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21화
“사람…… 인가?”
날래게 정확도 있는 화살을 쏘는 건, 조선의 무관이라면 보통 가진 능력이다.
말 타는 것도 마찬가지다.
말과 함께 살아가는 사나운 북방의 야만족들을 상대하며 그들의 수법을 체득한 조선의 기마술은, 마상재馬上才라는 기예에 달할 정도로 상당하다.
환도를 단숨에 연속으로 휘두르는 것도, 연습을 많이 하고 손재간이 빠르다면 충분히 해낼 법하다.
환도는 그리 무거운 칼이 아니며, 반복 훈련된 사람의 신체는 놀라운 경지에 다다르니까.
그러나 세 가지를 동시에 해낸다면, 문제는 조금 달라진다.
구국의 영웅 충무공의 조카이자 양자라면 이 정도 해내는 건 당연한 걸까?
“왜 같은 편인데도 지릴 것 같냐.”
“도적들은 지렸을걸.”
“……이놈들, 진짜로 지렸는데.”
“그걸 굳이 확인해?”
짧은 잡설은 부상자들의 치료와 함께 그쳤다.
도적들이 사람 목숨은 우습게 알았어도 사람 목숨을 앗는 데 전문가인 건 아니었다.
다행히 여러 상인이 다쳤으나 목숨을 잃거나 곧 그리될 정도로 치명상을 입은 자는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상행이 힘들 정도로 다친 사람은 있었다.
“이런 제기랄! 군대 따라가서 쉽게 장사할 줄 알았더니만 여기서 끝이라고?”
오른팔이 제법 크게 다친 상인이 호소했다.
그는 자신이 다친 것보다도, 좌절된 계획이 더 고통스러운 듯했다.
아예 바로 맞은편에 보이는 의주를 향해서 멀쩡한 팔을 들어 보이기까지 했으니.
“사람 목숨이라도 건졌으니 다행이지. 장사는 또 하면 그만이니, 지금은 돌아가는 게 좋겠네.”
“짐은…… 제기랄! 짐은 또 어디 갔어?”
애초에 상인들의 화물을 노리고 덤벼든 도적들이었다.
습격으로 여러 사람이 놀라 짐을 버리고 피신하는 동안, 도적들이 들고 가버린 것이다.
몸은 다치고 상행은 좌절되었으며 상품마저 잃어버린 상인은 그제야 눈물을 보였다.
“씨벌.”
그 모습에 여러 상인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강을 건너기 전까지는 제각기 따로 놀던 상인이었으나 습격당한 뒤로는 함께 죽다 살아남은 동료라는 동질감이 생겼다.
꼭 그러한 감정은 제외하더라도, 처지가 곤란해진 사람을 보면 난처해하는 건 사람이라면 지극히 당연한 반응.
그렇다고 서둘러 쫓아가야 할 군대를 남겨두고 낙오한 동료를 도와주기도 곤란했다.
“내가 도와주겠네.”
덕순의 상인 형장이었다.
그는 나무에 몸을 붙인 채 활을 쏘느라 묻은 부스러기를 대수롭지 않게 털어냈다.
“오.”
“참말인가?”
“지금은 좀 늦어질지 몰라도, 나중에는 배로 돌려받을 걸세.”
“그럼.”
어쩌지 못하고 주저하던 상인들이 제각기 한숨 돌리며 형장의 홍복을 기원했다.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도적들이 아직 남아 있으면 어쩌려고? 혼자 가면 위험하네.”
“원수 어르신께서 다 죽이겠다 천명하시고 쫓아갔는데, 설마 도적이 남아 있어서 횡행할까. 걱정 마시구려.”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지 않소?”
“내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소이다.”
상인 형장은 실소하며 활을 슬쩍 들어 보였다.
난전 도중, 원수가 등장하기 전에 화살의 도움을 받은 적 있던 상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둘러들 쫓아가시오. 또 고생하지 마시고.”
“아유. 그럼. 또 보세, 성품 좋은 형장.”
“또 봅시다!”
“다시 보면 술이나 한잔하고!”
상인들은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어준 뒤, 곧 헉헉거리며 군대가 지나간 길을 쫓아갔다.
“가자. 덕수나.”
“……진짜로 도적들이 숨어 있던 숲에 들어간다고요?”
“그럼 진짜로 들어가지, 거짓으로 들어가랴?”
“…….”
“너는 내가 일꾼으로 고용했으니 혼자 내뺄 생각일랑 말고 따라와라. 짐 옮기면서 혹시 나타날지 모를 도적을 어떻게 혼자서 상대하겠냐.”
내키지 않았던 덕순은 뒤통수를 벅벅 긁다가, 눈치가 느껴져 다친 사내를 보았다.
