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12화
칭제건원한 세력이 ‘옥새를 팔아 급전을 당기자!’라는 결론을 도출하긴 힘들다. 황제의 권위와 옥새의 존재가 나라의 기반이 되었으니까.
그러나 홍태주는 어렵지 않게 신하들을 설득해냈다.
그의 세력은 더 힘든 상황에 놓인 덕이었다.
제국은 멸망 일로를 나아가는 마당이었고, 옥새는 이미 넘겨졌다.
뒤늦게 반대해봐야 공허한 외침에 불과했다.
적지 않은 신하가 홍태주의 막무가내를 다행스럽게 여겼다. 마지못해 따를 좋은 명분이었으니까.
현실에 순응한 홍태주와 신하들은 공식적으로 조선에 원조를 요청했다.
조선에서 왕과 삼의정의 의사가 일치했고, 양국이 물밑에서 협의가 성사되었어도, 조정의 동의 없이 식량과 무기를 이국에 불출하기는 어려웠다.
후금이 먼저 조선 신하들의 비위를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저들이 잘못했고, 자칭 황제 놀이도 반성하는 차원에서 그만두겠으며, 그 증거로 옥새를 ‘문명’에 ‘반납’하겠다고 말이다.
홍태주 딴에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한때 침공했던 이국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서 저를 제발 살려달라 구걸하는 꼴이었으니까.
그러나 옥새와 마찬가지로 자존심이 열세의 전황을 뒤집어주지는 않았다.
다만 홍태주는 이것이 절치부심하기 위한 기만책임을 천명하면서 흩어지는 권위를 조금이나마 수습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의 신하들은 알면서도 당해준다는 느낌으로 쉬쉬하였다.
대신, 효과는 확신했다.
“원나라의 옥새는 본디 전국옥새傳國玉璽라 하여 춘추전국시대 옥 장인 변화卞和가 초여왕楚?王에게 바친 화씨벽和氏璧에서 파생된 보물이옵니다.”
공조판서 김류였다.
“이어서 초나라를 제패하여 천하를 얻은 진시황이 재상에게 명하여 화씨벽으로 전국옥새를 만들게 하였으며, 이후로는 대대로 천자국의 상징으로 전해져왔으니, 이는 천하에 둘도 없는 보물이옵니다!”
김류가 전래동화 수준으로 널리 알려진 전국옥새의 내력을 장황하게 읊은 건, 그만큼 기뻐서였다.
자신이 불러온 서인천하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던 그다.
“하늘이 조선의 성세를 인정하여 이 땅에 천자의 상징인 전국옥새가 흘러들어 왔으니, 이는 진정으로 상서로운 징조가 아닐 수 없사옵니다!”
기실, 원나라의 옥새가 그 전국옥새가 맞냐는 데는 그간 상식 수준으로 회의론이 강했다.
물은 아래로 흐르고, 해는 동쪽에서 뜨며, 원나라의 옥새가 그 진품 전국옥새일 리가 없다는 느낌으로 말이다.
이는 전국옥새가 장대한 세월 워낙 많은 사람의 손을 탔고, 중간에 유실되었다가 ‘재발견’된 적도 잦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황제들은 이것이 진품이라고 천명하면서 전국옥새를 통해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했다. 거기에 전국옥새의 진위는 중요치 않았다.
그러나 원나라의 옥새가 곧 최초의 진품 전국옥새가 아닐지라도 이것이 조선에 들어온 의미가 퇴색되는 건 아니다.
원나라는 수사적 표현이 아닌, 실제로 ‘천하’의 대부분을 지배했던 몽골제국의 적통이며 동시에 수사적으로 천하인 중원을 한 세기 반 지배한 제국이었다.
이러한 국가의 옥새를, 부족 단위로 영락한 북원 잔당이나 자칭 제국은 감당하지 못하여 끝내 토해내게 되었으며, 이것이 중원이 아닌 조선에 흘러왔다는 건 굉장히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명나라조차 두렵게 한 후금을 망국으로 몰아넣으며 ‘실은 우리가 세계최강……?’이라는 국뽕에 진하게 취했던 이들에게는 칭제건원의 명분으로 해석되고도 남을 징조다.
때마침 명나라가 반란과 내란으로 점철되며 제국에서 ‘제국이었던 무언가’로 전락해 버린 마당.
천하의 대세는 어쩌면 우리에게 온 것이 아닐까, 하고 가일층 국뽕에 취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었다.
