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14화
과거, 후금의 전성기를 앞두고 지어진 요양의 황궁도 그다지 방대하지는 않았다.
정면을 정면으로 안쪽 깊숙한 곳에 대정전大定殿이 있고, 그 앞에서 좌우로 중신이 사무를 보는 십왕정十王亭이 세워진 게 거의 전부였으니까.
조선으로 따지자면 경복궁 근정전과 광화문 너머로 이어지는 육조거리가 하나의 궁궐로 묶인 셈이다.
기실, 후금의 핵심 관청인 십왕정十王亭도 정자亭子라는 명칭에 걸맞게 소박하기 짝이 없었다.
서넛은 뭉쳐야 대감댁 사랑방 정도는 될까.
궁궐을 방문한 조선인들이 묘한 미소를 짓는 이유였다.
“이래놓고 황제를 자칭했단 말이지?”
“오랑캐들의 되는대로 지껄이는 습성이란, 쯧!”
“왜놈들은 자기네 두령을 천황이라 한다지요?”
“‘천황’씩이나 된다는 놈이 왜 벽지 군도에서 해적 두령이나 한다는 말입니까. 놈들도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하는 걸까요?”
“그만한 사고가 가능하면 천황을 자칭하지도 않았겠지요!”
“하하하하!”
한간 관리들은 보란 듯 궁궐의 대로 한가운데를 떡하니 점거한 외부인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섣불리 연관되려 하지 않았다.
홍태주가 조선에 사실상 굴복해버리면서 조선이 비단 상국만 아니라 물주까지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당장 조선의 지원이 사라지면 대신조차 굶주림에 직면해야 하는 마당이었다.
혹여 ‘이놈 때문에 지원 끊겠다’라는 폭거를 당할 바에야, 차라리 입을 닫는 게 나았다.
그리고 그게 한간 관리들의 특기이기도 했다.
명나라의 전현직 관료였으면서도, 누르하치에게 조용히 굴복하고 그의 앞잡이가 되기를 자처했던 자들이었으니까.
그러니 이들에게 불의를 개의치 않는 건, 어렵지 않았으며 새로운 일도 아니었다.
이미 몇몇은 조선을 새로운 동아줄로 여겨 단물에 꾀이는 파리처럼 주변을 서성이곤 했다.
왁자한 조선인들과 구차한 한간 관리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건 도리어 또 하나의 조선인 무리였다.
“한낱 범죄자들이 아조의 복식을 하고서 아조의 언어로 시끄럽게 무례를 저지르니, 참으로 낯부끄럽습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왜 저런 작자들을 궁궐에 들이도록 허락한단 말입니까?”
“홍태주의 사정이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생각보다 훨씬 심한가 봅니다. ……고작 밀수꾼들 따위에게 의지하다니요.”
조선이 홍태주에게 식량을 지원해주기는 하였으나 운송은 강 너머로만 국한되었다.
그 이상은 요동의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운반하는 사람이 상할 수 있으니 직접 옮기는 게 조건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응한 게 조선유상이었다.
홍태주는 자신의 군사들은 믿지 못했다. 신뢰를 떠나, 다들 너무 굶주려 있었으므로 어렵게 얻어온 식량이 마구잡이로 횡령당해 흩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조선유상은 드러나는 모습만 상단일 뿐, 수뇌부는 조선 왕의 수하들이었으므로 이들의 신뢰는 검증되어 있다는 게 홍태주의 복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선유상이 탈 없이 양곡을 운송하는 동안 반대로 홍태주의 군병들이 앞다투어 충돌해 왔다.
일부는 검문과 통행료를 빙자하여 횡령을 시도했으며, 또 일부는 아예 무력으로 강탈하고자 했다.
다종다양한 방식으로 충돌을 거듭하는 와중 실제로 교전이 행해지고 사상자마저 발생하자 홍태주는 조선유상을 상대로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군병에게 맡기면 우려했던 상황이 실현된다는 것이 증명되어 버렸으니까.
이제는 대청제국이 아니게 되어버린 자신의 세력 안에서, 조선 왕의 입김만 더 세진다는 것을 알아도 별다른 수는 없었다.
홍태주에게는 조금이라도 멀리 보는 조력자가 필요했으니까.
