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20화
평안도 의주부.
이곳에 군사들이 모인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으나,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과거에는 요동에서 건너오는 적을 막기 위해 군사들이 의주에 모였다면, 이번에는 반대였다.
조선의 확장을 원하는 여론에 부응하여, 그러한 목소리를 내는 자들을 중심으로 꾸려진 군대가 요동반도의 끄트머리인 비사성을 확보하기 위하고자 의주에 모였다.
다른 건 그뿐만은 아니었다.
조선의 강토를 수비하기 위해 북방군이 진주했을 때는 군사들의 사기가 충천하였으나, 지금은 다소 미묘했으니까.
대부분은 식자로서의 신분을 과시했던 자들이다.
안전한 후방에 남아있을 것을 전제하고서 불태웠던 열의는, 막상 환경이 달라지자 십중팔구는 반전되어 잿불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일부는 진심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조선이 맞이한 황금기의 후광을 지평선 너머까지 펼치고자 했다.
그러나 국가가 비원을 대신 들어주지 않음을 깨달은 십중팔구들 사이에서, 그들이 공공연히 야욕을 설파하는 이는 없었다.
신참들의 이러한 광경과 분위기는 북방군의 고참 자원병들에게는 제법 볼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볼거리를 부담없이 즐겨도 될 정도로 원정군의 실태가 그리 최악이지는 않았다.
활 쏘는 것이 기술만 아닌 기예로도 인정받고, 많은 선비가 치열한 문과 대신 거듭된 승전으로 조명받은 무과 또한 준비해왔다.
모두가 좌절하지는 않았듯, 마찬가지로 모두가 백면서생白面書生은 아니었던 셈이었다.
그러니 원정군이 의주에 장기간 체류한 목적은 출전의 심리적 부담감을 덜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이들이 가진 잠재력을 실체로 개화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군사들의 체력은 확실하게 증대되었군.”
원정군의 원수, 이완이 성벽에서 연병장을 내려다보며 평했다.
그곳에서 신병들은 고참들과 오와 열을 맞춰 구보하고 있었다.
과거 고참병들이 뒤에서 똥꼬 쫓아다니며 발길질 갈겨대던 시절을 생각하면 경천동지할 진전이다.
‘그건 필요했던 과정이었지만.’
막 입군한 식자들은 한때 피역까지 해야 했던 북방군 고참병들을 존중하지 않았다.
신분도 다르고, 학문의 성취와 가세의 흥망도 다르거늘 어찌 배운 사람이 칼잡이들 따위에게 고개를 숙이겠냐면서 말이다.
이완은 그러한 군율의 이반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것이 생부보다 더 가까웠던 양부, 충무공이 전장에서 일관적으로 보여주었던 모습이며 이완에게 가르쳐준 것이기도 했다.
군율을 존중하는 자는 똑같이 존중했고, 군율을 존중하지 않는 자는 똑같이 존중해주지 않았다.
기강을 세우는 데 필요한 건 오직 그뿐이었다.
이완은 눈을 감고 고개를 들었다.
볕이 더는 따갑지 않았다. 의주의 분위기는 훈훈했다. 가을을 앞두고 수확이 다가온 덕이었다.
‘떠날 때가 되었구나.’
군사의 조련은 완성에 다다랐다. 이 이상 정예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실전이 수반되어야 했다.
과연 그 실전을 잘 겪어낼 수 있을까?
군대의 사기는 모름지기 첫 전투가 결정하는 법이다.
홍태주가 굴복하면서 요동의 가장 큰 적은 사라졌으나, 그 땅에는 대신 도적과 마적이 들고일어났으며 이들은 관군마저 겁내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비사성이 위치한 요동은 한때 그러한 도적과 군벌들이 가장 창궐했던 험지다.
‘할 수 있을까?’
이완은 고개를 저어 의문을 털어버렸다.
‘아니, 해낼 뿐이다.’
상념을 마친 이완은 성벽의 여장을 붙든 채 다시 연병장을 내려보았다.
그곳에서는 원수의 존재를 깨달은 군관와 군사들이 거듭 눈을 힐끗대며 이완을 의식하고 있었다.
마치 수방사가 한성 앞에서 격전을 치르기 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 너희들에게는 실전이 필요한 게 맞다.”
* * *
원정군이 출전을 결의한 길일이 훌쩍 다가왔다.