“과연 이것은 상서로운 징조이나, 절대 자만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하늘이 주의 깊게 지켜본다는 건 그만큼 수신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상서로운 징조를 상서로운 결과로 직결시키는 비결은 바로 세심함입니다.”
“그러하옵니다.”
이원익이 단호하게 긍정했다.
이 소식이 한양에 퍼진다면 혈기방장한 젊은 관료와 식자 중 적잖은 이가 국뽕으로 뇌수가 마비되어 이상한 소리를 지껄여댈 게 분명했다.
예를 들자면, 당장 칭제건원을 주청하지 않는 놈들은 사문난적에 적신賊臣 무리라는 식으로 호도한다던가.
“홍태주가 아조의 대세를 인정하고 굴복하였다는 것은 그가 아조의 질서에 편입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와 대적하는 다이곤은 한때 홍태주와 마찬가지로 황제를 참칭한 이래 무도한 태도를 굽히지 않았으므로, 마땅히 주벌해야겠지요.”
이것이 원나라 옥새의 대가임을 모를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군사가 직접 피를 흘려가며 토벌해야 할 정도로 다이곤이 홍태주와 비교하여 더 큰 죄를 지은 건 아닙니다. 나는 홍태주가 당장 절실하게 바라는 식량과 오래되어 퇴역한 무기를 제공하여 이이제이를 노리고자 하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왕의 질문에 옥새의 대가로 군대까지 보내야 하나, 고뇌하던 재상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조선이 요동을 직접 지배할 수 있다면 모를까.
홍태주가 납작 엎드렸으므로 그리할 명분이 더욱 줄어들었는데, 군사로 남의 나라 전쟁을 직접 원조하는 건 진정으로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식량과 퇴역 무기를 지원하는 정도라면 다르다.
“지당하옵니다. 홍태주가 당장은 부복하였으나, 내심 어떤 마음을 품었을지 모르므로 그의 싸움을 직접 도와주는 건 상책이라 할 수 없사옵니다.”
이원익이 이미 상의했던 내용을 재상들에게 전했다.
“그러나 굴복하고 질서에 순응한 자를 외면한다면, 누구도 아조를 따르지 않을 것이므로 완전히 무시해서도 아니 될 것이옵니다.”
그래서 간접적인 지원에 동의한다는 영의정의 말에, 다른 두 의정도 이견 없이 긍정했다.
왕과 삼의정이 중대사를 어전회의에 앞서서 먼저 논의한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므로, 이들이 이러한 결론을 미리 정해놓았다는 데 재상 몇몇은 조금 감정이 상하였으나 딱히 이론을 발하지는 않았다.
이원익의 발언이 워낙 정론이었으므로.
왕은 무언으로 긍정하며, 간간이 고개를 조아리는 신하들을 돌아보곤 일렀다.
“좋습니다. 의정부에서는 구체적으로 홍태주에게 지원할 물품과 전달 방식을 구체적으로 상의하여서 올리세요.”
“받들겠사옵니다.”
이원익이 대표로 대답했고 왕은 작게 웃었다.
“좋습니다. 진지한 이야기는 이쯤하지요. 내 짐작하자면 재상 중 적잖은 분이 옥새에 호기심이 많으실 텐데, 한 사람씩 나와서 직접 구경하게 해드리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 말에 재상들은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내색하진 않았어도, 원나라의 옥새가 어떻게 생겼는지 다들 궁금하긴 했다.
최초의 전국옥새는 아닐지라도 일단 수백 년 된 제국의 옥새라는 건 확실하지 않은가. 그 형태와 직인의 형상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다만 옥새의 존재가 워낙 중대하고 민감하여 가벼이 호기심을 드러내지 못하였을 뿐.
그래서 신하들은 이번에도 무언으로 침묵했다. 속으로 왕의 배려에 감사해하면서 말이다.
“다들 솔직하지 못하십니다. 좋아요, 영상부터 와서 직접 보시지요.”
“망극하옵나이다.”
이원익은 이미 가까이서 옥새를 본 적이 있었으나, 자세히 살펴볼 기회는 없었다.
용상에 올라 예를 올린 이원익이 직접 옥새를 받들어 만져보고, 도장을 확인했다.
그러고 서열을 따라 입시한 재상 모두가 옥새의 실체를 확인하니, 곧 한양은 원나라 옥새에 관한 이야기로 시끄러워졌다.
* * *
“내가 살다 살다 원나라의 옥새를 손에 쥐어볼 줄은 몰랐구나.”
