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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18화 (218/380)

인조, 명군이 되다 218화

평안도 철산부.

한때 명군을 빙자한 해적들이 발을 디뎠던 해안가에서는, 새벽부터 굶주린 사람들이 해초를 따고자 방황하고 있었다.

덕순도 그중에 하나였다.

본래 그의 가정은 유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때마침 장성한 그는 식량난을 맞아 이른 독립에 나섰다.

아무리 배우지 못하였어도 눈치가 없을까.

나라에서 잡곡을 좋은 값으로 매수한다는 소식에 양곡을 팔아 부족한 살림을 채웠지만, 이제는 양곡이 부족하게 되었다.

그릇에 담기는 밥은 줄고 동생들은 칭얼대는데 별수 있으랴.

어차피 땅이 적어 농사를 크게 짓지도 않는 만큼, 덕순은 군입이라도 줄이고자 아닌 밤중에 집구석을 나섰다.

일단은 산기슭을 전횡하며 풀뿌리를 캐고 나무껍질을 벗기며 연명하였으나, 주림을 면할 수 없었고 영원토록 이리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무언가 도모하고자 해도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에 불알 한짝, 해변에서 주운 다 삭은 바구니가 전부.

덕순은 바위에 앉아 바구니에 걷어올린 해초를 씹었다.

바닷물이 갈라진 입술의 딱지를 녹이며 스며들었다.

“끄으응…….”

먹는 게 고역이 되었지만, 이제는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지경이다.

다들 사정이 곤궁해졌는지 해변을 방황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으니까.

‘예전에는 아침에 나와도 해초가 널려 있었는데.’

이제는 경쟁이 치열해져 새벽만 되어도 서성이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밤에 나와야 하나?’

빛 들지 않는 밤바다의 위험성은 잘 알고 있다.

이미 누군가 밤중에 해초를 따러 나갔다가 파도에 휩쓸렸다는 말도 돌았고.

그러나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주릴 판국이니 별수 없다.

“여하튼 목구멍이 최고 상전이지…….”

덕순의 신세한탄에, 근처 바위에 앉아 배를 채우던 사내가 웃었다.

“아주 빌어먹을 놈의 상전이지.”

“……나를 아시오?”

“알아야만 말을 붙이나. 여기 서성이는 사람 치고 서로 면식 있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있으면 그것대로 불행이지.”

옳은 말이었다. 지인이 자신처럼 해변을 방황하며 해초로 연명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아는 사람과 해초를 가지고 경쟁해야 하니, 그것대로도 불행이다.

“흐흥.”

덕순은 실소했다.

“자네는 어쩌다 이곳에 흘러왔나?”

“나야, 뭐 뻔하지 않소? 집구석에 먹을 건 동났고 눈치는 보이니 나왔지.”

“가족을 생각했군.”

“눈치만 생각했소. 그것도 지금은 후회 중이고.”

집 나오면 개고생이라더니, 개도 안 할 고생을 하고 있잖은가?

“형장兄丈의 사연은 어떻소? ……보아하니 못 먹고 살던 사람 같지는 않은데.”

체격은 건강하다 못해 건장했고, 옷도 해변을 방황하는 이들의 거적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굳이 해초를 씹지 않아도 먹고 살길이 많을 사람이다.

“정말로 눈치 하난 좋은데.”

“눈에 보여 물어보는 거요.”

“다 자네 같지는 않더라고.”

“……흥.”

덕순은 사내가 사연을 말해주기 싫은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잘 먹고 잘살던 사람이 해변까지 밀려왔으면 민망한 사연이 있을 법도 하다 치부하고 말 따름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민망함과는 거리가 먼지 훌쩍 일어나 덕순의 곁으로 왔다.

“……뭐, 뭐요?”

“몸도 멀쩡하고.”

사내가 희미한 미소와 함께 몸을 훑어오자, 덕순은 깜짝 놀라 물러났다.

‘비역질하는 변태인가? 그래서 쫓겨났구나!’

쫓겨난 게 아니라, 빈궁한 사정에 목구멍 채우기 어려운 사내를 꼬득이고자 나선 걸지도 몰랐다.

덕순은 소름끼치는 외간 사내에게 손바닥을 보였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지만, 비역질에 놀아나겠소? 일 없으니 다른 사람이나 알아보시구려!”

“……?”

짐작이 잘못되었을까. 오히려 사내쪽이 더 정색하고는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아, 몸 상태를 확인한 것 때문인가? ……아니야. 절대 아니지.”

사내는 단호하게 고개 저었다.

“그럼 어째서 남의 몸을 훑어보았소?”

