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22화
선선한 바람 나부끼는 서궐 내의원 지붕 아래.
“허어…….”
어의 최득룡崔得龍은 새로 엮어 빳빳한 새 책을 넘기며 장탄식을 연발했다.
좌우의 다른 두 어의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집중하기는 마찬가지.
잠시간 책을 정독한 최득룡은 감탄한 얼굴로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동의보감이 편찬된 이래 더 놀라운 의서는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아니었습니다.”
“과찬을 하십니다.”
“과찬이 아니옵니다.”
다른 어의가 책을 뺏어가거나 말거나 최득룡은 발언을 이어갔다.
“그동안 의서들은 약재가 어디에 어떻게 효험이 있고, 질환마다 어떤 처방을 하는지만 알려줄 뿐 처방의 결과를 구체적으로 알려주지는 않았습니다.”
병을 낫게 했다면 그만 아닌가, 라는 식이다.
의서를 집필할 정도로 오래 의학을 공부해온 의원이라면 충분히 가질 법한 자신감이다.
그러나 세자빈의 산후조리를 돕겠다는 이유로 의학을 연구하게 된 세자다.
스승에게서 직접 배우기보단 사람의 건강과 직결되는 일을 하는 많은 이들에게서 조언을 받았으며, 이는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기에 검증을 거듭했다.
세자가 엮어낸 의서는 그 결과물이었다.
기존의 의서를 답습하는 대신 숙련된 종사자들의 검증된 방식을 취합하면서도 이를 거듭 검증함으로써 부족한 전문성을 보강했다.
처방 및 처치한 환자들의 성별과 나이, 용태는 어떠했는가.
총 몇 명의 환자에게 이러한 처방 및 처치를 내렸고 결과는 어떻게 갈렸는가.
처방 및 처치의 신뢰도가 의심된다면 이유는 무엇이고, 처방 및 처치가 유효한 조건은 무엇인가.
사례와 통계까지 집대성한 세자의 의서는 기존의 의서들보다 한 단계 너머에 있었다.
과학적 방법론의 반영이야말로, 관습과 학문을 나누는 경계선이었으니까.
“아직 많이 미진합니다. 어의들께서 의서의 첨삭을 지도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도라니요.”
세자의 말에 최득룡이 멋쩍게 웃었다.
“저하께서 엮으신 의서는 저희들도 배워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스승을 지도한다니, 당치 않지요.”
오래전 배운 의술을 근간으로 그간 누적되어온 피상적인 경험에 의존했던 어의들이다.
이를 서면으로 정립해 객관적으로 처치를 검증해 낸다는 건, 조선 의술의 현 정점들에게는 시사하는 바가 있었다.
“며칠만 의서를 저희들에게 빌려주시겠사옵니까? 충분히 연구하여 체득한 다음, 도와드릴 수 있다면 그리하겠사옵니다.”
“어의들께서 사소한 성취를 높게 사주시니 매우 민망합니다. 물론이지요, 책을 봐주시는 건 오히려 내가 부탁드려야 할 일입니다.”
“하하. 망극하옵니다.”
의서도 전달했겠다, 내의원에서 볼일을 마친 세자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기왕 자리가 만들어진 김에 어의들께 더 배웠으면 하지만, 일정이 촉박하여 지금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아.”
어의들이 아차하며 세자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배웅을 만류하는 세자에게 극구 사양하고는, 내의원 바깥 거리까지 따라 나왔다.
“살펴 가시옵소서, 저하.”
“예. 다시 봅시다.”
세자는 멀찍이 나아가 골목을 돌며 사라졌고, 최득룡과 어의들은 웅성거리며 다시 내의원 본채의 대청으로 향했다.
그중 한 사람이 말했다.
“누가 보면 저하께서 편찬하신 의서가 아니라, 화타가 편찬한 의서인 줄 알겠어.”
어의란 국가시험에 합격한 여느 유능한 의원들마저 제치고 정점에 오른 존재다.
