 뜬금없이 나타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당당히 놓인 물건은 자신이 두 눈으로 보았던 옥새가 맞았다…….

멍청한 얼굴이 된 이귀는 반신반의하며 용안을 올려다보았다. 무언의 해명 요구였다.

“홍태주가 내게 이것을 비밀스럽게 전달했습니다.”

“……??”

“이것이 진짜가 맞는지 궁금했는데, 나나 삼의정 중에서는 직접 본 적이 없어서요. 오직 병조참판의 안목만이 해답이었습니다만, 반응을 보니 가짜는 아닌 모양입니다.”

“……예, 이것은 진짜 원나라의 옥새이옵니다. 한데.”

“홍태주와 다이곤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는 건 참판께서도 아시겠지요.”

이귀는 이해했다.

홍태주가 갑자기 미쳐서 옥새를 보낸 게 아니라, 옥새를 대가로 도움을 받고자 한 것이다.

경위를 깨달은 이귀는 갑자기 분노에 휘말렸다.

“전하,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에게 패하자 겉으로 치욕을 자처하며 절치부심한 끝에 오나라를 멸망시켰사옵니다!”

홍태주도 비슷한 수작을 부리는 게 분명했다.

“역사를 상고해보면 믿지 못할 자의 굴복은 항상 독이 되어왔사오니, 이 같은 전례를 또 만들어서는 아니될 것이옵니다!”

“안 그래도 삼의정께서 같은 지적을 해주셨어요. 그러니 참판에게도 물어보겠습니다.”

“……하문하시옵소서.”

“홍태주와 다이곤 중에 누가 더 믿지 못할 자입니까?”

“둘 다 황제를 참칭하는 더러운 오랑캐에 불과하니, 모두 믿지 못할 놈들이옵니다!”

“알겠습니다. 병조참판의 고견은 새겨두도록 하지요. 오늘 일은, 내가 신하들에게 알리기 전에는 공개를 유의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왕은 까까를 하나 물려준 뒤 슬쩍 손짓했다.

문간을 직접 가리킨 건 아니었으나, 이귀는 그것이 축객임을 알고 물러났다.

어전이 조용해지자 왕이 삼의정에게 말했다.

“병조참판이 결정적인 발언을 해주었습니다. 둘 다 믿지 못할 놈들이지요.”

홍태주라고 신용도 있는 건 아니나, 다이곤이라고 딱히 믿을만한 자는 아니었다.

진흙탕을 제패하고 그곳의 확고한 패자로 등극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다이곤은 더욱 믿기 어려운 인물이다.

‘오직 정도正道만으로 난세를 평정하기란 불가능하니까.’

왕 역시 반란 직후의 혼란한 조정을 평정하고자 여러 바람직하지 못한 수법을 동원해야 했다.

조선마저 그러했을진대 하물며 야만족 사회에서 덜할 수야 없다.

‘그렇다고 아예 개입을 포기하는 건 너무 무책임하고.’

지금 흐름대로라면 이변이 없는 한 다이곤이 탄탄대로 요동의 주인이 될 테고, 통일된 후금은 조선이 빨아먹지 않는 만큼 더 강해진 위협으로 돌아올 테니까.

“홍태주가 비밀스럽게 옥새를 보냈다는 건, 그 역시 자칭 황제놀이를 이제 와 포기하기란 버겁다는 의미겠지요. 그의 파멸도, 구원도 모두 우리의 손에 달린 셈입니다.”

뒤에서 홍태주가 옥새를 팔았다는 소문을 퍼뜨리면 그대로 파멸이고, 대가로 적절한 지원을 약조해준다면 홍태주가 면피할 구석이 생기는 셈이다.

어쨌거나 놈의 신민들도 옥새가 주린 배를 채워주지 않는다는 건 질리도록 체감해서라도 알고 있을 테니.

“이러한 각오를 믿어보자는 게 아닙니다. 이만한 절실함이라면, 우리의 도움을 구하고자 많은 이권을 약조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러한 이권들이 곧 우리의 요동 통제권과 직결될 겁니다.”