상처는 소매를 찢어 일단 지혈하였으나 어쩌지 못하고 그저 흘낏흘낏 의식할 따름이었다.
“하아…….”
덕순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답했다.
“알겠습니다. 갑시다.”
“덕수니가 그래도 사람은 됐구나.”
상인 형장은 자신의 짐을 다친 상인에게 맡겨둔 뒤, 도적들이 도망친 쪽으로 향했다.
덕순은 그 뒤를 쫓으면서 상인들을 제하고 이어진 전투의 흔적을 마주했다.
말이 질주하는 동안 부딪혀 찌그러지고 부딪힌 관목과 나뭇가지들.
그리고 화살이 박히고 사지가 날아간 채 곳곳에 쓰러진 도적들의 시체까지.
본래 비위가 좋지 않았고 전투의 흥분마저 가진 덕순은 차오르는 욕지기를 애써 참아야했다.
“군대를 못 쫓아가면 또 도적들 상대하게 되는 거 아닙니까? 죽을 각오를 또 할 수는 없으니, 다친 사람이랑 같이 의주로 가야 할 텐데 그럼 우리 장사는 그대로 종치는 꼴이고요.”
“덕수나.”
“녜.”
“원래 장사는 이문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처지 곤란해진 사람을 도와주면 사람을 남기는 거라 봐도 되지 않겠느냐? 이만하면 장사는 성공한 셈이다.”
형장의 태평한 훈계에 덕순은 입술이 튀어나왔다.
“사람을 남기는 건 좋은데, 장사를 날리면 우리는 뭘 먹고 살죠?”
“뭐든 먹고는 살겠지.”
“그건 삶의 태도에 너무 불성실한 게 아닐까요.”
“그럼 너는 실성한 거냐? 얼마 전까지 해초나 주워먹고 살던 놈이 무슨 소리야.”
“이젠 부랑자가 아니고, 형장 시중을 한 번만 들고 말 생각은 없으니까 대신 걱정해주는 거죠. 이게 실성입니까? 성실이지.”
만담을 나누던 두 사람은, 곧 짐을 놓친 채 쓰러진 시체를 발견했다.
“멀리도 왔다.”
상인 형장은 발끝으로 시체를 뒤집어 다른 짐은 없는지 확인하고는, 하나뿐인 등짐을 가리켰다.
“얼마나 성실한지 한 번 보자꾸나.”
덕순이 짐을 등진 채 무릎을 꿇었고, 상인 형장이 짐을 들어 지게에 올려주었다.
덕순은 몇 번 어깨를 들썩이며 지게와 짐의 위치를 잡고는 먼저 움직였다.
“아휴, 이 무거운 걸 지고서 잘도 여기까지 도망쳤네. 빌어먹을 도적놈들.”
짐 때문에 허리를 숙이게 된 덕순은 주변을 형장이 잘 경계해주기를 바라면서 나아갔다.
원수 어르신이 정말로 도적들을 다 죽여버린 걸까.
상처 입은 상인에게 돌아오는 동안 변고는 없었다.
어쩌면, 몇몇 도적은 살아 도망쳤으나 몰살에 준하는 학살의 현장에 금세 다시 발 붙일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르리라.
“아이고, 내 짐!”
다친 상인은 명백하게 기쁨의 눈물을 맺으며 덕순과 형장을 끌어안았다.
“덕분에 살았소이다, 고맙소. 고맙소.”
“우리가 짐을 의주까지 옮겨다줄 수는 없소이다?”
“아유. 짐을 가져다준 것만으로도 망극할 일인데 무슨 걱정이요. 고맙소. 쓸데없는 걱정일랑 말고 두 분은 일 보시오. 군대가 멀리 가지는 않았을 거요.”
“성실하게 쫓아가야지. 자, 짐은 저 강변까지만 옮겨드리겠소.”
“아유우…….”
다친 상인은 난처해하면서도, 마다할 수 없었던지라 고이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상인 형장과 덕순이 길로 향하자 한참 왼손을 흔들다가, 사공을 부르기 위해 몸을 돌려 그대로 계속 손을 흔들었다.
“이제야 좀 가겠다야.”
상인 형장의 탄식에 덕순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뭐, 보고 있으면 못 갈 데라도 있습니까?”
뻥 뚫린 게 길이고 또 도적이 나타나지만 않는다면 저지할 사람도 없거늘.
상인 형장은 대답에 앞서 씨익 웃었다.
* * *
‘못 할 짓이지. 나라를 생각하면.’
호조판서 김신국은 식량난의 심화를 우려했고, 나는 이를 타개할 방법 세 개를 떠올렸다.
가장 먼저 떠올렸던 방법은 정석적인 구황이었다.