이들이 해박한 분야는 의술만이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최득룡은 다른 어의의 말이 사회생활의 일환처럼 들리지 않았다.
자신 역시 그렇게 느껴졌으니까.
“만약 저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이런 의서를 편찬해 냈다면, 도리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을 테지.”
최득룡이 낮은 어조로 평했다.
의원들이 서로 경쟁할지언정 유대감은 강했다.
국가시험인 의과에 합격하여 직품을 제수받아도 문무과 실직자들에게는 끗발 떨어지는 존재로 여겨졌으며, 이들 가문 또한 양반이 아닌 중인 집안으로 치부됐으니까.
의원이라는 이유로 천장으로 누르는 이들이 존재하는 한 의원들 역시 의원이라는 이유로 서로 유대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인식이 강화된 건 허준이 왕가의 병을 다스린 공로로 정일품에 추천됐을 때였다.
이를 당시의 문무백관이 기를 쓰고 반대하여, 결국 허준의 정일품 제수는 무위로 돌아갔다.
그러고도 만족하지 못한 백관은 노화로 인한 왕의 질환을 허준의 책임으로 돌리기까지 했다.
진시황도 찾아내지 못한 불로장생의 영약이 없는 것이 어찌 허준의 잘못이란 말인가?
그렇게 의원들은 이익집단으로 뭉쳤다.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그랬다.
그리고 그 이익집단의 수좌인 어의들에게 세자가 펼쳐낸 의서는 찬란한 빛만큼이나 그림자도 진했다.
‘이 의서가 세상에 전해지면 돈 있고 똑똑한 놈들은 다 의술을 배워 의원을 부르지 않게 된다.’
400년 뒤에는 원래 돈 있고 똑똑한 사람들이 의학을 배워 먹고 살지만, 조선은 아니다.
조선 시대에서는 예전부터 의업에 종사해 온 집안들만이 의학계를 독점해 왔다.
이 이익집단 밖에서 경쟁자가 생겨난다는 건 곤란한 일.
하물며 고객이 경쟁자로 변하는 건 더욱 치명적이다.
다른 사람이 낸 책 같았으면 빛을 보지 못했을 거라는 건 그 때문이었다.
용을 써서라도 원고를 뺏어다 아궁이에 처넣었을 테니까.
“자네가 범궐犯闕 한 번 해볼 텐가?”
다른 어의가 농조로 묻자, 최득룡은 콧방귀를 뀌었다.
“이미 궐 안인데 범궐은 무슨.”
어의까지 되어 세자의 책을 태워버릴 수는 없는 노릇.
신의라 칭해지던 화타도 시체가 된 자기 자신은 살려내지 못했다.
“……그저 잘 배워서, 체득할 수밖에.”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다. 짧은 단락만 보고도 의서가 가져올 여파를 감지한 어의들이다. 그동안 배운 게 있고 해온 게 있어 만들어진 안목이다.
이런 안목으로 세자의 깨달음까지 체득한다면 고작 책 따위에 밀리지는 않으리라.
최득룡은 그리 믿었다.
믿지 않는다고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 * *
“들으셨습니까? 세자가 세간에서는 신의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세자가요?”
“예.”
세자가 활인서에서 의술을 베푼 건 호패법 홍보의 일환이었다.
호패를 등록한 사람은 차후 나라님이 될 분에게 진료까지 받을 수 있다고 말이다.
그때부터 세자가 의학에 정통했던 건 아니었다.
산파와 명의들에게 가르침을 구하고 수방사의 부상자들을 돌보았을 뿐.
외상은 몰라도, 사람이 흔히 걸리는 다종다양한 질환에는 전문성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단지 위치가 주는 공신력에 의지한 편법이었을 뿐.
“아직도 틈틈이 활인서에서 병자들을 구휼한다더니 세자가 의행에 걸맞은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렇지요.”
