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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15화 (215/380)

인조, 명군이 되다 215화

무턱대고 강 대 강으로 지른 말은 아니었다.

자신은 전하와 조정을 대행하여 후금을 방문한 외교관.

확신 없이 무턱대고 이국의 사나운 군주를 도발할 정도로 사리분간을 못 하지는 않았다.

최명길은 의주 맞은편에서부터 갖은 참상을 목도하면서 요양으로 왔다.

팔기는 굳이 저들의 꼴사나운 부분을 보여주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숨기고자 하여도 걸인과 부랑자들의 무리가 불온한 기운을 풍기면서 사신과 관군의 뒤를 쫓아다니는 것을 어찌 가릴 수 있을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는 못하는 법이다.

후금의 현황이 이렇다면, 홍태주라는 인물은 어떠한가.

홍태주가 여전히 야만적인 오랑캐 두령에 불과하다면, 후금이 어떠한 파국을 맞건 하찮은 분풀이를 위해 자신을 해치고도 남을 터.

‘하지만 홍태주는 이미 밀수꾼들의 두령을 독대했다.’

최명길과 조선유상의 대표는 대정전의 입구와 이어지는 계단에서 교차했다.

그 사이에 시립한 한간 관리들이 모두 도망친 게 아니라면, 홍태주는 조선유상의 대표와 독대까지 했다는 뜻이다.

그들이 후금에서 가지는 필요성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후금은 처참하게 몰락했지만, 그 대가로 홍태주라는 인물은 달라졌다.’

그래서 최명길은 확신했다.

자신을 죽음으로 겁박하는 것도, 실상은 죄어오는 조선의 지배를 조금이라도 떨쳐보기 위한 애처로운 발악에 지나지 않을 뿐 실제로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말이다.

‘또 만용을 부리기에는 너무 비참한 결과를 맞이했지. 아무리 사나운 자라도 머리가 존재한다면 두 번 자초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국의 신하가 군주에게 강 대 강으로 맞서는 건 다소 잔혹한 처사였을지도 모른다.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황제를 자칭하는 홍태주다. 주변에 다른 신하들이 있었다면 본인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무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독대하는 중.

당사자들 외에 홍태주의 치욕을 아는 자는 환관뿐이다.

그가 죽음으로써 이 치욕이 덮일 수도 있겠지만, 달리 통역할 자가 없고, 홍태주가 신용하는 인물이라면 목숨이야 건사하겠지.

‘이런 조건에서 홍태주가 보일 모습은 정해져 있다.’

최명길의 확신이 옳았다.

“그대도 악질이군. 조선 국왕 전하께서 그대를 보낸 이유를 잘 알겠다.”

홍태주는 얼굴의 화기火氣가 가신 채로 답했다.

“감사합니다.”

“두 번 감사하게 만들었다간 나부터 제 명에 못 살겠군…… 그래, 원하는 게 뭐냐?”

“찬탈자의 진압도 궤도에 올랐습니다. 빼앗긴 영역을 회복하고, 도리어 그들의 무단으로 장악했던 땅도 수복하고 있지요.”

“그렇다. 이게 그대의 주인을 불편하게 만드나?”

“전하께서는 성경 탈환 이후의 계획을 궁금해하십니다.”

“왜지? 이 땅의 이름은 요동이지, 조선은 아닐 텐데.”

당장 홍태주에게 심력을 쏟아부을 분명한 계획이 없다면, 어쩌면 강 너머를 향해서는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이를 이실직고할 수는 없는 노릇.

“전하와 조정은 대한이 요동을 통치하는 데 소모되는 경제적, 정치적 비용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 두 가지는 아조에서 대한에게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흐음.”

홍태주는 쓰게 콧바람을 토해냈다.

“내가 요동을 통일한 다음 곧바로 착수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또 과거의 우를 범하리라고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설사 과거의 우를 반복하고자 하더라도, 이런 상태의 요동으로는 한없이 불가능하다. 나는 찬탈자가 점거한 영역을 모두 수복한 다음에는 곧바로 요동을 회복시키는 데 전념할 생각이다.”

