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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25화 (225/380)

인조, 명군이 되다 225화

주먹밥과 짠지의 반전 없는 맛을 보고 난 다음에는, 얼굴이 불콰하게 변한 농군을 상대했다.

“내가 갑작스레 결례를 저질렀네.”

“아이고, 아닙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귀한 술을 마시게 된 것만으로도 잠깐 전세 내는 건 충분하다는 투였다.

아예 주병을 쓰다듬고 있었으니.

그렇게 하면 다시 술이 샘솟기라도 한다는 걸까.

아니면 술과의 짧은 추억을 벌써부터 회상하는 걸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내 주변에는 자네만 한 전문가가 없어서 말이야.”

“전문가라니요?”

나는 광대한 들판을 향해 팔을 뻗었나.

“농사 말이네.”

“헤, 쇤네야 그냥 남들도 하는 대로 할 뿐입지요.”

“그게 바로 내 주변 사람들이 안 되는 영역이란 걸세.”

고리타분한 가르침을 외우고, 서로 언성을 높이며 피곤한 소리를 지껄이는 데는 누구보다 전문가들이지만, 농사에 대해서는 쥐뿔이라도 알겠는가?

조정에서 물어봐야, 누가 K-못된똥이고 K-흐루쇼프인지 아는 게 전부였을 거다.

“그러니 전문가에게 고견 한 번 들어보세. 농사를 잘 지으려면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해야 하나?”

농군은 손에서 주병을 놓지 않은 채 팔짱을 꼈다.

“일단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물이지요. 가까운 곳에 수로가 있으면 가물 때 물 대기가 쉽습니다. 멀다고 안 댈 수는 없지요. 작물이 타버리면 한 해 농사를 망치니까요. 굶어 죽을 수는 없잖습니까?”

“그렇지.”

“대신, 수고가 많이 드니 물을 충분하게 대지 못하지요.”

“관개시설을 잘 갖추는 게 급선무란 뜻이군.”

“으음……!”

잘 축약한 듯한데 농군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앓는 소리를 흘렸다.

“수로를 갖추는 것도 문제입니다. 다들 자기 농지는 양보할 생각이 없으니, 저수지를 파고 물길을 내려고 해도 서로 마다하지요. 그런데, 이 길이 원래부터 이랬겠습니까?”

농군이 벼랑이나 다름없는 주변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길을 사람이 지나다닐 만하게 내놓았을 텐데 지금은 외줄처럼 좁다.

“다 좌우에서 파먹어서 그럽니다. 쇤네가 콩만 할 때는 이것보단 넓었지요.”

“사람 욕심이란 게 무섭군.”

“그나마 관에서 억지로 윽박질러야 저수지가 생길까, 말까 하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막상 관에서 나서면 다들 노역이라고 질색이지요.”

“왜 그런가?”

“그간 사람들이 시답잖은 일에 많이 부려져 그렇지요. 지금은 노역도 잘 없습니다. 다들 만사가 귀찮고 피곤하니 손을 놓아버린 셈입죠.”

농군은 이러한 현실이 개탄스러운지 한숨을 푹 쉬고는 쩝, 입맛을 다셨다.

“그럼…… 이앙법移秧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게 뭡니까?”

“모내기 말일세.”

“아. 아아. ……하으.”

농군은 질색하고는 말했다.

“여기 벌판을 보십쇼. 제대로 난 물길 하나라도 보이십니까?”

“없군.”

“이런 마당에 무슨 모내기를 합니까. 나라에서 강제로 하라고 시켜도 못 하지요.”

지금은 정반대로, 나라에서 이앙법을 금지하고 있다.

이유는 농군의 말대로였다.

관개수로가 미비한 상황에서 모내기를 시도했다간 쉬이 한 해 농사를 망치기 때문.

상하수도 잘 깔리고 기계식 펌프가 있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조차 물 대기가 여의치 않아 직파법을 하는 곳이 있었다.

하물며 조선 시대라면 어떻겠는가.

“관에서 윽박질러 어떻게든 관개시설을 갖추면?”

“하지 말라고 말리지만 않으면…… 보통은 하겠지요?”

사실 이앙법을 금지하는 건 사문화된 법에 가깝다.

이즈음부터 하삼도에서는 일부나마 알음알음 이앙법을 시행하고 있기 때문.

그런데 경기도는 하삼도와 다르게 한양을 에워싼 수도 지척이다.

사문화된 법이라도 구속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뜻.

‘이건 개정이 필요하겠군. ……일단 여건부터 갖추고 난 다음에 말이야.’

그런데 여건을 갖추자니 그것부터 문제였다.

농군의 지적대로 사람들이 무단으로 농지를 확장해온 탓에 관개시설을 설치할 장소가 부족하기 때문.