망국마저 아른거리는 위태로운 시기에 그가 지배하는 요동을 전제하는 강대한 이국의 군주란 도리어 든든한 우군이었다.
그러나, 밖에서 보면 조선유상은 국법으로 금지한 행위를 국경 밖에서 벌이는 범법자 집단.
후금 내에서는 의외로 인상이 크게 나쁘지 않다고 해도, 이는 보수적인 관리들에게는 알 바가 아니었다.
“아조의 강토에는 감히 발 딛지 못하면서, 이국에서는 저리도 기고만장한 모습이라니.”
“나라 망신입니다.”
오가는 험담 사이, 검지를 입술에 얹고서 골똘히 생각하는 이가 있었다.
정사 최명길崔鳴吉이었다.
본디 그는 인조반정을 계획했던 책사로, 원래 역사에서는 냉철한 판단력을 인정받아 출세 가도를 달렸으나 달라진 역사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않아 왔다.
본디 그가 주장해야 했을 여러 분야의 개혁을 왕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주도하고 집행해버린 영향이 컸다.
반대했던 선혜법의 확대는 궤도에 올라 순항 중이며,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이행하는 방식에는 공감하지 못했던 호패법은 더욱 성공적이었다.
이런 상황이 거듭되자 최명길은 자신의 판단력을 과신하는 대신 맡겨진 일이나 잘하는 능신能臣으로 남고자 했다.
아직까지는 성공적이었다.
“영감.”
수행원 중 하나였다.
부름에 고뇌가 흩어진 최명길이 의문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수행원은 대답 대신 한쪽을 바라보았다.
돌바닥 너머에서 환관이 정확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분주하게 오가던 잡담도 그친 지 오래.
최명길은 수행원들을 제치고 환관에게로 나아갔다.
“대인,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알겠습니다.”
최명길은 수행원들에게 손바닥을 보여준 뒤, 환관을 따라 돌바닥을 밟으며 나아갔다.
정면의 대정전에서는 조선유상 쪽 사람으로 보이는 이가 반대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잠시 최명길과 눈을 마주쳤다가,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흐음.”
최명길은 멀어지는 조선유상 쪽 대표의 등을 흘기다, 환관과 너무 멀어지지 않기 위해 곧바로 그를 쫓았다.
그가 후금의 동향 및 홍태주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사신으로 파견된 이래, 요양에서 잠시 머물면서 의아하게 느낀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가장 의아했던 게 조선유상의 존재였다.
직접 보고 전해들은 요동의 현황은 인세보다는 수라도에 가까웠다.
비단 전선만이 아니었다.
전화와는 거리가 먼 후방에서도, 혼란의 여파와 이어지는 굶주림으로 걸인과 도적이 양산되었고 이는 사신단이 팔기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면서도 체감할 수 있었던 부분이었다.
부실하게나마 무장한 무리가 불온한 눈빛으로 한동안 사신단을 쫓아다녔으니까.
‘그런데 이런 곳에 조직적인 밀수꾼 집단이 있다라…….’
인간은 미련하며, 이문 앞에서는 쉽게 약해지며, 위험 앞에서는 결집하는 습성이 있다.
그러니 큰 이문을 추구하고자 자신의 안위마저 돌아보지 않는 미련한 밀수꾼들이 험지의 위험성에 대항하여 조직을 구성할 순 있더라도, 이렇게 단일의 질서를 갖춘 조직을 구성한다는 건 다소 당혹스러운 점이 있었다.
“폐하.”
환관이 안쪽을 향해 부르자, 곧 안에서 지친 목소리가 돌아왔다.
“들어오라고 해라.”
만주어에 익숙하지 않은 자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을 짧은 대화였다.
그러나 최명길은 혹 홍태주나 그 주변 사람들의 방심을 의식하여 만주어를 익혀두었다.
‘폐하라. 흠.’
조선의 눈치를 봐야 하니 밖으로는 전하라고 하지만, 저들끼리는 황제의 예우를 유지하는 모양이었다.
딱히 불온하다고 할 건 없는 태도다. 고려도 한때는 외왕내제外王內帝했다.
“듭시지요.”
환관의 반 박자 늦은 전언에 최명길은 그제야 발을 옮겼다.