이들이 떠난다는 소식에, 군대가 장기간 의주를 체류하는 동안 맺어진 인연들이 출성하는 군사를 배웅하고자 거리로 모였다.
백마를 탄 원수 이완을 선두로, 긴장한 얼굴의 원정군이 차례대로 대로를 질러나가는 모습에 호사가들이 한 마디씩 꺼냈다.
“군사들이 기어코 강 너머로 떠나는구나.”
“지금 요동 상황이 아주 혼란하다던데 괜찮을까?”
“에이, 당연히 괜찮지. 우리 군사들이 어디 보통 군사들인가? 홍적마저 무릎 꿇린 군사여!”
“갸들이랑 쟈들이랑은 다르지.”
“뭐가 다른데? 저번에도 봤던 사람들이 또 보이던데.”
“봤던 얼굴만 보이고, 새로 보이는 얼굴은 안 보이던가? 그네들은 십중팔구가 양반이여. 양반.”
“양반이 군역을 지나?”
“내가 들은 소문이 있는데…….”
걱정과 우려, 자신과 믿음.
잡담이 교차하는 동안 원정군은 꽁무니까지 마저 의주성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눈치만 보던 상인들이 뒤따랐다.
* * *
상인들이 군대를 쫓는 건, 세계적으로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병사는 팔기 전까지는 짐에 불과한 전리품을 빠르게 처분할 수 있고 다양한 편의를 제공받으며, 군대는 사기와 보급의 일정 부분을 외부를 통해 충당하며, 상인은 편의의 대가로 많은 이익을 거두게 되니까.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존하는 셈이다.
조선은 이런 일반성에서 다소 떨어져 있었다.
일단 전쟁을 자주, 오래 하는 나라도 아닐뿐더러 상업이 미진하여 군대의 수요를 충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임란 때는 왜의 상인들이 조선 땅에 들어온 명군을 상대로 대신 장사했을 정도다.
그러니 상인이 원정군을 뒤따르는 건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다만 이들이 군대와 동행하는 이유는 여느 주보酒保와 달랐다.
위험만큼 이익이 뒤따르는 요동으로 건너가고 싶으면서도, 횡행하는 도적과 마적의 위협에서는 회피하고자 군대에 빌붙은 것이다.
개중에는 상계에 투신한 덕순도 있었다.
그는 자신을 일꾼으로 고용한 상인 형장과 함께 나룻배에 올랐다.
사공은 키로 뭍을 밀어내며 배를 띄웠고, 덕순은 수면을 따라 휘청이는 나룻배 구석에 앉아 눈을 질끈 감았다.
“왜, 두렵나?”
“…….”
“눈 뜨고 주변을 보게.”
“…….”
“고작 눈 뜬다고 죽지는 않아.”
덕순은 천천히 실눈을 떴다.
사공은 바로 옆에서 관심도 없다는 듯 키만 움직였고, 맞은편에서는 상인 형장이 얄궂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주변에는 상인으로 보이는 일행들이 저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중이었다.
“군대는요?”
“벌써 저만치 가버렸지.”
원정군은 의주에서 미리 징발해둔 배를 타고 순식간에 압록강을 건났다.
그동안 상인들은 군대 앞에서 국경 넘는 모습을 보일 수 없어 원정군의 도강을 지켜봐야만 했다.
눈 가리고 아웅이지만, 대놓고 위법을 저지르는 건 위험하니까.
그리고 군대가 사라진 뒤에 강을 건너기 시작했으므로 당장은 처진 상태였다.
“…….”
덕순은 질색하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이역만리 오랑캐 땅에서 지켜줄 군대가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 도적들 앞에서 알몸이 된 기분이었다.
“서두를 거 없어. 금방 쫓아가면 되니까. 설마 둘이서 움직이는데 군대보다 느릴까?”
상인 형장은 손가락 끝으로 압록강의 물결을 긁었다.
그 태평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덕순도 긴장감이 가셨다.
나룻배는 곧 맞은편 강변에 도달했고, 사공은 이미 삯을 치렀음에도 짐 옮기는 것까지 도와주었다.
“거, 알고는 있겠지만 위험하니까 몸 간수 잘하시오.”
“아이구. 감사합니다. 무탈하십시오.”
상인 형장은 웃으며 돌아가는 사공에게 인사한 뒤, 곧장 군대가 만들어낸 길을 뒤쫓았다.