너희들 잘못이라며 눈 딱 감고 밀어버릴 수도 있지만, 그러면 재수 없는 사람만 유탄을 집중적으로 맞게 된다.

과정은 시원할지 몰라도 결과까지 시원하진 못한 하책.

‘난관이군.’

가장 직접적이고 단순하다고 여긴 해법조차 현실의 단계로 오니 이토록 난해하다니.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식량은 조선 경제의 거의 전부고, 경제 문제에 관한 한 국가부터 여염의 일개 백성까지도 모두 이해관계자니까.

* * *

“전하, 어찌하여 신들에게 말씀 한마디 없이 한양을 나서셨사옵니까?!”

궐로 돌아오니 공조판서 김류가 재상들과 함께 쳐들어와서는 기를 썼다.

“막을 게 분명한데 어찌 미리 알려주겠습니까.”

“당연히 막아야지요! 전하께서는 이 나라에서 가장 중요하신 분이옵니다! 어찌하여 옥체의 소중함을 간과하시고……!”

손을 든 채 가만히 있으니, 김류가 입술을 짓씹고는 뭐 할 말이라도 있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공조판서가 나 대신 나의 옥체를 걱정해주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픕니다.”

“전하!”

“내가 공판과 뭇 중신들의 가상한 마음을 알았는데 어찌 치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무슨 약을 팔려고 이러나, 하는 중신들에게 은행의 개념과 그 위력을 설명해주니 다들 안색이 확 달라졌다.

못 알아먹을 바보들이 아니니까.

“전적으로 내수사의 재산으로 설립되는 은행이나, 공판이 대표해준 뭇 중신들의 충심을 보아 의결권 일부를 그대들에게 양보하겠습니다.”

“……!”

처음부터 은행의 안정성을 위해 조정에 의결권 일부를 나눠줄 생각이었지만, 따지자면 원래 내 것인지라 생색 좀 냈다.

그럴 생각으로 후환 걱정 없이 출궁까지 한 거고.

여기에 거듭 공조판서를 강조해주니, 김류는 제가 은행의 의결권을 뜯어낸 줄 알고 어깨가 으쓱으쓱 올라갔다.

“……크, 크흐흠!”

단순하니 좋군.

만족한 김류는 잔뜩 누그러져 항의를 마무리했다.

“전하께서 신들의 우려하는 마음을 몰라주지 않으시니, 참으로 망극할 따름이옵니다만, 앞으로는 이런 일이 있으면 무조건 반대하지는 않을 터이니 신들과 먼저 상의해주시옵소서. 혹여 옥체에 생채기라도 난다면, 신들은 죄스러운 마음을 견디지 못할 것이옵니다!”

“나도 미안할 따름입니다. 더는 무단으로 성을 나서는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해주세요.”

“망극하옵니다. ……크흐흠. 으흠!”

궐로 쳐들어올 때의 기세는 어디 갔는지, 김류는 이만하면 됐으니 돌아가자는 듯 주변을 돌아보곤 재상들과 회군했다.

똑똑한 사람들이라 다 알았을 거다.

은행이 가진 막강한 힘과 영향력과 나의 순순한 양보를 결부하면 내막이 뻔히 드러나지 않는가.

내가 처음부터 기관의 건전성을 확보하고자 이럴 생각이었다는 것을.

‘하지만, 알아도 받아먹은 게 너무 달달하지.’

왕이 순전히 자기 재산으로 세운 은행의 의결권 3할…….

딱히 한 거 없이 지랄이나 하려고 왔다가 입에 물린 떡 치고는 크다.

그러면, 뭐. 조용히 해산하고 집에 가야지.

* * *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은행의 의결권을 나누어준 직후.

경기도 관찰사를 호출했다.

“부르셨사옵니까?”

경기도 관찰사는 감영이 한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어, 부르자마자 달려왔다.

“교지를 보내 전달할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경이 진지하게 들어주었으면 해서 불렀습니다. 번거롭게 만들지는 않았겠지요?”

“전혀 그렇지 않사옵니다.”

“드세요.”

먼길 왔다고 과자부터 물려준 뒤 본론에 들어갔다.

“경기도에 실험적으로 이앙법을 시행해 볼까 합니다.”

“전하. 이앙법은…….”

“이앙법에 대해서는 나도 들은 게 있어요.”

전문가에게.

“무작정 도입하자는 게 아닙니다.”

“그럼…….”

“여론 조사를 시행해, 경기도에서 여론이 가장 긍정적인 고을에서 대대적인 관계시설의 구비와 제한적인 이앙법 시행을 병행해보려고 합니다.”

관찰사가 작게 끄덕였다.

