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23화
“이곳이 길목이다.”
원정군 원수 이완이 지도의 한 부분을 짚었다.
그는 요동반도 끝자락에 진입하며 주변의 정찰을 명령했다.
비사성 일대는 조선의 태안반도처럼 좁은 길목으로 육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사전에 들어서였다.
“정찰 결과, 폭의 넓이는 10리里 가량이라 한다.”
“좁지는 않군요.”
미터계로 환산하면 4km.
“대신 망루를 세우든 벽을 세우든 해서 요동과 분리하면 방대한 이남을 ‘비사성 일대’로서 취득할 수 있지.”
그 면적은 대략 10만 헥타르.
흔히 면적의 비교 대상으로 흔히 거론되는 여의도가 300헥타르 남짓이고 서울특별시의 전체 면적이 6만 5천 헥타르다.
실로 방대한 영역.
2억 헥타르에 달하는 만주 전역에 있어선 새 발의 피에 불과하나 막 강 너머 진출을 시작한 조선에 있어선 압도적인 성과다.
“당장은 이남을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는 병력이 적고, 비사성엔 번화한 고을이 없으니 이남의 방대한 영역을 관할할 여유도 이유도 없는 셈이지. 길목의 확고한 확보에 주력하는 게 급선무다.”
제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위해서는 안정적인 주둔지와 물자를 보급받을 부두가 전제되어야 한다. 주변에 여러 어촌 부두가 있지만, 토착민의 거주지를 무단을 점거한다면 우리는 도적과 다를 바가 없다.”
이완은 길목에서 해안과 인접한 지역을 짚였다.
“여기. 길목의 종단이면서 해안과도 인접한 지역에 직접 주둔지와 부두를 건설할 거다. ……질문 있는 사람?”
이완이 지도에서 눈을 떼자 한 장수가 말했다.
“길목을 확보하면서도 주둔지 공사까지 진행하려면 군사들이 피로해질 겁니다. 토착민을 징발해 노동력으로 삼는 건 어떻겠습니까?”
“내 말을 듣지 않은 건가?”
“적어도 그들의 거주지를 점거하지는 않잖습니까. 소관은 무척 관대한 조처라고 봅니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죄수를 동원하는 건 허락하지.”
원정군은 비사성으로 오는 동안 여러 분쟁을 겪었다.
도적과 도둑의 원치 않은 방문이 거듭됐고, 방랑하는 부랑자들의 무리는 구걸하다 여의치 않자 공격해왔으며, 마적이나 다름없게 된 관군들은 홍태주의 약조에도 통행세를 강요했다.
그 결과.
원정군은 두려움 담긴 명성과 많은 죄수가 생겨났다.
“그간 군입을 먹여주었으니 노역에라도 동참해야지.”
“알겠습니다.”
“부리기 좋은 자들이니 과도한 노역으로 쉽게 소모하지는 말도록.”
“예.”
“나머지는? 물어볼 게 없나?”
이에 다른 장수가 손을 들었다.
“말하라.”
“장장 10리에 달하는 길목을 차단하려면 여러 거점이 필요할 텐데 근무는 돌아가면서 합니까, 아니면 한 번 맡은 거점은 교체될 때까지 계속 남아서 지킵니까?”
후자라면, 행운의 주인공이 되어버렸을 경우 본진과 가장 먼 곳에서 순환 없이 붙박이로 근무하는 수가 있었다.
“그건 추가적인 지형정찰을 마치고 거점의 설치 장소를 확정한 다음에나 논할 문제로군.”
“…….”
“조금이라도 대답해 줄 수 있는 구석이라면, 그래. 최초로 배정된 곳에서는 꽤 오래 머물게 될 거다. 거점이 완전히 설치되고 안정화될 때까지는 지휘의 혼선을 지양해야 하니까.”
장수들의 얼굴에 좌절감이 깃들었다.
“왜들 이래. 나와서까지 뜨끈한 구들장에 등 지지면서 잘 줄 알았나?”
“…….”
“가서 일들 봐. 병사들에게 야영지 주변 정리하는 거 감독한 다음에.”
* * *
원정군은 장기간 주둔해야 했으므로 막사 생활은 빠르게 청산해야 했다.
야영지 주변에서는 나무 베는 소리가 분주히 이어졌다.
힘깨나 쓴다는 이들이 손바닥에 침을 묻히고서 도끼질하다, 이내 퍼질러져서 교대하는 광경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분주하면서도 평화로운 모습.
그 하늘 위로 높게, 화살 하나가 날아올랐다.
삐이이이이익!
창공을 가르는 휘파람 소리에 원정군 병사들이 일제히 흩어졌다.
기수들은 마구간으로 내달렸고, 무기고를 지키는 병사는 안에서 마구잡이로 무구를 꺼내 밖에 흩뿌려놓았다.
