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227화
어떠한 논제가 나오건 대조선이 우위에 있다.
다만 홍태주가 궁지에 놓인 만큼, 과도한 압박은 지양해야 한다.
그것이 최명길이 찰나의 변화를 포착하고 내린 판단이었다.
홍태주는 한때 황제를 자칭했다.
그러나 살아남고자 참칭을 자발적으로 포기했고, 그와 후금의 권위는 메마른 강바닥처럼 쩍쩍 갈라지고 부스러졌다.
외왕내제하고 당당한 모습을 억지로 과시하는 건 그러한 권위의 몰락을 조금이라도 붙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런 마당에 약한 모습을 보였다는 건…….’
찌르면 진짜로 아픈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일지 유추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장 내전이 끝나면 무엇이 변화하고, 그래서 홍태주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이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면 정답은 빠르게 나온다.
‘식량 지원이군.’
분열된 만주를 일통하면서 책임져야 할 건 늘어났는데, 반대로 지원은 끊긴다?
‘최악의 경우 내전이 재개될 수도 있겠지.’
그러한 절박함을 이용하는 게 대조선 사신의 의무겠으나, 섣부른 접근은 지양해야 한다.
홍태주가 비록 참칭은 관두었을지라도 일개 세력의 수장이었고, 작정한다면 설사 대조선일지라도 해를 입을 수 있다.
마침 막 개척이 시작된 비사성은 대조선의 노출된 약점이라 봐도 무방했다.
어설프게 이용하려다 절박함의 뾰족한 끝이 대조선을 향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홍태주가 말했다.
“내가 성경을 함락하면 만주는 다시 화평해진다. 그 뒤로 내가 무엇을 할지, 그대가 물었었지.”
“예.”
“군사를 이끌고 친정하면서 나는 확신을 가졌다. 만주는 참칭자의 거듭된 죄과로 황폐해졌고, 나의 급선무는 만주를 다시 소생시키는 것임을 말이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려면 식량의 지원이 전제되어야 했다.
“소관 역시, 만주의 급선무는 전하의 보살핌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 국왕 전하께서 나를 더 도와주신다면 매우 고맙겠군.”
“전하께서는 조선의 주인이시지, 천하 만물을 경영하는 황제가 아니시며, 만주의 주인이시지도 않습니다.”
껄끄러운 적막이 한 차례 흐르고.
“내가 전하의 후의를 살 방법은 없겠나?”
“전하.”
“말하라.”
“자칫 과도한 제안이 될 수 있어 우려하는 마음이 크지만, 전하께서 방도를 물어보시니 마냥 숨기지는 못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개의치 말라.”
“감사합니다.”
최명길은 고개를 까딱이고는 말했다.
“전하께서도 조선의 군사들이 비사성에 주둔한 건 전해 들으셨지요.”
“안다.”
“현재 비사성은 조차된 땅으로, 여전히 전하의 영토에 속해 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원정군이 곤란해지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완전히 내어달라는 뜻이냐?”
“전하께서 비사성의 조차를 약조해 주실 때, 소관과 전하께서는 불미스럽게도 기한을 약정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이 계속 강성하다면 비사성을 무기한 점거하게 될 테고, 반대로 후금이 여유가 생긴다면 당장 돌려달라고 강짜를 놓을 수도 있다.
그러한 분쟁의 여지가 양국 관계에서 걸림돌이 될 터.
“좋게 마무리하면, 분명 전하께서도 근심을 하나 더 더시게 될 것입니다.”
홍태주는 손끝을 턱으로 가져가다가, 채 닿기도 전에 답했다.
“10년.”
“1년.”
“5년.”
“1년.”
홍태주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는 따졌다.
“그대가 말하는 ‘비사성 일대’가 작지 않다고 들었다.”
“전하께서는 아조의 도움을 받아 만주의 절반, 아니. 전부를 가져가셨습니다.”
다 망해가던 나라를 살려 2억 헥타르의 만주를 지배하게 해주었으면, 비사성 일대를 양보하는 건 아주 약소한 성의 표현으로도 치부할 수 있지 않을까.
“……3년!”
“1년.”
최명길의 완고한 고집에 홍태주는 질색한 얼굴로 미간을 꼬집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래, 1년! 독한 놈. 이제 족한가?!”
“족합니다.”
내색하진 않았으나 최명길은 평안도에서 식량난이 발생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당장 조선에서 먹을 식량도 부족한데 무슨 10년이고 5년, 3년인가.
1년도 많이 양보한 셈이다.
그렇다고 승냥이 같은 홍태주 앞에서 조선의 곤란한 처지를 드러낼 순 없었기에 땡중 염불 외듯 ‘1년’만을 중얼거렸을 뿐.
다행스러운 점은, 홍태주의 후금이 조선보다 더 곤란한 상황이라는 거다.
“임의로 지원을 감축해서는 안 된다!”
“염려치 마시지요. 대조선의 신의는 두텁습니다. 그리고 소관이 장담컨대, 만주는 오늘날 전하의 결의로 소생할 것입니다.”
홍태주는 푹 한숨을 내쉬고는 손을 저었다.