여론이 가장 긍정적이라면 관개시설 구비 과정에서 발생할 갖은 잡음도 적을 테고.

도 단위 행정역량을 일개 고을에 집중시킨다면 사업을 빠르게 진척할 수 있다.

그 결과까지 좋다면, 다른 고을에서도 같은 작업을 시행할 때 여론은 더 호의적이고 실무진도 숙련되어 있을 터.

“이미 하삼도에서는 알음알음 이앙법을 시행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단속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고요.”

하삼도는 반도 내에서 농사가 가장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이고, 유지들의 세력은 막강하다.

그리고 유지들은 각자가 대지주로서 소출을 폭증시킬 이앙법 도입에 강력한 유인이 있다.

그 결과 유지들은 이앙법 시행에 필요한 관개시설을 자체적으로 구축하며, 이에 반하는 일부 구성원들의 반발 따윈 가볍게 찍어누르고, 관에서 법을 집행하려 든다면 목소리를 높인다.

관에서도 사례가 이앙법을 금지하는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융통성 없이 법을 강요하긴 힘들다.

상대가 막강하고 잘 배운 지역 유지들이라면 특히나.

하삼도에서 알음알음 이앙법이 행해지는 이유다.

‘이런 현상 자체는 발전일지 몰라도, 이러한 방식은 옳지 않아.’

지역 유지들이 국법을 사문화시키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 의의와 결과야 어떻든, 현상 자체는 바람직하지 않은 셈.

원인은 법이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관개시설만 충분히 갖춘다면 이앙법은 누군가에게 해가 되는 행위가 아니다.

“만세에 통용되는 법은 없어요. 변화하는 세태에 발빠르게 맞추지 못하면, 법은 의의를 상실하고 백성들을 억압하기만 할 뿐입니다.”

“지당한 하교이시옵니다.”

“실험적인 도입을 시험해본 다음에는 결과에 따라서 허가제로 바꿀까 합니다. 그러면 본래 이앙법을 금지하던 의의를 지키면서도, 여건을 갖춘 이들에게는 이앙법을 허락할 수 있겠지요. 어떻습니까?”

경기 관찰사는 대답이야 뻔하지 않겠냐는 듯, 밝은 얼굴로 답했다.

“여부야 있겠사옵니까. 전하의 성교가 실로 지당하십니다.”

관의 입장에서도 불합리한 법을 원치 않게 강요하는 것보다는 관의 판단에 따른 허가제가 훨씬 편하고, 유리하다.

그간 이앙법에 관해서라면 명분을 쥐고서 공공연히 불법을 자행하던 유지들을 상대로 적법하게 권한을 행사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곧, 관의 권위를 강화하게 된다.

마다할 일은 아닌 셈.

“불법을 이미 오래 자행해온 몇몇 유지들은 언짢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입니다.”

향촌에서는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거다.

유지들 내부적으로는 왈가왈부하겠지만, 공론이 갈린다면 그만큼 관을 향한 똥물의 역류는 줄어들 테니까.

“정치적인 논쟁도 최대한 나오지 않게 힘써드리겠습니다.”

허가제로 바뀌면 하삼도에 인적, 경제적 기반을 둔 북인은 정책 확대에 힘을 실어줄 공산이 크다.

반대로 서인들은 섣부른 이앙법 확산이 가져올 폐단을 문제삼아 제동을 걸겠지.

그런데 이건 싸워도 되는 영역이 아니다.

주의는 이미 내가 충분히 기하고 있으니, 정치적 논리로 인한 제동 따위를 받아줄 생각은 전혀 없다.

‘아마 서인들도 그 정도 분간은 하겠지.’

그래서 어전에서 공허하게 지랄만 떨기보단, 담당자인 경기 관찰사와 실험에 선발된 고을 수령에게 영향을 행사할 가능성이 크다.

이쪽이 나보다는 훨씬 만만하니까.

관찰사는 종이품이고, 이하 수령은 당연히 그보다 낮다.

최소 정이품 품계에 장관급인 재상이 힘을 써버리면 일개 관찰사는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품계 차이도 그렇지만, 관찰사는 외직의 임기를 마치고 조정으로 귀환할 때 유의미한 실직으로 귀환하려면 이미 박힌 돌들의 눈치를 봐야 하기도 했다.

반대로 일개 재상쯤은 산 채로도 씹어먹을 내가 뒷배가 되어주어야 한다는 뜻.

“가벼이 사업을 어지럽히려는 자가 있으면 나 대신 경고해주세요. 경회지에 발이 아니라 머리부터 들어가는 수가 있다고.”

나는 잔뜩 쫄아버린 관찰사에게 씩, 웃어주고는 과자를 하나 더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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