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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226화 (226/380)

인조, 명군이 되다 226화

“왔나?”

김류의 인사에 이귀는 고개를 까딱이곤, 자리에 앉았다.

“생각보단 깔끔하군.”

“여기가 불탄 지 몇 년이 지났는데, 그새 정리 한 번 안 했을까.”

“공판께서는 알고 계셨고?”

이귀가 마지막으로 본 경회루는 불타 잿더미가 되어 내려앉은 채, 경회지에서는 시체가 몇 달을 썩어 시궁창이 되어버린 광경이었다.

빼앗긴 수도를 수복했음에도 나라가 망했다는 걸 체감한 순간이었다.

그때 이귀는 다시는 경복궁을 방문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결의보다는 외면에 가까운 결정이었다.

“새 단장이라도 한 느낌이군.”

경회루는, 경복궁과 마찬가지로 끝내 재건되지 못했다.

남은 건 오직 석조 기둥뿐.

그러나 그을음을 모두 닦아내었고, 시궁창이 되어 썩은 내만 풍겼던 경회지는 맑은 물이 되어 유영하는 잉어가 보였다.

근본적으로 달라진 건 없었다.

다만, 황폐화한 경복궁의 첫인상이 너무 처참해 무언가 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

이귀는 달라진 풍광의 감상을 갈무리했다. 분명 기분 좋은 변화였지만, 김류에게 물어볼 게 있었다.

“전하께서는 어인 일로 연회를 주재하신다던가?”

“승전 기념으로.”

원정군의 비사성 확보는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전쟁과 같았다.

후금이 적대 관계는 아니지만, 그 땅에 산재한 도적들은 적군 수준으로 즐비했던 탓.

오는 길을 가로막은 건 물론, 일군의 보급을 털어볼 생각으로 설쳐대는 무리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완의 원정군은 그 모든 수작을 분쇄했고.

“그야 나도 들어서 알지.”

“알면서 물어봤나?”

“내가 묻는 건, 진짜 이유가 무엇이냐는 거야.”

이미 중신들은 원정군이 비사성을 확보한 일로 왕에게 하례를 올렸다.

그리고 이를 기념할 연회를 청탁하였으나, 왕은 사양했다.

군사들이 이역만리 호지에서 힘겹게 하루를 보내는데, 어찌 왕으로서 혀끝의 즐거움을 추구하겠냐는 이유에서였다.

명분이 그러하였으니 신하들도 두 번 강권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왕이 시일이 지난 지금 대뜸 말을 바꾸어서 연회를 열고 중신들을 초청한 것이다.

그것도, 은밀한 경복궁 경회루 터에.

비사성 운운은 가짜고 역시 다른 이유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전하께서 납십니다.”

밖에서 내시가 알렸다.

이귀는 고민을 더 이어가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보다 상석에 착석한 육조의 판서들과 의정부의 대신들 역시 함께 기립하여 왕을 맞이했다.

“편히들 앉으세요.”

왕은 착석을 권하며 상석에 자리했고, 중신들 역시 예를 표하며 다시 앉았다.

이에 영의정 이원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조가 삼한의 고토인 비사성을 회복한 것은, 전조 오백 년 세월에도 해내지 못한 대업인지라 성상께서 하례를 사양하셨을 때 신들은 죄스러운 마음뿐이었사옵니다.”

내심, 그때는 마다하더니 이제 와 딴소리하는 이유를 물어본 것이다.

제법 에둘러 말한 것 치고도 꽤 직설적인 발언이었으나 왕은 기꺼이 본론에 응해주었다.

“영상께서 이미 꿰뚫어보셨으니 내가 어떻게 빈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리지요.”

혹, 왕과 삼의정 사이에서는 이미 합의된 일이라도 있을까.

이귀를 포함해 신하 모두가 상석을 향해 이목을 모았다.

“차차 이앙법을 허락해 줄까 합니다.”

왕은 대수롭지 않게 발언했고, 중신들의 머릿속에서는 최근 사건들이 하나의 조각처럼 맞춰졌다.

그간 갖은 귀금속을 웃돈까지 얹어가며 매입해 준 내수사.

전례 없던 개념인 은행의 거론과, 이 기관의 의결권을 흔쾌히 신하들에게 나눠준 일.

그리고 왕의 갑작스러운 출궁과 경기 관찰사의 입궐.

