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17화
“산등성이에 서서 동편을 바라보니 저 멀리 바다에서 해가 떠오르는데…….”
“그것 참 장관이겠구나.”
“이를 말이겠사옵니까, 저하. 화공도 사흘밤낮을 들여 풍광을 그렸으나, 그 감회를 다 담아내지는 못하였습니다. 보시지요.”
“조선의 동편이 이렇게 생겼구나. 내가 두 눈으로 직접 볼 일이 올까?”
세자의 물음에 봉림대군이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아바마마께 여쭈어보시지요.”
“……아니다.”
한양을 떠난 봉림대군은 먼저 절경이 많기로 유명한 강원도를 방문했다.
가깝기도 했고.
그곳에서 수행원들과 산을 타며 명성만 무수히 접한 절경을 방문하다가, 한 바퀴 돌고 나서 한양으로 돌아온 것이다.
“날도 더운데 선선해질 때까지 쉬다가 가지 그러느냐?”
“인사차 들렀습니다, 저하.”
“같이 다니는 사람들도 신경 써야지. 너를 수발들면서 오래 고생하였으니 쉴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아, 아하하. 그건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봉림대군은 평소 수행원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제공하였으나 굳이 첨언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쉬어도, 오지에서의 휴식이 집구석에서 쉬는 것만 할까.
“저하의 말씀대로 푹 쉬다가 가겠습니다.”
“그래. 그 편이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서도 좋아하실 거다.”
형과 해후를 나눈 봉림대군은, 고개를 빼꼼 내밀고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봉림대군의 귀환은 가족 모두의 경사였다.
자리가 만들어지기 전에 먼저 회포를 터놓아 그렇지, 가까운 곳에 부왕과 어머니도 있었다. 두 분은 지금 담소를 나누는 중.
“저하.”
“왜?”
“저하께서 직접 상주드리기 부담스럽다면, 소제가 대신 아바마마께 말씀드려 볼까요?”
“무엇을 말이냐.”
“혹 저하께서도 외출하실 수 있는지 말입니다.”
“……글쎄다.”
세자는 답지 않게 옳다, 그르다 분명하지 않게 대답했다.
그게 봉림대군에게는 충분한 대답이 되어주었다.
밖을 다니는 동안 부쩍 장성하여, 입가에 거뭇거뭇 수염 날 징조가 보이는 입술이 꿈틀거렸다.
“형제 좋다는 게 뭐겠습니까?”
“…….”
무언의 긍정이 있었고.
“아바마마.”
봉림대군은 부왕을 불렀다.
품에 인평대군을 안고서 어머니와 담소를 나누던 부왕은, 아들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헉.’
봉림대군은 한양에 귀환한 직후 부모님께 문안부터 드렸다.
그때 오래간만에 마주한 부왕의 낯은 무척이나 초췌하였는데, 눈두덩이 아래가 창백해 섬찟할 정도였다.
지금도 그랬다.
“저어…….”
“말하거라.”
부왕이 윤허하며 힘없이 웃었고, 봉림대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자가 강원도를 다니며 방문한 절경이 많았는데, 매번 혼자 보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사옵니다. 언제, 형님도 바깥의 절경을 방문하게 해주시면 아니되겠사옵니까?”
“……으으음.”
부왕은 앓는 소리를 늘어뜨리고는 기운없이 답했다.
“나 역시 네 형이 넓은 세상을 직접 경험해 보았으면 한다만, 지금은 나라에 일이 많아서 확답해주기가 힘들구나.”
“예에…….”
그건 부왕의 반쯤 죽은 낯만 봐도 확실했다.
“송구하옵니다.”
“아니다. 나도 아쉽게 여기던 바였다. 상황이 정리되면, 그때 다시 논의해 보자.”
“예, 아바마마.”
부왕은 다시 어머니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봉림대군은 이 사이로 숨을 빨아들이며 멋쩍게 웃었다.
이에 세자가 말했다.
“근자에 일이 많기는 하였다. 예전부터 꾸준히 추진해 온 백년대계는 차치하더라도, 요동에서는 급박한 정황이 오가고, 한양의 백성들은 괴설을 퍼뜨리며, 조정에서는 등주를 정토하겠다 천명했고, 그 발판으로 조차한 비사성도 안정시켜야 하니.”
“비사성이요?”