상식적이기까지 한 판단.

그러나 과거의 홍태주는 이 상식적인 판단을 하지 못했고, 첫 번째 우를 역사에 남겼다.

“피폐해진 민생을 소생하는 일이라면 전하와 조선의 조정은 일가견이 있습니다.”

곧바로 조선의 제도와 문화를 이식해보겠다는 시도에, 홍태주는 전혀 관심없다는 얼굴로 답했다.

“고민해 보지.”

달리 용건이 없었다면 최명길은 보다 강권하여 자신의 의향을 실천하려 들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가 요동을 방문한 이유는 비단 홍태주의 복심을 떠보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긍정적으로 고민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또한, 조선에서는 비사성卑沙城을 조차하고자 하는데 이를 허락해 주신다면 망극하겠습니다.”

“……비사성?”

“요동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땅입니다.”

후대에는 대련大?이라 알려지는 곳.

해양무역이 미비한 오늘날에는 어촌만 듬성듬성 놓인 벽지에 불과했다.

“그곳을 어찌하여 조선이 조차하기를 원한다는 말이냐?”

“등주에 자칭 등래대원수가 발호한 이래 조선은 명과의 교류가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명이 먼저 등주를 수복하지 않으니 아조에서 먼저 창구를 뚫어야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가까운 곳에 군대를 주둔시킬 생각입니다.”

“조선이 등주의 반란군을 토벌하겠다는 뜻인가?”

“여러 조건이 부합하고, 황상께서 응하신다면 그리할 것입니다.”

“하지만 군대는 먼저 주둔시키고자 하는군.”

“그래야 여건이 갖춰졌을 때 신속하게 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홍태주는 손끝으로 자신의 턱을 두드렸다.

썩 유쾌한 요구는 아니었다.

더욱이 군대까지 주둔시키겠다니?

이유랍시고 댄 산동 진출도 불투명한 상태로 말이다.

그러니 조선의 요구를 노골적으로 축약하면 ‘비사성 내놔’가 될 테지.

하지만, 이를 허락한다면 조선에 얹혀 중원으로 뻗어나갈 여지가 마련된다.

등래대원수라는 작자를 토벌할 때 끼어들면 되니까.

이 관대한 제안을 거절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산동은 조선이 단독으로 점령하기엔 큰 땅이며, 조선의 왕은 백성의 인명을 소중히 여기니까. 값싼 요동인을 화살받이로 제공하겠다는데 마다할 리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로가 아니라면 홍태주는 요동을 일통해도 중원으로 진출하기 어려웠다.

영락한 후금을 수복한들 하루아침에 산해관을 극복할 전력을 갖추긴 힘들다.

몽고를 재차 정복한다면 장성을 우회할 수 있겠으나, 그러면 명나라가 아닌 명 서부를 장악한 반란군 틈왕闖王 왕가윤의 세력과 부딪친다.

조선에 비사성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후금의 전무한 수군으로는 산동으로 군사를 수송할 수 없다.

조선이 화살받이를 데려다가는 대가로 용인해 주어아만 홍태주는 중원으로 진출할 수 있는 셈이다.

반대로 조선이 홍태주의 해양진출을 차단하고자 비사성을 틀어막는 것일 수도 있다.

‘조선왕이라면 가급적 내가 요동에 얌전히 처박혀 있기를 바랄 테니…….’

그게 조선왕의 저의라면 홍태주에게는 애초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마침 조선의 지원을 등에 업고 다이곤과의 경쟁에서 승기를 잡은 참이다.

이제는 성경의 수복만을 남긴 시점.

이때 비사성을 요구하는 의도가 너무나 분명하지 않나.

“좋다. 하지만 비사성을 가져가겠다면 응당 그만한 셈을 치러야지 않겠는가?”

“전후 복구에 더없이 귀중한 교훈을 전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선 고민해 보겠다 하지 않았나.”

“이것보다 더 금나라에 절실할 대가는 없어 보입니다만, 이조차 고민거리에 불과하다면 조선이 과연 무엇을 대가로서 제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독한 놈.”