그동안 사람을 거의 타지 않은 해변과 곧장 이어지는 작은 숲은 군대가 지나간 것만으로 명확한 흔적이 남았다.
“덕분에 길은 안 잃겠습니다.”
덕순의 말에 상인 형장이 입술을 검지로 가렸다.
동그란 두 눈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멈춰선 채 대뜸 길을 막아서자, 뒤따르던 다른 일행의 상인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모여들었다.
“뭐, 무슨 일이라도 있소?”
그 순간이었다.
쉭!
하는 바람소리가 연달아 나더니 조잡한 화살이 푹푹 흙바닥을 파고들었다.
상인들은 곧바로 비명을 지르며 나무가 있는 쪽으로 흩어졌고, 동시에 저마다의 무장을 꺼내 들었다.
국내를 유람하는 보부상들도 무장을 하고 다녔다.
험지인 요동을 방문하는 밀수상들에게 무장이 없을 리 없었다.
“정신 차려!”
덕순을 멱살 끌고 나무 뒤로 데려온 상인 형장이 외쳤다. 한 손에는 활을 든 채였다.
“어, 어어…….”
습격에 정신이 나간 덕순이 멍청한 소리를 냈다. 위험은 분명 각오했다. 하지만 강을 넘어오자마자 이 꼴일 줄은 몰랐다.
짝!
찰진 소리와 함께 덕순의 뺨이 돌아갔다.
“정신 놓고 있으면 누가 살려주냐?”
“……아, 아니요.”
“이상한 놈이 달려들면 그대로 찔러버려.”
상인 형장은 덕순의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손에 들려주었다.
그리고 손아귀를 칼 손잡이에 감싸 쥐게 한 뒤, 배에 딱 붙였다.
“눈 딱 감고. 알았지?”
“……예.”
덕순이 숨을 헐떡이는 동안, 상인 형장은 덕순의 어깨를 툭 때린 뒤 곧장 화살을 빼 들고 몸을 돌렸다.
활시위는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튕겼다.
꽤액 숲을 울리던 고성 중 하나가 단숨에 멎었다. 멎었고, 또 멎었다. 철푸덕 쏟아지면서 몸뚱이가 낙엽을 바스러뜨리고 흙바닥을 뒹구는 소리가 이어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도 금속성 파열음이 이어졌다.
습격자들은 알아듣지 못할 이국의 언어로 지껄여댔고, 상인 일행은 욕지거리와 고함을 내질렀다. 틈틈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비명과 신음이 섞였다.
전투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숲을 짓밟으며 잡초와 관목을 바스러뜨린 길 저 너머에서, 지축을 박차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고함이 울렸다.
“누가 대조선 군사들의 배후에서 소란을 피우느냐!”
갈기 휘날리며 달려오는 백마는 본 적 있는 사람들이라면 몰라볼 수가 없었다.
그 뒤를 따라 십수 기의 기마가 따르며, 원수와 함께 화살을 쏘았는데 도적들의 조악한 활질과는 정확도가 달랐다.
남루하고 지저분한 행색에 조선식 상투마저 없는 도적들은 분간하기 쉬운 표적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 소나기처럼 쏟아진 화살에 도적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끄아아악!”
“??!”
“??!”
표적으로 후순위에 놓이는 도적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운이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선두에서 질주하던 기세 그대로 달려든 원수가 환도로 단숨에 목을 날려버렸으니까.
몸뚱이가 쓰러지는 동안 기겁한 수급이 허공을 날았다. 원수는 핏물이 비산하는 머리를 확인사살이라도 하듯 허공에서 베어 면상을 날려버린 뒤, 그대로 기수를 잡아당겼다.
말이 히히힝 울며 앞다리를 치켜들었고 원수의 고함은 숲을 울렸다.
“불한당! 어차피 쳐죽여야 할 놈들이니 다 죽여라!”
두 발을 번쩍 든 채로 제자리에서 방향을 튼 백마는 곧 다른 기병들과 함께 도적들이 뛰쳐간 곳으로 질주했다.
요란하게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 사이사이로 비명들이 틈틈이 이어졌다.
소란은 멀어지는 만큼 빠르게 잦아들어, 박력에 혼이 나간 상인들은 마치 도적들의 습격이 개꿈처럼 느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