“가라.”
“예. 강녕하시옵소서.”
최명길이 예를 올리고 물러나자, 홍태주는 미간을 마저 문지르며 탄식했다.
“사갈 같은 놈……. 장수들을 불러라! 성경을 점령해야겠다!”
* * *
홍태주는 분풀이하듯 성경을 몰아쳤다.
각 성문으로 충차가 진격했고, 성가퀴마다 운제가 향했다.
직전 가까스로 홍태주의 후금군을 격퇴한 성경의 후금군은 본격적으로 몰려드는 적의 광경에 운명을 직감했다.
그러나, 호락호락 죽어줄 이들은 아니었다.
다시 한번 성가퀴를 두고 창칼이 교차했다.
보색補色의 갑주들이 치열하게 서로를 밀쳐대는 모습이 멀리서도 한 눈에 보였으나, 접전이 길어지자 양측은 육신들이 토해낸 뜨거운 피로 붉게 물들었고 전황은 아무도 알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병사들은 죽고 죽이기를 반복했다.
마주한 자가 있다면 찌르고 베었으며, 어깨를 맞댄 자는 지켰다. 그저 그뿐이었다. 현세에 수라도가 현현한 것처럼 기계적이고 맹목적인 살육만이 이어졌다.
그리고 저녁이 되었다.
까악! 까악! 까악!
붉은 갑주의 후금군이 전장을 서성이며 전리품을 회수했다.
성벽에서, 성벽 아래에서.
피에 젖은 군기를 짓밟으며 전우와 적의 갑주를 벗겨내고 무기를 챙겼다. 눈 여겨봐 둔 자가 있다면 품을 뒤져 쌈짓돈을 챙겼다.
까마귀들은 그런 인간들이 두렵지 않은 듯, 종종걸음으로 사람을 피하며 부리 끝으로 시체를 두들겼다.
그러한 광경을 뒤로한 채 다이곤이 성 밖으로 끌려 나왔다.
홍태주와 다르게, 다이곤은 여전히 지저분하게나마 여전히 황제의 복식을 걸치고 있었다.
다이곤은 용상의 홍태주를 마주하고서 조소를 머금었다.
“기쁜 마음으로 조선의 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자리가 참으로 잘 어울리는구나.”
장수들이 발끈했으나 홍태주는 가벼운 손짓으로 만류했다.
“너도 지금 네 자리가 잘 어울리는구나. 감히 내게 대적할 생각을 하다니. 결국엔 이렇게 될 줄 몰랐더냐?”
“몰랐다. 네가 만만했으니까.”
“그건 지금 네 자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발언이로군.”
홍태주는 조소를 되돌려주곤 몸을 기울였다.
“너 때문에 내가 자존심이 크게 상했으니, 곱게 죽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득하나 형제의 우애를 생각해 용서하겠다. 호오거.”
홍태주가 자신의 장남을 바라보았다.
원래 역사에서, 호격豪格과 다이곤은 황위를 두고서 경쟁했던 관계였다.
그 싸움에서 최종적인 승자는 다이곤이었다.
무력을 통한 찬탈에 실패하자, 섭정으로 물러나는 대가로 황위는 홍태주의 9남 복림에게 돌아갔기 때문.
그러했던 역사를 이 역사의 호격이 알 리는 없으나, 그는 그 나름대로 이 불편한 관계에 종식을 고했다.
탱그랑!
청량한 쇳소리와 함께 칼 한 자루가 다이곤의 앞에 떨어졌다.
다이곤이 호격의 칼을 받아쥐자, 멀리서 홍태주가 일렀다.
“자결해라.”
* * *
‘지원을 1년 연장하는 대가로 비사성을 완전히 가져왔나.’
최명길의 역할은 미래로 치자면 대사에 가까웠다.
외교에 대한 전권을 부여받고, 파견된 국가에서 상주하며 중대사를 논의하는 것.
그러나 이러한 개념이 없는 오늘날에는, 최명길의 판단이 다분히 독단적으로 보이기 쉬웠다.
‘본인도 알고 있었겠지.’
여유가 있었다면 최명길 본인부터 사람을 보내 홍태주의 제안을 알려왔을 거다.
그런데 이렇게 확정부터 알려오는 걸 보니, 홍태주가 즉흥적으로 사신을 불러다 확언을 들으려 한 모양이다.
하기야 오랑캐들이 예법에 대해서 뭘 알겠나.
‘거래 자체는 나쁘지 않군.’
비사성 일대를 완전하게 확보했던 게 아니어서, 미래에서는 홍콩처럼 피곤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
과하게 장기적인 우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국의 상황에 따라 분쟁은 그리 먼 미래의 일이 아닐 수도 있고, 그 대가가 과하지 않은 만큼 손해 보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홍태주가 미쳐서 받아먹을 거 다 받아먹고 지랄하지만 않는다면야…….’
그런데 이건 당장 드러나는 게 아니니까.
“밖에 계십니까?”
호출과 함께 상선이 등장했다.
“부르셨습니까.”
“은행은요?”
“사람들은 거의 갖췄습니다. 다들 믿을만하고 셈이 빠른 사람들입니다.”
