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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19화 (219/380)

인조, 명군이 되다 219화

페르바스트도 벨테브레이처럼 돈과 명예가 좋았다.

헤이스버르츠처럼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는 것도 좋아했다.

단지 배가 더 좋았을 뿐.

그러나 페르바스트에게 조정이 해줄 건 없었다.

범선 항행에 필요한 기술은 전부 전수받았다. 남은 건 외부인에, 전직 사략선 선원이었다는 신뢰하기 힘든 출신뿐.

수군의 말단 장교쯤은 시켜줄 수 있었으나 그건 페르바스트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그런 페르바스트에게 내수사가 찾아왔다.

내수사는 팔도에 경작지를 소유했고, 전국적인 운송 역량을 축적해 왔으나 육운은 환경의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국토는 산간이 대부분에 도로는 미진했으며 물 건널 다리라곤 개울에 놓인 바위가 전부였으니까.

이때 나라에서 선혜법 확대로 수운이 조명받고, 태안반도를 우회할 수단으로 범선이 개발되자 내수사가 관심을 가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간 배와는 거리가 멀었던 내수사다.

이때 눈에 들어온 사람이 페르바스트였다.

내수사와 페르바스트는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했다.

“이런 깡촌까지 행차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페르바스트는 범선을 이끌고 평안도 철산부의 한 어촌을 방문했다.

여전한 바닷내음과 창백한 해안.

그 너머 녹음으로 이지러진 고산준벽高山峻壁.

조선의 일관적인 풍광은 마음에 들었지만, 때로는 너무할 정도로 야만적이었다.

“이토록 해안 길고 산 많은 나라에서 수운이 발달하지 않았다니.”

해안 한가운데 놓인 어촌만 하더라도 너무나 작고 소박했다.

그나마 일대에서 군항을 제하고 가장 큰 포구를 지녔다는 데도 이 지경이라니?

페르바스트 곁에서 승객인 선원이 물었다.

“평안도도, 철산부도 다 벽지에 속하는데 동네가 없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지요. 화란은 다릅니까?”

“다르지. 네덜란드에서는 혼자 사는 사람이라도 저것보단 멀쩡한 포구를 가지고 있을 거야!”

배를 좋아하긴 하지만, 승하선이 번거로운 건 별개의 문제였다.

고향에서는 연안 항해용에 불과한 체급인데도 입항이 불가한 건 너무하지 않은가?

나라의 항만 총책임자 비슷한 위치로 올라간 옛 사관이 열심히 일해야 할 이유다.

“선장님.”

배의 선원이 다가와 고했다.

“닻을 내렸고, 뭍으로 향할 쪽배도 준비되었습니다.”

선원의 보고에 페르바스트는 갑판을 서성이는 상인들 앞에서 손바닥을 쳤다.

짝짝!

이목이 모이자 페르바스트가 말했다.

“배가 커서 입항하지 못하니, 대신 선원들을 뭍으로 보내 사람들을 부르겠소!”

이에 몇몇 상인이 삮을 내어주게 생겼다며 불평했다.

“불만 있으면 짐 이고 바다에 뛰어내리시든지!”

이 나라의 항만시설이 후진 게 본인 잘못은 아니잖은가?

상인들과 그들의 화물을 옮겨주는 대가도, 온전히 페르바스트의 주머니에 들어온 것도 아니었다.

물주이자 상전인 왕이 시킨 대로 할 뿐.

페르바스트가 웅성거리는 소리를 무시하고서 손짓하자 선원 몇 명이 쪽배에 옮겨타고 뭍으로 향했다.

곧 용돈 벌 요량으로 쪽배 가진 사람들이 우우 몰려들었다.

상인들은 갑판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배 주인들과 삯을 협상했고, 왈가왈부 떠든 다음에는 호들갑을 떨며 짐을 옮겼다.

범선과 쪽배의 체급 차이가 큰 만큼 작업은 매우 천천히 이루어졌다.

쌀섬은 겨우 하나둘씩만 쪽배로 옮겨졌고, 쪽배들은 몇 번이나 부두와 범선 사이를 오가며 짐과 사람을 실어날랐다.

작업이 워낙 위태롭고 번잡하다 보니 사고도 벌어졌다.

풍덩!

시끄러운 물소리와 함께 곳곳에서 혀 차는 소리와 ‘아이고!’ 하는 탄식이 이어졌다.