병사들은 제각기 환도와 동개일습을 낚아채고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향했다.
그 앞을 안정도 없이 말에 오른 기수들이 뛰쳐나갔다.
요동의 도적은 조선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홍태주의 파멸적인 몰락으로 많은 도적이 칼 한 번 맞대보지 않고 조선군을 과소평가했으며, 관군과 마찬가지로 소수라면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다고 여겼다.
정찰과 작업 도중 간간이 발생하는 습격이 이를 방증했다.
하지만 조선군의 위명은 허명이 아니었다.
숲 한가운데 긴장한 얼굴을 사이로, 몸에 대살 몇 개씩은 단 조선군이 서로 등을 맞댔다.
이미 효시가 쏘아졌으므로 도적들은 다급했다.
그들은 서로를 채근하며 주춤대다, 일순 일제히 몰아쳤다.
캉!
칼날이 부딪히며 금속성 파열음이 터졌다.
환도의 검면이 비산하는 불씨를 헤치고 무쇠칼을 비껴내며 갑주를 갖추지 못한 가슴팍을 베었다.
도적의 앞섬이 나부끼며 혈선이 그어졌다. 무용을 뽐낸 군사는 기세를 이어 우군을 몰아붙이는 다른 도적의 팔을 쳐냈다.
그것만으로 전의를 잃어버린 도적의 면상이 쩍 갈라졌다.
“반격해라!”
“와아아아아!”
조선군이 일제히 고함지르며 기세를 올렸다.
도적들은 승기가 반전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에겐 처음부터 승산이 없었다.
원수 이완이 훈련만으론 그려내지 못했던 화룡정점은 이미 완성된 뒤였다.
어설프게 등 돌린 도적의 팔뚝이 잘려나갔고 가슴에선 도신이 솟아났다.
“으, 허…… 억!”
가슴에서 세상 밖으로 나온 환도의 끝이 마치 탐색하듯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쑥. 환도가 도로 뽑히자 분수처럼 피가 터졌다.
그 와중 동료의 피와 목숨을 팔아 피신에 성공한 도적들도 있었다.
그들은 습격이 애당초 그른 발상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나 자신이 지금 탈출하고 있다는 착각에서만은 벗어나지 못했다.
말발굽 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두두두두두!
뒤에서 땅이 꺼질 것처럼 폭음이 쫓아오자 도적들은 마저 필사적으로 달리거나 바위나 나무 따위에 기대고서 몸을 웅크렸다.
먼저 표적이 된 건 전자였다.
사람이 아무리 빨라도 말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헉헉 숨을 몰아쉬며 낙엽을 열심히 짓밟아댄다면 더욱 그러했다.
정신없이 내달리던 도적이 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대지였다.
화살에 맞은 줄도 모른 채로 고꾸라진 것.
그 몸뚱이가 채 흙에 뉘이기도 전에 짓쳐든 말발굽이 머리통을 짓밟아 터뜨렸다.
“……이런 제기랄.”
전마의 말발굽이 도적 머리에 심어진 광경을 본 기수의 소회였다.
때맞춰 꼭꼭 숨은 도적은 당장 쫓아오는 말발굽은 피할 수 있었다.
보통은.
그리고 과신한 습격을 계획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성은 마비된 채 과호흡만을 반복했다.
숨을 돌릴 여지는 없었다.
사방에서 낙엽을 걷어차고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댔으니까.
앞선 기병들을 뒤따라 숲으로 파고든 조선군 보병들이었다.
도적들로선,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으르렁대며 주변을 헤치고 다니는 조선군은 이제 표적이 아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깨달음이 다른 이들에게 전해지는 일은 없었다.
* * *
“두 개의 두 개의 오伍가 지형을 답사하던 중 도적의 습격을 받아 교전이 발생했습니다. 사수가 곧장 효시를 날려 위기를 알린 덕에 적기에 지원할 수 있었습니다. 수급은 다섯 개를 거두었는데, 교전에서 벤 적은 서른 가량입니다.”
널린 게 수급이나 다 거두지 않았다.
귀찮아서.
수급은 전공을 증명하는 수단이 나, 전투가 반복되면 누가 공을 세웠는지는 증거가 없어도 모두가 알게 된다.
마침 조정에서도 무관의 인사를 담당하는 병조 속사, 무선사武選司의 관리를 종사관으로 붙여주어 원정군은 제한적이나마 현지 임관마저 가능한 상태.
수급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다.
“적습으로 화살에 피격된 자는 많으나 갑주를 단단히 갖추어 전사하거나 중상한 자는 없습니다. 이는 두 오장이 군율을 유지한 덕이니 두 오장과 효시를 날린 사수 및 하졸들을 모두 포장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장수의 추천에 이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전훈을 세운 병사들에게 술과 고기를 내리되 다른 포장은 거론하지 마라. 신상필벌은 확실히 해야지.”