“게다가 신의라니. 성인聖人이 아니라 신의 소리를 듣는 걸 보아 실력도 상당한 모양입니다.”
마음씨 좋은 것도 좋지만, 실력까지 출중하다면 더욱 좋다.
그리고 자식 잘난 걸 미워할 부모는 없는 법이다.
“참으로 장하지 않습니까?”
중전이 뺨을 붉히며 물었다.
어쩌다 접한 세자의 좋은 소식에, 그간 그 말을 할 기회를 노려온 걸까.
“세자가 부친보다는 모친을 더 닮아 다행입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세자를 보면 전하의 젊었을 때 모습이 보이는데요.”
“이젠 늙고 병들었다고 은근히 구박하십니까?”
중전은 빵 터지더니 입을 가리고서 웃었다.
“전하께서나 신첩이 늙고 병들었다고 버리지나 마십시오.”
“허어, 참. 중전께서 정치를 하셨으면 삼의정도 찍어눌렀겠습니다.”
후궁 한 번 들인 적 없는 사람에게 이런 모함이라니.
나는 품에 안긴 인평대군의 정수리에 코를 박고서 당부했다.
“막내는 어머니의 다른 건 다 닮더라도, 불쌍한 사람을 모함하는 건 닮지 말아라.”
“알겠사옵니다, 아바마마.”
“아구. 장하다.”
“좋은 거 가르치십니다.”
인평대군은 천자문을 떼고 경전을 탐독할 정도로 머리가 굵어졌지만, 여전히 아비나 어머니의 품에서 지내고 있다.
첫째도 둘째도 독립해버려서…….
늙고 병든 부모의 곁을 지켜줄 자식이 막내밖에 없다.
막내가 품속 생활을 편하게 여겨서 다행이지.
굳이 노력하진 않았는데 막내는 얌전하게 지내는 것을 좋아했다.
시서화詩書畵와 함께 진귀한 기물과 새로운 지식을 선호하니까.
지체 높은 신분으로서는 평범한 게 아닌가 싶지만, 세자는 훗날을 위한 제왕학을 익히면서도 의서를 펼쳐내는 등 많은 백성을 도울 방법을 강구하고 둘째는 활동성이 넘치다 못해 아예 분출하여 한양을 탈출해 버렸다.
두 형과 비교하면 많이 얌전한 게 맞지.
“고맙다…….”
인평대군이 둘째처럼 기운이 넘쳤어 봐.
왜 형은 바깥으로 내보내 주고, 자신은 내보내 주지 않느냐며 화를 냈겠지.
그런데 차순위 후계자를 바깥으로 돌린 건, 둘째가 원래 왕이 됐었어야 할 운명이었고, 나로 인해 이러한 운명이 달라졌으며, 신하들에게는 평소 따둔 점수로 많은 양보와 용인을 받아 겨우 이뤄낸 일이다.
여기에 삼순위 후계자까지 한양 탈출을 도모했다간…….
‘중신들이 나까지 한양을 탈출시켜주겠지.’
그러니 인평대군이 얌전한 게 고마울 수밖에 없다.
“전하.”
밖에서 내시가 불렀다.
“…….”
왕에게 보장된 휴식은 없다. 처소가 있긴 하지만, 그 전에 궁궐 전체가 일터이기도 했다.
“막내야.”
조용히 부르니 인평대군이 뜻을 알고 품에서 나왔다.
“일 보고 오겠습니다, 중전.”
“다녀오세요.”
나 대신 인평대군을 끌어안은 중전과 묵례를 나누고서, 침전을 빠져나왔다.
상선은 안내에 앞서 들고 있던 권자부터 건넸다.
“반 각 전에 승전색이 가져온 권자이옵니다.”
승전색은 왕과 승정원 사이를 잇는 내시.
통상적인 업무에 해당된다면 사무실인 편전에서 일할 때 권자들을 전달해 주는데, 이른 시각에 가져다준 걸 보니 단순한 사유는 아닐 듯했다.