“북쪽의 찬탈자가 그렇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물러나라. 나를 더 괴롭힐 건수가 없다면.”

홍태주가 질린 낯으로 손을 휘젓자, 볼일은 다 본 최명길이 안색을 바꾸고서 답했다.

“전하께서 대한에게 보낸 선물이 있습니다.”

“뭐지?”

“건시乾?입니다. 조선의 상주에서는 말려서 먹을 때 가장 맛있는 감이 나지요. 그 땅에서 나는 감으로 만든 건시로, 이는 전하께서도 자주 드시지 못하는 귀물입니다.”

“흐음…….”

이국의 사신에게 모질게 골수만 빨아먹히던 홍태주는, 감이라는 말에 얼굴이 펴졌다.

다만 그가 좋아하는 건 정확히 감 중에서도 홍시였다.

최명길은 이에 대해서 할 말이 있어 곧장 덧붙였다.

“전하께서는 대한이 홍시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접하셨으나, 홍시는 당장 혼란한 요동에서는 안전하게 운송하기 어려워 건시를 가져왔습니다.”

“……그건 나의 실책이 맞구나.”

이국의 군주가 선물을 빙자해 질책하는 것으로 들릴 법도 하였으나 홍태주는 진심으로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 역시 홍시를 좋아하는 만큼, 운송이 얼마나 어려울지 쉬이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비사성을 조차해주었으니 뱃길이 뚫리면 그때는 홍시를 보내오지 않을까. 그렇게 속으로 위안할 따름이었다.

“알았다. 조선 국왕 전하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주라.”

“예.”

최명길이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대정전을 빠져나가자, 홍태주는 곧장 사신이 가져왔다는 건시를 찾았다.

* * *

홍태주의 사리분별과 순순한 비사성 조차는 후금이 당장 돌발행동을 벌일 가능성이 낮음을 증명했다.

최명길은 병 주고 약 준 독대의 성과를 기록하기 앞서 궁궐부터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가 입시하기 전 궁궐 한가운데를 점거하고서 왁자하게 떠들었던 밀수꾼 무리는 이미 떠나간 뒤였다.

‘뭐 하는 놈들인지 알아보고 싶었거늘…….’

다시 생각해봐도 평범한 밀수꾼들 무리처럼 보이지 않았으니까.

최명길은 이미 떠나간 무리에 미련 가지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요동을 안마당으로 하는 자들이다. 또 부딪칠 일이야 얼마든 있지 않겠는가.

* * *

다음 날.

최명길은 바로 어제 보았던 환관의 방문을 맞았다.

“그새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습니까?”

환관의 낯이 제법 심각했다.

“전하께서 대인이 전해준 건시를 취하신 뒤, 금일 아침부터 복통을 호소하셨습니다.”

“내가 건시에 무슨 짓이라도 했을까 싶어서 찾아왔다는 말입니까?”

환관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크흠 헛기침할 따름이었다.

할 변명이 있다면 지금 하라는 듯이.

이에 최명길이 마저 말했다.

“대한께서 건시를 간밤에 몇 개나 잡수셨습니까?”

“서른 개가량 잡수셨습니다.”

“…….”

환관의 당당한 대답에 최명길은 코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건시는 말려서 물기만 제하였을 뿐이지, 감 그 자체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서른 개나 잡수셨으면 당연히 소화불량이 오지 않겠습니까?”

“……건시에 다른 문제는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불미스러운 의심을 하신다면, 이렇게 되물어보겠습니다. 제가 고작 대한께 소화불량이나 안겨 어디에 쓰겠습니까?”

환관도 할 말은 없었던지 쓰게 침음했다.

딴에도 반신반의하면서 혹시나 싶어 찾아왔던 모양.

“그나저나, 대한이 건시를 마음에 들어하시니 전하께서 매우 기뻐하시겠습니다. 다음부터는 한 번에 많이 드시지 말라고 권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심려를 끼쳐드렸습니다.”

환관은 꾸벅, 예를 표하고는 숙소에서 물어났다.

최명길은 터덜터덜 멀어지는 등판을 보며, 옆머리를 긁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칭 황제의 변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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