이는 임란 기간 스승이자 상관이었으며, 일찍이 여읜 아버지 대신 친아버지처럼 따랐던 숙부 충무공의 제일第一 원칙이었다.
“나머지는 내가 하나씩 만나보고 결정하겠다.”
“예.”
이완은 의자에 늘어지며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이상하군.”
“무엇이 말입니까?”
“이만하면 여기 도적들도 대조선의 군사가 용맹함을 깨달을 법하지 않나? 그런데 잊기도 전에 자꾸 덤벼오는군. 부나방처럼 말이야.”
“……요동의 상황이 제법 극단적이지 않습니까. 도적들도 필사적인 모양입니다.”
“그렇더라도 막상 죽이면 말짱 황인 것을.”
이완은 주둔지 주변에 도적들의 수급이라도 걸어놔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부나방들의 연이은 습격 원인은 다른 데 있지 않았다.
그저, 조선군의 실력을 경고할 패잔병을 남기지 않아서였을 뿐이었다.
* * *
길목으로 지칭되던 반도 끝자락의 좁은 틈새에 정식 명칭이 부여됐다.
여문呂門.
이름 그대로 여呂 자 형태로 생긴, 비사성으로 들어오는 문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작명은 여문 이남의 반도 끝자락을 비사성으로 묶겠다는 거시적 의도도 있었다.
홍태주가 지도라도 보고 정확하게 조차지를 떼어준 건 아니니까.
그렇다면 조선으로선 이용할 여지는 이용해 줄 수밖에 없다.
나아가, 조선은 여문을 진짜 문門으로 만들기로 했다.
드문드문 설치된 각 감시 거점을 연결하며, 이를 차근차근 강화해나감으로써 비사성을 철저히 요동과 단절시키는 것이다.
이는 훗날 홍태주나 그의 후손이 변심할 경우를 방비하기 위한 대책이었다.
“저희로선 너무 장대한 계획이로군요.”
조정의 전언을 접한 장수가 평했다.
“차라리 너무 장대한 편이 좋지 않나?”
이완은 실소하고서 덧붙였다.
“우리가 주둔하는 동안 반드시 하고 떠나야 할 일이 분명하게 정해지는 것보단 말이야.”
여문을 산해관으로 만들겠다는 거창한 계획은, 원정군이 그때까지 주둔할 것을 전제한 게 아니다.
“목재나 자연석을 쌓아서라도 성벽을 축조하라는 명확한 지시가 떨어졌다고 생각해봐.”
원정군의 간부진들은 길바닥에서 나흘 지난 생선이라도 씹은 양, 앉은 자리에서 면상이 찌그러졌다.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고통이었으니까.
“조정에서 여문의 개발 방향을 지정한 이상 무언가는 하고 떠나야겠지만, 진짜로 장벽을 쌓게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안 그런가?”
“맞습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고, 다들 진보鎭堡에서 근무할 때 조금이라도 지침을 반영하도록 노력해봐. 가기 전에 해놓은 게 아예 없으면 조정이 괘씸하게 여길 수도 있으니까.”
휘하 제장이 반가워할 만한 당부는 아니었으나, 이게 현실이기도 했다.
예산을 쓰는 입장에서는 그 예산을 지원하는 쪽에서 기대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를 모른다.
하물며 직접 소통이 닿지 않는다면 더욱.
그러나 원정군은 하는 일 없이 하루를 죽이는 데만도 막대한 비용이 소모된다.
직접적으로 들어가는 것 외에도, 비사성을 얻고자 홍태주의 전쟁을 지원하는 비용은 또 얼마나 될 텐가.
-깃발 꽂았으니 이제 돌아가도 되죠?
하고 마무리 지을 일이 아니었다.
현장에서 거듭 생사를 시험해 온 장수와 군병들의 생각은 다를 테지만 말이다.
‘그걸 잘 조율하는 게 원수의 의무겠지.’
한 번은 내수사 소속의 거대 범선이 여문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중상자를 본국으로 수송하기 위해서였는데, 그 점은 고마웠으나 빈 배로 왔다는 데 실망한 사람도 많았다.
기왕 오는 김에 술과 고기 그리고 다른 물자도 잔뜩 채워서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전쟁을 지휘하는 게 내수사는 아니니 부상자 호송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지만.’
사람이 험지에서 생사를 계속 걸다 보면 지원이라도 융통성 있게 잘 해주기를 바라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긴장상태에 오래 놓이면 누구든 세상만사가 억울해지게 마련이다.
그런 심리가 안 든다면 생물이 아니라 돌이겠지.
‘전하께 아쉬운 소리라도 해야 하나.’
숙고의 단초를 떠올린 이완은 내심 한숨을 삼킨 뒤, 아무렇지도 않게 제장에 일렀다.
“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