가난한 조정의 예산에 내수사 재산을 더하여 평안도 일대에 양곡을 나눠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기금 운용은 무척 쉽게 허비된다.
왕과 조정이 각 고을마다 누가 얼마나 굶주리는지 직접 알아낼 방법은 없는 만큼, 수령과 아전들에게 기금 집행에 일방적인 자율성이 부과되기 때문이다.
구황미를 건전하고 합당하게 분배하는 건 번거롭고 귀찮은 일인 데 반하여 부패를 저지르는 데는 16차선 고속도로가 뚫리는 셈.
비효율적으로 자금을 낭비하기엔 다들 호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았다.
조정은 제도를 개혁하였으나 순차적으로 도입하는 중이며, 또 이는 획기적인 세입을 창출하는 개혁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를 확대 시행할 목적으로 황해도에서는 기반시설에 대대적인 재투자가 이뤄지는 중이었다.
평안도에서 빠르게 가용 가능한 식량은 원정군의 군량이라는 점도 한목했다.
그걸 세간에 풀어버리면 군사들은 무얼 먹나?
곤란한 사정은 내수사도 마찬가지였다.
나라의 수만 냥 금을 웃돈 주고 매입하여 화폐제도의 초석으로 삼는 한편, 조정의 예산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면서도 범선 수 척을 건조했다.
남은 자금은 있으나 이는 비상용.
평안도의 식량난이 비상이 아니라면 무엇이 비상이겠냐마는 추수 전에 비상이 한 번만 걸린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대안을 강구하기 전에 비상금부터 비효율적으로 허비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그래서 떠올린 대안이 위기의 역이용이었다.
내수사의 비상금과 새로 건조된 범선을 이용해 영세 상인들을 신속하게 제치고 평안도의 식량 수요를 독점하는 것이다.
위험부담 없이 막대한 이윤을 창출할 보증수표였다.
그러나 이는 밑천을 양곡으로 바꾸어 바리바리 평안도로 향했을 상인들을 짓밟는 셈이다.
상업을 키울 생각을 하면서 동시에 시장을 독점하겠다는 건 이율배반이었다.
‘게다가 백성들의 고충을 이용해 이윤을 노린다는 게…….’
수요를 충족시켜주는 것과 위기를 이용하는 건 다르다.
그리고 왕이라는 위치는 백성들의 위기를 이용해 장사하라고 있는 게 아니다.
나라를 생각하면 못 할 짓이라 여긴 이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떠올린 방법이 참으로 적절했다.
평안도의 식량난을 신속하게 진화하면서도 비싼 돈 들여 건조한 범선이 백성들에게도 유용함을 널리 알릴 방법.
‘……나는 천재인가?’
곧장 실행했다.
* * *
한윤이 대행수로 이끄는 조선유상은 비밀조직 아닌 비밀조직으로 반투명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한윤을 위시하여 무관 출신들이 간부진을 형성에 첩보전에 임하였으나, 대외적으로는 조선유상에 몸담은 밀수꾼들이 나무를 가리는 숲이 되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유상은 이러한 이점을 백분 활용하여 요동 각지에 눈과 귀를 퍼뜨리면서도, 동시에 활동자금을 자체적으로 조달한다는 일석이조의 특혜를 누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조선유상은 기로에 섰다.
조정에서 비사성을 확보하고 일대에 치안을 구성할 요량으로 원정군을 파견한 것이다.
지옥 같았던 요동 땅에 안정적인 거래 장소가 생긴다는 건, 위험을 이윤으로 치환하는 밀수 조직에 있어선 치명적인 변화였다.
더욱이 법망 밖의 존재인 밀수꾼이 비사성에서 상업 활동을 하기에는 제약이 따를 터.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눈치 볼 일이 늘어난다는 것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또한, 밀수꾼들에 안전한 상행 및 활동이 가능한 도피처가 생겨남으로써 조선유상에 의탁하는 조직원 수 또한 축소할 여지가 컸다.
이러한 때 조선유상의 수뇌부가 왕, 예조와 의주부의 속하로 예정된 요동의 변화를 미리 안내받은 건 다행이라기보단 당연한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대행수 한윤은 다가오는 파도를 그저 넋 놓고 맞이할 생각이 없었다.
덕순의 상인 형장이 그를 조선유상으로 데려온 이유였다.
“덕순아.”
“……여긴 어딥니까?”
“조선유상이다.”
“조, 조선유상이라면…… 악명 높은 밀수꾼 집단!”
“내 시중 한 번만 거들고 말 생각은 없다고 그랬지? 다행이구나야, 이제 배 주릴 걱정도 없고!”
싹수있는 녀석들로 조직원을 미리 충원해 놓겠다.
대행수 한윤의 대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