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13화
생애 마지막으로 회광반조를 다하여 역작을 써내겠다던 유몽인의 각오는, 다음 날 비몽사몽하여 등청한 직후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아니, 이 양반아!”
“……왜 갑자기 화를 내고 그러십니까?”
함께 일하는 제술관, 이수광이 먼저 조보에 ‘해동칠룡이 나르샤海東七龍飛’라는 이름으로 먼저 용비어천가를 올렸기 때문이었다.
이는 유몽인이 지은 용비어천가의 첫 구절과 같았다.
두 사람이 모두 ‘해동육룡이 나르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용비어천가를 의식하였으므로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발표가 늦은 유몽인으로선 졸지에 표절 시비에 걸리거나 혹은 이수광이 발표하기 이전 자신도 똑같은 구절을 생각했을 뿐이라며 첨언을 달게 되어버렸다.
어느 쪽이건 혼자만 당당해지고 남들에겐 구차해 보이기는 마찬가지.
밤새 뜨겁게 타올랐던 창작욕이 차갑게 식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말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유몽인을 갈 곳 잃은 창의력을 발휘해 말을 돌렸다.
“그대는…… 어? 대왕께서 친히 임명해주신 제술관이 되어 용비어천가를 그대로 베껴 쓸 생각이나 했단 말이오? 참으로 진부하고 무책임하지 않소이까!”
“음…….”
대뜸 질타당한 이수광은 난처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 * *
무뎌진 이랑마다 잡초만이 어지러이 피어난 황무지 위로, 말발굽이 교차했다.
“쳐라!”
“죽여라!”
고함과 함께 핏발 선 눈과 칼부림이 어지러이 뒤섞였다.
사람이 안장에서 추락하고 말이 비명을 내질렀다. 패인 자국마다 검붉은 피거품이 괴였다.
곧, 패색이 짙어진 쪽이 날아드는 화살들을 등지면서 달아났다.
앙상한 나무들이 마구잡이로 패이고 베어진 숲 방향이었다.
가까스로 승리를 거둔 측은 적을 추격하는 대신, 그들의 말발굽 아래 추락한 적과 동료들의 시신부터 파헤쳤다.
무딘 무구와 낡은 장신구, 호주머니에 담긴 한 줌에 불과한 전재산.
그렇게 전리품을 챙긴 승자들은 파헤쳐진 시신을 등진 채 대오를 추스르며 물러났다.
그 직후.
하늘에서 전황을 관망하던 흉조凶兆가 벌떼처럼 전장으로 날아들었다.
까마귀의 만찬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곧, 헐벗고 피골상접한 군상들이 스멀스멀 모여들다가 이내 왁자하게 달려들었으니까.
새들이 후드득 깃털 흩뿌리며 달아난 자리에는, 곧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빗물보다 핏물을 더 많이 마신 잡초들을 제외하고는.
그리고 멀리서 이러한 광경을 주시하고 있던 또 하나의 무리가 있었다.
원색의 갑주를 걸친 채 중무장한 이들은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눈 좋기로 유명한 몽고인들조차 발견이 쉽지 않은 거리.
그래서 이 원색의 갑주를 걸친 이들은 천리경千里鏡으로 전황을 주시해왔다. 희귀하면서도 값싼 기물이었다. 고작 양곡 한 주머니와 교환되니.
한 사람이 정리 끝난 전장에서 시야를 옮겼다.
“우리와 싸울 때보다 많은 면에서 퇴보했습니다. 이제는 정말 짐승과 다를 바 없군요.”
“대신, 대응은 더욱 힘들어졌지.”
원색의 갑주를 입은 이들은, 조선에서 파견한 군사 고문이었다.
다만 명분만 그러할 뿐 실제로 이들이 행하는 건 요동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관찰하면서 변화한 양상을 관찰하고 장단을 분석하여 이점을 취득하고 만약을 대비하는 것이었다.
“만약 저들이 우리 땅에서도 이렇게 싸움을 걸어온다면 방비가 얼마나 곤란해지겠는가.”
회전을 통한 단판 승부로 세력 간 승패와 대세를 규정하는 건 이제 요동의 방식이 아니었다.
후금이 몰락을 거듭한 건 세력의 물리적인 강대함만이 아니었다.
지켜야 할 것은 오직 생명만이 남아, 전투의 양상은 더욱 천박하고 노골적으로 변했으며 이는 군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더는 뒤에 두고 온 가족과 곁의 전우를 위해 승리를 추구하지 않았다.
대신 약탈을 실현하기 위한 전제로서 살육을 벌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에 질서나 규율은 존재하지 않았다. 적지에 빼앗을 것이 있다면, 굶주린 짐승이 되어 마구잡이로 들이칠 따름이다.
“강 대 강으로 부딪친다면 우리가 백전백승이겠지만, 단련되지 않은 백성들이 저런 것들과 마주한다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겠지.”