“신체 건강한 일꾼이 필요했거든.”

덕순의 눈이 가늘어졌다.

“가진 게 없어 해변이나 방황하는 부랑자들 사이에서 말이오?”

사지 멀쩡한 사내를 구할 뿐이라면, 부랑자들 가득한 해변보다는 여느 동네를 방문하는 게 더 나았다.

덕순의 합리적인 의심에, 사내는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그냥 날품팔이를 구하는 게 아닐세. 신체 건강한 것도 중요하지만, ‘최고 상전’을 먹여살리기 위해 처지가 곤란할 필요도 있거든.”

굳이 그런 조건이 필요한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다시금 비역질 대상을 구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하게 된 덕순이 인상을 굳혔다.

그 반응에 사내는 더 끌지 않겠다는 듯 터놓았다.

“강 너머로 갈 생각이기 때문이야.”

“……강 너머라면, 요동 말이오?”

“그렇지.”

“요동에는 도적들이 들끓어 도저히 사람이 살 세상이 아니라던데, 거긴 어인 일로 일꾼까지 대동하여 간다는 거요?”

“이문이 남으니까.”

그것으로 족하지 않냐는 듯, 사내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덕분에 덕순은 어렵지 않게 사내의 정체를 추측해냈다.

나라에서 엄금한 밀수를 자행하는 범죄자이거나, 혹은 그리 되려는 예비 범죄자.

부랑자들 사이에서 일꾼을 구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평범하게 이어나갈 일상이 있는 사람들은 위험천만한 모험에는 동참하지 않을 테니까.

“지금 의주에 군사들이 모여 비사성으로 갈 준비를 하는데, 거기에 얹혀가면 도적들에게 시달릴 걱정도 없고 비사성에서 안전하게 장사를 할 수 있어. 그렇게까진 위험하지 않다는 말이지.”

“위험하지 않은 건 아니란 말이잖소?”

“그건 어쩔 수 없지. 이문은 항상 위험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자, 잘 들어보게. 위험하지 않은 곳에서 하는 장사라면 그만큼 경쟁하는 사람도 많겠지? 경쟁하는 사람이 많다면, 당연히 서로 이문을 작게 남겨서라도…….”

상인이 일장연설을 늘어놓자 덕순은 손을 내저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방랑인들 못 하겠소이까만, 요동까지 건너갈 생각은 없소!”

“아니, 어째서?”

“군사들과 동행한다 하여도 그들 일이 우리를 지켜주는 건 아닌데 만에 하나라도 횡액을 맞으면 먹고 사는 게 무슨 소용이요?”

윽, 하고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일 없으니 다른 사람이나 알아보시구려.”

“……허어. 참.”

상인은 말똥거리는 눈으로 한참 덕순을 쳐다보았다.

즐비한 부랑자들 사이에서 어렵사리 찾아낸 일꾼 후보였다.

그리고 덕순의 반응으로 그가 일꾼에 더욱 적합함이 증명됐다.

요동으로 건너갈 만큼 처지가 곤란한 사람을 구하고 있긴 하지만, 위험에 몰지각한 건 좋은 상인의 덕목이 아니기 때문.

“잘 생각해 보게. 이러고 있다고 하늘에서 감이 떨어지는 건 아니잖나? 언제까지 해초나 주워 먹고 살 생각이신가.”

“…….”

“당장은 날이 따뜻하니 노숙에는 문제가 없겠지. 해초도 많고. 그런데, 추워지면 어떻게 되겠나?”

거듭되는 강권에 덕순은 머리를 긁었다.

당장 방랑생활을 타파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대로 세월만 죽인다면 아사는 면하더라도 동사는 면하기 어려울 터.

어쩌면 이건 하늘이 내려준 기회일지도 몰랐다.

“음. 하루만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하루 정도 기다리는 건 괜찮지만…… 잘 생각해 보시게.”

“잘 생각하려고 기다려 달라는 겁니다.”

아사도, 동사도 무섭지만 객사도 무섭기는 마찬가지.

이제 면식이 생긴 사람을 따라 한평생 살아온 조선 땅을 떠나 이역만리로 향하는 것도 가벼이 결정할 일은 아니었다.

그 직후였다.

해변에서 간간이 오가던 부랑자들의 잡담이 점차 커져갔고, 고개 푹 숙인 채 고뇌하던 덕순은 소란의 원인을 찾아 주변을 살폈다.

잔잔하게 파도치는 바다 저 멀리 배 한 척이 다가오고 있었다.

배가 바다를 돌아다니는 거야, 그리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 배가 바다를 다니지 산을 다니겠나.