고작 게눈 몇 번 깜빡일 찰나에 엉성하게나마 큰 그림을 그려낸 중신들이 탄복 반에 한탄 반으로 탄식했다.

“허…….”

그리고 이앙법의 합법화가 가져올 대대적인 변화에 대해서도 빠르게 주판을 튕긴 중신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꺼냈다.

“전하, 과거 열성께서 이앙법을 금지한 이유는…….”

“이앙법이 비록 폐단이 있어 금지되었다고는 하나, 관개시설만 충분히 갖춘다면 소출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은즉…….”

“관개시설을 충분히 구비하여도 가뭄이 매우 심하게 들 경우…….”

중신들은 같은 하늘에 두 태양이 있을 수는 없다는 양 열성적으로 경도된 주장을 펼쳤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조차 상황에 따라서 이앙법과 직파법을 선택하거늘.

이렇게 될 줄 알았던 왕이었기에, 그는 의견마다 답해주는 대신 조용히 손만 들었다.

그 단순한 행위에 중신들은 빠르게 입을 닫았다.

그리고 이어진 왕의 발언은, 중신들이 다시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들었다.

“내가 경들을 이 자리에 불러 모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푹 가라앉은 침묵 속에서 왕은 현재 조선이 처한 상황을 담담히 밝혔다.

국외에서 시행되는 두 사업으로 나라의 식량이 대대적으로 반출되는 중이다.

평안도의 식량난이 당장은 진정되었어도 시간이 흐르면 식량난은 전국으로 확대될 거다.

이미 쌀과 잡곡의 교환비가 줄어든 것으로 조짐이 감지됐다.

왕은 이에 대한 해법으로서 신용화폐의 도입과 식량 자체의 증산을 제시했다.

신하들은 장차 설립될 은행이 신용화폐의 초석에 불과했다는데 놀랐다.

그 개념의 강력함은 이해했으나, 이것이 과거 무수히 실패하여 잊히다 못해 봉인된 신용화폐와 직결된다는 건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

신하 몇몇은 감탄했고, 몇몇은 우려했다.

“벌써 이 계획이 이상대로 실현될지 걱정하는 눈빛들이 보이는군요. 개중에는, 방금 열성적으로 내게 이앙법의 가불가를 논하시던 분들도 있고요.”

“…….”

“걱정하시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방금처럼 근시안적인 당리당략에 매몰되어 직접 대사를 그르치면서, 뒤에서는 딴소리하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제 발 저린 신하들이 푹 고개를 숙였다.

“조선이 어디까지 뻗쳐나갈 수 있을지는, 치기 어린 젊은이들의 염원이나 호사가들의 응원에 달린 게 아닙니다. 경들에게 달려 있지요. 이 문제에서만은 당리당략에 따른 분쟁을 불허하겠습니다.”

신하들은 얌전히 고개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 마당에 딴소리했다간 자신이 적신賊臣이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자! 재미없는 이야기는 이만하면 됐으니, 술이나 듭시다.”

* * *

“와아아아아아!”

한때 홍태주가 지배했던 후금의 수도 선양에는, 다이곤과 아파태에 의해 쫓겨났던 홍태주의 군사들로 가득했다.

“쳐라!”

선봉장의 명령에, 군사들은 북을 치며 나아갔다.

빗발처럼 쏟아지는 화살에 여기저기서 고꾸라졌으나 홍태주의 군사는 그보다 많았다.

곧 성벽에 사다리가 걸렸다.

두 후금군은 성가퀴를 가운데 두고서 혈전을 벌였다.

창칼이 교차할 때마다 피가 터졌다. 성벽에서, 사다리에서 사람이 추락했다.

반나절을 꼬박 이어진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갈 무렵.

성벽은 피칠갑을 했으며, 아래에는 무수한 시체가 너저분하게 깔렸다.

“죽여주십시오.”

성과 없이 퇴각한 선봉장이 홍태주 앞에 부복했다.

“…….”

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홍태주는 접전이 치열했던 것으로 만족했다.

다이곤은 조선이 지원해주는 홍태주에게서 끝내 반전을 가져오지 못했다.

아무리 간교한 투사라도 배 주린 채로는 맞서지 못하는 법.

이제 다이곤에게 남은 건 모든 것이 시작되었고, 그에게 남겨진 전부인 성경뿐이었다.