“삼한이 있던 시절, 요동반도의 끝자락에 고려가 세운 성의 이름이다. 아, 전조의 고려를 말하는 게 아니라 엣 고려를 말하는 거다.”
그 이후로는 반도의 국가가 요동에 진출한 적이 없어 달리 부를 지명이 없었다.
오늘날에도 비사성 일대는 발전이 전무하여 인지도 없는 어촌만 듬성듬성 놓인 게 전부이기도 하고.
“……일이 많기는 하군요. 아바마마께 송구스럽게 되었습니다.”
“아니다. 내가 먼저 말렸어야 했는데 혹하였구나.”
봉림대군의 감언이설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세자란 언제 한양을 나설 수 있을지 불투명한 신세.
왕이 된다면 출성은 더더욱 어려워질 터.
욕심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때가 안 좋았다.”
“예…….”
봉림대군은 멋쩍게 웃고는, 세자에게 화공이 그린 그림 몇 장을 더 보여주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도통 그림에 집중하지 못했다.
* * *
“어허.”
인평대군이 천리경으로 하늘을 보기에, 서둘러 내려주었다.
“그러다 태양 보면 눈 다 간다.”
“어째서이옵니까?”
“맨눈으로 봐도 눈이 가는데, 천리경으로 확대해서 보면 얼마나 위험하겠느냐.”
“어째서이옵니까?”
“……확대되는 만큼, 먼 곳의 빛이 집중되니까.”
“어째서이옵니까?”
인평대군의 거듭되는 물음에, 이 모든 의문에 답하려면 현자를 데려와도 부족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핏 미래에서 접했던 일화가 생각났다.
한 학원의 학생이, 선생님에게 중력의 원인을 물어보았다던가?
이는 현대과학도 밝혀내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었다.
이처럼, 어린 지성은 놀라우면서도 치명적인 호기심을 발휘한다.
“막내가 이 아비의 얼마 없는 기력을 다 빨아먹는구나.”
“어째서이옵니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계속해서 그렇단다. 이 아비가 밥상에 얼굴 박기 전에 어머니를 괴롭히려무나.”
부쩍 덩치가 커진 인평대군을 안아 중궁에게 건네니, 중궁이 힘겹게 받아 품에 안았다.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요즘 이런저런 일들이 많아서요. 보통은 삼의정이 어느 정도 해결을 해주는데, 이번에는 삼의정도 제 편이 아닙니다.”
“그들이 정승이라도 신하는 신하입니다. 잘 다그쳐보시지요.”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아서 그렇지요.
여론의 힘은 강대하다. 한양의 수십만 신민이 한쪽으로 달리는데 어떻게 왕 혼자 붙들어놓을까.
포기하고 끌려가자니 이 광기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
삼의정이 등주를 팔아 여론에 방향성을 부여하긴 했으나, 광기가 괜히 광기인 게 아니라서.
“지금은 좀 나아졌습니다.”
여론에 불 지르는 걸 좋아하던 호전광들을 군인으로 만들었거든.
대부분이 사대부였으나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고 훈련병이라는 명목에 말단잡병으로 편성한 뒤, 북방군의 고참병들을 섞어 비사성으로 보냈다.
덕분에 요즘은 덜하지.
세계정복이 아무리 좋아도, 본인이 선봉에 서야 한다면 대부분은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게 내게는 휴식입니다.”
나는 중궁의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가족과 함께하는 이 순간만큼은, 주체할 수 없는 격랑이 되어버린 국정에서 가장 멀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 격랑에 다시 몸을 던질 수 있는 건 이 순간 내가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다는 걸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눈치보지 않고 중궁 앞에 드러누었다.
주변에는 가족과 출타를 시종하기 위한 환관 몇 명뿐.
이 순간에서도 마음 편하게 드러누울 수 없다면 내가 어디서 편히 드러누울 수 있을까.
달리 무어라 하는 사람도 없었고, 중궁은 손을 뻗어 눈을 가려주었다.
“푹 쉬세요.”
* * *
회의가 말미에 다다른 건 노을이 질 때쯤이었다.
중신들은 굵직한 의제를 두고서 당색의 분간도 없이 치열한 논쟁을 거듭했으며, 그럼에도 많은 부분에서 명확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전처럼 내가 최고 결정권자로서 상황을 정리하는 것도 이번에는 불가능했다.