그리고 물장구 소리가 그친 다음에는, 처절한 ‘아이고!’가 뒤따랐다.

“내 전 재산!”

여러 뱃사람이 바다로 뛰어들어 엎어진 배를 뒤집고, 물에 잠긴 양곡도 꺼냈으나 상인의 통곡은 그치지 않았다.

“동네에서 잔치 벌어지겠습니다.”

구경하던 페르바스트 곁에서 선원이 촌평했다.

양곡이 목욕을 해버리면 며칠 이내에 상해 쓰지 못하게 된다. 당연히 가치는 폭락.

오열하던 상인은 빠뜨린 양곡이 진짜 전 재산은 아니었는지, 범선과 부두를 몇 번 더 오갔다.

그리고는 운반을 도와준 사공에게 무어라 말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사공이 희희낙락하여 바닷물 줄줄 흘리는 양곡을 등에 업었으니까. 그가 주변을 향해 무어라 외치자, 사람들이 환호했다. 정말로 잔치라도 여는 걸까.

“조선 사람들이 마음씨는 참 좋아.”

페르바스트가 평하자, 선원이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배가 뒤집어지게 무섭게 사람들이 다 달려들어서 도와주고, 물에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된 양곡도 대신 건져주었으니 이만하면 천사들이지.”

“화란은 다릅니까?”

“거기 같았으면 대부분은 신경 안 써주지.”

남의 배 뒤집는 것을 제 옷 적셔가며 도와줄 사람도 흔치 않겠으나, 물 먹고 잠겨 무거워진 양곡을 꺼내주는 일은 없을 터였다.

상인 역시 굳이 건지려 하지는 않았겠지만.

상품을 염가에 처분하여 시세를 낮추느니, 그냥 물고기밥으로 버려두고 남은 양곡을 비싸게 팔아먹는 게 더 이익이기 때문이다.

식량이 아깝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상인으로서 목적을 달성하는 것만 생각할 뿐.

“거긴 인간들이 정이 없어.”

페르바스트는 난간을 밀어내며 물러섰다.

“나도 내려가야겠다. 밥이나 얻어먹으면서 쉬어야겠어.”

* * *

페르바스트가 쪽배를 타고 부두로 건너오자, 어촌의 마른 얼굴들이 일제히 페르바스트를 쳐다봤다.

“그래, 그래. 코쟁이는 처음 보냐?”

가는 곳마다 당해보는 취급이라 이제는 대수롭지도 않게 여기는 페르바스트였다.

그런다고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말이 통함을 알게 되면 도리어 더 잘 대해주려고 했다.

이상하게 생긴 놈들은 노예로 부려도 돼, 하는 코쟁이들 세상보다야 훨씬 나은 셈.

페르바스트는 이목에 개의치 않고 태연히 부두에 앉아 두 다리를 바다에 담갔다.

그 모습에 쪽배에 동행한 선원이 물었다.

“기껏 바다에서 나오셨는데 또 바다로 들어가시는 겁니까?”

“데비 존스라는 존재를 아나?”

“모릅니다마는…….”

“내가 가르쳐주지.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에 바다를 주름잡았던 대해적이 있었어. 그는 각지를 약탈하며 산더미 같은 부를 쌓았지만, 늙어가고 있었지.”

“죽지 않을 방법을 찾았겠군요.”

“흠, 눈치가 너무 좋은데. 실은 알고 있는 거 아닌가?”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곱게 죽기 싫어하는 건 좀 뻔한 이야기 아닙니까.”

진시황부터 그러했으니까.

“그건 그렇지. 하지만, 대부분은 때가 되면 죽을 수밖에 없었어. 그러나 이 데비 존스라는 인물은…… 찾아낸 거야.”

“오?”

“그는 악마와 계약했고, 영생을 얻었지. 대신 그 대가로 바다를 떠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네. 그래서 데비 존스는 그 저주를 풀기 위해 바다에서 죽은 이들의 영혼과 재산을 자신의 보물상자에 모으고 있지. ……악마에게 줄 대가로 말이야.”

페르바스트는 손가락을 모으고서 우우우, 겁을 주려는 듯한 소리를 냈으나 선원은 그저 의아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악마는 또 뭡니까?”

“……신경 쓰지 말게. 아주 나쁜 놈인데, 있어.”