“변진의 수를 늘려야 할까요?”
“그것 역시 방법이 되겠군. ……마침 군사도 늘어났으니.”
지난 몇 년 동안 변진의 상황은 크게 개선되었다.
두 순변사가 각기 양계의 한 쪽을 도맡아 엄히 감독하기도 했지만, 중앙의 지원도 차근차근 증대되어 살림이 나아진 덕이었다.
흩어져 장부에만 남아버린 인원들이 돌아왔고 버려진 둔전은 다시 개간됐다.
“인력과 자금, 사기가 충당되었다면 변진을 신설하는 건 어렵지 않지. 그러나 몇 곳 변진을 신설한다고 국경 전부를 방위할 수는 없네.”
적이 회전을 각오했다면 대군이 기동할 수 있는 길목과 그러한 길목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를 틀어막는 것으로 저지할 수 있다.
그러나, 적에게 부딪칠 생각은 없고 전역에서 소규모로 취약한 부분을 치고 빠질 의도라면 이런 식으로는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
“장성이라도 축조해야 할까요?”
“더 좋은 방법이 없다면 그렇게라도 해야겠지.”
“음…….”
대동한 무관들이 고민에 빠지자, 선두에서 논의를 주도하던 이가 웃었다.
“그래서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이네. 요동에 질서를 가져온다면, 지금처럼 군사로 가장한 마적들이 천지사방에 들끓다 못해 차고 넘쳐 조선마저 침범하는 걸 막을 수 있겠지.”
그들의 역할이 직접 요동에 질서를 가져오는 건 아니었다.
왕과 조정은 이국의 전쟁에 대신 피 흘리기를 마다하였고, 대신 요동에서는 사람 목숨보다 비싼 양곡으로 셈을 치렀다.
그리고 그것이 올바르게 사용되는지 감독할 사람이 필요했다.
“싸움도 끝났으니, 어디 오랑캐들이 질서를 가져오는 데 우리 반만큼이라도 진지한지 확인하러 가볼까.”
“그러지요.”
선두의 사내가 기수를 돌리자 일행이 곧바로 뒤따랐다.
일행이 버려진 논밭을 가로질러 도착한 폐허에서는 막 싸움을 마치고 귀환한 후금군이 삼삼오오 주저앉아 주먹밥을 먹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군의 등장에 고개를 들었으나, 이내 개 닭 보는 시선으로 무심히 주시하다가 다시 주먹밥으로 관심을 돌렸다.
“군량 배급만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는 모양입니다.”
“홍태주가 옥새까지 팔아가며 사 온 양식인데 떼어먹기가 쉽지는 않지.”
이에 일행 하나가 덧붙였다.
“그랬다간 말단 병사들에게 먼저 칼 맞고 죽을 테지요.”
보급은 항상 민감한 문제였으나 지금은 특히나 더 민감한 상태였다.
조선에서 갖은 이권과 교역의 대금으로서 막대한 양곡을 수출했으나, 전군을 안정적으로 먹이기에는 벅찬 상태였다.
홍태주는 여전히 궁지에 몰려 있었다. 단지 위안과 시간을 조금 벌었을 뿐.
병사들은 여전히 살아남기 위해 약탈을 거듭해야 했고, 이때 최후의 보루로서 딱 굶지 않을 정도로만 배급되는 조선산 양곡은 성역에 가까웠다.
약탈에 눈이 멀어 동족과 전우의 죽음에도 개의치 않는 후금군이 잘 차려입은 조선군에 무관심한 이유이기도 했다.
혹여 불미스럽게 엮이기라도 했다간 공공의 적이 되어 곱게 죽지는 못할 테니까. 개도 밥 주는 사람은 알아보는 법이다.
그리고 주변에서는 개조차 되지 못한 자들이 불안한 눈빛으로 군사와 그들 너머에 자리한 조선군을 흘낏거렸다.
더는 잃을 게 없어 도리어 가장 위험한 자들.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홍태주가 후금을 통일하더라도 당장 달라지는 건 없겠습니다.”
“흐음. 우리도 몇 년 전까지는 거의 이 정도였지.”
조선은 연이은 암군들의 실정과 폭정으로 왜란의 전화戰禍가 매듭지어진 지 이십 년이 지나고도 상처가 회복되지 않았다.
그러나 금상이 즉위하자 고작 몇 년 만에 파탄 지경이었던 국가는 몰락해 가는 명나라마저 딛고 명실상부 천하제일로 발돋움했다.
“당장의 모습은 중요하지 않다. 나라를 이끄는 자가 얼마나 적격인지에 달렸을 뿐이지.”
“홍태주는 적격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개인적으로는……, 아니라고 생각하네. 전하께 맞설 생각을 한 결과가 이러니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고 여기지.”
“그럼 걱정을 안 해도 되는 거 아닙니까?”
일행이 희미하게 웃었다.
“전하와 조정이 그렇게 생각지 않으니까.”