“이대로 조직을 갖춰주세요.”
나는 미리 작성해두었던 조직도를 밀어냈다.
은행장 아래로 영업, 부동산, 정보, 경영 등 최소한의 구상을 해놓았다.
“이미 내수사에서 해오던 것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관련한 분야를 오래 맡아온 사람이 각 부처의 행장이나 부행장을 맡으면 금세 익숙해질 겁니다.”
대규모의 자산 운용은 내수사의 본질이며, 백성들에게 저리로 대출해 주는 건 그 일환 중 하나였다.
내수사를 통해 은행을 설립하는 이유.
“무조건 이대로 하라는 게 아니라, 실정에 따라서 얼마든지 개편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대신 은행장과 상임감사는 소속이 달라야 합니다.”
“초대 은행장은 생각해 둔 사람이 있으시옵니까?”
“형식적으로는 이사회의 추천을 받겠지만, 상선이 특별히 추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합시다.”
내수사와 은행을 분할하더라도, 은행의 최초 구성원들은 기존 내수사 소속들이다.
내정이 있다면 그대로 실현할 수 있는 셈.
조정에서 추천을 받더라도 은행장으로서의 실질적인 업무 능력은 기대할 수 없는 만큼, 기실 내정은 당연하고 또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대신 조정 쪽 추천인은 상임감사를 차지하겠지.
“전하…….”
“말씀하세요.”
“은행을 설립하더라도 내수사의 기존 업무들은 많이 축소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대출이나 좀 빠질까.
“그래서요.”
“조직을 분할하면 인력이 부족하지는 않을까 걱정이옵니다.”
“내수사가요?”
“둘 중의 한 곳은 겪지 않겠습니까.”
“흠.”
백성들의 귀한 생식소를 잘라 환관으로 만들어버릴 수는 없으니, 은행에서 새로운 직원을 채용하면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머리가 되는 사람들은 근본 미상에 역사마저 짧은 은행에 인생을 의탁하기보단 과거에 열중하지 않을까?
최 상선이 앓는 소리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생각해 두신 건 있고요?”
“내수사에서 은퇴한 사람들을 데려다가…… 은행의 업무를 보게 하면 어떨까 하옵니다.”
“흠. 다들 오래 돈을 만져봤고. 정상적으로 은퇴한 사람이라면 신용도 있고.”
“예에.”
“그런데, 그것만으로 충분할까요?”
“……복심이 있으시옵니까.”
어디서 사람을 데려올까.
그 고민을 한참 하다 보니, 굳이 영역을 내시나 식자들에게만 국한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명부의 은퇴 상궁들은 어때요?”
최 상궁이 눈을 끔뻑였다.
“내명부…… 말이옵니까?”
“상궁쯤 되면 머리가 아예 안 돌아가는 사람은 아닐 테고. 오래 궁에서 일했으니까 신뢰도는 마찬가지로 검증됐고.”
“하오나 내명부는…….”
궁녀들의 조직이다.
“돈이 남자, 여자 가리면서 탑니까? 돈 빌리고픈 사람들도 물주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신경 쓰지 않겠지요. 함께 일할 사람들도, 어차피 궁녀들과 한 궁궐 안에서 오래 부대끼고 살았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을 겁니다.”
“그렇긴 하겠사옵니다마는…….”
“은퇴 상궁 중에서 잘 먹고 잘사는 사람도 많다 들었습니다.”
궁녀라고 노비처럼 무급으로 부려지던 신세가 아니다.
삭료朔料라고, 매월 초하루마다 직급 및 근무연수에 따라 증액되는 기본수당에 하인을 부리는 비용까지 지급했다.
여기에 반년마다 품위 유지비인 의전衣纏도 별도로 제공했다.
그 총합이 작지 않아서 상궁은 조정의 실무진 수준이었고 수장인 제조상궁은 당상관을 능가했다.
월급이 나랏일 하는 사람들과도 별반 다르지 않은 셈.
이를 모아두었다가 잘 투자한다면 장밋빛 은퇴 생활도 가능하다.
‘그리고 그게 되는 사람이라면 능력을 더 큰 곳에 써야지.’
최 상선이 은퇴 내시들을 추천한 데는 분명 복심이 있었다.
그와 다른 내시부 식구들이 언제까지고 궁궐 생활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기왕이면 은퇴하고도 먹고 살 구석이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경쟁상대가 없으면 은행은 노익장들이 황혼을 빛낼 전장이 아니라 그냥 노인정이 되어버릴 공산이 크다.
그러면 안 되지.
은퇴 내시와 궁녀가 함께 은행에 입성하게 되면 아주 분명한 차이점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파벌이 나뉠 텐데 그렇게 성과 경쟁을 해주면 나야 고마운 일이다.
“됐죠? 이건 해결된 거로 알겠습니다.”
“……예에.”
최 상선이 썩 떨떠름하게 답했다.
본인도 미래가 그려졌겠지.
그런데, 최 상선을 부른 건 은행 건 때문만은 아니었다.
“비사성이 완전히 내 땅이 됐다는군요. 안심하고 더 투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