“봅시다.”
잘 봉인된 권자를 풀어 말미부터 확인하니, 무려 원정군 원수인 이완이 보낸 장계였다.
시간대를 생각하면 압록강을 건넜다는 보고일까.
장계를 일독하니 서두는 예상대로였다. 원정군은 차질 없이 일정대로 길일에 출정하였으며 전원 안전하게 압록강을 건넜다.
그러나 직후, 배후에서 도적들이 상인들을 습격하여 이완이 친히 기병을 이끌고 대응해 십수 여 수급을 확보했다는 첨언이 붙어 있었다.
“……흐음.”
출정과 함께 첫 전투에서 이완이 친히 출전하여 승전을 거둔 건 분명 낭보였으나, 내심 우려도 들었다.
‘고작 도적 따위가 군대의 바로 배후에서 행각을 벌이다니.’
그만큼 요동의 치안이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기실 요동의 현황은 한윤과 의주부를 통해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홍태주 세력의 관군도 반쯤은 공인 마적에 불과한 상태였다.
도적이 관군을 우습게 알아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이런 분위기에서 원정군이 비사성으로 진격하고 확보하는 과정에 얼마나 많은 분쟁이 발생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낭보는 낭보.’
원정군이 출정과 함께 거둔 최초의 승전 소식이다. 굶주린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좋은 선전거리지.
* * *
왕이 즉위할 당시 당파들은 서로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처럼 여겼다.
북인은 감히 앙금을 표출하지 못하고 속으로 이만 갈았으며, 서인은 왕 뒤에 숨은 북인 상대로 씩씩대었다는 차이가 있었지만 말이다.
이러한 구도로 당쟁이 여의치 않자, 각 당파는 서로 갈라져서라도 당쟁을 이어갔다.
북인은 여생을 얌전히 찌그러지기로 한 원로들과 북인의 낙인을 원로들의 원죄로 몰고 서인 천하에 항거하려는 젊은 당여들로.
서인은 왕의 지배를 인정하고 탕평에 순응한 자들과 바지사장의 중재로 좌절되어 버린 북인의 완전한 청산을 마저 성사하려는 자들로.
하지만 왕의 치세는 융성했고 또 흥성했다.
즉위 전후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국의 안정을 실현한 왕에게 뒤늦게 반기를 든 자들은 숙청을 면치 못했다.
서인 강경파는 오랑캐 앞잡이의 낙인이 찍힌 채 처참하게 몰락했으며 토사구팽인가 싶어 물을 올리던 북인 부흥군은 자신이 솥에 들어갔다.
그러나 천하대세는 평화와 혼란을 반복하는 법.
위정자란 싸울 구석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싸우는 족속이었다.
이들이 일치단결할 경우는 오직 하나.
당이 아닌 국가 단위로 맞서야 할 적이 있을 때뿐이다.
“원정군이 요동에서 첫 승전을 거둔 건 기쁜 소식이나, 도적들의 호전성을 생각하면 앞으로가 우려될 수밖에 없습니다.”
“군사를 증원해야지 않겠습니까?”
“원정군은 호지에서 장기간 주둔할 예정입니다. 그 때문에 소요되는 경비가 지금 수준으로도 만만찮은데, 증원이라니요?”
“잠룡이 깨어나고자 용틀임을 하는데 수고로움이 안 들 수가 있겠습니까.”
“억지를 부린다고 부족한 재정이 보충되는 건 아닙니다.”
서로 당색이 다른 재상들이 정치 논리 없이 오직 조선을 강 너머까지 확장시키겠다는 일념으로 논의에 몰두했다.
조선이 망할 나라 같았으면 이런 때 도리어 치열하게 정쟁을 벌였으리라. 과연 왕이 기억하는 역사에서는 후금군에 포위된 채로도 그러했다.
그와는 상반된 광경이 펼쳐지는 어전에서, 왕은 가히 달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