가도의 해적이 소탕된 뒤로는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배의 거대한 크기와 부랑자들 난생 처음 보는 양식이 여러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덩치는 어째서 저리도 거대하며, 돛은 산처럼 비대한가?

“저, 저건 무슨 배요?”

“아. 한동안 나라에서 신기하게 생긴 배를 만든다고 별 소문이 다 돌았는데. 저게 그 배인가 보구먼.”

“나라의 배라는…… 말이요?”

“저기서 우리에게 갑자기 화포라도 쏘지 않는다면 말이지. 흐흐.”

상인은 태평하게 농을 건넸으나, 배의 크기와 이질감에 위압당한 덕순은 정색했다.

상인의 짓궂은 농담은 실현되지 않았다.

배는 속도를 줄이며 해안에서 더욱 가까워졌다. 정확히는, 근처의 어촌으로 향하고 있었다.

부랑자들은 배가 위험하지 않다는 걸 깨닫자 호기심이 돌았는지 서성이거나 쉬는 걸 그치고 배를 쫓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이 우우 몰려가자 덕순도 바위에서 일어났다.

“잠깐, 저 배 좀 보고 오겠소.”

“그러시든지.”

상인은 걸터앉은 바위에서 앉아 등을 대고 눈을 감았다.

그 태평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덕순은 상인이 이미 세상의 많은 것을 구경하고 와서 이렇게 무심한 건지 고민하다가 이내 부질없음을 깨닫고 부랑자들을 쫓아갔다.

해안의 어촌은 어촌치고는 제법 규모가 있는 편이었다.

가도의 해적들이 난동을 피울 때는 여러 사람이 횡액을 맞아 잠시 퇴락하곤 했지만, 이후에는 사행로가 되어 활기를 되찾은 덕이었다.

부두는 구색을 갖추었고 그곳에 묶인 크고 작은 배들이 파도를 따라 출렁였으며, 집집마다 외벽에는 그물을 걸어놓았고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염소鹽所도 있었다.

그러나 이 어촌도 이형의 거선을 감당하기에는 벅찼다.

배가 부두로 다가오지 못하여, 대신 어촌 사람들이 배를 끌고 나가 사람과 화물을 받았으니까.

벌떼처럼 달려들었다가 속속들이 부두로 귀환하는 배에는 군사도 선원도 아닌 짐꾼들로 가득했다.

제각기 지게를 들고 있었으므로 달리 볼 여지가 없었다.

‘나라의 배라더니만 높으신 분은 안 보이고 일꾼들만 가득하네?’

더욱이 일꾼들은 제각기 동질감이 깊지 않은지, 곳곳에 저마다의 짐을 내려놓고 쉬었다.

이따금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논하는 자가 있었으나 그뿐.

딱히 소속이 같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중에서 몇몇 사람은, 잠깐의 휴식을 마치고 짐을 챙겨 흩어졌다. 이게 어인 일인가.

덕순은 부랑자들을 제치고 가까운 곳에서 쉬던 일꾼에게 다가갔다.

어차피 부랑하는 신세다. 철면피 깔고 뭐 좀 물어본다고 해서 밑질 게 있으랴.

“엉?”

“저기, 형장께서는 어디서 오는 길입니까?”

“한양에서.”

“저 배를 타고요?”

덕순이 뒤를 돌아보았다.

거대한 이형의 배가 망망대해에서 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냐?”

“예…….”

“나도 신기했다. 저런 게 잠기지 않고 바다를 건널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다만, 아주 미끄러지듯이 가더라.”

“나라의 배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반신반의하면서도 탔지.”

바다의 개척이 미진한 조선에서 배를 타는 건 일단 목숨을 거는 일로 여겼고, 연안을 벗어나는 건 미리 유서까지 써둬야 할 일로 여겼다.

오죽하면 제주도 부임이 정해진 관리들은 살고자 평생의 노력마저 저버리고 사직하거나 도망칠 정도.

하물며 배도 기이하게 생기지 않았나.

그러나, 왕가의 소유라는 사실에는 불안을 종식시키는 힘이 있었다.

정확히는 나라의 배가 아닌 왕의 배인 셈.

“한 번 타보고 싶으냐? 선장 바짓가랑이 붙들고 애원하면 허락해 줄지도 모르지. 흐흐.”

일꾼은 웃으며 덕순 너머로 턱짓했다.

덕순이 고개를 돌리니, 막 부두에 오르는 선비가 있었다.

“……?!”

무척이나 신기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머리는 붉고, 얼굴은 하얀데, 심지어 코는 누가 잡아 당겨놓은 것마냥 뾰족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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