유몽인은 썩 감회가 새로웠다.
금상의 반정으로 북인 정권이 몰락하고, 대북 인사들이 대거 숙청당했으며, 잠잠해지나 싶었더니 이내 기자헌과 함께 적신으로 지목당하여 명줄이 다시 달랑거리기도 했다.
당시에는 매일 새롭게 뜨는 해에도 볕을 받는 기분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과분한 왕의 후의가 자신을 지켜주기만을 빌고 또 빌어야만 했다.
그때가 그리 먼 과거가 아님에도 유몽인은 감회에 빠져들었다.
왕은 무분별한 숙청 시도에 절대 응해주지 않았으며, 동강진 및 후금과의 거듭된 전쟁은 북인과 서인이 모두 같은 조선의 신하라는 동질감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조선은 일신에 우일신을 거듭하여, 마침내는 대명에 반역하였던 오랑캐마저 자발적으로 조선에 옥새를 바치기에 이르렀다.
“이래서 세인들이 인생은 살아보기 전까지는 모른다고 하는구나.”
유몽인의 말에 아들 유약이 멋쩍게 웃었다.
유약 역시 조선이 원나라의 옥새를 얻을 줄은 추호도 몰랐으나, 부친은 고희古稀에 이르렀으므로 살아보기 전까지는 모른다는 깨달음을 거론하기엔 묘한 춘추였다.
“아조가 성세를 맞이하였는데 대왕께서는 칭제하실 의사가 없으시니, 내가 눈을 감기 전에 조선이 대국을 천명하는 것을 보기는 어렵다는 게 천추의 한일 따름이야.”
“방금 살아보기 전까지는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놈아.”
유약의 당돌한 발언에 유몽인이 곧장 꾸짖었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과연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음.”
“정 안타까우시면 전하께 칭제를 상주드리는 건 어떻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공론을 모을 것입니다.”
부친의 주춤하는 모습에 유약이 권했다.
솔깃한 유몽인은 잠시 고민하였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서 바라시지 않는데 내가 여론을 모아 강권한다면 그것도 불충이야.”
유몽인은 실소하고는 덧붙였다.
“그리고,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대왕께서는 이미 황제나 마찬가지시다. 다른 군주들 같았으면 좋다고 잔치를 벌이고 옥새를 금지옥엽 떠받들었을 텐데, 도리어 수신해야 한다 강조하시고 대수롭지 않게 옥새를 구경시켜준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무엇입니까.”
“그런 기물을 떠받들지 않아도 대왕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고 있기 때문이야.”
대국을 천명하는 건 그저 금상이 얼마나 겸손한가에 달렸을 뿐이다.
살아생전 그러한 광경을 보지 못하는 건 분명 아쉬운 일이지만, 천추의 한이라고 한 건 단지 과장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황제나 다름없는 대왕에게 칭제란 단지 요식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으음. 영감이 떠올랐다.”
“……영감이요?”
“칭제를 살아생전 보기 불투명하다면, 글을 통해서라도 아쉬운 마음을 해소하면 될 게 아니겠느냐.”
과거 그는 세간의 야담을 집대성하여 어우야담於于野談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낸 적이 있었다.
시집 역시 내보았고.
눈으로 익힌 게 있고, 본인은 달필이라 자신하므로, 용비어천가를 써내리는 데 조금도 부담이 느껴지지 않았다.
“너는 연적에 물을 담아오거라.”
“아버지…… 지금은 침소에 드실 시간입니다.”
“어허. 내가 근자에 들어 이렇게 기운이 돈 적이 없었는데 자식이 되어 돕지는 못할망정 타박이나 하느냐?”
“그러다가 지금 쓰시는 글이 유작이 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이 미친놈이 아비 상대로 못하는 말이 없구나.”
유몽인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그것도 썩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세를 거듭하여 망국에 다다랐던 나라에서, 천수의 종말만을 앞두었던 재상이 바람처럼 도래한 중흥군주의 치세를 찬양하고 죽는다?
이거야말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일이 아니냐.
일생이 권신과 연루된지라 관료로서는 더 대단한 일을 하기에는 그른 참이었다. 그렇다면 문인으로서라도 화룡점정을 찍어야지 않겠는가.
“좋다, 이참에 유작을 써야겠다. 네 핏물로 먹을 갈기 전에 빨리 연적이나 채워오거라.”
“아버지…….”
“어서.”
“아직 원나라의 옥새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주지도 않으셨습니다…….”
“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