요동 및 후금을 향한 왕의 일관적인 태도는 뭇 신민의 의문을 불러왔다.
천하제일인 조선이 어찌하여 대승에도 불구하고 강역의 확장을 꺼려야만 하는가?
또 왜 직접 요동을 지배하지 않고 대역죄인인 홍태주에게 목숨을 허락하여 오동의 지배를 대행시키는가.
이러한 의문은 과거 여러 사람에게 불만으로 작용했으나, 지금은 과민반응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결과적으로는 잘 되었다는 게 금상의 의지를 정당화해 주었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분명하고 합당한 이유가 있으니 요동의 제패를 마다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일행은 직접 요동의 참상을 목도하며 어느 정도 왕의 의지에 공감할 수 있었다.
이 오물이나 진배없는 영역을 아조에 편입했다간 무관으로서 시달리는 일만 늘어날 게 분명했으니까.
“이동하지.”
선두의 한 마디에 휴식을 취한 조선군들이 다시 안장에 올랐다. 요동은 넓었고, 오늘 안에 돌아봐야 할 전장과 주둔지는 많았다.
또 수월한 활동을 위해 자리를 미리 비켜주어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군사 고문들이 떠나고 스산함만 남은 곳에.
조선인들이 돌아왔다.
군사 고문들은 아니었다.
저마다 허기를 채우고 주리던 요동인들이 고개를 들고서 손님을 맞이했다.
조선유상.
이들은 가치 있는 재화라면 가리지 않고 거래했으며, 이는 들고 다닐 수도 없는 토지마저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조선유상은 매양 굶주리는 요동인들에게 주어진 숨구멍이기도 했다.
그리고 항상 바다에 잠겨 있는 자라면, 누구든 숨을 쉬기 위해서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비켜! 죽여 버리기 전에!”
후금군은 상단 주변으로 몰려든 걸인과 부랑자들을 밀쳐내고서 가장 앞에 섰다.
아무리 주려 날 선 자들이라고 해도 밥 먹듯 살육과 약탈을 일삼는 마적 떼와 맞설 수는 없는 노릇.
더욱이, 군병으로 가장한 마적들과는 싸워 이겨도 거둘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그들 역시 하루살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먼저 밀수상에게 다가간 후금군이 주먹 반 개 만한 주머니를 내밀었다.
“이거면 얼마나 받을 수 있지?”
주머니 안에는, 그간 후금군이 목숨을 건 대가로 낡은 장식들과 귀금속 몇 알이 담겨 있었다.
* * *
요동은 모두에게 공평한 지옥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조선의 개입은 비록 간접적이었을지언정 판도에는 확실한 변화를 불러왔다.
조선이 대량으로 제공한 조와 피, 수수는 남부에서는 가축의 사료로 소비될 정도로 가치가 떨어지지만, 동시에 위급할 때는 구황작물로 기능하기도 했다.
홍태주와 요동인들에게는 때마침 필요한 것이었다.
굶주린 약탈자가 독기에서는 앞설지 모르나 배부른 약탈자를 기력으로 이길 수는 없었다.
춘궁기는 지나갔으나 요동은 여전히 굶주린 채웠고, 지원도 받지 못한 채 북방에 위치한 다이곤의 세력은 더 굶주려 있었다.
스멀스멀 남진해온 양 세력의 국경은 원래 자리를 지나 더 위로 올라갔다.
연초와는 반대로 홍태주가 다이곤의 존속을 위협하는 형세가 된 것이다.
홍태주는 벅찬 전황의 변화에 지도를 두고서 중얼거렸다.
“이제 어찌할 테냐, 꼬맹아.”
얼마 전 다이곤이 명나라와 접촉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반전되지 않은 걸 보아, 설령 접촉에 성공했더라도 그 결과는 성공적이지 못한 게 분명했다.
“하기야 명나라가 너를 좋게 볼 구석이 어디 있겠느냐?”
그건 홍태주를 향한 조선의 시선도 마찬가지겠으나, 적어도 조선은 강 너머로 똥물이 넘치지 않게 한다는 실리만은 존재했다.
하지만 명나라가 당장 처한 상황은 어떠한가.
이미 똥물이 범람하다 못해 제국이 휩쓸려 나가고 있는 판국이다.
오죽하면 왕가윤王嘉胤이라는 도적 수괴가 자신만의 나라를 세웠다는 소문이 산해관을 넘어 요동까지 전해질 정도일까.
최근 수십 년 동안 요동은 끔찍한 소식을 토해내는 곳이었지 받아들이는 곳은 아니었다.
산해관에 강과 바다로 격리된 이곳에서 소문이란 보통 유민을 통해 오가는데, 한동안은 사람이 빠져나가기만 했으니까.
홍태주에게는 좋은 징조였다.
요동 전체를 수복한 다음에는, 예전 같지 않을 명나라로 쳐들어가 중원을 정복할 수 있을 터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