짧은 침묵이 있었고, 영의정 이원익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요동은 거듭된 전쟁과 내란에 의해 극도로 빈궁하고 혼란스러워졌사옵니다. 홍태주가 많은 이권을 약속하더라도, 아조가 어떤 분야에서 얼마나 많은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겠사옵니까?”

벼룩을 파헤쳐 간을 떼먹은들 사람의 배가 얼마나 차겠는가.

도리어 벼룩을 파헤치는 수고로움이 더욱 크지 않을까?

그러나 이 시점에서도 이미 해양의 실력자들은 서로 더 많은 벼룩의 간을 빼먹고자 아귀다툼을 벌이는 중이다.

제국주의는 하루아침에 태동하지 않았다.

이미 대항해시대부터 강대국들은 해양 거점을 확보함과 동시에 값싸게 원자재를 수급하고 저들의 상품을 판매할 목적으로 세계 각지를 정복해나가고 있었다.

요동에서 확보할 이권도 여기서 따오면 된다.

“요동은 미개척지가 많고 식량의 가치는 높습니다. 자원을 값싸게 수입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공물의 형태로 해마다 조공을 받아도 될 겁니다.”

삼의정의 안색이 제법 흥미롭다는 듯이 변했다.

오랑캐 무리와의 무역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겠으나, 전통적인 조공의 방식이라면 다르다.

하물며 자칭 황제국일지라도 그리 빙자하는 무리에게서 조공이라니.

“반대로 아조에서는 식량을 비싸게 매각하고, 추가적으로 명나라의 유산과 사치품을 매입할 수도 있겠지요.”

각종 서적과 비단, 도자기, 귀금속, 희소가죽 등.

당장 먹을 게 없어 아사하는 요동의 백성들에게 그런 게 중요할 리 없다.

“요동이 안정되어 다시 식량을 충분하게 생산하게 된다면, 그 같은 이점을 계속 누리기는 어려울 것이옵니다.”

“땅도 사들이면 되지요. 조선이 요동의 대지주가 되면 식량 공급에서 주도권을 가지게 될 겁니다.”

“……요동의 땅을 말이옵니까?”

이원익을 따라 두 의정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조정의 이름으로 땅을 매입하게 된다면, 그건 아조의 영토가 되는 셈이 아닌가?

혹 상인이 땅을 사들인다면 그 땅은 조선의 영토인가, 후금의 영토인가. 후자라면 조선의 백성이나 후금에 세금을 내야 한단 말인가?

“이국의 땅을 매입하게 된다면 난해할 여지가 많을 것이옵니다.”

“우리가 아쉬운 처지는 아니니, 그 점은 우리에겐 문제가 되지 않지요.”

“흐음.”

“논란이 되더라도 나쁠 건 없습니다. 후금이 아조 혹은 아조 신민이 보유한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한다면, 정당하게 거래를 통해 취득한 토지에 우리의 군사를 주둔시킬 수도 있겠지요.”

“……음!”

경제활동을 일방적으로만 개방시키고, 국가의 생명줄인 식량의 수급을 통제하며, 심지어 이국의 영토에 군대까지 주둔시킨다.

삼의정에게는 생소한 제안이겠으나, 그렇다고 이게 조선이 요동에서 막대한 힘을 발휘할 수단임을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단지 이 같은 방식에 익숙하지만 않을 뿐, 계산이 안 서는 사람들은 아니니까.

그리고 그게 이 수작의 최대 장점이었다.

“삼의정께서도 보여주셨듯, 이는 아조에도 전례가 없으며 동서고금을 통틀어도 생소하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그들에게도 생소하리라는 의미지요.”

“……큰 반발 없이 이러한 이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뜻이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게 될 즈음에는 이미 우리가 요동의 목숨줄을 틀어쥐고 있겠지요.”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들도, 무력으로 복속된 경우를 제외하면 보통 이런 식으로 당했다.