쟁점인 요동과 산동은 국외인 만큼 주어진 정보가 제한적이고, 같은 이유로 영향력의 투사는 간접적인 수단으로 국한되었으며, 연루된 이해관계자가 많아 가벼이 단언할 수 없었으니까.
철인 한 사람이 전횡할 영역이 아니었다.
최선은 검증된 지성이 모여 도출해 내는 것.
그마저도 순탄치는 않지만.
바깥에 노을이 진 만큼 어전도 붉고 침침하게 물들었다.
각 관청에서는 당상들이 왈가왈부 떠드는 동안 조용히 일하고 있었을 실무진들이 퇴청을 준비하겠지.
“회의는 이만 파하도록 하지요.”
“전하…….”
호조판서 김신국이었다.
“의제가 있다면 다음 회의 때 논해봅시다.”
나는 손바닥을 들어 어전을 향했다. 중신들은 한나절을 꼬박 싸움에 임했고, 죄 비몽사몽하여 눈깔이 풀린 상태였다.
“보고드릴 사안이 있사옵니다.”
“그러면, 호조판서만 남고 해산하세요.”
지친 중신들은 김신국의 문제에는 신경 쓸 힘도 없는지, 앞다투어 예를 올린 뒤 비틀거리며 어전을 빠져나갔다.
보통 신하들은 회의가 파한 다음 정전 밖에서 삼삼오오 모여 논의된 사안과 공무에 대해 떠들곤 했으나 오늘은 그런 일도 없었다.
죽지 못해 산다는 느낌으로 흩어질 따름이었다.
그렇게 어전에는 김신국과 연장된 회의로 자리를 더 지키게 된 위사와 내시들만 남았다.
“호조판서는 회의 때도 별로 발언하지 않으셨지요. 무슨 일입니까?”
“홍태주에게 양곡을 지원 및 수출하는 일로 평안도 잡곡의 가격이 상승했다는 건 이미 아뢴 바 있사옵니다.”
“기억합니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기도 하고.
“상황이 심화되었습니다.”
“……식량난이 발생했다는 말입니까?”
“예.”
“호조판서께서 직접 거론하신 걸 보면 상황이 심각한가보군요.”
“아직은 아니옵니다. 다만, 원인을 분석한 결과 충분한 대응이 따르지 않으면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이 명약관화하여 보고를 서두르게 되었습니다.”
원인을 분석했다니?
“양곡의 절대적인 물량 감소가 식량의 가격 상승을 불러오리라는 점은 이미 분석하지 않았습니까?”
“부차적인, 그러나 치명적인 조건을 간과했사옵니다. 평안도에서도 주로 잡곡을 농사지어 먹는 북부지방은 애초에 생산성이 낮사옵니다.”
아차 싶었다.
“잡곡의 가격이 상승하더라도 그 가치가 쌀이나 보리의 가격과 반전되지 않는 한, 이들 지방은 잡곡의 대금을 충분히 받더라도 달리 충당할 식량수급원이 없는 셈이옵니다.”
그래서 식량난이 발생했고, 잡곡의 가격이 더 상승하더라도 상황이 악화되기만 하는 것이다.
‘안 그래도 바쁜데 또 일거리야?’
기운이 쭉 빠졌다.
후순위로 두거나 간과해버릴 문제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떼로 아사할지 모르는데 어떻게 무시해.
이 와중에 한양에서는 대륙조선의 발판을 확보하겠다는 소식에 환호한다는 점이 아이러니할 따름이다.
수도에 거주하는 부유한 신민이 최북단 오지의 어려움을 어찌 알겠느냐만.
이건 나도 예외라고는 할 수 없는 한계였다.
“그래도, 대금은 있으니 다른 지역에서 양곡을 매입할 텐데?”
“과연 국내의 상인들이 차익 실현을 위해 평안도로 식량을 지고 향하였으나, 절대적인 상인의 수효도 적을뿐더러 활동하는 규모가 대부분 개인이라 운반하는 식량의 총량은 사태를 해결하는 데 충분치 않으리라 사료하옵니다.”
그래서 식량난이 벌어진 거 아니겠나.
“곤란한 일이군.”
반사적으로 촌평을 남기면서도 곧장 세 가지 정도의 해법이 떠올랐다.
다행스럽게도 국내의 문제고, 나는 이 나라의 왕이다. 얼마든지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