문이 좌우로 열리면서 내부에는 방대한 공간이 드러났다. 홍태주는 그 한가운데 있었다. 유난히 높은 용상 좌우에는 시립한 신하 없이, 빈자리는 오직 따스한 볕만이 채우고 있었다.
“이리 오라.”
“가까이 오시라고 합니다.”
황제의 명령에 이어 환관이 통역했다.
공대와 존대를 구분하는 자연스러움.
조선인 출신일까? 살이호전에서 많은 사람이 납치되었고, 공식적으로는 모든 포로가 아민 및 자송합과 교환되었다고 했으나 눈이 직접 닿지 않는 곳에 예외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곧, 홍태주와 환관이 어감의 차이만 있을 뿐인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간 많은 결례에도 불구하고, 조선 국왕 전하께서 내게 귀중한 양곡을 내려주시고 사신을 보내 안부를 물어주시니 거듭 망극할 따름이다. 조선 국왕 전하께서는 안녕하신가?”
“아뢰옵기 송구하옵게도, 전하께서는 옥체보다 요동의 안녕을 더 신경 쓰고 계십니다.”
“안타까운 일이다. 조선 국왕 전하는 천하의 영웅인데, 일신의 안녕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최명길이 노골적으로 왕의 관심사를 드러냈지만, 홍태주는 태연하게 받아넘기며 덧붙였다.
“그분이 원하신다면 명의를 수배하여 소개해드리겠으나 짐작하건대 받아들이지 않으실 것 같군.”
약간은 이죽거리는 느낌.
조선의 왕은 홍태주를 신뢰하지 않으며, 그건 홍태주도 알고 있었다.
조선의 왕이 국궁진췌鞠躬盡?하여 좋은 의원이 필요하고, 홍태주가 화타를 되살려내어 소개한들, 그를 불신하는 조선의 왕이 받아들일 리 없다.
‘무슨 말을 해도 믿지 못할 테니 어련히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라는 뜻인가.’
최명길은 생각했다.
정확하진 않더라도 정답에는 충분히 가까우리라.
전하와 홍태주 사이의 뻔한 불신을 배제해도, 이국의 군주에게 간섭당하는 걸 좋아할 군주는 없으니까.
하지만, 조선은 후금에 간섭할 이유가 있었다.
“전하께서는 대한大汗이 요동을 안정시키겠다는 약조를 믿으셨기 때문에 여러 사람을 시켜 식량과 군사를 보내 원조하였습니다. 대한이 옥체를 염려해 주는 건 당장 필요한 일이 아니라 사료합니다.”
네 할 일을 해야지 않겠느냐, 로 축약될 질책에 홍태주는 눈살을 찌푸린 채로 이마를 매만졌다.
한때는 천하의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군림했던 홍태주다.
얕잡아보았던 이국의 신하에게 잔소리 들을 일이라곤, 다이곤을 상대하면서도 없었다.
보통 다이곤의 추종자라면 무엇이 됐건 죽이고, 조선을 얕잡아본 것도 아주 오래전이며 지금은 지독하리만치 후회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렇다 쳐도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한간 관리들이 거듭 간청한 바가 있으나 홍태주는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대는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구나. 비록 나와 조선 국왕의 관계가 달라졌다곤 하나, 여전히 이곳 궁궐에서는 나의 한 마디만으로 그대의 목이 달아날 수 있음을 모르느냐?”
당장 양국의 협력 관계도 그다지 건전한 편은 아니었다.
조선은 홍태주를 통해 요동 전체를 간접적으로 지배하려드는 중이었고, 홍태주 역시 여기에 순순히 당해주기만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어차피 예정된 분열이라면, 그 시기를 조금 앞당겨도 무방하지 않을까?
홍태주의 겁박에 환관이 식은 땀을 흘리며 통역했다.
최명길은 그런 홍태주의 노기 묻어나는 겁박이 도리어 하찮게 여겨진다는 듯, 무심하면서도 간결하게 답했다.
“대한께서는 아직도 후회가 부족하십니까?”
환관은 사색이 되었고, 홍태주는 당혹하여 입을 열지 못하는 환관을 노려보았다.
곧, 환관이 마지 못하여 통역했다.
홍태주는 얼굴이 홍시처럼 빨갛게 물든 채 입술을 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