국제 신종사기라고 해야 할까.

이게 진짜로 악질적인 건, 사기 치는 놈이 보통 몽둥이까지 쥐고 있다는 점이다.

호락호락 사기를 당해주지 않으면 그대로 대가리를 깨버릴 용도로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방법만 같지 조선은 절대적으로 무고하다.

몽둥이도 들고 있긴 한데, 여태 요동에 휘두른 적은 없다. 먼저 쳐들어왔으니까 휘둘렀지.

그리고 나와 삼의정은 홍태주건 다이곤이건 요동을 통일하고 세력을 추스르고 나면 또 덤빌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도와준다면 홍태주가 생명을 보전하고 요동을 평정하겠지만, 그 과실은 오롯이 아조의 것이 될 겁니다.”

어디까지나 사전 방위다.

* * *

합의에 이른 왕과 삼의정은 구체적으로 협력과 그 대가를 규정했다.

협력에서 직접적인 군사원조는 제외했다.

현재 조선은 군사를 용병으로 팔아야 할 정도로 불리한 상황에 놓이지는 않았으니까.

대신 소수의 무장만을 군사 고문으로 파견할 생각이었는데, 이는 협력보다는 대가에 가까웠다.

달리 해주는 것 없이 전장만 시찰함으로써 요동의 지리와 후금의 달라졌을지 모를 전투 양상을 익히려는 의도였으니까.

대신, 그들 군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군량과 물자를 지원해 주기로 했다.

마침 요동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천대하는 잡곡과 철 지난 구식 무기들을 값비싸게 처분하기 좋은 상황이었다.

그러한 의도를 홍태주도 모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대가랍시고 요구하는 것도 협력의 절대적인 수치와 비교하면 확실히 과했다.

전례가 없더라도, 그것의 유불리를 분간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단지 객관적으로 계측하기가 어려울 따름이다.

“옥새를 보내 신의는 보였다만, 조선은 이참에 나의 등골을 빨아먹으려 하는구나.”

홍태주가 쓰게 제안을 평가하자, 장남이자 황태자인 호격豪格이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반란군을 물리친 다음에는, 여세를 몰아서 놈들도 똑같이 물리치면 될 따름입니다.”

“……정녕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홍태주가 정색해 말했다.

후금이 가장 강성할 때 몽골과 야인여진까지 빌려 총체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는 무위로 돌아갔으며, 도리어 처참한 파국의 단초만 되었을 뿐이었다.

“…….”

호격은 안색이 창백해진 채 입술을 악다물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며, 홍태주는 쓰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그래, 운이 좋으면 그럴 기회가 오겠지.”

어차피 홍태주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조선이 먹고 떨어지라 한 잡곡과 구식 무기라도 양손 펼쳐 받들어야 할 판국이었다.

장차 화근이 될 대가를 제공하는 것도, 다 요동을 통일한 다음에나 신경 쓸 문제들이다. 제국의 존립마저 시험받는 지금 미리 근심하기엔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조선의 제안은 쓰디쓴 약이다.

분명 불쾌하고 내키지 않으며, 장기적으로는 독이나 다름없지만 당장 살아남기 위해서는 삼킬 수밖에 없다.

‘이놈도 아니까 아비를 위로한답시고 한 말이겠지.’

단지 그 방법이 미숙했을 뿐이다.

의도치 않게 아비의 아픈 구석을 쑤셨으니.

그 의도만은 참으로 가상하였으나, 민감하게 반응한 건 홍태주도 어쩔 수 없었다.

원정에 대패하고 요양으로 쫓겨난 뒤로 홍태주는 간간이 조선을 방문하여 왕을 마주했던 때를 악몽으로 꾸고 있었다.

이제는 기억조차 흐릿하여 꿈에서 등장하는 조선 왕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으나, 그것을 마주하는 순간 홍태주는 헉 숨을 삼키며 눈 뜨곤 했다.

그러다가 이제는 그 조선의 왕에게 대원의 옥새를 바치는 꿈마저 꾸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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