저항이 필사적인 건 당연했다.

홍태주의 군사가 성벽을 넘는 순간, 자칭 황제인 찬탈자는 처참한 죽음을 면치 못할 테니까.

“네가 싸우는 동안 운제雲梯가 완성됐다. 다음 전투는 더 쉽게 치를 수 있을 거다.”

운제는 바퀴와 구조물을 갖춰 보강된 사다리다.

발 빠른 사람은 성벽을 언덕처럼 넘을 수 있다. 이는 공성에서 획기적인 효과를 발휘할 터.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물러나라.”

“예.”

홍태주는 두 번째 공성을 명령하는 대신, 고뇌에 빠져들었다.

‘조선의 군사가 강을 넘었고, 비사성에 주둔하며 일대의 도적을 모두 소탕했다지…….’

요동의 도적은 홍태주에게도 까다로운 골칫거리였다.

그가 군대의 주력을 이끌고 친정하는 동안, 당장 더 위험한 건 다이곤이 아니라 도적들인가 싶을 정도로 많은 피해 소식이 올라왔으니까.

그런데 조선군은 그러한 수고가 없는 듯했다.

여전히 그들이 강성하다는 방증이었다.

‘……놈들이 불시에 뒤를 친다면 요양은 함락을 면치 못하겠지.’

혹, 조선이 과욕을 품었다면 그의 군대가 북쪽으로 빠진 지금이 적기였다.

어쩌면 지금 당장이라도 요양에서는 조선군의 깃발이 휘날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만약 그렇지 않아도, 제국의 앞날은 밝지 않지.’

내전의 종결과 함께 만주에 평화가 찾아온 순간 조선은 곧장 이권을 이행할 테니까.

홍태주는 조선의 왕에게 자신과 제국의 존속을 구걸하는 대가로 많은 것을 바쳤다.

대원의 옥새는 단지 굳게 닫힌 문을 여는 데 쓰였을 뿐.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홍태주는 조선에 만주 전역에서의 일방적인 경제활동과 면세 혜택을 내어주어야만 했다.

지금까지는 만족스러운 거래였다.

내전으로 혼란한 만주에서 조선은 이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지 못했고, 대리전의 대가로 많은 식량만을 제공했으니까.

그러나 내전이 종결하면?

조선은 그간의 지원을 배로 되돌려받고자 대청의 골수를 빨아먹기 시작할 테고, 대리전의 종결로 식량의 지원은 단절될 터였다.

‘……곤란하군.’

차라리 뒤통수를 맞는 게 더 속이 시원할 지경이다.

“음.”

홍태주는 침음과 함께 일렀다.

“조선의 사신을 데려와라.”

* * *

최명길은, 과거 명나라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상주했던 남이공과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

그에게는 군사고문들과 마찬가지로 홍태주가 복심을 품고 쓸데없는 모략을 벌이지는 않는지 감시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니 홍태주의 친정에 동행한 것도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그런 최명길의 숙소에 홍태주의 환관이 찾아왔다.

“곧 가겠습니다.”

이미 성경에서는 한 차례 공방이 벌어진 뒤였다.

싸움 자체는 치열했으나, 돌아가는 사세를 보아 다이곤의 승산은 전무에 가까웠다.

홍태주는 예정된 승리를 앞두고서 자신을 찾은 셈이다.

‘무엇이 되었건, 내전의 종결마저 후순위에 두게 만든 걸 보니 사소한 일로 부르는 건 아닐 테지.’

최명길은 의복을 정제하며 자신의 지성과 의식 역시 날카롭게 벼려냈다.

최명길이 숙소를 나서자 전장과 주둔지의 풍경이 펼쳐졌다.

탄 내음에 비릿한 죽음의 냄새, 그리고 여러 험악한 인상들이 보내는 무뚝뚝한 시선은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자신은 대조선을 대표하여 홍태주를 상대하는 자.

최명길은 도리어 기고만장하게 턱을 치켜든 채로 환관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임시로 세워진 어좌에 도착했다.

“전하.”

“가까이 오라.”

최명길이 성큼성큼 몇 걸음 나아갔고, 그 기세에 홍태주의 낯에서는 곤혹스러움이 일순 스쳐 지나갔다.

최명길이 전략을 수립하는 데 필요한 단서는 그 찰나의 변화만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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