조선은 프레스터 존의 왕국은 아닌지라, 악마의 존재를 제대로 설명하려다간 부연이 길어질 게 뻔했다.

“음.”

“나는 자네가 나보고 데비 존스냐고 물어볼 줄 알았는데 말이야.”

페르바스트는 실망감 가득한 어조로 바다에 잠긴 자신의 두 다리를 보여주었다.

“데비 존스신가요?”

“아니.”

흥이 깨진 페르바스트는 질린 얼굴로 휘휘 손을 저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그대로 부두에 드러누웠다. 머리카락이 부두 끄트머리에서 아래로 흘러내렸다.

이렇게나 폭 좁은 부두라니.

“내가 이 마을의 대표였다면 이 후져빠진 부두부터 뜯어고쳤을 거야.”

“저기, 선장님.”

“왜?”

“이렇게 길을 막으시면 제가 어떻게 지나갑니까?”

“그냥 지나가면 되지.”

“이국에서 오셔서 모르시나 본데, 사람 위로 건너가는 건 결례로 봅니다.”

“내가 몰라서 다행이로군.”

“이제 알지 않으셨습니까?”

페르바스트는 더 상대해주지 않겠다는 뜻으로 팔로 눈을 가렸다.

그러자 몸 위로 무언가가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바다에 들어갔다가 나오기는 싫었던 모양이었다.

“그럴 줄 알았어.”

페르바스트는 실소하고는 그대로 자신만의 상념에 빠졌다.

그의 고용주이자 물주이며 상전인 이 나라의 왕은, 어째서 상인들을 이 먼 벽지까지 싼값에 데려다주기를 바란 걸까?

요식에 불과한 운송료 이상의 이익을 취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나라의 수운업 수준이 밑바닥이니 독점하기도 좋다.

‘나 같았으면 수운회사와 곡물회사를 세워서 시장을 독점했을 텐데.’

그러면 더 막강한 부와 권력을 누리게 되지 않을까.

공권력과 재력을 모두 겸비한 왕실 회사의 시장독점은 시장 착취나 마찬가지이나, 그의 고향에서는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응?”

페르바스트는 문득 자신에게 드리워진 존재감을 느꼈다.

만담을 나눴던 선원인가, 싶었으나 팔을 치워보니 생면부지인 사내였다.

면식 하나 없는 인간이 잔뜩 긴장한 채로 내려다보고 있었으므로 페르바스트는 곧장 몸을 일으켜세웠다.

“누구지?”

“……더, 덕순이라고 합니다.”

“확실히 내 선원은 아니로군.”

페르바스트는 귀를 후비다가 바닷물을 빨아먹어 창백해진 다리로 딛고 일어섰다.

“뭐지?”

“저 배가 나랏님 배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만.”

“나랏님 배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태워준 겁니까…… 요?”

“그래.”

덕순이라 소개한 사내는 연신 눈알을 굴려댔다.

“장사꾼이라면 어디든지 태워주는 겁니까?”

“네가 배를 전세낸다면 그렇게 되겠지만, 보통은 일정에 따라서 움직이지.”

“비사성도 일정에 포함됩니까요?”

“정기 운항은 아니지만, 그래. 달포쯤 뒤에 들를 예정이다.”

웃선에서는 군사들이 비사성으로 이동, 그리고 비사성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사상자의 발생을 우려하고 있었다.

페르바스트가 비사성을 방문하는 건 그 때문.

전초기지 건설에 필요한 물자를 나를 겸, 돌아오면서 사상자를 수송하기 위해서였다.

페르바스트는 그게 초면의 방문객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었다.

본인이 비사성에 들를 예정일까?

그렇다면 사상자가 되지 않고서야 자신의 배를 타고 귀국하게 될 가능성은 낮았는데, 부연은 하지 않기로 했다.

절대적인 건 아닌지라.

사상자가 적게 발생해 거의 빈 배로 돌아올 것 같으면 외부인이라도 태우는 게 이득이다. 선장이라 그 정도 자율성은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요!”

사내는 대답에 만족했는지 연신 허리를 숙이고는 도망치듯 물러났다.

뭐가 그렇게 기쁜지, 페르바스트는 알 수 없었다.

알 바도 아니었다.

“……메.”

페르바스트는 무슨 상관이겠냐는 뜻으로 혓바닥 한 반 내보이고는 다시 부두에 드러누웠다.

범선 쪽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포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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